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을 멈춰라! - 자율적 공생을 위한 도구, 이반 일리치 전집 4
이반 일리히 지음, 이한 옮김 / 미토 / 2004년 6월
평점 :
절판


"과학과 기술이 만든 문제는 한 단계 심오한 과학과 더 나은 기술만이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을 유행처럼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잘못된 관리를 해결하는 법은 더 적극적이고 더 많은 양의 관리라고 여긴다. 이는 마치 오염된 강을 치료하는 길은 더 비싸고 강력한 청정합성세제를 사용하는데 있다고 결론 짓는 것과 같다. 더 많은 지식과 정보를 쌓고 더 많은 과학과 기술을 도입함으로써 현재의 문제를 억누르려고 하는 것은 그 근본 원인에 대한 성찰없이 그저 가속페달만 밟으면 모든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 것과 같다."  

이 책은 법정스님의 저서 < 내가 사랑하는 책들 >에 소개된 책 50권 중 <소로우의 무소유, 월든>, <농부철학자 피에르 라비>, <오래된 미래>, <무탄트 메시지>에 이어 다섯 번째로 읽은 책이다.

저자가 처음 이 책을 발간한 시기는 1973년이다. 아직 소련과 동구권 체제가 무너진 시기도 아니었고 신자유주의가 도래하기도 10년 이상 남아있던 시기에 산업생산양식과 성장의 폐해에 대해 일갈하고 정치적 전환을 주장한 저자는 인류역사의 선각자이자 사상가라 인정받을 만 하다. 특히 학교와 의료, 수송, 에너지에 대한 그의 통찰력 넘치는 분석과 비판은 세대를 뛰어넘는 시기임에도 우리에게 여전히 울림으로 다가오고 있다.
그래서 법정스님께서 추천하셨으리라...
 
먼저, 출판사 서평을 읽어보자...
1949년, 미국의 대통령으로 재선된 트루먼은 취임 연설에서 “미국에는 새로운 정책”이 있다고 선언했다. 이 새로운 정책이란 다름 아닌, 미개발의 나라들에 대해 기술적 & 경제적 원조를 실시하고 투자를 확대한다는 것이었다(여기에는 당연히 한국도 포함).
이 연설에서는 향후 산업생산양식을 이끌어갈 중요한 단어가 사용됐는데, 바로 ‘미개발 국가(under-development country)’라는 단어가 그것이다. 이전에는 백과사전에서조차 찾아볼 수 없었던 ‘미개발국가’, ‘근대화’는 금새 경제학과 사회학에서 사용되는 전문용어로 정착됐다. 발전경제학이나 발전사회학이 대학의 정규과목이 된 것도 이 무렵이다.
트루먼의 취임 연설 이후 ‘개발’은 미국과 미국의 원조를 받는 제3세계의 국정지표 그리고 급기야 유엔의 정책이 되었다. 

‘발전’과 ‘성장’은 구래의 지반을 가지고 있는 ‘역사적’인 단어가 아니라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단어다. 마치 요즘 사용하고 있는 세계화가 그런 것처럼…
더욱 흥미로운 건 소련의 스탈린 역시 비슷한 시기에 자국민들을 ‘개발’의 바다로 노저어 가게 했다는 것이다. ‘개발’ 혹은 ‘성장’은 이때부터 신화가 되어버렸다. 누구도 ‘성장’에 이의를 달지 않았다. 러시아의 예에서 보듯이 성장보다는 분배의 정의를 요구하는 자들조차 ‘성장’을 부정하지 못했다. 이처럼 ‘경제발전’에 대한 사고방식에는 이데올로기로서의 측면을 찾아볼 수 없다. 자유주의자나 보수주의자, 민족주의자나 파시스트 그리고 나치나 레닌주의자 혹은 스탈린주의자들 역시 ‘성장’이라는 코드를 공유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상식대로 ‘성장’은 모든 가치를 뛰어넘는 선(善)인가? 이건 뜬금 없는 질문이 아니다. 최근 한국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성장과 분배의 논쟁 역시 ‘성장’이라는 코드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정부와 주류경제학자 그리고 재야 간의 대결구도로 형성되었던 성장과 분배의 논쟁은 이제 급기야 제도권 안으로까지 진입했다. 하지만 이 논쟁구도 역시 ‘성장’을 배제하지 않는다. 전통적으로 ‘성장’의 가치를 추구하던 세력뿐 아니라 소위 진보진영 역시 ‘진보적 경제발전론’이나 ‘분배를 통한 성장’을 주장하며 ‘성장’에 힘을 보태고 있다. 하지만 일리히는 명쾌히 주장한다. “성장을 멈춰라!”
 
40여년 전에 경고했음에도 우리의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성장’만을 위해 질주해온 미국과 유럽, 일본과 한국,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대부분의 지구상 국가들에서 지금 나타나는 모습은 어떠한가? 과연 ’학교’가 우리에게, 그리고 우리의 아이들에게 진정한 ’배움’을 줄 수 있는가? 과연 ’병원’이 우리에게 건강과 치유력을 제공하는가? 과연 자동차와 비행기가 우리에게 시간적, 공간적, 정신적, 육체적 여유와 시간을 제공하는가?
 
저자는 봉건시대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시기에 교육과 건강, 통행과 에너지라는 미명하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산업생산양식이 ’학교’와 ’병원’과 ’수송’을 상품산업으로 탈바꿈시키고 교육과 건강, 통행과 에너지를 산업생산양식으로 탈바꿈시켰는지 알려준다.
 
산업생산양식은 ’교육’이라 불리는 상품을 제조해내면서 처음으로 완전히 합리화 되었으며, 교육은 과학적 마술이 창조한 환경에 맞는 새로운 유형의 인간을 탄생시키는 연금술적 과정을 추구하게 되었다. ’교육’이라는 상품과 ’학교’라는 제도는 서로를 필수적인 것으로 만들어 주었다. 배움을 학교교육으로 재정의해버린 후 사람들에게 학교를 필수적인 것으로 보이게했을 뿐만 아니라, 학교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가난의 고통에 더하여 교육을 받지 않은 자에 대한 차별까지 겪게 만들었다는 것... 사람들이 지식의 수준을 정의하고 측정하는 학교의 권위를 받아들이게 되면, 사람들은 적절한 건강 수준이나 수송 수준에 대해서도 해당 분야의 제도기관의 권위를 쉽게 더 받아들이게 되었고 그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저자는 의료의 경우, 1913년을 하나의 분수령으로 본다. 그때부터 환자들은 구체적으로 효과적인 치료를 제공해주는 의대 졸업자를 만날 확률이 반반이 되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의학이 병과 치료를 ’정의’하게 되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의사들은, 스스로 만들어낸 기준으로 치료의 효과를 측정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시기를 전후하여 과학과 기술의 발전으로 물은 정화되었고 유아 사망율은 낮춰질 수 있었고 쥐를 통제하여 역병을 물리치고 매독균을 현미경으로 보고 살바르산으로 매독을 제거할 수 있게 되었다. 저자는 사망율과 발병율의 눈부신 감소는 위생, 농업시장, 그리고 삶에 대한 일반적인 태도 변화 덕분에 일어난 것이며, 이들 변화 중 일부는 의학이 발견해낸 사실에 건축토목기사가 주의를 기울였기 때문에 생겼다고 말한다. 그러나 의사가 직접 개입하여 나타난 변화라 말할 수 있는 것은 대단히 드물다라고...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치료를 위한 도구가 간단하면 간단할수록 의료전문가들은 그 도구를 자신들만 독점적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에 소요되는 훈련기간은 더욱 길어져만 갔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급기야는 모든 사람들이 의사를 더 의존하게 되었다. 

저자는 의사들에 의해 생긴 질병 중에서 가장 심각한 질병은 바로, 의사들이 환자에게 더 나은 건강을 안겨주는 척하는 허풍이라고 단언한다. 엄청난 돈이 의학적 치료에 의해 생긴, 샐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손해를 메우기 위해서 사용되었고 의료가 병을 고쳐서 얻은 이득은, 의료가 새로이 아프게 만든 사람들의 비용에 비하면 난장이만큼이나 작아보인다고... 물론, 내가 보기에 이런 흐름은 의료 뿐 아니라 교육, 법률, 과학, 건설, 회계 등 과학과 기술을 통해 새롭게 정의된 모든 분야에서 공통적으로 적용될 것이다.
 
저자의 이야기는 내가 지금까지 전혀 생각해보지 못한 관점이고 접근방식이었다. 우리사회는 저자가 비판하는 산업생산양식과 제도들을 기초로 하여 헌법과 법률, 제도와 정책, 규범과 문화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적지않게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저자는 산업생산양식의 발전과 장악에 따라 인류가 위협받게 되는 여섯 가지 경로를 규명한다.
1) 과잉성장은 인간이 진화해온 환경의 물리적 기본구조에 대한 권리를 위협한다.
2) 산업화는 공생적인 일을 할 권리를 위협한다.
3) 새로운 환경에 맞추어 인간을 과잉 프로그래밍하는 일은 인간의 창조적인 상상력을 죽인다.
4) 새로운 생산성 수준은 참여정치의 권리를 위협한다.
5) 기존의 신화, 도덕, 판단을 참고할 수 있는 권리를 위협한다.
6) 강제적이지만 인공적으로 실현된 만족을 주는 수단이 불러일으키는, 만연된 좌절은 보다 미묘한 위협을 구성한다.
 
그리고 저자는 산업생산양식을 가져온 ’도구’를 재정의하면서 지나치게 효율적인 도구가 물리적 환경과 인간이 맺는 관계를 촉진하는 일에 적용되면 결국 인간과 자연의 균형을 파괴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 파괴의 모습은 ’생태계의 파괴’, ’근본적인 독점’, ’과잉계획’, ’양극화’, ’노후화’, ’좌절’이다. 이 모든 저자의 주장과 예상은 30년이 지난 후 인류에게 본 모습을 적나라하게 나타나고 있다. 
 
어느 날 숲의 나무를 잘라내고 그곳을 주차장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걸 흔히 ‘발전’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 장소에 전혀 다른 것을 설치하는 것. 그것을 보고 우리는 숲의 ‘발전’이라고 부르지 말아야 한다. 그는 이 책에서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까지 무한 성장하는 산업사회의 생산방식 대신 자율적, 공동적 도구 사용과 인간의 자율적 행위의 상호교환을 중심으로 하는 공생의 사회를 주창하고 있다. 그는 공생공락 하는 데 필요한 세 가지 - 시, 자전거, 도서관 - 가 있다고 말한다.
 
그가 성장에 반대하는 이유는 명쾌하다. 사회구성원 모두가, 다른 사람들이 최소한도로만 통제하는 도구를 사용하여 가장 자율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사회가 만들어질 때 우리는 공생적(Conviviality)인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37년 전의 저자의 비판과 대안을 인류사회는 거부하였다. 물론, 역자(이훈)의 말대로 저자가 제시한 세 가지 방안(과학의 탈신화화, 언어의 재발견, 법 절차의 회복)는 실천적이기 보다 상징적이었다. 하지만 저자가 줄기차게 주장하는 ’균형’과 ’도구의 한계를 정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산업생산양식이 인류사회를 지배하게 된 기간은 300년 가까이된다. 그렇다면 그것을 극복하는 기간 역시 짧은 시간 내에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모든 일이 한 걸음씩 이루어지는 것을 감안하면 ’성장의 한계’나 ’도구의 한계’를 정하는 것이 인류에게 출발점이 될 것이고 새로운 관점과 대안에 대한 계기로 주어질 것이다. 그 ’균형’을 위해서는 아주 자그마한 구멍 만들기부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산업생산양식’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고 근본에서부터 인류사회에 공론화시키는 것이라 생각한다.
 
* 책 속의 문장
- 공유된 배움과 개인간의 비판적 상호작용을 높은 수준으로 진작시키려는 사회는 교육산업의 성장에 한계를 설정해야만 한다.(p.09)
- 대단히 현대적이면서도 산업에 의해 지배되지 않는 미래사회에 대한 이론을 정식화하기 위해서는 자연적 규모와 한계르 파악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우리는 오직 이 한계 안에서만 기계가 노예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 한계를 넘어서면 기계 자체가 새로운 노예주가 된다.(p.12)
- 1970년 미국의학협회 총회에서 회장은 신생아의 건강상태가 양호하다고 증명될 때까지는 모든 신생아를 환자로 간주하도록 소아과 의사들에게 권고하였다.(p.22)

- 정보를 저장하고 지식을 쌓아나가고 더 많은 과학을 도입함으로써 현재의 문제를 억누르려는 것은, 궁극적으로 가속화를 통해 위기를 해결하려는 시도이다.(p.28)
- ’공생’이라는 단어는 사람들 사이의 그리고 사람과 환경 사이의 자율적이고 창조적인 상호작용을 뜻한다. 공생이란 개인의 자유가 사람들 간의 상호 의존성으로 실현된 것이며, 그 자체로서 하나의 윤리적 가치이기도 하다.(p.33)
-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현재의 제도를 뒤집어 엎어 산업적 도구를 공생적 도구로 대체하지 않으면 효과적으로 실현될 수 없다.(p.33)

- 대안적 정치질서는 모든 사람들이 각각 그들 자신의 미래를 정할 수 있도록 한다는 목표를 가진다. 그러한 정치는 생존, 정의, 그리고 일의 자율성이라는 가치를 보호하기 위해 도구의 사용범위를 제한할 것이다.(p.34)
- 에너지의 노예가 되지 않고 사람들끼리 의존하는 법을 다시 배워야만, 사람들 스스로 절제의 즐거움과 검소의 해방감을 재발견하게 될 것이다.(p.35)

- 나는 ’도구’라는 용어를 드릴, 전화기, 빗자루, 건축자재와 같은 단순한 기재에서부터, 자동차와 발전소같은 거대한 기계, 콘플레이크나 전류와 같은 유형의 상품을 생산하는 공장과 같은 생산적 기관, 그리고 교육, 건강, 지식, 결정과 같은 무형의 상품을 생산하는 기관까지 포함시키는 넓은 뜻으로 쓴다.(p.45)

- 공생적 사회에 근본이 되는 것은 조작적 제도와 중독적 재화나 서비스를 전부 다 제거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구체적인 욕구를 생산하고 그 충족을 위해 전문화된 도구와 자아실현 능력을 보충하고 발현시키는 도구 사이에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49)
- 치유될 수 있는 대부분의 질병은 오늘날 평범한 사람들이 처방하고 치료할 수 있다.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이기 매우 힘들어한다. 왜냐하면 의료가 지닌 의례가 너무 복잡해서 그 기본적 과정이 단순하다는 사실을 숨기기 때문이다.(p.64)
- 나이별로 학년이 나뉘어진 채 이루어지는, 일생을 결정짓는 특권을 따느냐 마느냐를 결정짓는 강제적인 경쟁은, 평등을 진작시키기는 커녕, 남보다 빨리 시작하거나, 더 건강하거나, 교실 밖의 자원이 더 많은 사람에게만 유리한 결과를 낳을 뿐이다.(p.74)

- ’근본적인 독점’이란, 하나의 브랜드가 지배하는 상태가 아니라 한 가지 유형의 생산물이 지배하는 상태다. 근본적인 독점은 산업생산의 과정이 절실한 필요의 충족에 대한 배타적인 통제를 행사하며 비산업적인 활동을 경쟁에서 축출하는 상태다.(p.90)
- 현대 의료의 근본적인 독점은 아픈 사람이 의사가 처방하지 않고 치료할 수 있는 권리를 박탈한 상태다.(p.91)
- 근본적인 독점은 강제적 소비를 부과함으로써 개인의 자율성을 제약한다.(p.92)

- 보건전문가의 통제 아래 쓰이는 돈이 더 늘어난다는 것은 더 많은 사람들이 환자의 역할, 스스로는 아프다 말다를 결정할 권한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주어지는 역할을 수행하도록 조작됨을 뜻한다.(p.93)

- 도로, 학교, 병원으로 온통 뒤덮인 사회에서 독점으로부터 보호받는 일은 어렵다. 왜냐하면 이런 사회에서 독립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 능력은 기능이 감퇴되고 단순한 대안마저도 상상력이 미치는 범위 밖에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필요한 행동이 마비되어 왔기 때문이다. 독점이 물리적 세계를 형성할 뿐만 아니라 상상력과 행동의 범위까지도 결정할 때 독점을 제거하는 것은 힘들다. 근본적인 독점은 일반적으로 너무 늦었을 때 발견된다.(p.96)
- 제어되지 않는 산업화는 가난을 근대화한다. 가난의 수준이 높아지고 부자와 빈자의 간극이 커진다. 이 두 측면은 함께 이해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파괴적인 양극화의 본질을 놓치게 된다.(p.114)

- 개인은 각자가 소유한 물건의 영수증이 얼마나 철 지난 것인가에 따라 사회적 등급이 매겨진다. ... 경제가 대규모로 생산물을 새로 고안하고 기존 기본 상품 묶음을 노후화시키는 과정 위에 건설된 곳은 어디에서나, 가장 최신의 서비스와 재화에 대한 접근권을 가진 자는 특권층뿐이다. (p.122)
- 재화와 도구를 정기적으로 혁신하게 되면, 무엇이든 새롭기만 하면 더 나은 것이라는 신념을 낳게 된다. 이 신념은 현대 세계관의 핵심적인 부분이 되었다.(p.123)
- 공동체가 과학에 대한 과잉확신을 가질 때, 사람들은 성장의 상한선을 설정하는 일을 전문가에게 맡겨버린다. ... 그러나, 폐쇄적인 전문가 집단이 전문적 지식을 추구하는 일에 자기제약을 가하리라고 신뢰할 수 없다.(p.142)

- 산업화된 국가의 언어는 창조적인 작업과 인간노동의 결실을 산업의 산출물로 파악한다. 의식의 물질화는 서구 언어에 반영되어 있다. ... 명사로 이루어진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그들이 가지고 있는(have) 일(work)이라는 식으로 소유권적 표현을 쓴다. ... 그들은 지식, 이동성, 심지어 감성과 건강까지도 획득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들은 일뿐만 아니라 사랑도 가진다.(have sex) p.145 

 [ 2010년 11월 2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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