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를 복기하다 - 버리기 아까운 진보정책 11가지
이정희 지음, 박홍규 그림 / 들녘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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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서평] "새로운 세상은 반드시 온다는 믿음만은 버리지 않겠다"

이정희 저 <진보를 복기하다 : 버리기 아까운 진보정책 11가지>를 읽고 / 2016, 2., 312쪽, 들녘


"사랑하기에 진보다. 포기할 수없는 이유,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므로 꿈꾼다. 그리고 받아들인다. 서툴고 거칠어 상처만 입힌 사람, 가까이 두지 않으려는 마음들을, 사랑하기에 받아들인다. 그래서 아프다.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 아직도 다 알지 못하니, 약속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새로운 세상은 반드시 온다는 믿음만은 버리지 않겠다는 것뿐.”(307쪽)


정치무대와 언론에서 사라진지 약 1년 만에 공개적인 의견을 피력한 이정희 전 통합진보당 대표.

이 책이 발간된 때는 통합진보당이 박근혜-새누리당 정권과 사법권력으로부터 강제해산 당한지 1년 2개월이 지나는 시점이었다.


이정희는 진보당 해산 이후 정권과 사법권력의 강제해산 조치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진보정치의 실패를 자인하며 스스로 긴 침묵에 빠져 있었다. 담담하게 그리고 아프게 혼자 진보정치의 실패와 온갖 비난을 감당해온 것이다. 

자신이 속해 있던 조직의 모든 실패와 문제점을 고스란히 스스로의 책임으로 떠안는 것이 그동안 보여준 그녀의 입장과 태도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무척 힘든 기간을 지내왔을 것이다. 그녀에게 전적인 책임이 있다는 것이 개관적인 사실이든 아니든...


"2012년, 진보당을 만들며 처음 맞은 약진의 기회에 분출하는 서로의 욕심들을 가라앉히고 이름 없이 먼저 나서서 헌신하던 진보정치의 첫 마음을 되살려냈더라면, 초기의 갈등을 수습하고 신뢰를 쌓는 데 대표로서 전력을 기울였더라면, 이 실패는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진보당 통합이 헌신의 마음을 모으는 일이 되지 못하고 더 큰 이익을 기대하는 통합에 그치고만 결정적인 책임이 나에게 있다. 내가 앞서 상대에게 헌신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진보정당다운 통합을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


"나와 동료들에게 가해진 허위의 공격에 침묵할 수 없어도 당이 갈라지는 사태만은, 중앙위 폭력사태만이라도 무릎 꿇어서라도 막았더라면 지금의 결과가 이렇게까지 참담하지는 않았을텐데. 되돌릴 수만 있다면 되돌리고 싶은 시간들이었다. 파국을 막지 못한 책임은 역사 앞에 너무나 무거운 것이다. 내부의 갈등을 파고 들어온 외부의 공격은 진보당을 국민들과 지지자들로부터 철저히 고립시켰다.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내란음모 조작과 헌정 사상 최초의 정당해산 청구에 맞서 사회 각계 단체들과 인사들이 함께 나서주셨지만 몇 년에 걸쳐 집요하게 계속되어온 ‘종북 정당이라는 공격을 이겨낼 수 없었다."


"결국 진보당은 해산당하고 말았다. 실망하고 기대를 거둔 분들 앞에 고개를 들 수 없다. 등 돌린 분들의 가슴에 난 상처들, 내 탓이다. 그 어떤 능력도 없었던 데다 이제 자격조차 잃었다. 타인에 대한 원망은 시간과 함께 줄어드는데, 나 스스로에게 돌아오는 질타는 더 커지기만 한다."(300쪽)


2011년 말 민주노동당과 국민참여당, 그리고 진보신당 탈당파와 시민사회세력이 함께 결성한 통합진보당은 2012년 4월 4.11 총선에서 진보정당 역사상 가장 많은 의석인 13석이라는 실적을 거두었다. 그러나 한달 만에 부정경선을 필두로 하는 당내 각 정파의 대립과 갈등으로 끝내 당이 갈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 와중에 당 내부와 외부에서 거세 ‘종북 공세’의 폭풍우가 밀려왔다.

통합진보당과 그 당에 남아 있던 국회의원들은 19대 국회 내내 개혁 입법을 본회의에 올리는 것이 버거웠다. 당과 의원 개개인에 대한 종북 공세와 야권 내에서까지 퍼진 ‘왕따’에서 벗어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 책 <진보를 복기하다>는 부제가 '버리기 아까운 진보정책 11가지'인 것처럼 통합진보당이 19대 국회에서 입법하고자 했으나 실패한 11가지 개혁입법의 내용을 소개하는 분량이 가장 많다.


"진보당은 정치의 현실에서 제거되었다. 그러나 애써 심어놓은 진보 정치의 새싹마저 흔적 없이 사라지게 해서는 안 된다. 한때라도 진 보정치에 기대를 주셨던 분들께 이 법안들에 간직된 진보정치의 꿈과 사랑만큼은 다시 봐주시기를 호소드린다. 이 법안들이 실현되고 서로가 서로에게 아름다운 존재가 되는 세상은 꼭 올 것이라는 희망을 키워주시기를 바란다."


"이 법안들과 정책들이 현실이 되면, 노동자가 일하다가 죽지 않고 농민이 논밭 갈아엎고 농약을 마시지 않을 터다. 이 법안들은 노동자에게 위험한 작업을 중지할 권한을 부여하고, 죽음의 일터에 노동자를 몰아넣는 사용자는 존재할 수 없게 하여, 노동자와 사용자가 인간으로 공존할 수 있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농민에게 농작물 가격 결정권을 주고, 소비자에게 안정된 가격으로 안전한 농산물을 먹을 권리를 보장하여, 서로 머리를 맞대고 한국 농업의 미래를 설계할 것이기 때문이다.”(308쪽)


11가지 진보정책과 개혁입법은 아래와 같다.

1. 죽지 않고 일할 권리 - ‘기업살인처벌법’, 2. 가장 아래에서 보아야, 비로소 보인다 - ‘노동관계법’, 3. 농업 문제는 국가 존립의 문제 - ‘국민기초식량보장법’, 4. 인간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나라에 요구할 권리 - ‘물·전기·가스 무상공급제’, 5. 수구세력 장기집권의 보검, 종편 - ‘종편퇴출법’, 6. 늑대에게 물리지 않으려거든 애완견으로도 키우지 말라 - ‘국정원해체법’, 7. 경제성장의 외형 대신 민주주의, 호혜 협력, 평등과 인권의 가치를 - ‘통상절차법’, 8. 서두르자, 보에 가로막힌 강물이 썩는다 - ‘4대강 복원법’, 9. 안보와 인권, 안보와 민주주의가 공존하는 길 - ‘대체복무법’, 10. 네 탓이 아니야 - ‘차별금지법’, 11. 1년 365일 주권자가 되는 길 - ‘국민참여예산제·국민소환법’ 


"나는 지금도 꿈꾼다. 이 법률안들이 시행되면 사회의 흉기가 된 종편들은 문을 닫아야 할 것이고, 국정원은 해체되고 정치공작은 종말을 고할 것이며, 비리와 독선의 거수기 국회의원들은 소환당할 것이다. 언론과 국정원과 비리 정치인들에게 장악당한 권력이 비로소 시민의 손으로 되돌려지는 순간이다. 4대강의 보는 해체되고, 개발독재와 환경 파괴의 더러운 욕심과 독단은 똑똑히 심판받을 것이며, 강에 깃든 생명들은 그 천연의 터전을 되찾고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다시 키워낼 것이다. 

70년 동안 멈춰 있을 뿐 끝나지 못한 채 때마다 적대의식과 종북몰이를 불러온 전쟁은 드디어 끝을 맺을 것이고, 평화의 신념은 존중받을 것이다. 이 법안들의 효과는 단지 누구에게 돈 몇 푼을 더 주거나 위기에서 탈출시키려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인간이 인간다움을 되찾게 하는 것, 서로 믿고 협력할 수 있는 세상은 온다는 희망을 키우는 것이 이 법안들이 가져올 가장 중대한 변화다."


이 책을 읽으면 한국진보정당사를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2014년 당시 한국사회의 진보정당은 통합진보당과 통합진보당을 탈당해 나온 정의당, 노동당과 녹색당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난 15년 동안의 한국진보운동과 진보정치의 가장 큰 축적물은 통합진보당일 수밖에 없다. 가장 오랜 역사와 규모를 보여주기기 때문이다.

통합진보당은 2001년 창당한 민주노동당에서부터 이어지는 15년 전통의 진보정당을 자임했다. 2014년 12월 헌법재판소로부터 강제해산을 당할 당시 진보당의 당원 명부에 기록되어 있는 당원은 12만 명이었고 매달 5천원 이상을 당비로 납부하는 진성당원은 2만5천명이었다. 

진보당의 대부분 당원과 진성당원은 비정규직 노동자, 농민, 서민, 여성 등 사회적 약자였다. 그들은 통합진보당의 당 강령 규정처럼 한국사회를 ‘일하는 사람들이 주인되는 진보적인 민주주의’로 바꾸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했음에도 ‘종북공세’의 광풍에 쓰러진 것이다.


비록 야만과 몰상식이 판을 치는 한국 정치판과 마녀사냥 여론에 통합진보당이 해산되었지만, 필자는 결코 극우보수정권인 박근혜-새누리당과 수구적인 헌법재판관에게만 책임을 돌리지는 않는다. 한때 15% 넘는 정당 지지율을 기록했고, 13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했던 통합진보당의 강제해산에는 진보정치와 당 내부에서 오래도록 누적되었던 문제들이 해결되지 못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통합진보당 강제해산 과정을 둘러싼 한국사회의 여러 문제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자기 정파 중심의 정치, 정치적 경제적 이권에 민감한 야권과 진보진영, 선민의식과 배타성, 이성보다 감정이 지배하는 정치 조직논리, 인간에 대한 예의가 사라져가는 풍토 등...


사실 통합진보당의 강제해산과 진보정치의 실패를 전적으로 자신의 책임으로 떠안으려 하는 이정희 전 대표의 평가는 타당하지 않다. 통합진보당의 강제해산과 실패는 이정희 개인이 아니라 통합진보당 전체와 나아가 진보정치권 전체 나아가 한국사회의 진보적인 미래를 꿈꾸는 모든 이들에게 공통의 책임이 있다. 순수함과 열정이 가득한 미래의 지도자 자질을 가진 젊은 정치인이 종북 공세에 멍들어가는 상황을 두 손 놓고 방관한 선배들은 이유여햐를 막론하고 비판받아야 하고 스스로 성찰해야 한다. 개인의 정치적인 목적으로, 정파적인 이해관계로 이정희를 대하고 이용한 이들도 철저하게 스스로를 돌아봐야 할 것이다.

필자는 진보정치권에서 지위가 높을수록, 명망이 클수록, 권한이 많을수록 그만큼의 책임과 의무가 주어진다고 생각한다. 통합진보당이 진보정치의 주력을 담당했기 때문에 그들의 책임이 더 큰 것이고, 당 대표였기 때문에 이정희의 책임 더 클 뿐이다. 한국정치에서, 아니 진보정치진영에서 자신(들)의 위치와 역할이 크다고 생각하는 개인과 집단일수록 통합진보당의 강제해산과 그를 전후한 한국사회 전반의 유신회귀에 대해 책임감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이 그 사람이, 그 집단이 진정한 진보세력의 주력인 것이고 진보적인 정당인 것이다. 개인적 집단적 대가를 바라지 않고 무한히 헌신하는 자세가 바로 진보정치이고 혁신이고 변혁일 것이다. 우리가 꿈꾸는 진보적인 미래 사회는 자신의 책임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늘이는 방향이며, 진보정당이 제시하는 미래의 사회상과 태도일 것이다.


"진보정치의 분열과 좌절에 실망한 분들에게, 또한 해산된 정당이라는 낙인이 찍힌 채 손발이 묶인 분들에게, 당을 대표했던 사람으로서 저지른 많은 잘못을 머리 숙여 사죄드린다. 차마 용서를 구하지 못한다. 그저, 살아가려 한다. 아픈 비판과 질책도 계속되는 수사와 재판들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나의 잘못을 딛고 넘을 뿐 진보정치 는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만 품고, 보이지 않는 곳일지라도, 가슴속에 함께 품었던 꿈과 사랑 만은 잊지 않고.”(309쪽)


이정희의 저런 발언과 모습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2008년 정치 입문 이후 일관되게 보여온 모습이었다. 그녀를 직접 경험한 이들이나 전해 들은 이들이 한결 같이 평가하는 ‘진정성’이다. 이정희가 ‘진보의 아이콘’이라는 평가는 개인의 인기나 학벌, 직업이 아니다. 존중과 겸허, 인간에 대한 예의, 헌신과 원칙, 민중에 대한 사랑과 진보에 대한 신뢰의 아이코인 것이다. 이런 자세와 마음가짐을 가진 정치인을 한때 자신이 몸 담았던 정당의 대표로 함께한 이들은 복받은 경우에 속한다. 한국의 진보정당사에 이런 정치인은 없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한국사회의 진보적인 전진은 분단체제에 기생하는 정치, 행정, 사법, 언론, 문화, 태도의 근본적인 변화에서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하며, 그러한 진전은 각 분야에서 모두 진행해야 하되 특히 진보정치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그 변화의 상징적인 계기는 ‘이정희의 정치적인 부활’로 나타날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전망한다.


[ 2016년 7월 1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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