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UFO! 사랑해요!

도시가 타락하는 것은 달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라고 나는 종종 생각하곤 합니다.

어찌하여 달은 지구 가까이에서, 저토록 슬프고 아름다운 얼굴로 지구를 바라보게 된 것일까요. 달의 기원을 몽상하는 일은 세속의 일상을 가로질러 나에게 우주먼지라는 말을 떠오르게 하고 우주거품이라든지, 은하, 블랙홀이라는 말들을 떠오르게 하지요. 그리고 묻게 됩니다. 나는 언제부터 나였을까, 라고.

달은 우리 은하가 만들어질 때 어떤 연유로 지구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된 이 별의 일부였는지도 모릅니다. 지구와 한 몸이었던 달 그래서 달은 멀리 가지 못하고 허락된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지구를 그리워하며 머물고 있는 것인지도. 그리움, 그 안타까운 일렁임이 저토록 고교한 빛의 너울로 지구의 바닷물을 끌어당기고 밤마다 그 물살 속에 달빛의 아이들을 산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여, 달이 가장 부푸는 만월에 일어나는 월식은, 지구와 한 몸이었던 달이 자신의 몸으로 돌아오고자 염원하는 신성한 혼례인지도 모릅니다. 지구의 몸 속으로 들어오는 달. 그 혼례의 밤이 지구의 그림자 속에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금 비껴가야 하는 슬픈 숙명을 지닌 것이라 할지라도.

혹은, 우주를 유랑하는 떠돌이별이었던 달이 우연히 지구 옆을 지나다가 한송이 푸른 꽃인 지구에 매혹되어 영영 지구 곁을 서성거리게 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서성거림. 우주를 떠돌며 그가 알게 된 다른 모든 은하의 별들에 구전되는 아름다운 노래들을 밤마다 나지막이 불러주면서, 이 푸른 별이 자신의 노래를 들으며 날마다 아름다워지기를 꿈꾸면서, 단지 서성거리면서... ...혹은, 우연히 지나쳐 흐르던 달의 노래를 사모하여 지구가 달을 보내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달은 또다른 미지의 은하를 꿈꾸고 지구는 창백하게 떨리는 달의 속눈썹을 단 한번 쓰다듬어줄 수 있기를 꿈꾸고... ...그렇게 두 별의 아득히 비껴선 그리움 때문에 달빛이 저토록 몽롱한 슬픔의 빛을 띠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더불어 달이 뜨지 않는 지구의 밤이 그토록 적막한 것인지도. 

어쨌거나 달은, 나라는 존재가 지구별 위의 미미하기 짝이 없는 어떤 공간에 부러져 '삶'이라는 이름의 어떤 호흡을 지속하고 있는 존재임을 자각하게 하는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환영입니다.  '우주'라는 헤아릴 수 없는 거대한 심연 속의 나의 목숨이란 우주의 목숨에 비하면 미미하기 짝이 없는 것이며 나를 받아안고 있는 지구의 목숨 또한 우주의 목숨에 비한다면 미미하기 짝이 없는 존재일 것입니다. 수백억을 헤아리는 은하들 중 자그마하고 평범한 한 은하에 불과한 태양계 속의 작은 별 지구와 달. 바로 이곳에서 내가 얻고자 하는, 우리의 삶이 얻고자 하는 세속의 것들이 부디 깨끗한 욕망으로 빚어지는 맑은 물 한사발 얻을 수 있기를.

말갛고 슬픈 빛으로 조용히 지구를 바라보고 있는 천공의 눈. 저 눈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인간의 세속이 무한한 연민으로 일렁거리게 됩니다. 현란한 도시의 불빛들이 내달려간 욕망의 피뢰침 끝에서 외줄을 타는 슬픈 광대들, 나와 우리가 어디를 향해 삶의 물고를 터야 할 것인지를 되묻게 됩니다. 달은 인간을 향해 쉬이 노여워하지 않습니다. 초승에서 보름으로 다시 그믐으로, 그리하여 달이 뜨지 않는 죽음의 시간을 지나 부활하곤 하는 달은, 자신의 숨결에 성심을 다하며 지구별 위의 인간 역시 가장 낮고 겸허한 자세로 스스로를 사랑할 것을, 이별을 사랑할 것을 묵언의 기도로 깨닫게 하고자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달의 죽음과 부활. 우리가 일상적인 것이라 느끼는 달의 죽음과 부활이 사실은 달의 의지가 이룬 매일의 기적이라는 것을, 내게 주어진 하루분의 생이 죽음을 껴안고 흘러가는 시계추 위에서 아직은 삶 쪽으로 기울어 있는 기적과도 같은 시간이라느 것을.

달빛에 공명하는 시간을 잃어버리면서 인간의 도시는 타락해 갑니다. 우주의 노스탤지어를 잃어버리면서 인간의 존재방식은 교만해집니다. 달의 노래를 들을 수 없는, 신성한 원시(原始)를 상실하면서 인간의 꿈은 무지해집니다. 저 달에서 보면 지구 역시 초승에서 보름으로 다시 그믐으로, 탄생과 죽음을 거듭하고 있겠지요. 매일매일의 기적의 힘으로.

                                                         -김선우, <물밑에 달이 열릴 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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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져 2004-10-14 0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아하는 시인의 글을 여기서 만나니 또 새롭습니다.
오랜만에 저 산문집이나 들춰봐야겠어요 ^^

stella.K 2004-10-14 0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사실은 님 서재에서 발견한 책이었죠. 요즘 읽고 있는데 문장이 아주 뛰어나더군요. 어떻게하면 이렇게 쓸 수 있을지...물론 문장을 흉내낼 건 아니지만.^^
 

●가는 년이 물 길어다 놓고 갈까●

시집살이가 싫어서 친정으로 돌아가는 여자가
물을 길어다 놓고 갈만큼 시집에 대해 정이 남아 있지 않다는 뜻


●간다 간다 하면서 아이 셋 낳고 간다●

한 번 결정한 일이라도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뜻


●갑작사랑 영이별●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잃는다는 뜻


●같은 값이면 과붓집 머슴살이●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


●겉보리 서말만 있으면 처가살이 하랴●

입에 풀칠만 할 수 있어도 처가살이는 하지 않는다는 말

 

●겉보리를 껍질채 먹은들 시앗이야 한 집에 살랴●

시앗을 데리고 살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뜻

 

●계집 둘 가진 놈의 창자는 호랑이도 안 먹는다 ●

계집 둘 가진 놈의 속이 얼마나 나쁘면 호랑이도 먹지 않으랴 ?

 

●계집 때린 날 장모 온다●

공교롭게도 일이 잘 안 풀린다는 듯

 

●계집 바뀐 건 모르면서 젖가락 바뀐 건 아나●

자기 부인에게 그만큼 관심이 없다는 뜻

 

●고와도 내 님 미워도 내 님●

한 번 배우자로 결정한 사람은 미우나 고우나 자기 사람이라는 뜻

 

●고운 사람 미운 데 없고 미운 사람 고운 데 없다●
한 번 곱게 본 사람은 끝까지 곱게 보이고,
한 번 밉게 본 사람은 끝까지 밉게 보인다는 뜻

 

●고자 처갓집 다니기●

고자가 처갓집이 있을리가 만무
없는 일을 두고 하는 말


●고쟁이를 열두 벌 입어도 보일 것은 다 보인다●

아무리 가리려고 해도 드러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말

 

●고추가 커야만 매울까●

크기나 외형에 상관 없다는 말
남녀관계에 있어서는 물건이 크고 작은 것이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뜻

 

●곯아도 젓국이 좋고 늙어도 영감이 좋다 ●

나이가 들수록 자기 서방이 최고라는 말

 

●과부 사정은 홀아비가 안다●

'동병상련'이라 했던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이 그 사정을 잘 안다는 말

 

●과부 뭐 줄듯 말듯 한다●

될 듯 될 듯 하면서도 잘 이루어지지 않는 일을 두고 하는 말

 

●과부는 은이 서 말이고 홀아비는 이가 서 말이다 ●

여자는 혼자 살아도 남자는 혼자 살기 어렵다는 말

 

●과붓집 머슴은 왕방울로 행세한다●

과부집 머슴은 남자라는 것만으로도 행세할 수 있다는데

 

●나가는 년이 세간 사랴●

이미 마음이 떠난 상태에서는 아무런 일도 하고자 하지 않는다는 말

 

●나이 차 미운 계집 없다●

남자가 나이가 들수록 여자의 손길을 필요로 하게 된다
그러니 나이 들수록 아내를 미워하지 못한다는 말

 

●남편은 두레박 아내는 항아리●

남편의 마음이 바가지 크기라면 아내의 마음은 항아리크기라는 말
가정에서 아내의 도량이 넓어야 한다는 말

 

●남편을 잘못 만나도 당대 원수 아내를 잘못 만나도 당대 원수●

부부간의 불화는 심각한 문제이므로
배우자를 고를 땐 신중히 하라는 말

 

●내 님 보고 남의 님 보면 심화 난다●

남의 떡이 커 보인다
내 님 이쁜 건 잘 안 보여도 남의 님 이쁜 것은 잘 보인다는 말

 

●내외간 싸움은 칼로 물 베기●

부부 싸움은 지나고 보면 표시도 없다는 말

 

●누이 믿고 장가 안 간다●

이루어지지도 않을 사랑 때문에 결혼도 못하는 일을 두고 하는 말

 

●두더지 마누라는 두더지가 제일이다●

자기 남편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해 보인다는 말

 

●뜨물에도 아이 생긴다●

남녀는 가까이하면 아이가 생기게 된다는 말
(뜨물 : 정액을 비유함)

 

●마누라 작은 것하고 집 작은 것은 산다●

마누라는 작아도 사는 데는 지장이 없다는 말

 

●마누라가 예쁘면 처갓집 말뚝 보고도 절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관계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좋게 보인다는 말

 

●마누라가 죽으면 변소 가서 웃는다●

새 장가를 들게 되었으니, 사람들 앞에서는 웃을 수 없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기뻐한다는 말

 

●뭣 주고 뺨 맞는다●

모든 걸 다 주고도 푸대접 받는다는 말

 

●바늘 가는 데 실 간다●

부부는 일심동체이니 언제나 함께 다닌다는 뜻

 

●부부는 돌아 누우면 남●

형제는 떨어져도 핏줄이지만,
부부는 돌아서면 전혀 관계가 없는 남이라는 말

 

●뽕도 따고 임도 보고●

일거양득

 

●사내란 계집 앞에서는 나이를 타지 않는다●

나이가 적으나 많으나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는
소년이 될 수 밖에 없다는 말

 

●새벽  꼴리는 건 애비도 못 막는다 ●

새벽에 그만큼 정기가 왕성하다는 말

 

●새벽 호랑이가 중을 가리나 ●

호랑이는 영물이라 사람을 알아본다는데 평소에 살생을 하지 않는 중은 봐줬던 모양

그러나 새벽에는 배도 고프고 원기가 왕성하여 중이라 해도
가리지 않고 잡아먹는다는 말

 

●소더러 한 말은 안나도 처더러 한 말은 난다●

마누라한테는 입 조심하라는 말로 여자들의 입이 싸다는것을 비유

 

●술에 계집은 바늘에 실이다●

바늘 가는 데 실 가듯이 술을 마시는 곳에는 여자가 있게 마련이라는 뜻

 

●술에 색은 범 가는 데 바람이다●

범이 지나가면 자연히 바람이 휙 하고 이는 법
술과 여자가 그만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말

 

●씨앗 싸움은 남편도 못 말린다●

한 남자를 두고 벌이는 여자들의 투기는 속수무책이라는 말

 

●씨앗 싸움에는 부처도 돌아 앉는다●

여자의 투기가 그만큼 심하다는 뜻

 

●씨 도둑질은 못한다●

아이는 부모를 닮게 마련이라는 말

 

●아비 죽인 원수는 잊어도 여편네 죽인 원수는 못 잊는다 ●

그만큼 눈이 뒤집힌다는 말

 

●여우는 데리고 살아도 곰은 못 데리고 산다 ●

여우같은 아내가 곰처럼 미련한 아내보다는 낫다는 말

 

●여자 말은 잘 들으면 패가하고 안 들으면 망신한다 ●

남자란 여자의 말에 좌우되지 말고, 자기 주관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말

 

●오뉴월 풋고추에 가을 피조개●

아주 잘 어울리는 한쌍
힘이 넘치는 오뉴월 풋고추와 물 오른 가을 피조개

 

●올바람은 잡아도 늦바람은 못 잡는다●

나이 먹을 수록 남편 단속, 아내 단속 잘 하라는 말

 

●음양에는 원래 천벌이 없는 법이다●

남녀가 눈이 맞아서 사건을 이루는 것은 하늘의 이치라는 뜻

 

●이 도망 저 도망 다 해고 팔자 도망은 못 한다●

다른 것은 다 도망칠 수 있을지 몰라도 팔자는 못 고친다는 말

 

●인연 없는 부부는 원수보다 더하다●

원수는 피하면 어느 정도 해결되지만, 부부간의 원수는 해결할 방법이 없다

 

●재수 없는 과부는 봉놋방에 들어도 고자 옆에 눕는다●

팔자타령

 

●재수 좋은 과부는 앉아도 요강 꼭지에 주저앉는다●

운이 좋다는 말

 

●절구통에 치마를 둘렀어도 술은 여자가 따라야 제 맛 ●

술과 여자는 항상 같이 있어야 한다는 말

 

●제 마음에 괴어야 궁합이다●

뭐니뭐니 해도 자기 마음에 드는 것이 가장 좋은 궁합이라는 뜻

 

●조강지처 버리는 놈 치고 잘 되는 법 없다●

자기 아내를 아낄 줄 알아야 다른 일도 잘 한다는 말

 

●종년은 누운 소 타기●

주인이 여종을 건드리기가 그만큼 쉽다는 말

 

●중매는 잘 하면 술이 석 잔, 못하면 뺨이 석 대●

중매서기가 어렵다는 말

 

●피조개 보고 나서 애매한 양물 친다●

쓸데없는 짓을 한다는 말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

그럴만한 구실이 있어야 일이 일어난다는 말

 

●한 구멍 동서간●

동서간이란 본디 여자 형제의 남편들을 일컫는 말인데,
이 말은 한 여자와 두 남자가 관계한다는 말

 

●형제는 수족과 같고 여편네는 의복과 같다●

형제는 한 핏줄을 타고 났으니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관계지만,
아내는 얼마든지 갈아치울 수 있는 존재라는 말

 

●혼인대사 급대사 ●

혼사 말이 나오면 특별한 경우가 없는 한 시간을 끌 필요가 없다는 말
시간이 흐르면 자꾸 흠이 발생하여 이루어지기 힘들다는 말

 

●홀아비 부자 없고 과부 가난뱅이 없다 ●

대개 여자는 혼자 살면 알뜰히 돈을 모으지만,
남자는 혼자 살면 헤프게 쓰기 때문에 돈을 모으질 못한다

 

●효도 중에 으뜸은 웃방 아기●

젊은 처녀를 품에 안으면 회춘한다는 속설에 따라
늙은 아버지를 회춘하게 하는 것이 가장 큰 효도라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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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urblue > 당신들이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 않는다고 나는 들었다

 

당신들이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 않는다고 나는 들었다

 

당신들이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 않는다고 나는 들었다.

추측컨대, 당신들은 백만장자인 모양이다.

당신들의 미래는 보장되어 있다. ─ 미래가

당신들 앞에 환히 보인다. 당신들의 부모는

당신들의 발이 돌멩이에 부딪히지 않도록

미리 준비해 놓았다. 그러니 당신은

아무것도 배우지 않아도 된다. 당신은 지금 그대로

계속해서 살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시대가 불안하여, 내가 들은 대로,

어려운 일이 생긴다 하더라도,

당신에게는 만사가 잘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 지를

정확하게 말해 줄 당신의 안내자들이 있다.

어떤 시대나 타당한 진리와

언제나 도움이 되는 처방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그들은 모든 요령을 수집해 놓았을 것이다.

 

당신을 위하여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는 한

당신은 손가락 하나 움직일 필요가 없다.

그러나 만일에 사정이 달라진다면

물론 당신도 배워야만 할 것이다.

 

                                                                                              ─  베르톨트 브레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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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밥헬퍼 > 얼음과 물의 경계에서 만난 나희덕과 기형도 시인

                               얼음과 물의 경계

                                                                 나 희 덕


  메멘트모리. 죽음을 기억하십시오. 어느 수도원에선가는 이 말로 인사말을 대신한다고 한다.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안녕을 기원하는 세간의 풍속과는 달리 부재의 확인을 통해 존재를 성찰하는 그들이 부럽기도 했다. 그러나 세간의 인사에 길들어 살아가는 나에게도 누군가 그런 인사를 건네는 날이 이따금 있기는 하다. 매년 삼월 첫째 주말, 기형도 시인의 묘소에 갈 때마다 내 안에 살아있는 그가 이렇게 인사를 건네는 것이다. 메멘트모리.

  나는 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 보지는 못했다. 나는 2학년 때 연세문학회에 들어갔는데, 그는 이미 졸업을 한 뒤라 술자리에서 몇 번 마주쳤을 뿐이다. 그리고 내가 신춘문예에 당선된 1989년에 그는 중앙일보 편집부 기자였지만, 그 후 석 달 만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때 중앙일보 복도에서 자판기 커피를 뽑아주며 창밖의 희부연 풍경을 바라보던 모습이 내가 가장 가까이 본 모습이 마지막 만남이었다. 조금씩 엇갈린 인연이었던 셈이다. 

  그런데도 십년 동안 그의 주기 때마다 묘소에 가는 것을 한번도 거르지 않았다는 사실이 지금 생각해보면 이상스럽기도 하다. 나는 그에 대해 추억할 무엇도 가지고 있지 못하며 그렇다고 내가 유별난 의리의 소유자인 것도 아니기에 말이다. 그것은 마치 신년을 맞이하며 해돋이를 보러 가는 것과 비슷하게, 봄이 오기 직전 어떤 죽음 하나를 만나러 가는 습관화된 의식 같은 것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나는 왠지 그가 죽고 나서야 비로소 그를 조금씩 알아가고 있는 것 같다.

  모든 죽음은 결국 살아 잇는 자에 의해 유추되고 해석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의 죽음은 해마다 조금씩 다른 표정을 내게 보여주었다. 그의 묘소에 가려면 늘 지나치는 저수지가 하나 있는데, 그 무렵이 되면 얼었던 물도 다 풀리고 나무마다 새싹이 돋아나곤 한다. 그런데 막상 그가 묻힌 산언덕에 이르면 왜 그리도 춥고 음산하던지 그의 죽음에 온통 살얼음이 박혀 있는 느낌이 들곤 했다.

  그의 시를 읽으면서도 시린 느낌은 마찬가지인데, 그것은 아마 그의 시에 유난히 많이 나오는 얼음과 눈(雪) 이미지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에게는 안개나 구름조차도 “두꺼운 공중의 종잇장”이나 “희고 딱딱한 액체”(「안개」)와 다름없었다.

  “밤에 깨어 있음, 방안에 물이 얼어 있음. 손(手)은 영하 1도”(「새벽이 오는 방법」)라고 했을 때, 나는 그가 살았던 방의 윗목, 아니 늘 윗목인 삶을 떠올린다. 거기서 그는 시린 손으로 ‘겨울 판화’를 새기듯 시를 써나갔으리라. “내 몸은 얼음으로 꽉 찬 모양이다”(「聖誕木」)중얼거리며 성냥을 그어대기도 하고, 눈길 위에 떨어진 서류봉투를 주우며 “나는 불행하다/이런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일생 몫의 경험을 다 했다. 진눈깨비”(「진눈깨비」)라고 탄식하기도 한다.

  그때 그의 내부를 가득 채우고 있는 얼음과 진눈깨비는 실은 그의 눈물이 응결된 것이다. 세상을 너무 축복하였기에 거꾸로 매달려 외로운 천형을 견디고 있는 고드름처럼, 부단히 “오르기 위하여 떨어지는”정신으로 말미암아 그는 오래도록 고통 받아야 했다. “나 또한 얼마만큼 오래 냉각된 꿈속을 뒤척여야 진실로 즐거운 액체가 되어 내 생을 적실 것인가”(「이 겨울의 어두운 창문」)노래하면서. 그는 녹아 흐르고 싶어 했으며, 그러기 위해 자신의 삶 속에 얼음처럼 박인 죽음의 그림자를 향해 힘겹게 불꽃을 피워 올렸다. 그러나 그가 지핀 불은 대체로 작은 성냥개비나 창백한 초 또는 램프에 붙여진 불이어서 “자고 일어나면 머리맡의 촛불은 이미 없어지고/하얗고 딱딱한 옷을 입은 빈 병만 우두커니 나를 쳐다”(「10월」)보는 것이었다.

  그러한 빈 병 또는 빈 방은 결국 그의 육체를 가두고 말았지만, 그의 시만은 오히려 결빙된 절망으로 빛나는 날을 가지게 되었고 수많은 영혼에게 깊은 흔적을 남겼다. 특히 그의 범상치 않은 죽음의 에피소드를 둘러싸고 진행되어온 신비화가 없지 않았다. 그로 인해 그의 시는 일정한 부가가치를 얻은 대신 문학으로서는 갇힌 부분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제 그의 죽음 자체가 던진 충격에서 벗어나기에 충분한 시간이 흘렀다. 시간이란 모든 대상을 빛바래게 하는 대신 적절한 거리를 베풀어줌으로써 오히려 새로운 발견을 가능케 한다.

  십년 만에 전집으로 새롭게 묶인 그의 시들을 다시 읽으면서 나는 얼음과 물의 경계에 대해 내내 생각했다. 이십대의 나에게 그의 시는 결코 녹을 것 같지 않은 단단한 얼음이었다면, 지금의 나에게는 간절히 녹고자 한 영혼, 이미 녹기 시작한 영혼의 일렁임 같은 게 만져진다. 이것이 세월을 거슬러 흘러갈 수 있는 시의 고유한 힘인지, 젊음의 팽팽한 긴장에서 어느 정도 놓여난 내 마음의 반영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삶과 죽음의 경계란 물과 얼음의 경계처럼 단호한 듯하지만 끊임없이 삼투하면서 새롭게 생겨나는 것이라 생각한다. 죽음을 기억하십시오. 이 인사가 마침내 일상이 될 때까지 우리는 언 물과 얼지 않은 물 사이에서 오래 출렁거려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를 기억하는 일이 더 이상 죽음의 성채를 쌓는 일이 아니라 삶으로 죽음을 녹여내는 일이 될 때, 그와 그의 시는 무연한 강물처럼 자유스러워 질 것이다. 그 역시 「잎․눈(雪)․ 바람 속에서」에서 이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나는 살아 있다. 해빙의 강과 얼음산 속을 오가며 살아 있다.”<나희덕, 반통의 물, 창작과 비평사, 1999>

........................................................


                             잎. 눈[雪]. 바람 속에서

                                                              기 형 도


나무가 서 있다. 자라는 나무가 서 있다. 나무가 혼자 서 있다. 조용한 나무가 혼자 서 있다. 아니다. 잎을 달고 서 있다. 나무가 바람을 기다린다. 자유롭게 춤추기를 기다린다. 나무가 우수수 웃을 채비를 한다. 천천히 피부를 닦는다. 노래를 부른다.


나는 살아 있다. 解氷의 江과 얼음山 속을 오가며 살아 있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은빛 바늘 꼽으며 분다. 기쁨에 겨워 나무는 목이 메인다. 갈증으로 병든 잎을 떨군다. 기쁨에 겨워 와그르르 웃는다. 나무가 웃는다. 자유에 겨워 혼자 춤춘다. 폭포처럼 웃는다. 이파리들이 물고기처럼 꼬리치며 떨어진다. 흰 배를 뒤집으며 헤엄친다. 바람이 빛깔 고운 웃음을 쓸어간다. 淸潔한 겨울이 서 있다.


겨울 숲 깊숙이 첫눈 뿌리며 하늘이 조용히 安心한다.

 

 

 

 

 

 

 


 

 

 

 

 

 

 

 

 

제임스 콜만, Country Roa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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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세상 최고의 고수가 되는 법

"손자병법"에서는 최고의 경지에 오른 ‘고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1. 여유.
- 그에게는 산처럼 움직이지 않는 무게가 있다. 아직 덜 익고 서투른 사람은 어수선하고 바쁘기 마련이다.
어떤 상황이든 완전히 이해하고 장악한 사람은 그 경륜과 기술만큼이나 무게와 힘이 있다.
어떤 어려운 상황이 닥쳐도 태산과 같이 움직이지 않는 신중함으로 대안을 찾아내고 위기를 겪어 낸다.

2. 무게.
- 그는 자신의 칼날을 함부로 남에게 드러내 보이지 않는다. 강태공은 “남과 다툴 때 번쩍거리는 칼을 쓴다면 훌륭한 장군은 아니다”라고 했다. 진정한 최고는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거나 뽐내지 않는다.

3. 겸손.
- 그는 사람들의 환호와 갈채에 연연하지 않는다. 자신의 갈 길은 자신이 직접 선택하는 소신과 자신감이 있다.
‘전쟁에서 이겼다고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칭찬한다면 최고 중의 최고는 아니다’라고 손자는 말한다.
자신이 정한 원칙과 소신은 타인의 칭찬이나 환호, 비판에도 흔들리지 않는 자신의 길을 걸을 줄 알아야 한다.

4. 비범.
- 손자는 진정 고수의 병법에는 일반인들의 상식적인 예측을 뛰어넘는 것이 있다고 말한다.
일반인들의 상식을 넘어서는 자신만의 안목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진리가 실제로는 매우 담백하고 소박한 곳에 있는 것처럼 고수가 되는 길도 역시 그러하다.

중국의 지식체계 혹은 사상을 살피다보면 몇 가지 상념들이 떠오른다. 하나는 실용주의, 중국의 지식인은 전통적으로 지식 그 자체를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지식을 위한 지식을 추구하지 않았을 뿐더러 , 직접 인간의 행복을 증진할 수 있는 지식의 경우 중국철학자들은 역시 그것을 행하여 인간의 행복을 증진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우리는 종종 동양의 철학을 공자왈 맹자왈하는 공리공론이나 일삼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 동양의 철학에서의 핵심은 시작도, 그 완성도 "실천"에 있다.
 
그러니 고수가 되는 길의 핵심도 결국엔 실천에 있겠지... 그러나 그게 어디 쉬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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