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사회 - 타인의 공간에서 통제되는 행동과 언어들
김민섭 지음 / 와이즈베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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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이 사회는 거대한 타인의 운전석 <대리사회>

김민섭 저, 2016. 11.. 255쪽, 와이즈베리


저자의 전작은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이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자신이 대학에서 보낸 8년을 ‘유령의 시간’으로 규정지었고, 기업보다 더 신자유주의적인 대학의 노동력 착취 실태를 고발했다. 그 책을 출간하고서 홀연 대학을 떠난 저자는 대리운전 기사로 변신했다.

대학을 박차고 나와서야 그는 대학과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대학은 신자유주의의 첨병인 '괴물'이었고, 자신은 괴물 같은 대학에 보이지 않는 '유령'이었다.


저자는 대학원생, 박사과정, 시간강사였던 스스로를 대학의 구성원이자 주체로서 믿었지만 그 환상은 강요된 것이었고, 그는 타인의 욕망을 대리하면서 강의실과 연구실에만 존재했다. 강의하고 연구하고 행정 노동을 하는 동안 그는 사회적 안전망을 보장 받을 수 없었고 재직증명서 발급 대상조차 아니었다.

이후 대학에서 나온 그는 그 시간이 ‘대리의 시간’이었음을 알았다.


저자는 1년간 대리기사로서 일하면서 보고, 듣고, 느낀 점을 거리에서 때로는 책상에서 기록해 <대리사회>라는 책을 냈다.


저자가 전하는 대리운전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대리운전에 필요 없는 모든 행위는 계약에 의해 또는 무의식적으로 금지된다. 내 차가 아니기에 의자의 기울기를 조절할 수도 없고 에어컨이나 히터를 틀 수도 없었다.

손님이 먼저 말을 건네기 전까지 먼저 말하는 것도 주저하게 된다. 손님이 던지는 말에 '네, 맞습니다'라고 대답만 할 뿐이다.


주체적으로 행위하고 말할 수 없게 되니 생각 자체를 하지 않게 된다. 사유의 통제다.

저자는 대리기사가 겪는 이런 주체성의 통제가 단지 대리기사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대리기사의 삶을 한국사회에 투영한다. 바로 이 사회가 거대한 대리사회라는 것이다.


“이 사회는 거대한 타인의 운전석이다. 은밀하게 자리를 잡고 앉은 대리사회의 괴물은 그 누구도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서 행동하고, 발화하고, 사유하지 못하게 한다. 모두를 자신의 욕망을 대리 수행하는 대리인간으로 만들어낸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들에게 주체라는 환상을 덧입힌다. 자신의 의자에서 자신의 의지에 따라 운전하고 있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다.”(7쪽)


우리는 우리 삶의 주인공인 것처럼 좌석에 앉아 도로를 질주하지만 이미 조수석에 누군가가 앉아 있다.

이 타자의 욕망은 내비게이션을 통해 끊임없이 전달되고 우리는 내비게이션의 들려주는 길 안내에 따라 운전한다.


‘대리운전’이라는 ‘주체성의 통제’, ‘자신의 욕망을 대리 수행하는 사회’를 사회 전분야로 확대적용하여 ‘대리사회’로 규정하는 저자의 논리에 일부 수긍한다. 그렇지만 수긍은 일부일 뿐이다.

‘주체성의 통제’나 ‘자신의 욕망을 대리 수행하는 사회’는 ‘상품을 소비하는 소비자’로서만 개인을 대상화시키는 ‘자본주의 사회경제체제’의 특성이고, 언론에 의해 이미지화된 ‘주어진 정당과 후보’에게만 투표하는 것으로 ‘정치의 주인’으로서의 지위를 가로막는 자유민주주의체제(대의민주주의체제)의 특성이지 않을까 싶다. 권력과 자본이 ‘통제’와 ‘상품의 판매’를 위해 시민과 소비자를 획일화시키고 세뇌시키고 저항을 무력화시키는 체제의 문제가 본질적이다.


필자는 오히려 대리운전이 음주문화와 연관된 특수한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사회경제체제로 유지되는 전세계 국가 중에서 대리운전이 얼마나 보편적일지 모르겠지만(언론에 따르면 중국 정도가 대리운전 사업이 폭발적 성장세임), 음주문화가 한국과 비슷한 국가에서 시장의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전망이나 자본주의 상품화의 특성상 ‘욕망의 대리경험’과 관련한 기술이나 산업이 성장할 수는 있겠지만, 저자가 의미하는 ‘대리사회’의 개념과는 다를 것이다.


저자는 어린 시절부터 부모와의 관계에서 학교 교사, 직장 상사와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이런 '을의 공간'에 순응하는 법을 체화했기에 우리는 남의 운전석에 앉아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 공간에서 다른 대리인간에 의해 밀려나기 전에 스스로 물러나라고 충고한다. 그래야만 조수석에 앉아 있는 타자의 존재, 즉 자기 욕망을 대리시켜온 대리사회의 괴물을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타인의 즐거움을 보며 대리로서 즐거워야 한다면, 역설적으로 나 우리는 지금 그만큼 즐겁지 않다는 것이다. 현실이 만족스럽다면 남들이 먹고 노래 부르는 것에 지금처럼 필요 이상으로 열광할 이유 는 없다. 결국 많은 이들이 새벽에 연구실에 앉아서 기약 없는 논문을 써 내려가는것만큼이나 외롭거나, 아니면 절박한 심정이라는 이야기 가된다."(212쪽)


저자는 그때부터 '사유하는 주체'가 되고 “자신에게 강요되는 천박한 욕망을 거부할 용기를 얻게 된다”고 말한다


"그 누구도 가르쳐준 바 없지만, 결국 우리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야 한다. 밀려나기는 쉽지만 스스로 물러서기는 어렵다. 그것은 공간의 주체만이 할 수 있는 행위이고 절대로 패배가 아니다. 그러고 나면 시스템의 균열이 보다 선명하게 보인다. 그 균열의 확장을 통해 그동안 자신의 욕망을 대리시켜 온 대리사회의 괴물과 마주할 수 있다. 그때부터는 ‘사유하는 주체’가 된다. 여전히 행동과 언어는 통제될지라도, 정의로움을 판단하고 타인을 주체로서 일으키는 힘을 가지게 되는 것 이다.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강요되는 천박한 욕망을 거부할 용기를 얻는다.

우리 모두는 경계에 있다. 다만, 한 걸음만 물러설 용기를 가지면 된다. 대리인간으로 밀려날 것인지, 스스로 물러서고 다시 나아오는 주체가 될 것인지,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252쪽)


‘사유하는 주체’, ‘거부할 수 있는 용기’라는 저자의 문제의식은 ‘대리사회’라는 개념보다 이반 일리히의 <학교없는 사회>나 <병원이 병을 만든다>,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와 <그림자 노동>, 그리고 <성장을 멈춰라>가 자본주의 체제나 근대사회체제를 비판하고 세계와 자신의 주인으로 살고자 하는 문제의식에 적합하다고 본다.


[2017년 4월 20일]

(다른 책에 대한 리뷰가 궁금하신 분은 블로그 http://book.interpark.com/blog/connan 를 찾아가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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