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킬 수 없는 약속
야쿠마루 가쿠 지음, 김성미 옮김 / 북플라자 / 2017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누구에게나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 '흑역사'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잊으려 하면 할수록 문득문득 생각나는 옛 기억. 일본의 미스터리 소설가 야쿠마루 가쿠는 주인공의 오래전 기억 속으로 독자를 안내한다. 소설의 주인공인 무카이는 한 레스토랑의 공동 경영자이고, 사랑하는 아내와 어린 딸을 둔 행복한 가장이다. 지금은 그렇다.

 

40대 중반의 평범한 가장으로서 누릴 수 있는 하루하루의 특별하지 않은 일상을 보내던 그에게 어느 날 갑자기 날아든 한 통의 편지. 그 편지로 인해 무카이는 두 번 다시 떠올리기 싫었던 과거의 기억 속으로 소환된다. '그들은 지금 교도소에서 나왔습니다"라는 한 줄의 문장과 봉투에 적힌 발신인의 이름이 주는 충격은 주인공으로 하여금 자신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지금의 행복한 일상을 지켜야 한다는 강한 자극이 되기도 한다. 자신의 아내와 딸만큼은 자신의 어두웠던 과거 속으로 절대 끌여들여서도, 자신의 비밀을 알아서도 안 된다는 일념이 그의 일상을 서서히 잠식하여 마침내 주변 사람들과 가족의 오해를 사기에 이른다.

 

"나는 사실 다카토 후미야라는 전과가 있는 남자이고, 16년 전부터 무카이 사토시라는 타인 행세를 하며 살아왔다고 이야기한다면, 그리고 경찰을 찾아가서 사카모토 노부코라는 이름을 사칭하는 인물로부터 사람을 죽이라는 협박을 받고 있다고 호소하면, 바로 수사를 해서 범인을 체포해주지 않을까?" (p.140)

 

태어날 때부터 얼굴 반을 가릴 만큼 큰 멍자국이 있었던 주인공은 자라면서 주변의 차가운 시선과 따돌림으로 인해 큰 상처를 입었고 그의 가슴에는 증오와 복수심만 자라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야쿠자 세 명에게 상처를 입히고 쫓기는 신세가 된다. 그러나 남들과 다른 그의 얼굴은 야쿠자 조직으로부터의 추격을 쉽게 따돌릴 수 없게 만든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절망적인 상태에서 만난 사람이 사카모토 노부코였다. 자신의 어린 딸이 유린을 당한 것으로도 모자라 잔인하게 죽임을 당한 이후 딸을 살해한 두 명의 범인에 대한 복수의 일념으로 살아왔던 사카모토 노부코는 범인들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던 것에 분개해 그들이 출소하는 날 반드시 딸의 원수를 갚고자 했다. 그러나 말기 암을 앓는 그로서는 그것이 불가능한 소망이었고, 자신을 대신해 딸의 복수를 해줄 인물로 주인공인 무카이를 선택한다. 복수의 대가는 얼굴 성형과 신분세탁에 필요한 비용 일체였다. 그렇게 두 사람의 약속이 성사되었다.

 

"지금이니 드는 생각이지만, 그 무렵의 나는 내 목숨과 인생을 가볍게 보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도, 지켜야 할 존재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내게는 사랑하는 사람도, 지켜야 할 존재도 있다. 죽고 싶지 않다는 마음은 그 무렵과 다르지 않겠지만, 그 이상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는 것을 더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p278)

 

자신의 얼굴과 신분을 바꾼 무카이는 아르바이트를 하던 가게의 단골손님이었던 오치아이로부터 동업 제안을 받고 수락한다. 20대 후반의 나이였던 두 사람은 바를 겸한 레스토랑을 운영하면서 난관을 극복하고 가게를 연 지 15년이 지난 지금은 어느 정도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게 다 창업자금을 대고 운영자금을 마련했던 오치아이의 덕분이었다. 그러나 40대 중반이 된 오치아이는 여전히 독신이고 직원들과 어울리는 자리에도 참석하지 않는 등 비밀스러운 삶을 이어간다.

 

교도소에서 출소한 두 사람을 제거하라는 압박은 계속되고 급기야 무카이가 약속을 지키지 않을 시에는 그의 어린 딸에게 상응하는 고통을 주겠다는 협박도 이어진다.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 새로운 사람으로 살았던 무카이, 그는 그 약점으로 인해 자신의 비밀을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털어놓지도 못하고 경찰에 신고도 하지 못한다.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단 두 가지, 출소한 두 사람을 살해하거나 자신의 과거를 솔직하게 털어놓고 용서를 구하는 일. 무카이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작가는 주인공 무카이의 젊었던 시절 그가 했던 두 가지 선택에 주목한다. 절망감에 휩싸인 채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내린 결정과 한 순간을 모면하고자 했던 임시방편으로서의 결정. 누구나 그렇지만 우리는 매 순간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고 그 선택으로 인해 보답을 받거나 대가를 지불하며 산다. 소설 속 주인공 무카이도 다르지 않았다. 우리가 하는 선택이 잘한 결정인지 잘못된 결정인지 그 순간에는 분간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더구나 이성을 마비시킬 정도로 어려운 상황에서는. 지나고 보면 확연히 알게 될 일도 그 순간에는 미처 결과를 눈치채지 못하는 게 인생이다. 나이가 들수록 선택에 망설여지는 것도 다 이유가 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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