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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 현실과 환상이 만나고 다투다가 하나 되는 무대 ㅣ 클래식 아고라 2
일연 지음, 서철원 옮김 / arte(아르테) / 2022년 11월
평점 :
아르떼 출판사에서 CA(클래식 아고라, Classic Agora) 시리즈를 내고 있다.
출판사는 지루하기만 한 고전보다 흥미진진한 몰입감을 선사하는 새로운 품격의 고전, 중역과 낡은 번역으로 점철된 고전이 아니라 젊은 학자들의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고전의 새 시대를 열겠다는 포부도 밝혔다.
시리즈의 시작은 임진왜란에 관한 뼈아픈 반성의 기록인 유성룡의 <징비록>이었고, 두 번째 편은 바로 일연의 <삼국유사>이다.
고전을 읽어야 함은 누구나 많이 들어 그에 대한 부담감은 항상 있어 왔다. 하지만 고전에 대한 접근을 방해하는 가장 큰 요소는 바로 난해하거나 처음 접하는 고언어와 지루함이다.
이를 반영하여 젊은 감각의 학자들의 시각으로 요즘 시대의 감각에 맞춰 번역 및 해설을 함께 수록하여 난해한 고전을 쉽고 재미있게 풀어낸 고전 시리즈가 나왔다 하여, 용감하게 한 번도 읽어보지 않은 삼국유사 읽기에 도전했다.
책을 처음 받아들었을 때 그 두께와 표지의 단조로움에 약간 실망했다. ㅠㅠ
‘역시 고전은 표지와 두께부터 부담을 주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번역과 해설을 한 서철원씨는 이 책의 첫머리에서 삼국유사의 제목과 그 뜻을 소개하면서 부담 가질 필요 없다고 단단히 일러둔다. 삼국유사는 말 그대로 ‘유사’, 즉 <삼국사기>를 쓰면서 ‘빠뜨린 일, 남겨진 일, 버려진 일’이기에 뚜렷한 목적을 지니고 읽을 필요 없이, 아무 곳이나 펼쳐 읽고 이해가 되지 않으면 그런대로 다른 곳을 읽더라도 무방하다고 말한다.
“목적 없는 자유로운 읽기야말로 빠뜨린, 남겨둔, 버려진 일을 부담 없이 대할 수 있는 자세일 것이다. -12쪽”
삼국유사를 정식(?)으로 처음 접하는 입장에서는 무척 위안이 된다.
원래 삼국유사의 체제는 왕력편, 기이편, 그 밖의 것들을 모은 나머지 이렇게 셋으로 나누지만, 이 책은 크게 기이편(상)(하)편과 불교적인 내용인 흥법편, 탑상편, 의해편, 신주편, 감통편, 피은편, 효선편 등 전체 아홉 편으로 구성하였다.
<목차>
기이편은 임금과 관련된 이야기인 ‘기’와 비현실적 존재를 다룬 ‘이’가 붙어 현실과 환상의 존재가 모두 나온다.
읽다 보면, 우리가 익히 들어왔던 건국 신화나 옛날이야기의 모티브를 많이 찾을 수 있어 제일 재미있었던 부분이다. 기이편은 시대별, 국가별, 임금별로 꾸며져 있어 쭉 읽다 보면, 부담 없이 책장이 넘어간다.
고조선 단군왕검의 곰과 호랑이 신화나 알에서 나온 삼국의 왕의 신화 등이 나온다.
여기서는 성씨나 호칭의 유래에 대해서도 나오는데, 신라 시조 박혁거세 왕의 신화에서 박 모양의 알에서 태어나 성을 ‘박’이라 하였고, 석탈해의 ‘석’ 씨는 오래전(옛 ‘석’) 탈해가 호공이라는 사람의 집을 꾀를 내어 빼앗아 ‘석’ 씨 성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흥미롭다. 한국인의 많은 성씨 ‘김’ 씨 또한 황금 상자에서 사내아이 알지가 났는데, 여기서 금을 뜻하는 ‘김’이 붙여져 (경주) 김씨 성의 시조 김알지로 불린다. 또한 신라의 왕을 지칭하는 용어 중 ‘이사금’이라는 칭호도 있는데, 이는 이빨 자국(잇금)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진한의 여섯 촌에서 촌장들이 모여 왕을 뽑을 때 떡을 씹어 이빨 자국을 세었다고 하여 여기에서 잇금(이사금)이 유래하여 지금의 ‘임금’으로 불린다고 한다.
그리고 수많은 임금의 사후 모습도 소개된다. 고조선의 시조인 단군왕검은 1,908세에 산신령이 되었고, 신라의 시조 혁거세 왕은 승천한 후 7일 뒤 몸이 나뉘어 땅에 떨어졌는데, 이때 머리와 사지를 각각 다섯 릉으로 만들어서 ‘오릉’이라 한다. 탈해왕은 토함산의 산신령이 되었고, 문무왕은 동해의 용이 되었다.
읽다 보면 꿈, 괴이한 귀신과 동물, 신통한 저 세상 물건과 신묘한 일, 점괘 등이 나온다.
그중 선덕여왕의 3가지 예언, 만파식적, 처용 이야기는 한 번쯤은 들어봤을 매우 유명한 이야기이다. 처용의 아내는 전염병 귀신도 사랑할 정도의 미모를 지녔다. 전염병의 신은 사람으로 둔갑해 밤에 처용의 집에 가 그 아내와 동침한다. 귀가하던 처용은 그 광경을 보더니, 노래하고 춤추며 물러난다. 그 유명한 처용가가 소개된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의 원조 격인 경문왕 이야기도 재미있다. 그리고 거북이 등에 새겨진 백제의 멸망을 예언한 글귀도 나오는데, 이는 ‘백제는 보름달, 신라는 초승달’이라는 예언이다. 가득 차 곧 기울어지는 백제의 운명을 예언한다.
중간중간 다양한 고대의 노래도 요즘 언어로 바꾸어 소개하고 있다.
너무나 아름다워 신들에게 잡혀간 수로부인을 내놓으라는 노래 <해가>, 소 치던 노인이 수로 부인에게 철쭉꽃을 꺾어 바치며 불렀던 <헌화가>를 요즘의 말로 쉽게 번역해 다시 들려준다.
비단을 짜 가사를 무늬로 새겨 당나라의 임금을 기쁘게 한 진덕여왕의 <태평가>를 읽어보면, ‘그 당시 칭송은 이렇게 하였구나’하고 가사를 눈여겨 여러 번 보게 된다.
<태평가>
당나라가 세워지니
황제의 뜻 높고 높아
전쟁이 그치고 평화가 열려
문치를 닦아 옛 임금 이으사
하늘과 통하니 자연도 잘 따르며
만물을 다스려 깊은 덕 품으리니
깊이 어진 마음 해와 달을 짝하고
편안한 운수 요순시절보다 더하리라.
깃발은 어찌 그리 빛나게 펄럭이며
징이며 북은 또 어찌 굉장하던지!
말 안 듣는 변두리 오랑캐들쯤은
엎어지고 천벌 받으리라.
중화의 풍속 온 누리에 퍼져
밀거나 가깝거나 앞다투어 받아들이고
황제의 총명이 1년 내내 어우러져
해와 달과 다섯 별도 만방을 다 비추리.
산신령님께서 보필할 재상을 태어나게 하고
황제께서 그런 충신을 잘 임명하사
5제 3황 이래로 한결같은 덕 이루어져
우리 당나라 황실을 밝히시리라. 88-89쪽
3편 흥법, 불교의 전래부터 9편 효선, 효와 선행의 실천까지는 주로 삼국 시대 불교의 전래와 사찰과 탑의 유래, 승려의 일화와 가르침을 담았다. 그 유명한 이차돈의 순교와 그의 머리가 날아가 떨어진 곳에 지어진 백률사, 우리나라의 최초 다문화 가족인 금관가야 시조 수로왕의 부인이 인도에서부터 싣고 온 호계사의 파사석탑도 소개한다.
그리고 승려의 일화에서는 후대 많은 이들의 문학적, 예술적 영감을 준 ‘조신의 꿈’ 이야기도 나온다. 신라의 승려 조신이 짝사랑한 여인과 꿈에서 혼인하여 일생을 함께 보내다 굶주림과 병마에 못 이겨 헤어지는 장면에서 내뱉는 여인의 말과 이에 크게 기뻐하는 조신의 모습이 매우 현실적이라 씁쓸하기도 하다.
“... 집집마다 구걸하기 산더미처럼 부끄럽고, 춥고 배고프다는 아이들도 보살피지 못하네요. 그러니 부부의 정이 있을 여유가 어디 있겠어요? 청춘의 얼굴은 풀섶에 이슬처럼 허무하고, 부부로 살잔 약속도 바람 앞에 버들처럼 연약하군요. 당신은 제 탓에 되는 일이 없고, 저는 당신 탓에 걱정만 늡니다. 생각해 보면 옛날 기뻤던 일들이 재앙의 시작이었어요. 당신과 내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다 모여 굶주리며 살기보다는, 차라리 짝을 읽고 그리워하는 게 낫겠지요?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게 인정에는 못 할 일이지요. 그러나 가고 멈추는 게 사람 마음대로 안 되고, 만남과 이별도 팔자대로니까요. 이제 헤어집시다. 275-277쪽”
비록 꿈이지만 인간사의 욕망과 번거로움, 고뇌가 잘 녹여져 있다.
이렇게 현실과 환상이 뒤섞여 이어가는 삼국유사의 이야기는 옛날 할머니 무릎을 베고 전해 듣던 옛이야기들이 떠올라 따뜻한 고전의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순서를 크게 따지지 않고, 옛날 고시대의 사람들과 성현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빠져 읽다 보면 어느새 두꺼운 책도 뚝딱 그 끝을 드러낸다. 번거로운 고언어의 해석으로 그 재미에 빠져들기 어려웠던 기존의 삼국유사에서 벗어나 쉽게 읽히도록 재탄생시킨 아르떼의 클래식 아고라 시리즈의 <삼국유사>를 읽고 나니 고전의 새 시대를 열겠다는 출판사의 포부가 허튼소리가 아님을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