내 가슴을 다시 뛰게 할 잊혀진 질문 - 절망의 한복판에서 부르는 차동엽 신부의 생의 찬가
차동엽 지음 / 명진출판사 / 2011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단 한 권의 책을 읽고 작가의 글 전체를 좋다, 나쁘다 평하는 것은 이치에도 맞지 않을뿐더러 그래서도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렇게 말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독자들의 정확한 평가(그것이 비록 악평일지라도)야말로 우리 사회 전체의 문화를 선도하는 작가로 하여금 더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도록 각성하고 정진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내가 차동엽 신부님의 글을 읽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베스트 셀러 작가인 동시에 유명 강사라는데 말이다.  성당에서 세례를 받은 지 몇 년 되지 않은 나로서는 차동엽 작가가 신부라는 또 다른 직책을 맡고 있음에도 그의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다.  종교적으로나 학문적으로 내 무지의 소치에서 비롯된 일이다.  오히려 외국 신부님들 저서는 그럭저럭 많이 읽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얼핏 생각나는 이름만으로도 폴 신부님, 안젤름 그륀 신부님, 피에르 신부님, 앤드류 그릴리 신부님, 헨리 나웬 신부님 등이 있다.  내 기억으로는 그분들의 작품을 읽고 가끔 리뷰를 올리기도 했지만 '괜히 시간만 버렸다'싶을 정도로 비판적인 글을 쓴 적은 없었던 걸로 알고 있다.  오히려 그 진한 감동이 오래도록 가시지 않은 적은 많았지만.  평생 글을 쓰는 작가의 입장에서 세상에 내놓는 모든 작품이 다 독자의 구미에 맞을 리가 없다.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작가라도 말이다.  그런 점에서 차동엽 작가의 이번 작품이 왜 내 맘에 들지 않았는지 지적하고자 한다.  나 혼자만의 생각이기에 이것은 전혀 객관성을 담보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1. 시간에 쫓겼거나 사색이 부족했거나

 

처음부터 이 책이 맘에 들지 않았던 이유는 이 책을 어떤 범주에 넣어야 하나 하는 문제였다.  작가 자신의 경험과 사색을 기록한 책이라면 당연히 수필에 속하겠지만 인용글이 80%가 넘어 보이는 이 책을 수필이나 산문집으로 보기에는 어폐가 있었다.  그렇다고 주제에 어울리는 글들만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엮은 잠언집으로 보기에도 무리가 있었다.  작가의 견해나 경험을 완전히 배제했더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것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니 잠언집이라고 단언할 수만도 없다.  그렇다고 짜깁기로 일관한 학부생의 리포트라고 할 수도 없고...

 

아내와 결혼하기 전에 나는 가끔 시간이 나면 근처에 있던 특수학교에서 봉사활동을 하곤 했다.  그곳에 모인 학생들은 주로 다운 증후근을 앓고 있었는데, 그들과 어울려 생활해 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나 스치듯 지나쳤던 사람들은 학생들 각자의 외모로 서로를 구분하는 것이 결코 호락호락한 일이 아님을 실감하게 된다.  일반인의 경우에는 손바닥 뒤집기보다 쉬운 일일텐데 말이다.  비슷비슷한 외모 탓인지, 아니면 그곳을 찾는 외부인에게 많은 실망을 경험한 탓인지 자기네들끼리의 유대감은 강하지만 처음 찾는 외부인에게는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  시간 날 때마다 몇 번인가 방문하면서 낯을 익히던 어느 날, 한 학생이 내게 수줍게 내밀었던 사탕 한 알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자신의 주머니에 몰래 남겨두었던 사탕을 내게 건네며 환하게 웃던 얼굴.  그때의 감동을 후에 나는 이렇게 적었었다.  가슴이 따뜻한 사람은 손끝이 무디다라고.

 

내가 이 경험을 적은 이유는 작가를 비난하고자 함이 아니다.  작가라는 직업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시간이 무한정으로 남아 그 무료함을 달래려 글이나 쓰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누구보다도 늘 시간에 쫓기는 사람들임을 잘 알고 있다.  자신의 글솜씨만 믿고 시간에 쫓겨 감동이 없는 글을 쓰는 이가 있다면 나는 그를 일컬어 가슴이 차고 손끝이 잰 사람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2. 문체에 대하여

 

책의 구성은 크게 네 파트로 이루어져 있다.  '생명의 몸살'이란 제목이 달린 현실 세계의 문제 극복에 대한 조언, '고독한 영혼의 초월 본능'이라는 제목의 종교와 기도에 대하여, '내 인생의 비밀코드'에서는 신의 존재에 대하여, 마지막으로 '피할 수 없는 물음'에서는 인간의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을 기본 얼개로 하고 있다.  서문에서 밝히 듯이 고인이 된 이병철 삼성 회장이 죽기 전에 남긴 24가지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출발한 것이 이 책이 나온 배경이다.

 

천주교의 주일 미사나 개신교의 주일 예배를 참석한 경험이 한번쯤이라도 있는 분이라면 다들 공감하겠지만 목사나 신부는 일반인과 다른 독특한 억양과 어투로 설교를 한다.  그 어투도 어투려니와 말을 전달하는 자세에서도 고압적이고 권위적인 느낌이 들게 마련이다.  마치 초등학생과 선생님의 관계처럼 어색하기 그지없다.  그것은 사석에서도 고쳐지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그런 어투와 자세, 누군가에게 교훈을 주어야 할 의무감에 부푼 듯한 일방적 욕심은 오히려 성직자에 대한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기 십상이다.  비록 그 의도가 선할지라도.

 

이 책에서도 그런 모습이 군데군데 비친다.  어려운 내용을 쉬운 말로 풀어 쓰거나, 더 나아가 적절한 경험을 버무려 읽는 재미까지 더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플라톤의 '대화편'에서도 독자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에서는 여지없이 적절한 예시가 등장한다.  작가가 어떤 글을 인용하느냐 아니면 자신의 사색과 경험에 의존하느냐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작가 자신에게 달려 있다.  그러나 인용글조차 독자가 이해할 수 없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작가 자신이 글을 풀어 가는 역량의 문제라고 보아도 좋다.  그리고 작가만 알고 독자는 모른다면 그런 책은 더더욱 읽을 가치가 없다.  누군가를 가르치려 하기보다는 누군가와 공감하려는 자세가 작가의 기본적 책무가 아닐까 싶다.

     

3. 이 민감한 시기에 왜 이병철인가?

 

현 정권이 들어서면서 사회적 양극화가 커다란 문제로 대두되었다.  비단 어제 오늘의 문제도 아닌데 왜 일반 국민들은 그토록 심각하게 인식하는 것일까?  내 생각으론 국민들이 인내할 수 있는 임계점에 도달한 것이 아닌가 싶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 책의 출발은 삼성의 창업주 이병철 회장의 질문에서 비롯되었다.  무엇에서 글의 아이디어를 취하든, 글의 주제를 무엇으로 정하든 그것은 전적으로 작가의 자유다.  그리고 이병철 회장의 질문은 죽음에 임박한 한 인간이 품을 수 있는 소박하고 진솔한 것이었다.  작가는 책에서 그 질문과 크게 관련이 없는 글도 실었고, 일정 부분 그 질문에 충실한 것도 있다.  인간이기에 품을 수 있는 인류 공통의 근원적 질문만을 골라 답을 하고자 했다면 굳이 이병철 회장을 언급할 필요가 있었을까?하는 의문이 든다.

 

4월에는 총선이 있고, 사회 양극화의 문제로 재벌에 대한 국민들의 시선이 곱지 않은 이 시점에 작가는 왜 우리나라 재벌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인 이병철 회장을 책의 전면에 거론한 것일까?  사회 분위기를 몰랐었거나 아니면 숨겨진 다른 의도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전자든 후자든 책의 판매나 일반 독자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작가적 욕심에서나 하등 도움이 되지 못할 것임이 분명한데 왜 작가는 뜬금없이 고인이 된 이병철 회장을 언급했던 것일까?

 

블로그에서 책을 읽고 서평을 쓰는 것을 유희 삼아 하고 있는 대다수의 블로거들과 내가 다를 것도 없고, 지식도 일천하다.  책에 대한 이런 일방적인 비판이 작가로서는 일견 당혹스럽고 화가 날 만도 하다.  충분히 이해한다.  그리고 쌍방간의 대화가 아닌 일방적 견해이니 항변할 것도 많을 것이다.  나는 독자로서 '다 읽지도 않고 무슨 서평을 쓰며, 더구나 비판을 가할 수 있느냐'하는 비판을 면키 위해 인내심을 갖고 책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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