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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타이거
페넬로피 라이블리 지음, 김선형 옮김 / 솔출판사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문타이거'라니? 

 신간평가단 홈페이지를 보고 나서 가장 먼저 느낀 것이다. 조지 오웰의 『숨 쉬러 나가다』는 어느 정도 납득이 되었지만, 이 소설은 당최 본 적이 없다. 내가 4월 달에 주목 신간 페이퍼를 썼다고 했지만, 『문타이거』라는 제목의 책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편집자의 눈에 띄였고, 또 일종의 개정판을 내는 꼴이니 수긍하고 읽기로 했다. 

 제목이 꽤나 심오하면서도 단순하다. 직역하면 '달호랑이', 우리말로는 '모기향'을 의미한다고 한다. 모기향? 불에 서서히 타들어가면서 연기를 내는 신비한 도구. 마침내 모든 것이 재가 될 때에는 한 치의 여운 없이 모두 날아가버리는 그것. 왜 페넬로피 라이블리라는 작가가 '모기향'을 제목으로 삼았는지 의문이 든다.  

 나는 그 해답을 책 속에서 얻어냈다. 물론 소설 속에서는 문타이거가 주된 소재로 등장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그것이 사건의 실마리가 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문타이거의 이미지가 내 머릿속에 각인되면서 서서히 작가가 '문타이거'를 제목으로 삼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마 많은 독자들이 소설의 첫문장에서 흥미를 느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적어도, 처음에는 이 소설이 재미없다고 말할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세계의 역사를 쓰고 있어요." 그녀가 말한다. 그러자 간호사가 말한다. "어머나, 세상에." 임종을 눈앞에 둔 늙은 노파가, 아무리 예전에 역사가라고 한들 어떻게 세계의 역사를 쓸 수 있겠는가? 아마 간호사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클라우디아가 묘사하는 역사란 그런 연대기적인 역사도 아니며, 그렇다고 모든 세계의 역사를 다루는 것도 아니다. 

 그녀의 역사는 마치 모기향처럼 어느 한 중심을 기준으로 주변에서 계속 순회한다. 결코 수평선으로 타들어가지 않는다. 세계의 역사와 그녀 자신의 역사가 모기향처럼 원을 그리며 순회하며, 서서히 그 '중심'으로 들어가는 방식. 그것이 바로 『문타이거』의 방식, 모기향의 방식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 중심이란 게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모기향의 크기에 비하면, 중심의 크기는 매우 작은 편이다. 하지만 아무리 모기향이 소용돌이치며 타 들어가도 그 중심에 가까워질수록 온화해지고 짙은 연기를 낸다. 역자는 모기향의 중심에 있는 것이 클라우다아와 전쟁 때 만난 병사 톰 서던과의 로맨스라고 주장한다. 아니, 주장이라기보다 실제로 그렇다. 이 소설에는 클라우디아 외에도 그녀의 친오빠 고든, 남편 재스퍼, 갑작스럽게 그녀의 손에 맡겨진 폴란드 교수의 아들 라솔로, 친딸 리사 등의 인물이 등장한다. 톰 서던은 소설의 초두에 잠깐 등장하고 세계의 역사의 무대에 사라진다. 하지만 그녀의 역사에서는 그가 영원히 살아있다. 

 사실 나도 이 소설이 그다지 재미있지는 않았다. 메모의 공간이 너무나 부족해서, 글씨 간의 여백이 조금 뺵뺵해서, 주석이 미주라서, 이런 외부적 핑계들과 클라우디아의 잡담식 역사가 너무 진부해서, 라는 내부적 핑계가 있다. 하지만 내가 뭐라고 하든, 그녀 자신의 역사에 대해 감히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마치 내 역사를 다른 사람이 침해할 수 없듯이 말이다. 

 작가는 말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이미 결정된 운명은 멈출 수도 없고 방향을 바꿀 수도 없다고. 이게 바로 역사라고, 이게 바로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일이라고." 결국 내 기억에 남은 것은 재스퍼의 편지, 그리고 그의 전사 소식(16장). 어떻게 나의 역사와 클라우디아의 역사가 같을 수 있겠는가? 나는 내 역사에 충실하며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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