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가 예술의 도시라는 명성을 누리는 것은 이처럼 기존의 관습과 관성을 일상적으로 뛰어넘고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파리에서 깨닫게 되는 것은 자유의 반대는 구속이 아니라 타성(惰性)이라는 사실 입니다. 타성은 그것이 억압이나 구속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 그것은 견고한 무쇠 방입니다. 새로운 사고와 새로운 감성이 갇혀 있는 상태입니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예술이 추구해야할 목적이나 예술이 수행하는 기능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개인과 사회가 가지고 있는 잠재적 에너지를 해방의 역할에 주목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관용과 다양성은 그런 점에서 예술의 전제이며 예술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해방이 어떠한 예술 양식을 만들어 내고 얼마만한 성취를 이룩하였느냐 하는 평가는 그 다음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

인간을 예술화하고 사회를 예술화 하는 미래적 과제는 무엇보다 먼저 해방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무한한 잠재력을 진부한 틀에서 해방하고 완고한 가치로부터 해방하는 일입니다.

                                                            -신영복, <더불어 숲>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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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04-09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덕에 요새 <더불어 숲>을 발췌해서 매일 조금씩 읽고 있어요.
홍세화의 똘레랑스...같이 생각해 봤었던 부분이죠.
"자유의 반대는 구속이 아니라 타성이다"라는 부분을 읽었을 때 그 앗차!하던 느낌이라니...

stella.K 2004-04-09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동감입니다.^^

waho 2004-04-29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영복님 글 너무 좋아여...
 

...<쉰들러 리스트> 영화는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었습니다. 점령군 사령관으로부터 범랑 냄비 생산 공장인 레코르드(Rekord)를 불하 받은 쉰들러가 이 공장에 유대인을 고용함으로써 유대 인 수천 명을 아우슈비츠에서 구해낸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고용해주는 댓가로 뒷돈을 받은 그의 '장사'였다는 것입니다. 이곳에서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또 한번 충격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이 유대인이었던 스필버그 감독이 쉰들러의 정체를 몰랐을 리 없으면서도 그의 이야기를 아름답게 극화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아우슈비츠의 비극을 더욱 처절하게 조명하기 위한 극적 구성일수도 있으며, 최후의 위로를 남겨두려는 그의 고뇌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듣는 쉰들러의 '상혼(商魂)'은 다시 한 번 우리를 좌절하게 합니다. 진실이 아닌 위로는 결국 또 하나의 절망을 안겨줄 뿐입니다.

                                                                       -신영복, <더불어 숲>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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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4-04-03 2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오래 전 이 영화를 보았다. 특히 담배를 한손에 들고 다리를 꼬고 앉아 은은하고도 고뇌에 찬, 리암 니슨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그냥 보고 있기가 괴로웠던 영화 <쉰들러 리스트>가 사실과 다르다니...우린 이런 전기 영화를 어디까지 신뢰해야 할까?

비로그인 2004-04-03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뒷통수 맞은 느낌이었죠....
우리에게 "각인"이라는 용어로 친숙한 로렌츠...자연을 그리고 동물을 사랑했던 아름다운 인간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는 바로 나치의 인종 차별 정책에 생물학적 (얼토당토 않은)이론의 토대를 제공했던 몹쓸 인간이었다죠....갑자기 생각 나기에 객쩍은 몇 마디 남겨 놓고 갑니다.

stella.K 2004-04-04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쉰들러도 쉰들러지만, 그것을 영화화 할 생각을 했던 스필버그도 좀 그렇더군요.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신영복 교수 나름으로 그를 어떻게든 이해하고는 했다지만, 역시 저에겐 스필버그 감독은 유명한 감독일지는 몰라도 훌륭한 감독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피아노는 우리에게 반음(半音)의 의미를 가르칩니다. 반(半)은 절반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반(伴)을 의미합니다. 동반을 의미합니다. 모든 관계의 비결은 바로 이 반(半)과 반(伴)의 여백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절반의 환희'는 절반의 비탄과 같은 것이며, '절반의 희망'은 절반의 절망과 같은 것이며, '절반의 승리'는 절반의 패배와 다름없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절반의 경계에서 스스로를 절제할 수만 있다면 설령 그것이 희망과 절망, 승리와 패배라는 대적의 언어라 하더라도 얼마든지 동반의 자리를 얻을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신영복, <더불어 숲>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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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4-04-02 1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반의 자리를 얻을수 있으리라는 의미...참 어려운 의미인것 같습니다.
저도 가끔 "삶은 선택의 경계선을 얼마나 현명하게 걸어가는냐의 문제다" 라고 떠들곤 했는데, 일맥상통하는것 같기도 하고...
참, 퍼갑니다.

stella.K 2004-04-02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 구절을 읽으면서 거울 저쪽의 세계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중학교를 갓입학했을 때 명찰이 미처 다 만들어지지 않아서 임시 명찰을 달고 다녀야 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두꺼운 도화지를 조그맣게 오려 제 이름 석자를 써서 가슴에 대고 거울을 비춰봤는데 왠걸 글자가 거꾸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어떻게 해야하나 고민 끝에 거꾸로 써 보았더니 거울에선 재대로 비췄습니다. 그렇다면 이대로 달고 학교를 가야하나 생각해 봤는데 결론은 그렇게 하지 않았죠. 만약 그렇게 하고 학교에 갔더라면 웃음거리가 되었을것입니다.
하지만 전 지금도 때론 거울 저쪽에서의 시각이 더 옳은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엉뚱하죠.^^
 

로마는 정복 전쟁이 정지될 때 무너지기 시작하여, 로마 시민이 우민화 될 때 로마는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정확하게는 로마가 로마 인의 노력으로 지탱할 수 있는 크기를 넘어섰을 때, 그때부터 로마는 무너지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아야합니다. 콜로세움은 이 모든 것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상징탑이었습니다.

                                                  ...

로마제국은 과연 과거의 고대 제국일 뿐인가. 그것이 전쟁이든, 상품이든, 자본이든 정복이 정지되면 번영이 종말을 고하는 오늘날의 제국은 없는가. 우리들은 진정 로마를 동경하고 있지는 않는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물어 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잠재우는 거대한 콜로세움은 없는가.

                                                             -신영복, <더불어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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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04-01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부쩍 서재 이곳 저곳에서 신영복의 글을 접하게 되네요. 이 김에 <더불어 숲>이나 다시 한 번 들춰봐야 겠단 생각이 듭니다! ^^
"우리에게는 우리를 잠재우는 거대한 콜로세움은 없는가.".......

stella.K 2004-04-01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정말요? 이 책 읽으면 읽을수록 정말 잘쓴 미문이란 생각이 들어요! 감탄하며 읽고 있습니다.^^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만들어 내려는 미지의 작업이다. 따라서 인식의 혁명이 먼저 요구된다.

                                                            -신영복, <더불어 숲>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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