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의 기억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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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언 반스의 작품에 매혹되는 까닭은 어떤 식으로든 독자의 지적 허영심을 만족시킨다는 데 있다. 때로는 작가의 지적 수준이 독자를 한참이나 앞질러 간 까닭에 글을 읽는 독자가 어리둥절 이해를 못 하거나, 지루함을 느끼거나, 읽었던 문장을 여러 번 반복해서 다시 읽어야 하는 불편을 끼칠 때도 있지만 작가는 서사라는 이야기 구조 속에 삶의 이면을 고집스럽게 덮어씀으로써 우리가 미처 몰랐던 인생의 실체, 인간의 심리, 진정한 가치 등을 자세히 파악하도록 한다.

 

<연애의 기억(The only story)>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야기인 즉 일흔 즈음에 접어든 한 남자가 50여 년 전에 있었던 비극적인 자신의 첫사랑으로 인해 그의 인생 전체가 달라지는 과정을 매우 세밀하게 다룬 것으로 주변에 흔한 사랑 이야기로 읽히지만 실상은 한 남자의 인생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삶이 유지되는 한 사랑을 멈춘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랑 이야기는 언제든 인생 이야기로 쉽게 치환되거나 전환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어린아이이고, 그녀는 중년의 유부녀다. 나에게는 냉소주의가 있고, 삶에 대한 이해라고 알려진 것이 있다. 하지만 나는 냉소주의자일 뿐만 아니라 이상주의자이기도 해서, 문제를 해결할 의지와 힘을 다 갖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p.139)

 

작가는 사랑이 삶의 전부로 여겨지는 청년 시절과 사랑은 그저 삶의 일부이거나 주변부로 여겨지는 어느 시점과 기억 속 작은 흔적으로만 존재하는 노년기를 다룸으로써 소설 속 주인공의 사랑이 세월에 따라 변질되어가는 과정을 밀도 있게 그리고 있다. 말하자면 우리는 사랑 안에 갇혀 있거나, 사랑과 어깨를 나란히 하거나, 그 옅은 흔적이나 체취만 간직하는 경험을 세월에 따라 순차적으로 겪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랑 안에 존재하는 청년 시절에는 사랑을 제대로 파악하기는커녕 그 실체조차 보기 어렵다. 그 시기의 연인은 오직 나와 상대방만 보일 뿐이다. 지구 안에 존재하는 우리가 지구 전체의 모습을 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세월의 경과에 따라 나와 사랑을 동일시하던 과거의 습관에서 점차 벗어나게 되고 사랑의 실체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것이 꼭 사랑이 식었거나 사랑으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에 빚어지는 결과는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사랑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서서히 알아가게 되는지도 모른다. 작가는 이러한 과정을 인칭의 변화로 그려내고 있다. 1인칭에서 2인칭으로 그리고 3인칭으로.

 

"나중에 이 대화를 생각해보다가 너는 그녀가 너보다 잃을 게 많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 사실, 처음으로. 훨씬 많다는 사실을. 너는 과거를 버리고 있고, 그 많은 부분은 버리게 되어서 행복하다. 너는 중요한 건 오직 사랑뿐이라고, 그것이 모든 것을 보상해준다고, 너하고 그녀가 그것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모든 게 제자리를 찾아갈 거라고 믿었고, 여전히 전과 다름없이 깊게 믿고 있다. 그러다 너는 그녀가 뒤에 두고 온 것이 - 심지어 고든 매클라우드와의 관계도 - 네가 가정했던 것보다 복잡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너는 큰 덩어리들을 고통이나 합병증 없이 삶에서 깨끗하게 절단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네가 처음 만났을 때 그녀가 빌리지에서 고립된 것처럼 보였다면, 네가 그녀를 데리고 떠나옴으로써 그녀를 더 고립시켰다는 것을 깨닫는다." (p.208~p.209)

 

소설의 주인공 폴은 이제 막 성인의 대열에 합류한 19살의 대학생이다. 여름 방학을 보내기 위해 런던 교외의 본가로 돌아왔던 그는 어머니의 권유로 나가게 된 테니스 클럽에서 48살의 여성 수전 매클라우드를 파트너로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수전에게는 폴과 비슷한 나이의 두 딸과 남편이 있었지만 자신감 넘치고 위트가 가득한 수전의 매력이 폴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수전은 테니스 파트너로도, 이야기가 잘 통하는 대화 상대로도 폴에게는 단 한 명의 특별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급기야 두 사람은 수전이 모아두었던 돈으로 런던에 방을 얻고 사랑의 도피 행각을 벌이기에 이른다. 일상이 된 유머감각과 음악과 테니스라는 공통분모를 통하여 두 사람의 사랑은 영원히 지속될 줄 알았지만 함께 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서로의 속사정을 더욱 깊이 알게 되고, 이해의 폭이 깊어지면서 단단했던 사랑의 결속은 금이 가기 시작한다. 수전은 알콜중독에 우울증, 알콜성 치매를 앓게 되면서 황홀했던 기억들을 서서히 잃어가고 이를 지켜보는 폴 역시 서서히 지쳐간다. 전도양양한 변호사로서 화려한 삶을 살 수도 있었지만...

 

"그는 수전과 있을 때 그들의 사랑을 토론하고, 분석하고, 그 형태, 색깔, 무게, 경계를 이해하려고 한 적이 없었다. 그 사랑은 그냥 거기 있었다. 불가피한 사실로서, 흔들 수 없는 주어진 것으로서. 하지만 동시에 그들 둘 다 그것을 토론할 말, 경험, 정신적 장비가 없었던 것 또한 사실이었다. 나중에, 삼십대가 되고 사십대가 되면서, 그는 점차 감정적 명료함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훗날의 관계에서, 그는 그때만큼 깊이 빠졌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고, 토론할 것도 줄었다. 따라서 그의 잠재적 표현 능력이 요구되는 일도 거의 없었다." (p.353)

 

폴이 자신을 못 알아보는 수전을 마지막으로 병문안 하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수전의 옆모습을 보면서 영화에서 보았던 몇몇 마지막 작별 순간을 떠올렸고, 아름다웠던 수전의 옛날 모습을 몇 분 동안 떠올려보았고, 이내 다른 곳을 떠돌기 시작하는 자신의 마음을 알아챘다. 자신의 '마음을 사랑과 상실에, 재미와 통탄에 묶어둘 수 없었'던 것이다. 총 3장으로 구성된 이 소설의 두 번째 장을 나는 다른 어느 것보다 아프게 읽었다. 2인칭으로 그려진 그 장에서 폴의 사랑은 그 빛을 잃고 서서히 쇄락해간다. 그 과정이 어찌나 사실적이고 아프게 묘사되었던지 이따금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살아가면서, 적어도 생명이 유지되는 한 우리는 단 한 번도 사랑을 유예하거나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랑은 곧 인생이 된다. 우리가 들려줄 수 있는 유일한 이야기는 오직 사랑, 그것 외에는 없다. 단연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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