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 박노해 시집
박노해 지음 / 느린걸음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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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우리들에게 그의 시와 노래 ’노동의 새벽’은 뼛 속 깊은 울림이 있었다.
어린 나이임에도 내가 어떤 존재이고 어떤 상태이고 무엇을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가를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이해하도록 해주었다.
 
"전쟁같은 밤 일을 마치고 난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이러다간 오래 못가지
이러다간 끝내 못가지
설은 세 그릇 짬밥으로
기름투성이 체력전을
전력을 다 짜내어 바둥치는
이 전쟁 같은 노동일을
오래 못가도
끝내 못가도
어쩔 수 없지
탈출할 수만 있다면,
진이 빠져, 허깨비 같은
스물아홉의 내 운명을 빠질 수만 있다면
아 그러나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지
죽음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지
이 질긴 목숨을,
가난의 멍에를,
이 운명을 어쩔 수 없지
또다시 다가올 내일의 노동을 위하여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자거운 소주를 붓는다
소주보다 독한 깡다구를 오기를
분노와 슬픔을 붓는다
어쩔 수 없는 이 절망의 벽을
기어코 깨뜨려 솟구칠
거치른 땀방울, 피눈물 속에
새근새근 숨쉬며 자라는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
우리들의 희망과 단결을 위해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줏잔을
돌리며 돌리며 붓는다
노동자의 햇새벽이
솟아오를 때까지"
 
그 시인은 노동자의 새벽을 열기 위하여, 노동해방을 위하여 동지들을 규합하고 조직을 건설하여 그 거대한 자본과 권력에 대항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거대권력 앞에 가로막혔고 거대권력의 철창에 갇혔다.
 
’시인이자 노동자이자 혁명가’로 온몸을 던져 살아온 박노해.
그의 삶과 투쟁은 1980~90년대의 우리 땅의 모습 그 자체였다.
1980년대 군사정권의 강권통치로 어둠이 가득했던 시절, 그는 우리들의 희망이자 노동해방과 민주화의 상징이었으며, 19990년대 분단 대치 중인 한국에서 절대 금기시되는 사회주의를 천명하며 자본주의와 강권통치에 맞섰다.
사회주의가 노동자,농민,서민을 해방시키는 길임을 믿고 혁명운동에 온몸을 던졌던 그는 사형선고를 받던 그 때,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 붕괴 현실을 목도해야만 했다.
이후 그는 ’실패한 혁명가’로서 정직하게 스스로를 인정하고 그 결과에 절망하면서 그동안의 과정과 시대의 변화에 맞는 내부로부터의 성찰과 자기쇄신을 통한 새로운 진보이념을 개척하기 위해 함구해왔다.
 
그리고 민주화가 되고 자유의 몸이 된 후,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고 싶지 않다" ’말할 때가 있으면 침묵할 때가 있다 / 누구나 옳은 말을 할 수 있을 때는 / 지금, 삶이 말하게 할 때이다’ (’깨끗한 말’) 라며 그는 홀로 국경 너머 가난과 분쟁의 현장에서 글로벌 평화나눔을 펼쳐왔다.
동시에 "온몸을 던져 혁명의 깃발을 들고 살아온 나는, 슬프게도, 길을 잃어버렸다"는 처절한 자기고백과 함께 지구 시대의 인간해방을 향한 새로운 사상과 실천에 착수해왔다.
스스로 잊혀짐의 시간을 선택한 박노해.
그 긴 침묵의 시간이 잉태한 시대정신의 한자락이 이제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로 우리 앞에 펼쳐진다.
 
그의 이번 신작 시집은 12년만에 출간된 것이다.
이 시집은 그가 10여 년의 침묵정진 속에서 육필로 새겨온 5천여 편의 시 중에서 304편을 묶어낸 것이다.
우리 시대의 ’저주 받은 고전’ <노동의 새벽>(1984)으로 문단을 경악시키고, 민중의 노래가 되었다.
두 번째 시집 <참된 시작>(1997), 옥중 에세이집 <사람만이 희망이다>(1997)와 <오늘은 다르게>(1999), <겨울이 꽃핀다>(1999)를 출간한 이후, 그는 지난 10여 년 동안 긴 침묵의 길을 걸어왔다.
그리고 이제 마침내, 그가 말을 꺼냈다.
이 시를 통하여 그는 이념이 붕괴하고 시장만능의 신자유주의가 전지구와 한반도를 점령하는 이 시기, 길 잃은 이들에게 ’사람만이 희망’이라는 새로운 주체 선언으로 또 한번 우리 사회를 흔들고 있다.
 
그의 시는 그가 발바닥 사랑으로 걸어다닌 중동과 아프리카 대륙의 넓이만큼 넓고, 그의 정직한 절망과 상처와 슬픔과 기도만큼 깊으며, 참혹한 세계 분쟁현장과 험난한 토박이 마을의 울부짖음과 한숨만큼 울림은 크다.
가난하고 짓밟히는 약자와 죽어가는 생명을 끌어안고, 국경 없는안ㄷ 적들의 심장을 찌르는 시.
가진 자들에게는 서늘한 공포와 전율을, 약자들에게는 한없는 위안과 희망을, 우리 모두에게는 묵직한 감동과 뼈아픈 성찰을 안겨준다.
그의 시는 지구시대 유랑의 시이고, 순례의 시이고, 목숨 건 희망찾기의 시이다.
이 시집은 21세기로 다시 태어난 <노동의 새벽>이다.
 
시인은 가치와 방향을 잃고 방황하는 나에게 차분히 생각하도록 해주었다.
그 분의 말처럼 나 스스로를 돌아보고 깨닫고 정립하고 싶다.
그 분처럼 내 주변에서부터, 이웃에게, 부족하고 어려운 이들에게 자그마한 도움을 줄 수 있도록 노력하는 한 해가 되기를 나에게 기대해본다.

내가 이 시집을 평가하는 것은 어불성설인 것 같다.
모든 이들에게 직접 음미하는 것을 권하고 싶다.
 
* 감명깊게 접한 시들
- ’ 넌 나처럼 살지 마라 ’(p.14)
- ’ 너의 눈빛이 변했다 ’(p.25)
- ’ 자기 삶의 연구자 ’(p.36)
- ’ 아이폰의 뒷면 ’(p.49)
- ’ 조금씩 조금씩 꾸준히 ’(p.52)
- ’ 사람의 깃발 ’(p.61)
- ’ 말의 힘 ’(p.83)
- ’ 안 팔어 ’(p.85)
- ’ 도시에 사는 사람 ’(p.121)
- ’ 혁명은 거기까지 ’(p.130)
- ’ 건너뛴 삶 ’(p.142)
- ’ 유산 ’(p.152)
- ’ 속울음 ’(p.184)
- ’ 민주주의는 시끄러운 것 ’(p.195)
- ’ 그리운 커닝 ’(p.197)
- ’ 다 아는 이야기 ’(p.222)
- ’ 거대한 착각 ’(p.248)
- ’ 삶이 말하게 하라 ’(p.253)
- ’ 어린 수경 ’(p.254)
- ’ 우리는 ’바보’와 사랑을 했네 ’(p.266)
- ’ 우리 밀 ’(p.298)
- ’ 촛불의 아이야 ’(p.300)
- ’ 보험 ’(p.311)
- ’ 두 가지만 주소서 ’(p.319)
- ’ 주의자와 위주자 ’(p.347)
- ’ 시간의 중력 법칙 ’(p.370)
- ’ 너의 날개는 ’(p.385)
- ’ 내가 쓰러질 때 ’(p.387)
- ’ 경운기를 보내며 ’(p.393)
- ’ 크게 울어라 ’ (p.395)
- ’ 사람이 희망인 나라 ’(p.397)
- ’ 나랑 함께 놀래? ’(p.400)
- ’ 젊은 피 ’(p.408)
- ’ 틀려야 맞춘다 ’(p.410)
- ’ 구명 뚫린 잎 ’(p.425)
- ’ 참 사람이 사는 법 ’(p.443)
- ’ 성숙이 성장이다 ’(p.449)
- ’ 명심할 것 ’(p.461)
- ’ 사과상자 ’(p.467)
- ’ 대한민국은 투쟁 중 ’(p.475)
- ’ 고모님의 치부책 ’(p.501)
- ’ 정점 ’(p.504)
- ’ 뉴타운 비가 ’(p.513)
- ’ 오래된 것들은 아름답다 ’(p.519)
- ’ 래디컬한가 ’(p.535)
- ’ 겨울 사랑 ’(p.545)
-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p.552)
 
이 책의 제목이자 시집의 마지막을 장식한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 안데스 산맥의 만년설산
    가장 높고 깊은 곳에 사는
    께로족 마을을 찾아가는 길에
 
    희박한 공기는 열 걸음만 걸어도 숨이 차고
    발길에 떨어지는 돌들이 아찔한 벼랑을 구르며
    태초의 정적을 깨뜨리는 칠흑같은 밤의 고원
 
    어둠이 이토록 무겁고 두텁고 무서운 것이었던가
    추위와 탈진으로 주저앉아 죽음의 공포가 엄습할 때
 
    신기루인가
    멀리 만년설 봉우리 사이로
    희미한 불빛 하나
 
    산 것이다
 
    어둠 속에 길을 잃은 우리를 부르는
    께로족 청년의 호롱불 하나
   
    이렇게 어둠이 크고 깊은 설산의 밤일지라도
    빛은 저 작고 희히한 등불 하나로 충분했다
 
    지금 세계가 칠흙처럼 어둡고
    길 잃은 희망들이 숨이 죽어가도
    단지 언뜻 비추는 불빛 하나만 살아 있다면
    우리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세계 속에는 어둠이 히해할 수 없는
    빛이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거대한 악이 이해할 수 없는 선이
    야만이 이해할 수 없는 인간정신이
    대배와 절망이 이해할 수 없는 희망이
    깜박이고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그토록 강력하고 집요한 악의 정신이 지배해도
    자기 영혼을 잃지 않고 희미한 등불로 서 있는 사람
    어디를 둘러 보아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대에
    무력할지라도 끝끝내 꺾여지지 않는 최후의 사람
 
    최후의 한 사람은 최초의 한 사람이기에
    희망은 단 한 사람이면 충분한 것이다
 
    세계의 모든 어둠과 악이 총동원되었어도
    결코 굴복시킬 수 없는 한 사람이 살아 있다면
    저들은 총체적으로 실패하고 패배한 것이다
 
    삶은 기적이다
    인간은 신비이다
    희망은 불멸이다
 
    그대, 희미한 불빛만 살아 있다면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 2011년 1월 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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