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무언가가 웃기는지 알고 싶다면 그것이 우리를웃게 만드는지 확인하면 된다. 어떤 그림이 아름다운지알고 싶다면 그림을 바라볼 때 우리 안에서 어떤 반응이 일어나는지 확인하면 된다. 웃음만큼 확실하지만 대부분은 좀 더 조용하고 주춤거리며 나오는 반응일 것이다.

계를 실감 나게 받아들인다는 걸 확인한다. 마을과 강그리고 강에 떠 있는 마을의 물그림자가 보인다. 다만모네의 세계에는 흔히 아는 햇빛 대신 색채만이 존재한다. 이 작은 우주의 훌륭한 조물주답게 모네는 햇빛을나타내는 색깔들을 펼쳐두었다. 펼치고, 흩뿌리고, 엄청나게 숙달된 실력으로 끝없이 반짝이는 모습을 캔버스에 고정해두었다. 오랫동안 보고 있어도 그림은 점차풍성해질 뿐 결코 끝나지 않는다.
모네는 시각으로는 길들일 수 없는 세상의 모습을 그렸고, 에머슨(랠프 월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종교적 독단이나 형식주의를 배척하고 인간 스스로를 신뢰하며 인간성을 존중하는 개인주의적 사상을 주장한 미국의 시인이자 사상가 옮긴이)은이를 "눈부심과 반짝임"이라고 표현했다. 이 그림의 물결 속에서 흔들리며 녹아내리는 수백만 개의 아롱진 반영들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옛 거장들의 상징주의적인 표현법에는 좀처럼 들어맞지 않는 유형의 미학이고,

정돈된 상태를 추구하는 우리의 두뇌가 일반적으로 허용하는 것보다는 더 혼돈스럽고 타오르는 듯한 아름다움이다. 대개 우리는 유용한 정보를 얻기 위해 위협적이고 산만하게 쏟아져 들어오는 주위 자극들은 무디게만들거나 아예 무시한다. 모네의 그림은 우리가 이해하는 모든 것의 입자 하나하나가 의미를 갖는 드문 순간들 중 하나를 떠올리게 한다. 산들바람이 중요해지고,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중요해진다. 아이가 옹알거리는 소리가 중요해지고, 그렇게 그 순간의 완전함, 심지어 거룩함까지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그런 경험을 할 때면 가슴에 가냘프지만 확실한 떨림을 느낀다. 이와 비슷한 느낌이 모네가 붓을 집어 드는영감이 되었으리라 상상한다. 그리고 지금 이 그림을통해 모네가 느꼈을 전율이 내게 전해져온다.

있다. 초상화도 아니고 스냅사진도 아니다. 습작이라고해야 할 것 같은 작품들은 그녀를 더 자세히 보기 위한노력들이다. 조지아 오키프의 손, 발, 몸통, 가슴, 얼굴,
다시 얼굴 그리고 다시 얼굴. 그녀는 눈부시게 아름다웠지만 그것보다도 이 시리즈는 대체로 사람이 얼마나구체적이고도 독특하게 만들어졌는지, 우리가 태도와몸짓으로 얼마나 많은 의사소통을 하는지, 우리가 다른사람들에게 어떤 선, 색깔, 빛, 그림자로 보이는지를 생생하게 일깨워준다. 사진 속의 오키프는 털이 없는 영장류같기도 하고, 또 일순간 근엄한 여신 같기도 하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실체일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인류라는 생물종의 신비로움이 나에게 깊은 각인을 남긴다.
사진에서 눈을 돌려 전시실을 둘러보니 문득 웃음이터질 것 같다. 전 세계에서 모인 수십 명의 살아 숨쉬는 사람이 한 공간에 있는데 하나같이 벽에 걸린 무색의 움직임 없는 인물 사진들을 보느라 옆 사람에게는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현실의 사람들은 흔해 빠진 대상들로 간주되는 듯하다. 정말이지 아무 때나 볼 수 있는 대상 아닌가. 우리의 삶을 순식간에 지나쳐 영원히사라져버릴 낯선 이들에게 왜 구태여 관심을 쏟겠는가.
여기 있는 예술 작품으로서의 조지아 오키프는 우리에게는 없는 미덕을 갖고 있는 듯하다. 그녀는 멈춰 있다.
그녀는 영구적이다. 그 주변으로는 그녀의 성스러운 아름다움과(옛말에서 성스럽다 Sacred는 단어의 의미는 ‘분리되어 있는‘이었다) 지루하고 평범한 세속의 영역을 분리하는 액자가 둘러져 있다. 때때로 우리에게는 멈춰 서서 무언

가를 흠모할 명분이 필요하다. 예술 작품은 바로 그것을 허락한다.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 한 관람객이 미동도 하지 않는 조지아의 얼굴 사진을 사진으로 남기기 위해 카메라를 갖다 대고 있다. 목격하는 순간에는 이것이 초현실적인 일처럼 느껴지지만,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이해할 수 있다. 카메라 뒤의 남자는 그가 현실을 더 꽉움켜쥐고 있는 기분이 들 것이다. 손 틈새로 금세 빠져나가버릴 순간을 온전히 경험하는 건 어려운 일이니까.
우리는 소유, 이를테면 주머니에 넣어갈 수 있는 무언가를 원한다. 하지만 아름다운 것은 주머니에 들어가지않고, 우리가 보고 경험하는 것 중에서 아주 작은 부분만 소유할 수 있다면?
이런 생각에 이르자 갑자기 전시실 안의 낯선 사람들이 엄청나게 아름다워 보인다. 선한 얼굴, 매끄러운 걸음걸이, 감정의 높낮이, 생생한 표정들. 그들은 어머니

의 과거를 닮은 딸이고, 아들의 미래를 닮은 아버지다.
그들은 어리고, 늙고, 청춘이고, 시들어가고, 모든 면에서 실존한다. 나는 눈을 관찰 도구로 삼기 위해 부릅뜬다. 눈이 연필이고 마음은 공책이다. 이런 일에 그다지능숙하지 않다는 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뜻이다. 나는사람들이 입고 돌아다니는 옷과, 남자친구나 여자친구와 손을 잡거나 혹은 잡지 않는 몸짓에서, 머리를 다듬고, 면도를 하고, 내 눈을 마주하거나 피하고, 얼굴과자세에서 기쁨이나 조급함, 지루함이나 산만함을 보이는 방식들 속에서 의미를 찾는다. 그리고 내가 보는 대부분의 것에서 말로 표현할 수 있는 확실한 의미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저 이 장면에 깃든눈부심과 반짝임을 바라보며 기쁨을 만끽한다.

브뤼헐의 이 명작을 바라보며 나는 가끔 이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흔한 광경이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사람들은 주로 농사를 지었고 그들 중 대부분이 소작농이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평생 노동을 하고 궁핍한삶을 살아가면서 가끔 휴식을 취하고 다른 이들과 어울리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너무도 일상적이고 익숙한광경을 묘사하기 위해 피터르 브뤼헐은 일부러 노력을기울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광활하게 펼쳐진 세상의 맨 앞자리를 이 성스러운 오합지졸들에게 내주었다.
가끔 나는 어느 쪽이 더 눈부시고 놀라운 것인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위대한 그림을 닮은 삶일까, 아니면 삶을 닮은 위대한 그림일까.

외롭게 살기를 원치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들과의 소통에서 만들어지는 운율을 깨닫는 것은 내가 자라서 어떤 어른이 될 것인지를 깨닫는 것처럼 느껴진다. 내가삶에서 마주할 대부분의 커다란 도전들은 일상 속에서맞닥뜨리는 작은 도전들과 다르지 않다. 인내하기 위해노력하고, 친절하기 위해 노력하고, 다른 사람들의 특이한 점들을 즐기고 나의 특이한 점을 잘 활용하기 위해 노력하고, 관대하기 위해 노력하고, 상황이 좋지 않더라도 적어도 인간적이기 위해 노력하는 것.

양탄자를 유심히 들여다보다 보니 수만 개의 매듭과 실이 마치 현재와 과거, 현실의 엄청난 밀도를 은유적으로 나타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한때는 이 네 귀퉁이 너머로 펼쳐졌던 세상이 있었다는 걸 떠올린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디테일로 가득한, 모든 찬란하고 평범한 인간 드라마를 위한 무대가. 또한 내가 방금 이야기한 맘루크 역사의 밑그림이 엄청나게 빈약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나일강을 따라 수천 마일에 걸쳐 펼쳐진땅에 존재했던 무한히 복잡했을 수천 년의 역사를 나는고작 ‘이집트‘와 같은 작은 단어로 일컫는다. 양탄자를내려다보자니 초월적인 질문들에 추상적인 답을 구하려는 노력이 바보스럽게 느껴진다. 더 많이 탐구할수록더 많은 것을 보게 될 테고, 그럴수록 내가 본 것이 얼마나 적은지 깨닫게 될 것이다. 세상은 서로 섞이기를거부하는 세밀한 부분들로 가득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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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녀장의 시대
이슬아 지음 / 이야기장수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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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인듯 에세이인듯
에세이보다 픽션이 들어간 이야기
이슬아 작가의 글을 대부분 읽어서 소설은 어떤 느낌일까 궁금했는데 비슷한 느낌

"선생님은 먼저 선에 날생이 합쳐진 말이잖아요. 먼저 태어나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죠. 제가 좋아하는 작가가 이런 말을 했어요. ‘내가 살아보지 못한 어떤 삶을 먼저 살아가고 있는 사람‘은 모두 선생님이 될 수 있다고요."*

슬아는 문득 복희가 없는 미래를 생각한다. 복희를 그리워하며 멈춰 있을 자신의 모습이 꼭 기억나듯 그려진다. 이미 겪어본것처럼, 마치 오래전에 살아본 인생처럼 그 슬픔을 안다. 그는지금 이 시절을 꽉 쥐고 싶다. 그러나 현재는 언제나 손아귀에서쏙 빠져나가버린다.

이런 상상을 해보기로 한다. 하루 두 편씩 글을 쓰는데 딱 세사람에게만 보여줄 수 있다면 어떨까. 세 명의 독자가 식탁에 모여앉아 글을 읽는다. 피식거릴 수도 눈가가 촉촉해질 수도 아무런 반응이 없을 수도 있다. 읽기가 끝나면 독자는 식탁을 떠난다. 글쓴이는 혼자 남아 글을 치운다. 식탁 위에 놓였던 문장이언제까지 기억될까? 곧이어 다음 글이 차려져야 하고, 그런 노동이 하루에 두 번씩 꼬박꼬박 반복된다면 말이다.
그랬어도 슬아는 계속 작가일 수 있었을까? 허무함을 견디며반복할 수 있었을까? 설거지를 끝낸 개수대처럼 깨끗하게 비워진 문서를 마주하고도 매번 새 이야기를 쓸 힘이 차올랐을까?
오직 서너 사람을 위해서 정말로 그럴 수 있었을까? 모르는 일이다. 확실한 건 복희가 사십 년째 해온 일이 그와 비슷한 노동이라는 것이다.
새삼스레 슬아는 미안하다고 느낀다. 하지만 미안함보다 민망함이 앞선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은 때때로 너무 어렵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도덕경』을 펼쳐놓고 이렇게 말했다.
知者不言 言者不知
지자불언 언자부지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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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으로부터,
정세랑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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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이 한 사람의 이름일 줄은 제목만 보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지금과 얼마나 달랐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 시절의 여성 예술가의 가계로부터 지금을 사는 우리가 갖고 살아야 할 무언가를 이야기 해준다. 얼마나 많은 경험과 관찰로부터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는 씌어지는가에 대해 생각하고 감탄했다.
삶에 인사이트를 발견하는 소설은 말그대로 인문학의 꽃이었음을 깨닫는다.
배우고 익히는 것을 좋아하는 점에서 난정의 이야기가 공감되었고, 사랑은 단단한 돌이 아니라 매일 빵을 굽는 일이라는 말을 남편에게 건넨 화수의 마음도 내 마음 같았다. 지수처럼 살고 싶었지만, 대부분의 결정은 화수처럼 해낸 것 같다고 나를 돌아봤으며, 새의 이야기에 마음을 쓰는 해림이가 이 세상을 구원해낼 것이라 믿었다.
물을 정말 무서워하는 나에게 서핑을 버킷리스트에 넣어보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하게 한 우윤도 멋졌다.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라지만 내 마음엔 존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존재를 넘어 실존하고 있었으면 좋겠다는, 아니 있을 것 같다는, 아니 있다는 확신이 드는 기분이 책을 읽는 내내 들었다. 작가의 힘은 이토록 대단하다.

남편과 서핑을 배워보는 나를 자꾸 그리게 된다.

빛나는 재능들을 바로 곁에서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누군가는 유전적인 것이나 환경적인 것을, 또는 그 모든 걸 넘어서는 노력을 재능이라 부르지만 내가 지켜본 바로는 질리지 않는 것이 가장 대단한 재능인 것 같았다. 매일 똑같은 일을 하면서질리지 않는 것. 수십 년 한 분야에 몸을 담으면서 흥미를 잃지 않는 것. 같은 주제에 수백수천 번씩 비슷한 듯 다른 각도로 접근하는 것.
사실 그들은 계속 같은 일을 했다. 그리고 조각하고 빚고 찍고・・・・・・ 아득할 정도의 반복이었다. 예외는 있지만 주제도 한둘이었다. 각자에게 주어진 질문 하나에 온 평생으로 대답하는 것은 질리기 쉬운 일이 아닌가? 그런데도 대가들일수록 질려하지 않

았다. 즐거워했다는 게 아니다. 즐거워하면서 일하는 사람은 드물다. 질리지 않았다는 것이 정확하다.
그러므로 만약 당신이 어떤 일에 뛰어난 것 같은데 얼마 동안해보니 질린다면, 그 일은 하지 않는 것이 낫다. 당장 뛰어난 것같지는 않지만 하고 하고 또 해도 질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시도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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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 - 개정판
양귀자 지음 / 쓰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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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여러 사람들의 추천이 있어 관심을 가지던 차에 어머니집 책장에 꽂혀 있는 책을 발견하고 집에 가져왔다. 오후에 아이들이 학원에 가고 집에 홀로 남아 있는 시간에 읽게 된 책.
작가는 아주 천천히 읽길 바랐지만, 주인공에게 몰입하여 빠르게 읽히는 책.

새삼스런 강조일 수도 있겠지만, 인간이란 누구나 각자 해석한만큼의 생을 살아낸다. 해석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는 사전적 정의에 만족하지 말고 그 반대어도 함께 들여다볼 일이다. 행복의 이면에 불행이 있고, 불행의 이면에 행복이 있다. 마찬가지다. 풍요의뒷면을 들추면 반드시 빈곤이 있고, 빈곤의 뒷면에는 우리가 찾지못한 풍요가 숨어 있다. 하나의 표제어에 덧붙여지는 반대어는 쌍둥이로 태어난 형제의 이름에 다름 아닌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일 년쯤 전, 내가 한 말을 수정한다.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다. 실수는 되풀이된다. 그것이 인생이다……….

이모를 죽인 겨울이 지나고 봄은 무르익어 사방에 꽃향기가 난만했다. 겨울이 있어서 봄도 있을 수 있다.
나도 세월을 따라 살아갔다. 살아 봐야 죽을 수도 있는 것이다.
아직 나는 그 모순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받아들일 수는 있다. 삶과 죽음은 결국 한통속이다. 속지 말아야 한다.
살아 있는 사람들의 사소한 이야기는 계속된다.
죽기 전에는 아무도 인생의 별볼일 없는 삽화들을 멈추게 하지못한다. 우리는 크고 작은 액자들 안에 우리의 지나간 시간들을걸어 놓으며 앞으로 앞으로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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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요조의 이름의 기원에 대해 듣다 알게 된 책
전도연과 류준열이 찍은 드라마 인간 실격을 보며 다시 한 번 내 마음에 와닿은 책
소설을 잘 읽지 않지만, 전주에서 읽은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 인상 깊어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도 읽게 되었다.(두껍지 않아 손이 가기 쉬웠다고나 할까?)
세상에 무슨 이런 사람이 있나 싶었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지극히 공감되는 지점들이 있었다. 인간은 모두 제각각 다르게 느끼고 다르게 살아가는 것 같지만 어떤 부분에서 유사한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묘하게 위로가 되었다.
어쩌면 다자이 오사무의 자서전같기도 한 책. 그래서인지 지어낸 이야기라기보단 자신의 경험을 일대기로 써내려 간 것 같아 더 몰입하게 되었다.
자기 파멸, 멸망

비합법. 저는 그것을 어렴풋하게나마 즐겼던 것입니다.
오히려 마음이 편했던 것입니다. 이 세상의 합법이라는 것이 오히려 두려웠고(그것에서는 한없는 강인함이 느껴졌습니다.) 그 구조가 불가해해서, 도저히 창문도 없고 뼛속까지냉기가 스며드는 그 방에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바깥이비합법의 바다라 해도 거기에 뛰어들어 헤엄치다 죽음에이르는 편이 저한테는 오히려 마음이 편했던 것 같습니다.
‘음지의 사람‘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 세상에서는비참한 패자,또는 악덕한 자를 지칭하는 말 같습니다만,
저는 태어날 때부터 음지의 존재였던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이 세상에서 떳떳하지 못한 놈으로 손가락질당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언제나 다정한 마음이 되곤 했습니다. 그리고 저의 그 ‘다정한 마음‘은 저 자신도 황홀해질 정도로정다운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늘 인간에 대한 공포에 떨고 전율하고 또 인간으로서의제 언동에 전혀 자신을 갖지 못하고 자신의 고뇌는 가슴속깊은 곳에 있는 작은 상자에 담아두고 그 우울함과 긴장감을 숨기고 또 숨긴 채 그저 천진난만한 낙천가인 척 가장하면서, 저는 익살스럽고 약간은 별난 아이로 점차 완성되어 갔습니다.
뭐든 상관없으니까 웃게만 만들면 된다. 그러면 인간들은 그들이 말하는 소위 ‘삶‘이라는 것 밖에 내가 있어도그다지 신경 쓰지 않을지도 몰라. 어쨌든 인간들의 눈에거슬려서는 안 돼. 나는 무(無)야.바람이야. 텅 비었어.
그런 생각만이 강해져서 저는 익살로 가족을 웃겼고, 또가족보다 더 불가사의하고 무시무시한 머슴이랑 하녀들한테까지도 필사적으로 익살 서비스를 했던 것입니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는 것.
제가 지금까지 아비규환으로 살아온 소위 ‘인간‘ 의 세계에서 단 한 가지 진리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것뿐입니다.
모든 것은 그저 지나갈 뿐입니다.

다자이가 자기 자신을 직설ET적으로 드러내기에는 너무 부끄럼을 타는 작가였다는 사실, 그의 소설이 늘 자전적 사실의 변형이었다는 점에서지나치게 자전에 결부시킨 접근은 경계해야 할 것이다. 오히려 이 작품에 접근하는 데에는, 도스토예프스키의「죄와벌」을 유의어가 아니라 반의어로 수용하거나 ‘여자‘의 반의어는 ‘꽃’이고 유의어는 ‘내장‘으로 생각하는 작중의 반대말 맞히기 놀이를 해독하는 것이 더 유효할 것이다. 와타나베 요시키, 도고 가쓰미 등의 다자이 연구가는 세상을합법적 세계에 속하는 남성 세계와 비합법적 세계에 속하는 여성 세계로 나누어, 사회의 실세를 형성하고 있는 남성 지배 세계에서 소외된 주인공 요조가 결국은 어느 세계에도 귀속하지 못하고 인간 실격자가 되어가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증명해 보이고 있다. (『작품론 다자이 오사무』,
1976) 한편 오쿠노 다케오는「인간 실격」한 편 때문에「다자이 오사무론」을 쓴 것이라고 전제한 후, "나는 ‘서문’ 을읽고 나서 이 작가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깊은 고뇌에찬 인생을 경험한, 통상적인 인생과는 완전히 다른 심각한정신 생활을 영위한 인간임을 느끼고(중략)그 확신하에이 평론을 썼다."라고 하고 있다. 타산과 체면으로 영위되는 이해할 수 없는 인간 세상과 확고하게 틀 잡힌 듯한 사회 질서의 허위성, 잔혹성을 「인간 실격」만큼 명확하게 드러낸 작품도 드물 것이다. 어떻게든 사회에 융화하고자 애

쓰고 순수한 것, 더럽혀지지 않은 것에 꿈을 의탁하고 인간에 대한 구애를 시도하던 주인공이 결국 모든 것에 배반당하고 인간 실격자가 되어가는 패배의 기록인 이 작품은그런 뜻에서 현대 사회에 대한 예리한 고발 문학이라 할수 있다. 넙치와 호리키가 드러내는 상식적인 인간상의 (적어도 그들은 이 사회에서 당당히 존재 가능하다.) 추악함은,
그 틀에 젖어 무감각하게 살고 있는 우리에게 자성을 촉구한다. 인간성이 상실된 현대 사회가 멸망해 가는 도정에있음을 이 작품만큼 명백하게 제시해 보인 작품은 없다고할 수 있다.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자성 없는 사회는 결국 소돔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요조의 고뇌를 인정할지하지 않을지가 다자이를 받아들일지 부정할지를 가름하는기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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