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시대의 문턱을 넘다 - 한미동맹과 전시작전권에서 남북정상회담에 이르기까지
김종대 지음 / 나무와숲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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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김종대 저 <노무현, 시대의 문턱을 넘다>(2010 나무와숲)

저자는 오랫동안 대한민국 정부와 국회에서 국방분야의 정책 업무에 종사했다. 군사정부 시절인 제14대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비서관으로 국방 업무에 뛰어든 이후, 15대와 16대까지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10년 동안 국방 분야에 파고들었다. 잠시 군사평론가로 일하다가 2002년 노무현 대통령 후보와 맺은 인연으로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국방전문위원으로 발탁되었으며, 이후 청와대 국방보좌관실(2003~2005년)과 국무총리실 산하 비상기획위원회(2005~2006년) 그리고 2007년 국방부장관 정책보좌관으로 근무했다.

이 책은 수십 년간 저자의 국방 분야와 관련한 국정 경험을 토대로 참여정부의 외교안보통일 분야 정책의 성과와 한계를 제시한 것이다. 책은 5개 장에 걸쳐 참여정부의 한미동맹 정책, 역대 대통령의 자주국방 추진, 참여정부의 군사외교 노선 갈등, 국방개혁, 남북관계와 남북정상회담 등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저자는 특정 정당이나 정파, 정부 출신으로서의 편파적 입장이 아니라 제3자적 입장에서 참여정부의 외교안보통일 분야 정책에 대해 ‘객관적’으로 설명하겠다고 서문에 밝혔다.

제1장 ‘주한미군 감축과 전시작전권 논쟁’은 협력적 자주국방이 탄생하는 데 기폭제가 된 ‘주한미군 감축’과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결심을 하게 된 한-미 간, 그리고 청와대 내부의 ‘자주파’와 ‘동맹파’의 대립을 기술한다.
참여정부는 출범 초기 주한미군 감축과 재배치 그리고 미국의 이라크 파병 요구와 용산미군기지 이전협상 등 한미동맹과 안보 분야에서 무게가 큰 과제를 해결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청와대와 국방부 등 외교안보통일 분야의 행정부 그리고 청와대 386 참모진과 NSC와의 갈등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여기에 대해 저자는 청와대 내부의 갈등을 ‘북한 체제를 깊이 이해하지만 미국의 북한 공격가능성에 대해 지나치게 불안해 했던 자주파’와 ‘미국의 북한에 대한 강압과 봉쇄정책을 비교적 정확하게 인식하였지만 북한 체제의 붕괴가능성에 지나치게 기울었던 동맹파’의 대립으로 설명한다. 
그런데 책의 내용을 읽어보고 당시 NSC 차장이었던 이종석의 <칼날 위의 평화>와 비교해보면 저자의 설명은 다분히 ‘대립’과 ‘갈등’만을 부각시킨 측면이 커 보인다. 참여정부가 미국 관계자와의 협상에서 곤란한 상황에 자주 노출된 이유는, 청와대나 정부 내부의 이념적, 정책적 갈등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경우 대통령의 지시와 결정된 지침을 이행하지 않은 채 사적인 판단이나 부처의 이기주의를 더 중요시한 고위 관료들의 태도였기 때문이다. 여기에 미국 행정부 관료의 전횡과 보수언론 등이 확대시킨 ‘정부 내 이념 갈등 논란’의 확신이었다.

제2장 ‘박정희, 노태우 그리고 노무현의 길’에서는 노 대통령의 협력적 자주국방이 탄생하는 데 밑거름이 된 과거 박정희 정권 시절의 80위원회, 노태우 정권 시절의 818위원회, 김영삼 정권 시절의 21세기국방연구위원회, 김대중 정권 시절의 <국방기본정책서>를 통해 한국의 국방개혁과 자주화의 역사를 정리했다. 

저자는 역대 정권에서 무수히 많은 국방개혁의 기도가 왜 좌절했는지, 한국군 내부의 개혁과 반개혁의 대립의 역사는 어땠는지 핵심을 잘 보여주었다. 군사정부 때부터 국방부의 전현직 장군들은 국방력을 주한미군에 의존하여 자주국방에 대한 철학과 태도를 보여주지 않았고, 분단체제와 한미동맹을 악용하여 부처 이기주의(소위 군피아)에 집착하였기 때문에 역대 정권의 국방개혁은 번번이 좌절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 미군의 군사전략과 군산복합체의 이익이 합세하여 한국정부의 국방개혁을 방해한 결과였다.

제3장 ‘자주-동맹의 대립과 전략적 유연성’에서는 노 대통령이 100년의 역사를 좌우할 담론으로서 구상한 ‘동북아 균형자론’과 한반도 평화체제에 대한 논리의 체계화 과정을 다루고, 아울러 그것이 전시작전통제권 전환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파헤친다. 특히 여기에서는 국가 전략을 강력히 통합하려는 청와대와 NSC 그리고 이에 저항하는 국방부와 외교부의 관료주의 행태를 기술했다. 또한 작전계획 5029, 전략적 유연성, 전작권 전환 시기 등 최근까지 논란이 되고 있는 문제를 다룬다.

저자는 책 전반에서 당시 NSC 차장이었던 이종석이 ‘자주파’로서 편향된 외교안보 정책을 펼친 것처럼 기술하고 있지만, 제3장에서 이종석 전 차장이 보여주는 업무 태도와 추진 과정은 좌우 이념 갈등의 문제가 아니라 보수주의자들도 환호할 정도로 자주국가와 자주국방이라는 '국익’에 기초하여 미국 국방부, 국무부 관계자와 협상을 전개하고 청와대와 정부 내에 존재했던 사대주의적, 부처이기주의적 관료들과 싸우는 과정을 증언하고 있다.

제4장 ‘전략의 충돌과 수렴’에서는 국방개혁 2020과 전시작전권 전환이 합의되기까지 극적인 장면을 추적하며, 그 속에서 청와대와 군부가 각기 어떤 고뇌와 갈등을 겪었는지를 살펴본다. 특히 역사적 순간은 시간대별로 상세히 다룬다. 이 시기에 청와대는 ‘자주’에 대한 문제를 일단락짓고 본격적인 평화 프로세스로 나아가는 전환을 한다.

이 장에서는 전시작전통제권 환수에 대해 한국과 미국이 합의하는 몇 년의 과정에서 한국 국방부와 전현직 고위 장성들이 얼마나 자주국방을 두려워하고 혐오하는지 보여준다. 한국군에서 자주국방과 국방개혁은 '동전의 양면’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왜 그렇게 자주국방과 국방개혁을 결사적으로 저지했는지는 전작권 환수가 무기 연기되고 국방개혁이 좌초된 이명박 정부 이후 한국군 내부에서 끊임없이 벌어지는 크고 작은 인명 사고와 방산비리 등 부정부패, 정치적 중립 위반 등의 사건이 근본적인 이유를 말해준다.

제5장 ‘남북정상회담과 평화공존의 새 질서’에서는 남북정상회담과 이를 둘러싼 NLL 논쟁의 실체, 그리고 한반도 평화체제 문제를 놓고 첨예하게 대립한 청와대, 외교부, 통일부의 갈등을 다룬다. 정부가 사분오열되어 서로 갈등하는 가운데서도 결국 남북정상회담으로 사태가 정리되기까지 긴박했던 순간을 추적하고 있다. 저자는 여기에서 특히 남북정상회담을 마친 노 대통령이 시대가 부과한 자신의 사명을 다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일관된 철학으로 평화의 단초를 열었다는 의미에 주목한다.

이 장에서는 미국이 원하는대로 주한미군 감축과 재배치가 진행되고 전략적 유연성이 완료되었으며, 전시작전통제권 환수가 결정된 이후에도 자주국방과 국방개혁을 거부했던 국방부 고위 장성들의 문제점이 그대로 드러난다.그들은 북한에 대한 적대감과 대결 본능만을 간직하고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의 가장 근본적인 의무는 남북화해와 평화통일이다. 지구상에서 역사적으로 내전을 ?d은 나라나 서로 전쟁을 겪었던 국가들 사이에서도 시간이 경과하면 서로 화해와 협력과 공존을 도모한다. 5천 년 동안 하나의 민족과 국가로 유지되었던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은 공직자들에게 평화와 통일은 지상과제일 수밖에 없다.

저자 김종대는 자신이 참여정부에 몸담으며 보필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재임 기간 중 역사 공부에 깊이 몰입한 지도자”였으며, “남과 북, 중국과 일본, 러시아와 미국의 힘이 중첩되어 있는 동북아시아에서 대한민국은 2~30년 후를 내다보는 국가적 의제를 정립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이제까지와 같이 강대국에 빌붙거나 끌려다니는 식의 외교안보가 아니라 우리가 주인으로서 정세를 주도하고 운명을 개척하는 전략을 준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증언한다.
그렇지만 그는 그런 생각은 가진 지도자는 노무현이 처음이 아니라고 말한다. “박정희 대통령의 ‘자주국방론’이나 노태우 대통령의 ‘민족자존과 통일을 준비하는 국방태세’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의 ‘대북 포용정책’의 의제들”도 마찬가지였고, 다만 노무현 전 대통령은 과거 정부의 의제를 집대성했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과거 정부의 정책 성과를 공개 거부해버린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도자로서의 자질이 부족한 셈이다.

저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한국이 주권국가로서, 우리 운명의 주인으로서 한반도 운명을 새로 개척해온 ‘자를 향한 길’을 추구했으며, ‘자주’는 국가의 생존을 짊어진 노 대통령이 역사 공부에서 찾아낸 ‘궁극의 정신’이자 ‘정념’이었다”고 평가한다. 이를 포괄하는 참여정부의 국방 담론이 바로 ‘협력적 자주국방’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자주국방’은 국수적이고 배타적인 게 아니다. 동맹이나 협력이 자주와 배치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주권을 제대로 관리하는 자주성 높은 국가가 동맹도 더 잘 관리할 수 있고, 더 탁월한 도약과 성취도 일구어낼 수 있다”고 말한다.

두 사람 모두 이명박 정부 이후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잃어버린 10년’으로 규정하며 이전 정부의 정책 성과를 부정하는 모습과 NLL 논란, 그리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에 충격을 받아 책을 발간하기로 마음먹었다는 부분은 공통점이라 할 수 있다.
전 참여정부 NSC 차장이었던 이종석의 <칼날 위의 평화>와 국방보좌관실에서 근무한 저자의 책을 비교하며 읽으면 좀 더 균형적인 판단을 할 수 있다. 이종석은 학자 출신으로서 책의 기술에서 기승전결이 명료한 편이고, 김종대는 전문가,평론가 출신으로서 ‘평론’ 방식으로 책 전반에서 기승전결이 약한 편이다. 다만 두 사람이 참여정부의 외교안보통일 분야 정책의 결정과 추진 상황에 대한 기술과 평가는 비슷한 부분도 많고, 서로 다른 부분도 많다. 
아마 이종석은 스스로 정리하고 보관한 자료를 토대로 출간했고, 김종대는 여러 사람의 정보와 의견을 취합하여 출간했으며, 결정적으로는 김종대가 비슷한 주제와 시기에 대해 책을 준비하면서 이종석과 서로 의견을 나누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저자 김종대는 2007년 공직생활을 접고 외교안보 전문지 <D&D Focus>를 창간하여 발행인 겸 편집으로 일하고 있다. 그리고 군사평론가 정욱식과 ‘진짜안보(http://www.podbbang.com/ch/6644?e=21743181 #팟빵
)’라는 인터넷 팟캐스트 방송을 진행 중이다.

[ 2015년 7월 19일 ]

— 인상 깊은 문장 —

"2003년 6월 1일 미국방부 차관 폴 윌포위츠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 면담에서 “주한미군 현대화를 위해 110억 달러를 투자하기로 했다. 한국도 자체적으로 군의 취약점을 보완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면서 “지금 한국의 국방비는 2.6% 수준인데 이것으로 한국군의 취약점을 보완하기에는 대단히 미흡하다.”고 주장했다. 이튿날 윌포위츠는 국회 국방위원회 장영달, 박세환 의원 등을 만나 주한미군의 110억 달러 전력증강계획과 한국 국방 예산 증액의 필요성을 주장했다."(p.39)

"그러나 이것은 명백한 거짓말이었다. 이날 윌포위츠가 한국에 약속한 110억 달러의 주한미군 현대화를 위한 투자는 그 이후 어느 시점에도 실행되지 않았다. 미군은 그 반대로 자신들이 맡고 있는 10대 핵심 임무를 한국에 이양하면서 핵심전력을 속속 빼갔고 한국에 국방비와 방위비분담금을 증액하라는 압력의 강도를 높여 갔다."(p.45)

그해 6월 6일 미국 국방부 장관 럼스펠드의 핵심 측근이라고 인정 받는 리처드 롤리스 국방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부차관보는 김희상 청와대 국방보좌관(반기문 외교보좌관도 배석)에게 ‘주한미군 12,000명을 감축할 예정이다’고 통보한다. “주한미군을 대폭 감축하겠다는 것은 미 정부 내에서도 극비리에 검토된 사항이다. 적어도 고위층에서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부시 대통령, 럼스펠드 장관, 그리고 나 세 명 밖에 없다.”
이어 롤리스 부차관보는 “우리도 주한미군이 급격히 감축딜 경우 한국에서 반미감정이 고조될 것을 우려한다. 내가 제일 걱정하는 것은 한국에서 미국을 성토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날 가능성이다.”라며 “그러니 장관급에서 이 문제를 협의하는 절차를 갖자. 6월 말에 조영길 국방장관이 워싱턴에 올 때 이 문제를 협의하는 자리를 만들면 어떻까?”고 제안했다.(p.30~31)

김희상 보좌관의 보고를 받은 노무현 전 대통령은 외부에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미 2003년 새해부터 북한 핵시설에 대한 미국의 정밀 폭격을 암시하는 기사가 쏟아져 나오고 미국의 강경파 고위 관리들은 북한의 정권교체와 체제전환을 경쟁적으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주한미군 재배치’와 용산기지 이전 문제는 이미 국민들에게 공개되어 논란이 한창이었다. 이로 인해 국내에서 안보 우려에 대한 여론이 컸기 때문이다.
그리고 노 대통령은 김희상 보좌관의 보고를 NSC 사무처를 포함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김희상 보좌관도 따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6월 21일 청와대에서 개최된 NSC 상임위원회 회의에서 롤리스 부차관보가 제기한 주한미군 감축 문제가 논의되었다. 어떻게든 주한미군의 급격한 감축을 막아야 한다는 의견이 합의되고 그 첫 번째 행동으로 27일 예정된 한미 국방장관 회담에서 미국측의 진짜 의중을 확인하기로 했다."(p.59)

"그러나 27일 워싱턴에서 개최된 한미 국방장관 회담에서 조영길 국방장관은 주한미군 감축 문제를 꺼내지 않았다. 럼스펠드 국방장관이 먼저 감축 이야기를 꺼냈으나, 조 장관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김종대는 조영길 국방장관이 주한미군 감축에 반대하고 감축 문제에 대한 협의나 공론화 필요성 마저 부정하는 장관 개인의 생각과 판단에 따라 논의 자체를 회피한 것으로 평가했다.(p.62)

"2003년 7월 청와대 자주국방 토론회에서 노 대통령은 전시작전권 환수와 주한미군 감축은 별개의 사안이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 한국의 전시작전권 환수 의지 여부와 관계 없이 미국이 주한미군 감축을 통보했다는 것이 그 근거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미국이 한국의 자주국방 준비를 위해 필요한 시간과 관계없이 주한미군의 감축을 통보한 것에 대해 고민하면서, 주한미군 감축 사실을 국민 앞에 공개하고 자주국방에 힘을 실어 달라고 호소하는 편이 나을 것으로 생각하여 ‘미군 감축을 적극 공론화하라’고 지시했다."(p.67)
(=> 그런데 김종대는 책 안에 대통령의 공론화 지시 시기나 장소를 구체적으로 기록하지 않았다.) 

김종대는 주한미군 감축 공론화를 위해 2003년 대통령의 8.15 경축사에 포함 - “미국은 우리에게 대규모 미군 감축을 통보해 왔습니다.” - 되었다가 막판에 NSC 이종석 차장이 삭제한 것으로 기록한다.

"2003년 8월 18일 을지 국가안전보장회의와 을지 국무회의 석상에서 노 대통령은 주한미군 감축 문제는 국민적 공론화 과정을 거쳐야 함을 분명히 했다."(p.82)

"9월 9일, 조영길 국방장관은 ‘주한미군 재배치 및 감축과 자주국방의 연계 프로그램’을 작성하여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그리고 바로 이날 청와대는 국민여론, 국가이익, 한국군 안전이라는 세 가지 원칙을 고려하여 이라크에 파병하기로 결정했다."(p.85)

“9월 25일 워싱턴, NSC 서주석 전략기획실장, 국방부 차영구 정책실장, 외교부 위성락 북미국장은 롤리스 부차관보와 주한미군 감축 계획 확인 및 협의를 진행했다.
김종대는 이 자리에서 차영구 정책실장과 서주석 전략기획실장이 주한미군 감축 문제 공론화를 미국측에 제안하라는 대통령의 지시를 어기고 먼저 미국측(롤리스 부차관보)에게 공론화를 내년으로 연기하자고 제안한 것으로 기록했다. 그의 이런 판단은 차후 국정상황실과 NSC 사무처간에 ‘대통령 지시 불이행’에 대한 논쟁이 벌어져 대화내용에 대한 속기록 조사에서 드러난 것이라 했는데, 서주석 실장은 대화내용의 뒷부분이 녹음되지 않아 대통령의 지시를 따르려는 자신의 노력이 반영되지 않았다고 주장했음을 덧붙였다.
아무튼 이날 롤리스와 한국 대표단 사이에는 “주한미군 감축은 내년 여름 이전까지 공론화하지 않기로 한다.”는 약속이 맺어졌다.(p.97~98)

10월 9일 NSC 이종석 사무차장은 대통령에게 “미국이 주한미군 감축문제 공론화를 반대하였고, 한국 대표단이 공론화해야 한다는 뜻을 확실하게 전했다.”고 보고했다. 김종대는 이종석 차장이 방미 결과를 대통령에게 ‘허위 보고’했다고 기록한다.(p.100)

10월 12일 라종일 국가안보보좌관은 부시 대통령에게 보내는 노 대통령의 친서를 갖고 미국으로 향했다. 친서에서 노 대통령은 주한미군 감축과 재배치 문제를 북한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 및 이라크 파병과 연계시켰다. 주한미군 감축 문제를 신중히 해달라는 내용도 담겨 있었다. 이에 롤리스 부차관보는 미국을 방문한 라종일 안보보좌관에게 “이럴거면 파병하지 말라”고까지 말하는 등 분위기가 험악했다.(p.104)

10월 17일 국가안보보장회의에서 노 대통령은 이라크 파병을 결정하였고, 그 이튿날인 18일 미국의 AP통신은 “부시 행정부가 주한미군의 1/3인 1만 2천명을 감축하기로 하고 한국 정부와 협상 중”이라고 보도했으나, 부시 대통령은 즉각 “그것은 하급관리들의 생각일 뿐”이라며 부인했다. 물론 부시의 해명은 명백한 거짓이었다.(p.105)

“(2003년 10월) 31일, (미국의 이라크 파병 요청과 대응, 청와대 내부 논의에 대해) 자세한 내막을 몰랐던 문희상 비서실장은 이라크 파병으로 인한 내부갈등이 더욱 커질 것을 우려하여 '그동안 청와대와 부처에서 사견을 밝힌 자들을 징계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이제 더 이상 문희상 비서실장의 엄명도 통하지 않는 청와대는 마치 두 개의 핵이 서로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둘로 쪼개질 것 같은 소행성 같았다.”(p.114)

“2007년 부시 대통령의 지시로 이라크스터디그룹(ISG)이 국방부 장관 럼스펠드 전쟁 수행 방식에 총체적 오류가 있음을 밝혀냈고, 그 결과 럼스펠드는 경질되었다.”(p.116)

“한-미 간의 일련의 파병 협의 과정에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미국은 한국에 파병 문제를 회의 의제로 공식 제안하거나 공식 문서를 통해 파병을 요청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미국은 절대 이런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오직 비공식적으로, 구두로, 회의 의제가 아닌 개별 접촉을 통해 파병을 요청한다. 지난 1960년대의 베트남 파병 때도 그러했고 지금의 아프간 파병도 마찬가지다."(p.123)

“청와대 젊은 386 비서관들은 이들(NSC의 이종석 차장과 서주석 실장)이 너무 대통령과 직거래만 하려 하고 비서실의 일반적인 의사결정 회의로부터 독립되어 있다는 데 주목했다. NSC는 말은 청와대 기구라고 하지만 사실상 이종석 차장의 개인 왕국과 같이 운영되고 비서실 통제를 받지 않으려는 성향이 강하다는 시각이다."(p.127)

“미국이 주한미군 기지이전에 대해 한국과의 협상을 제안한 시점은 참으로 절묘했다. 1990년이나 2003년은 다 같이 미군 철수, 또는 감축 문제가 전면에 등장한 시기였다."(p.134)

“2003년 11월 공직기강비서관은 17장의 조사보고서를 작성했다. ‘용산기지 이전협상 결과 보고’의 핵심은 기지이전 협상에서 우리 대표단이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미국에 굴종적인 태도로 임했다는 것이다."(p.131)

“문재인 민정수석은 공직기강비서관 이석태의 보고서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17장이던 보고서는 6장으로 줄어들었다. 문 수석은 이석태 비서관에게 알리지 않고 자신이 새로 요약한 보고서를 대통령에게 올렸다. 이 과정에서 용산기지 이전협상에 대한 양측의 상반된 시각이 균형 있게 정리되었다. 그러나 이 보고서를 전달받은 노 대통령은 ‘아무리 생각해도 어느 쪽 주장이 옳은지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였다."(p.135)

“NSC 실무진은 이종석 차장에게 청와대 내의 젊은 386 비서관들과 관계를 개선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러나 이 차장은 ‘내가 왜 그 친구들에게 고개를 숙여야 하나?’며 부정적으로 반응했다."(p.137)

이듬해인 2004년 3월 27일 럼스펠드는 노무현 대통령이 국회로부터 탄핵을 받아 업무정지 중인 상황에서도 “주한미군이 곧 감축될 것”이라는 점을 시사하는 발언을 했고, 4월 16일에는 주미한국대사관이 본국에 “주한미군 병력을 90일 후에 이라크로 차출할 것”이라는 정보를 청와대에 보고했다. 그러나 NSC 사무처는 2003년 9월 롤리스 부차관보와 약속하고 대통령에게 2004년 여름까지 공론화를 연기하기로 보고했기 때문에 대응을 할 수 없었다.(p.263)

5월 14일 헌법재판소는 대통령 탄핵을 기각했다. 그런데 같은 날 ‘중앙일보’는 “미국은 주한미군 일부를 이라크로 차출하겠다고 한국 정부에 비공식적으로 통보했다.”는 기사를 보도했다.
이틀 후인 17일 부시 대통령은 노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주한미군의 이라크 일부를 차출하겠다고 말했고 노 대통령은 ‘알았다’고만 답변했다. 이미 같은 날 오후에 스티븐 해들리 미국 NSC 부보좌관이 주한미군의 이라크 차출을 공식 통보해왔기 때문이다.
청와대는 19일 “주한미군 감축을 작년부터 대비해왔다.”고 해명했다.(p.264~265)

5월 20일 청와대에서 안보관계장관회의가 진행되었는데, 반기문 외교부 장관이 “한국측 사정에 의해 주한미군 감축 공론화가 미루어졌다”고 보고했다. 노 대통령은 2003년 10월 회의에서 방미 대표단이 “미국측이 주한미군 감축문제에 대한 공론화를 꺼린다”고 보고했음을 기억해내고 분노하며 추궁했다.(265 김종대 <칼날 위의 평화>)

5월 21일 NSC 이종석 사무차장은 “주한미군의 이라크 차출을 계기로 자주국방을 앞당겨 추진하겠다.”며 정부 대책을 발표했다. 주한미군 공론화에 대한 여론이 들끓자 28일 이종석 차장과 서주석 실장이 기자들 앞에 나와 “지난해 9월, 주한미군 감축 문제를 협의하러 미국에 우리 대표단이 갔을 때 미국은 이 문제를 공개하길 극히 꺼려 했다.”며 갑작스럽게 철수 통보를 한 미국이 한국과의 약속을 어긴 것으로 발표했다.(267)

5월 31일 청와대 국정상황실(실장 박남춘)은 “미군 감축 문제 공론화에 대한 NSC의 설명은 사실과 다르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작성하여 노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2003년 9월 방미 대표단의 대화내용 비망록을 입수하였고, 비망록에는 한국 대표단이 "한국측이 북핵 문제와 국내 정치 사정으로 내년 여름까지 연기해달라”고 기록되어 있었다.(269)

6월 1일 미 국방부 피네건 한국과장은 동아일보사로 전화를 하여 이종석 차장의 발표 내용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한국측이 여러 경로를 통해 주한미군 감축 문제를 2004년 4월 총선 이전에 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고, 2004년 여름까지 공론화하지 말자는 합의 문서를 교환했다는 이종석 차장의 말은 사실이 아니다"라는 것이었다.(269)

청와대 국정상황실은 미 국방부의 인터뷰에 대해 NSC의 해명을 요구하며 미국측과의 ‘합의 문서’를 제출할 것을 독촉했다. NSC가 제시한 문서는 주한미국대사인 허버드 대사의 서명이 들어있었다. 미 국방부는 해당 ‘합의 문서’를 모른다고 주장했다. 
이 상황에 대해 김종대는 주한미군 감축 문제 공론화 연기 문서라면 미 국방부 롤리스 부차관보나 책임 있는 인사가 서명한 것이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허버드 대사가 이종석 차장의 부탁을 받고 유령 문서에 서명했다는 사실은 다른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미 국무부 라인은 국방부의 보수강경파들에게 반감을 갖고 있는데, 이것이 이종석 차장과 공모하여 미 국방부를 ‘물 먹이는’ 행동까지 유발했다는 의미에서다”라고 평가한다.(p.271~272)

이후 NSC가 대통령의 지시사항을 어겼다며 징계해야 한다는 국정상황실의 주장에 대해 노 대통령은 “내가 알아서 판단할테니 오늘로 이 문제는 종결합시다.”라고 마무리했다.(274)

6월 6일 한국을 방문한 롤리스 부차관보는 공식적으로 한국에서 1만 2천 명의 미군을 감축하기로 했다는 미국의 방침을 통보하며 이후 감축을 실행하는 문제를 한국 정부와 협의하자고 요청했다.(p.274)

6월 7일 저녁, 국정상황실 권계현 행정관은 국방보좌관실에 협조 요청을 하여 롤리스 일행이 투숙하고 있던 조선호텔에서 미 국방부 피네건 한국과장과 중령 한 명을 만났다. 그는 피네건에게 주한미군 감축 문제 논란에 대한 진실을 말해달라고 요청했다.
피네건은 “6월 3일 싱가폴 국제회의에 참석한 롤리스 차관보를 외교부 이수혁 차관보가 급히 찾아와 ‘주한미군 감축 공론화는 미국이 반대한 것으로 하자’고 말했다. 하지만 롤리스는 거절했다.”고 말해주었다. 이 말은 국정상황실에 전해져 지속적으로 NSC가 대통령을 기망했다는 유력한 증거로 부각되기 시작했다.(p.275~276)

훗날 이수혁 차관보는 자신이 그렇게 요청한 것은 “주한미군 감축 문제 공론화에 대한 외교부와 NSC의 주장이 다르고 ‘수습을 하라’고 하니까 롤리스를 만난 것이며, 롤리스에게 ‘당신이 클리어하게 하라’고 말했을 뿐이다.”라고 김종대에게 말했다고 전해진다.(p.277)

2004년 6월 국방부 정책실장이 차영구에서 안광찬으로 교체되었고, 그해 9월까지 한미 양국은 미래한미동맹 정책구상회의(FOTA)를 진행한 후 그해 10월, 주한미군 재배치와 용산 미군기지 평택 이전 문제, 그리고 주한미군의 감축 일정을 2005년에서 2008년으로 늦추기로 합의했다.(p.359~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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