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민군 우편함 4640호 - 1950년, 받지 못한 편지들
이흥환 엮음 / 삼인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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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가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62주년이다. 한국 근현대사를 왜곡시키고 사회와 민족, 사람들을 양극으로 갈라 끝없이 갈등과 반목을 하도록 만들어버린 동족 간의 전쟁... 전쟁 이후 남한은 남한대로, 북한은 북한대로 '전쟁 중'이라는 빌미로 민중들의 자유로운 의사와 권리를 박탈하고 특정 계층이 부와 권력을 독점해왔다. 남북이 휴전선에서 군사적으로 대치한 현실은 남북 내부에서 자유로운 사상과 학문이 발전하는 것을 가로막았고 이데올로기와 폭력의 과잉을 불러왔다. 종북과 좌빨의 냉전 이데올로기로 우울한 사회...

한국전쟁에 대한 학문적 평가 역시 남북 모두에서 객관성을 상실할 수 밖에 없고 권력층의 '결론'와 다르면 어느 누구도 살아남지 못하고 매장당해 왔다. 따라서 한국 내에서 한국전쟁에 대한 객관적, 학술적 연구가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남북 모두 권력층에 의해 전쟁사와 현대사 연구가 통제되었음과 더불어 그 마저도 통사적 시각과 전쟁 전략전술적 측면, 가술적 측면, 인과측면만 다루어질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실제 전쟁에 자원하거나 끌려가 전쟁터 현장에서 죽어간 수 백 만명의 일선 병사들의 이야기는 거의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그 병사들의 부모형제, 친척 지인들의 삶과 생활 역시 공식적으로 남아있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 참상을 구체적으로 견뎌낸 이들의 이야기가 빠진 전쟁사, 현대사가 '역사'로서, '연구'로써 얼마나 가치가 있을지 의문이다.

따라서 이 책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우리가 거의 모르는 한국전쟁 당시 북한 군인들의 생각과 생활, 그 가족들의 삶과 혼란이 생생하게 그리고 고스란히 담겨있기 때문이다.
책을 엮은 이흥환은 KISON(Korea Information Service on Net) 프로젝트 선임편집위원으로 일하면서 2008년 11월 미 국립문서보관소(NARA,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의 열람실에서 한국전 당시 미군이 노획한 북한 문서의 목록을 작성하다가 이 편지들을 처음 만났다. 문서 상자 1,100여 개를 이미 들여다본 상태였다. 편지들은 문서 상자 1,138번과 1,139번 두 곳에 들어 있었다. 두 문서 상자에는 편지 728통과 엽서 344매가 들어 있었다. 노획 후 비밀로 분류해놓았던 것을 미 국립문서보관소가 1977년 비밀을 해제해 일반에 공개했으니 누구나 볼 수 있는 공개 자료가 된 지 30년이 넘었다. 
 
편지는 대부분 1950년에 쓰인 것들이다. 한국전쟁 발발 직전, 또는 직후이다. 인민군대에 간 남편에게 곧 면회를 가겠다며 쓴 편지, 폭격이 쏟아지는 와중에 살아 있다는 소식만을 긴급하게 휘갈겨 쓴 편지, 자식 셋을 군에 보낸 어머니를 위로해달라고 동네 형에게 부탁하는 편지, 어떻게든 아이들 죽이지 말고 잘 키워달라고, 살아만 있어 달라고 아내에게 당부하는 편지, 폭격 맞아 돌아가신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놀라지 말라”면서 전한 편지, 속옷, 양말, 발싸개 등을 사가지고 빨리 면회와주십사 아버지에게 떼쓰는 인민군 특무장 아들의 편지, 결혼 날짜 받아놨으니 속히 집으로 오라고 아들을 호출한 아버지의 편지 등 갖가지 사연을 담은 이 편지들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편지를 보낸 지 62년이 흐른 지금까지 수신인에게 전달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동안 미군이 노획한 문서 가운데 꽤 많은 문서들이 국내에 소개되었으나 이 편지 뭉치들은 누군가 손댄 흔적 없이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었다. 평양중앙우체국 소인이 찍힌 것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 1950년 10월 미군이 평양을 점령했을 때 평양중앙우체국에서 미처 배달하지 못한 편지들을 대량 노획한 것으로 보인다. 편지는 북한 안에서만 오간 것들이 아니다. 남북을 넘나들었음은 물론, 흑룡강성, 산동성 등 중국과 모스크바, 블라디보스토크 등 소련과도 오간 사연들이다. 편지는 노획했을 때 상태 그대로 편지 봉투에 들어 있었다. 편지지와 편지 봉투는 신문지를 자르거나 찢어 만든 것부터 누런 마분지 등 겨우 종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 것들이 많았다. 
이흥환은 1,068통의 편지를 샅샅이 살피면서 그 가운데 113통을 골랐다. 그중 68건은 편지글을 옮겨 쓰고 이해를 돕고자 편지에 대한 설명글도 적었고 45건은 설명 없이 화보로 구성해 이 책을 엮었다. 어느 것은 편지 원본을 다 싣기도 했고, 여러 장 가운데 한두 장만 골라 실은 것도 있다. 내용도 일부만 옮겨 적은 것도 있고 전체 내용을 다 옮긴 것도 있다. 

이 편지들은 한 개인이 개인에게 보낸 사신(私信)이다. 공문서도 아니고 어떤 목적을 가지고 쓴 기록도 아니다. 그러나 엮은이는 이 편지들이 헝클어졌던 한국 현대사의 한 시기를 보여주는 1차 사료로 역할을 충분히 한다고 판단했다. 이 편지들이 남북한 체제 연구, 한국전 전후 시기의 사회상 연구에 꼭 필요한 사료가 아니라고 한다면 사학이란 것은 공허하고 맹목적인 학문일 것이다. 또한 이 편지들은 ‘전쟁 문학’이라는 불리기에도 손색이 없다. 딱딱한 역사서는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생생한 육성 증언의 목소리가 담긴 한 시대의 증언인 것이다.
더 늦기 전에 남한에서도 이러한 기록과 증언들을 남겨두어야 할 것이다. 전쟁터 현장에 있었던 병사들과 그 가족들이 이승으로 떠나기 전에...

현재 편지의 원본은 모두 미 국립문서보관소의 서고 밖으로 가지고 나오지 못하는, 미 정부의 소유물이다.(1953년 7월 휴전협정이 체결된 후 미국이 북한에 돌려보내지 않은 이유는 모른다. 평화협정이 체결되면 가능할지...)  이 책에 실린 편지 사진들은 미 국립문서보관소의 편지 원본을 현지에서 디지털 복사한 것이다. 한국의 국립중앙도서관은 이 편지를 포함한 노획 북한 문서 전량과 다른 한국 관련 문서를 수집하는 사업을 2004년부터 해오고 있다. 엮은이가 이 편지들과 인연을 맺게 된 것도 국립중앙도서관의 이 문서 수집 작업에 참여했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 편지들은 개인의 쓴 글로, 글에 대한 권리(literary right)는 글쓴이, 즉 발신인이나 편지 수신인에게 돌아가야 마땅하다. 엮은이는 이 편지의 존재를 알고부터 기회가 될 때마다 한국의 몇몇 주소지를 들고 수신인을 찾아보려고 했으나 허사였다. 이 책을 보고서 편지의 주인공이 직접 나타나준다면, 그래서 정부 차원에서든 민간 차원에서든 미 국립문서보관소에 이 편지 묶음의 반환을 요청할 수 있다면, 이 책의 출간 의미는 한층 더 커질 것이다. 
전쟁은 남과 북을 가로막았으나 편지는 전선과 국경을 넘나들었다. 

전사(戰史)보다 더 생생하고 소설보다 더 감동적인, 전쟁이 써낸 이 편지들은 반세기가 넘도록 미 국립문서보관소 창고 안에서 수취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떤 역사학자가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라고 말했다. 정치는 개개인의 삶과 행복을 위해 인류가 만들어낸 것일 뿐이다. 개개인을 보살피지 못하는 정치는 이미 정치가 아니다. 따라서 전쟁은 정치는 커녕 "특정한 세력의 이익을 위한 광기에 개인들이 희생되는 것"일 뿐이다.
 
* 기억에 남는 편지 :
"어머님 전 상서. 어머님 그동안 어린 자식들을 시중하시기에 얼마나 큰 고생을 하십니까. 그간 어머님 위태만안하시오며, 동생 전환, 순복, 순옥, 무남, 충남, 용남, 영실이도 또 우리 처도 몸이 다 무사하며 건강한지요. 저는 남포 집에서 염려하여 주시는 덕으로 오날것(오늘까지) 건강히 공부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중략) 제 부탁은 어머님 어린 자식들 잘 기르시기에 힘드시겠지만 공습에 몸들을 주의하시고 병에 걸리지 않게 하고 있다 평화가 오면 씩씩한 몸으로 돌아갈 때는 반가히 만나길 꼭 약속합니다. 림해 형님이나 수림한테 저는 만경대 문화군관학교로 갔다고 알리시요. 그리고 쌀 배급은 꼭 수속하세요. 리장한테도 부탁하였습니다. 증선 동무와 원섭 동무에게 소식을 전하시요."(‘자식을 서이나 전선에 보낸 우리 어머님’ 중에서)

"…… 이곳 생각은 절대로 하지 마시우. 생각을 하여 봤자 도움이 없으니까. 춘길이 춘덕이를 잘 성장시켜 기르기를 바라우. 아모쪼록 춘길과 춘덕을 죽이지 말고 길러주시우. 만약 먹을 것이 없으면 빌려서라도 잘 길러주시우. 이 몸은 언제나 그리운 춘길과 춘덕이를 볼까. 금일 밤에도 춘길과 춘덕이를 보았는데 눈을 뜨니 꿈이었습니다. 생각은 더 말할 수 없고. …… 춘덕이는 수개월 전에는 병으로 고생한다고 하더니 죽지는 않았는데 금일은 별 생각 다 납니다. 그리운 춘길과 춘덕이를 언제나 보리우. 춘길과 춘덕이여, 절대로 앓지 말고 자라라. 끝으로 도시로 나가지 마시우, 절대로."(‘아이들 죽이지 말고 잘 길러주시우’ 중에서)

"사랑하는 오빠에게. 그동안 몸 건강하여 군대에 열중하고 있겠지? 우리 집안 인간들은 다 안녕히 있으니 그 걱정은 말고 오래비 네는 힘껏 마음껏 우리 조국에 바치어 완전 동립(독립)을 위하여 싸우라. …… 오래비 네 덕택으로 배급을 타 먹는다. 배급은 한 달에 3번씩 탄다. 오래비 네 편지를 받아보고 얼마나 깊어(기뻐)했는지 모르겠다. 오래비 네 여섯 동무가 다 함께 있다는 것을 보고 더 한층 깊어했다. 네 편지를 받아보니 노일이 형님한테도 편지를 하고 다 잘 있기를 써 있는 것을 보았다. 노일이, 일섭이는 인민군대를 안 나가구 집에서 논다."(‘오래비 네 덕택에 배급을 타 먹는다’ 중에서)

"사랑하는 귀란 동지 앞 …… 그동안 많이 섭섭하셨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자, 일 년이 넘도록 편지 한 장 하지도 않고 애인 말뿐이지 자, 동에가 있는지 서에가 있는지 주소라도 알면 편지라도 하겠는데, 또 그동안 저에게 편지 수차 했는지도 모르겠으나 회답도 오지 않지, 퍽 궁금도 하며 섭섭도 하였겠다 생각됩니다. 전번 주소는 내가 출장 갈 때 비슷하게 듣고 간 것이라 부대에 와서 본 즉 주소 번호가 틀렸습니다. 이번 치는 명확한 것입니다. 
…… 귀란 동무, 내가 조국 강토에 와서 있을망정 나의 어머니를 모르거나 귀란이를 모르거나 있던 곳을 모르거나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요. 동무가 수고를 얼마나 많이 한다는 것을 내가 다 파악하는 사람이요. 세상에서 하루를 천추 같이 여기실 어머님을 부디부디 동무가 나를 대신하여 마음 끝 봉양하여주옵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부탁은, 어머님의 기념사진 동무와 같이 찍어두기를 바랍니다. 부쳐달라는 말은 아닙니다. 동무 자서로서 이 편지 회답을 혁명자 입장에서 잘 써서 한 장 회답하시요. 나의 기념사진 한 장을 동무에게 보냅니다. 이것으로 철필을 놓습니다."(‘내가 떠나와 있을망정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오’ 중에서) 

"승요 좀 똑똑히 보아라. 금일이 양 10월 11일인데 편지는 10월 15일에(9월 15일의 잘못인 듯: 편집자 주) 보낸 것과 25일에 보낸 것이 오날이야(오늘에서야) 함께 와닷다(와 닿았다). 그런데 다름이 안이와(아니라) 네 말이 한마디도 깨다라 알 수가 없써서(깨달아 알 수가 없어서) 곤테(고쳐서) 똑똑히 외견한 말을 원문으로 써서 보내라. 

"…… 반드시 모(母) 내가 보래는 뜻은(꼭 어미인 내가 봐야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무슨 삭건인지(사건인지) 알 수가 잇니. 니불을 지고 가볼내도 네 말 한마디 디더 보고 갈낸다(이불을 짊어지고 가보려 해도 우선 정확한 네 말 한마디를 먼저 들어보고 가겠다)."(‘도무지 한마디도 깨달아 알 수가 없으니’ 중에서)
 
[ 2012년 6월 2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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