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으로 꼭 알아야 할 세계의 몬스터
정승원 지음, 이창윤 그림 / 삼양미디어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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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현상들이 과학으로 규명되기 전 인간들은 자연을 두려워했다. 주위의 모든 것이 인간의 생존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인간들은 자연을 경외하였고 그 모든 현상엔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해가 뜨고 지는 것, 바람이 부는 것, 비가 오고 또 별과 달이 빛나는 것까지. 그러다 이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거대한 자연의 힘은 신이 만들어 낸 것이고, 인간과 동물이 아닌 또 다른 존재가 신보다 더 가까이에서 인간의 삶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고 말이다. 고대나 중세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함으로써 그들의 고된 삶에 타당성을 부여했는지도 모른다.

<상식으로 꼭 알아야 할 세계의 몬스터>는 인간의 상상력으로 만들어 낸 온갖 몬스터들이 등장한다. 어떤 것들은 기원전부터, 어떤 것들은 중세시대부터 존재해온 몬스터들인데 이렇게 하나로 묶어 놓고 보니 몬스터에도 지역적 특색이 있기도 하고 공통된 것도 있어 읽으면서 정말 재미난 시간을 보냈다. 또 워낙 어렸을 때부터 그리스로마신화나 판타지 소설을 즐겨봐서인지 낯익은 몬스터들이 나오면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우선 이 책은 10개의 테마로 이루어져 있다. 테마는 영생불사, 반인반수, 용, 이종결합, 다다익선, 거대괴물, 여신 여괴, 자연 정령, 요괴 요물, 환상식물로 제목이 붙어있는데 각각의 몬스터에 따른 전설이나 신화도 같이 소개하고 있어 몰랐던 사실도 많이 알게 되었다. 예를 들어 영생불사 몬스터 중 봉황이나 샐러맨더, 가루다, 아펩 등이 거의 새나 뱀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건 처음 안 사실이다. 책에 의하면 그 몬스터들은 주로 태양, 불과 연관되어 있다 하는데 태양은 매일 밤 사라지지만 다음 날 다시 떠오르고 불은 생명과 빛의 근원으로 여겨져 영생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또 뱀은 탈피를 하기 때문에 다시 태어난다고 여겨지고 새는 그러한 뱀을 잡아먹기 때문에 같이 불사의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다른 예로, 용이 동양과 서양에서 상징하는 의미가 다르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서양에서의 용이 보물의 수호자라는 것은 처음 안 사실이다.(하긴 책 <해리포터>를 봐도 그린고트 은행의 보물을 지키는 것은 용이었다.) 각각 관장하는 것이 물과 불이고 성격도 달라 동양에서는 용이 신격화 되어 있고 서양에서는 성격이 포악하여 무찔러야 하는 대상으로 등장한다고 한다. 같은 용인데 지역 따라 겉모습도 다르고 상징하는 바도 다르니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서양의 용이 이렇게 인간에게 해를 미치는 대상이 된 데에는 ‘신약성서’의 힘이 크다고 한다. ‘신약성서’에서 용은 하느님의 적인 사탄으로 규정하고 이브에게 사과를 권한 것이 사실  용이라고 하는 목소리도 있는 모양이다. 그에 반해 동양에서는 용이 머리가 좋고 바람과 비의 힘을 가졌다 하여 신성시 되어왔다. 가뭄이 계속 될 때 용에게 기우제를 지내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한다.

그 외에 이 책엔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으로 친숙한 크라켄과 플라잉 더치맨도 소개하고 있고 어린 시절 비디오로 빌려봤던 강시시리즈의 강시도 나온다. 우리나라 고유의 몬스터인 불가사리와 미르에 대해 알게 된 것도 큰 소득이라 할 수 있겠다.

어렸을 때부터 난 까마득한 옛날엔 인간과 환상적인 존재들이 함께 살지 않았을까 생각했었다. 현대에는 인간이 전구를 발명해 어둠을 쫓아버려서 모두들 숨어버린 것이 아닐까하고 말이다. 그래서 검룡소(儉龍沼)의 이무기도 아직 천년이 되지 않아 바위 밑에서 수련을 하고 있지 않을까 상상도 해봤다. 이런 얘기를 하면 논리적인 사람들은 비웃겠지만 뭐 어떤가. 아무리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를 해도 설명할 수 없는 자연현상들은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오랜 시간 인간은 자연을 두려워 해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지 않고 그와 하나가 되는 삶을 살았었다. 하지만 불과 몇 백 년 만에 자연은 정복의 대상이 되어 인간에 의해 조각조각 난도질당하고 헤집어졌다. 그리하여 자연의 신비로움은 사라지고 원인과 결과만이 남았다. 그로인한 좋은 점도 부작용도 많다. 그래서 감히 말해 본다. 혹시 고대에서부터 내려온 전설이나 설화의 몬스터들은 자연을 함부로 건드리면 해를 입는다는 선조들의 가르침은 아니었을까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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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혁명 - 시대를 앞서간 천재 허균의 조선개혁 프로젝트
정경옥 지음 / 여우볕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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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전의 저자, 허난설헌의 동생, 이것만이 허균의 대해 알고 있던 내 모든 것이었다. 말년이 불우했던 개혁가라는 것도 알았지만 앞의 두 가지가 허균을 이루는 가장 큰 이미지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그것은 허균의 개인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어떻게 살아왔으며 언제부터 개혁의 꿈을 꾸었는지, 적자이면서 왜 서얼에 대한 소설을 썼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이 소설이 더 반가웠는지도 모르겠다. 타고난 인재가 많았던 선조-광해군 시절에 또 한명의 인재를 만날 기회였으니 말이다. 
 

허균의 나이가 스무 해가 되던 해, 집으로 금강산에 있다는 그의 둘째 형님 봉에게서 급한 전갈이 도착한다. 전할 말이 있으니 급히 와달라는 전갈이었다. 하지만 이레 걸려 금강산에 도착한 허균을 맞는 건 봉의 싸늘한 시신이었다. 봉이 율곡대감을 탄핵한 일로 정적(政敵)들에게 미움을 사 좌천된 지 5년만의 일이었다.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여성으로 태어난 죄로 타고난 총명함과 글재주를 묻고 살아가던 허균의 누이 허난설헌이 27세의 짧은 생애를 마감한 것이다. 그때부터였을까? 허균이 조선제도의 부당함을 느꼈던 것이. 적자로 태어나 조선제도 틀 안에서 지냈다면 평탄한 삶을 살았을 허균이었다. 하지만 허균은 그렇게 살지 않았다. 그는 서얼들과 어울리고 기생집을 드나들며 조금이라도 그 틀을 벗어나 자유롭게 살고자 했다. 그렇게 그의 슬픈 혁명이 시작되었을지 모른다.

이야기는 1인칭 시점으로 허균의 생애를 그려나가고 있다. 역사 속 인물인 허균을 살이 있고 피가 흐르는 사람으로 만드는 과정은 작가에게도 힘들었으리라. 하지만 그만큼 허균이라는 인물을 독자들에게 가깝게 다가오도록 만들었기에 보람 된 일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또 허균의 답답한 심정과 세상에 대한 분노도 잘 그려졌다. 역사 속 인물들과 역사 속 사건들을 잘 조합하여 많은 공부도 되었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난 지금에도 허균이 왜 이 혁명을 주도하게 되었고 서얼들과 어울리며 기회를 엿보았는지에 대해 모호하게 느껴진다. 너무나 드라마틱한 사극들을 봐온 나의 문제인지 허균의 뜻에 크게 공감할 수 있는 계기가 없었던 것이 안타깝다.

이야기에서 꿈이 주는 의미가 많이 나온다. 허균의 운명을 암시하는지 하나 같이 슬프고 괴로운 꿈들이다. 불길한 꿈은 틀리지 않는다고 꿈을 꿀 때마다 그에게는 나쁜 일이 벌어지곤 한다. 마지막에 꾼, 슬픈 눈으로 허균을 응시하던 이무기의 꿈은 허균을 암시하는 것이리라. 용이 되지 못하는 이무기는 꿈을 이루지 못하는 허균이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그의 운명인 것이다. 하지만 뚜렷한 죄안 없이 그가 급하게 형장으로 끌려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인조반정으로 광해군 당시 역모혐의로 죽은 사람들이 대부분 복권되었다던데 허균만이 조선왕조 말까지 역적으로 남아있던 까닭은 왜였을까. 시대를 잘못 타고난 천재이자 사상가에게 두려움을 느낀 조선왕조와 권력가들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의 다사다난했던 삶을 고찰하고픈 생각이 든다. 50생애, 한없이 자유롭고자 했던 허균의 꿈을 잊지 않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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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를 뒤흔든 12가지 연애스캔들
박은몽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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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의 영향력은 실로 대단하다. 오래전 만화 <바람의 나라>를 보았을 때 처음 삼국에 흥미를 느낀 나는 삼국의 역사를 알고자 서점으로 달려갔지만 문고판 크기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만 들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많이 달라진 걸 느낀다. 하나의 사극이 방영 되면 그에 관한 책들이 서점가를 장악한다. 독자로서는 큰 즐거움이다. 예전에는 구할 수 없던 전문적인 책들, 그것도 한 분야만을 다룬 세세한 역사서들이 나와 있으니 말이다. 
 

<신라를 뒤흔든 12가지 연애 스캔들>은 신라의 성풍속도에 관한 책이다. 많은 부분을 김대문의 화랑세기에서 참고했다 하니 요즘 절찬리의 방영중인 <선덕여왕>의 영향이 큰 듯하다. <선덕여왕>의 팜므파탈인 미실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은 법흥왕부터 문무왕까지의 신라왕실을 중심으로 왕후, 화랑, 색공지신들의 자유로운 성생활과 얽히고설킨 관계들을 12가지 이야기로 담아놓았다.

신국에는 신국의 道가 있다.

원래 정사[正史]보다는 야사[野史]가 재밌는 법이다. 야사[野史]는 우리에게 역사 속 감춰진 뒷이야기들을 전해준다. 그 이야기들 속엔 왕도 왕후도 용맹한 군인도 그저 한 사람에 불과하다. 사랑의 감정도 있고 질투도 하고 실수도 하기에 옛 인물들이지만 친근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특히 이 책은 잘 몰랐던 신라의 가계도라든가 왕실 주변인물을 허물없이 드러내 보인다.

사실 고대가 더 성에 대해 자유로웠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였을지 몰랐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성골이라는 왕족의 피와 골품제를 지켜나가기 위해 근친혼이 성행했다는 사실을 알긴 알았지만 복잡하게 얽힌 관계들을 읽고 나니 특히 놀랐다. 물론 고구려나 백제에서도 형사취수제와 약간의 근친혼이 이루어졌지만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 근친혼이 남아있었다는 건 아무래도 신라의 고립된 지역적 특성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신라의 사람들은 이 풍속을 부끄럽거나 야만적이라 생각하지 않고 예부터 내려온 고유의 풍습이라 생각했다 한다. 왕족과 권력을 가진 신하들이 제 피를 지키기 위해 서로를 피의 끈으로 묶은 것이다. 그들이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유럽의 왕조들도 많은 근친혼들을 했으니 말이다.
또 신라에는 색을 숭상하는 독특한 문화가 있었는데 남편을 잃은 아녀자의 슬픔을 색으로 위로하거나 미실에게 흠뻑 빠진 진흥왕을 바라만 볼 수밖에 없던 진흥왕의 빈첩 보명에게 진흥왕의 아들 동륜이 색으로써 기쁨을 주려한 것도 좋은 예이다. 그것은 남녀 간의 교합이 그들의 최고의 즐거움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얼마나 솔직한 지 신라를 폐쇄적이고 매력 없는 나라라 생각했던 내 편견이 많이 줄어들었다.

책을 읽다 보면 지금의 기준으로썬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관계들이 많이 등장한다. 남매간의 결혼이나 아버지와 아들에게 같이 색을 바친 미실, 어머니와 딸이 한 왕을 모신 경우도 있고 남편이나 아내가 있어도 왕의 명이 있다면 신분 높은 자에게 색을 바쳐야 한 경우도 있었다. 신라에서는 자신보다 신분이 높은 자에게 색을 바치는 것이 당연시 여겼기 때문에 그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신분을 상승시키기에 좋은 기회였다고 하니 색은 정치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했을 거라 생각된다. 색을 ‘천한 것’이 아닌 道로써 숭상한 신라가 결국은 삼국통일을 하고 천년왕국을 이룩했으니 이 끈끈한 유대감에 삼국통일의 비밀이 숨어 있는 건 아닐까?

이와 같이 색으로 채워진 열두 가지 이야기는 우리에게 새로운 신라의 모습들을 알려준다. 또 드라마 <선덕여왕>에 나오는 인물들이 다수 포함 되어 있어 등장인물들을 드라마 인물로 바꾸어 보니 몰입도 더 잘되었다. 다만 드라마와 책 사이의 차이도 종종 등장해서 드라마는 편집하기 나름, 역사는 각색하기 나름(?)이라는 교훈도 얻을 수 있었다. 아마 신라를 알려진 그대로만 봐왔던 사람이나 신라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이 책을 읽으면 많은 재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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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의 추억
사이 몽고메리 지음, 이종인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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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고양이, 앵무새, 원숭이까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동물들은 많다. 가축의 역사로 보면 신석기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가장 먼저 가축화 된 동물은 개였고 기원 전 8천 년 전엔 돼지도 가축화 되었다. 이렇듯 오랜 시간 동안 돼지는 우리에게 친숙한 동물이었지만 여러 편견에 휩싸인 동물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이 돼지는 식용으로 생각하며 게으르고 욕심 많고 지저분한 동물 일순위로 뽑기도 한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면 그 편견은 눈 녹듯이 사라질 것이다. <돼지의 추억>이라는 제목을 가진 이 책은 사랑스러운 돼지 크리스토퍼 호그우드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다.

저명한 지휘자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크리스토퍼 호그우드는 대개 크리스로 불린다. 크리스는 어미에게서 새끼돼지가 10마리 이상 태어나면 도태된다는 ‘무녀리’ 중 하나였다. 암컷 돼지는 젖꼭지가 12개이지만 젖이 잘 나오는 젖꼭지는 10개  뿐이라 10마리 이상 태어나면 도태되는 새끼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무녀리’라고 한다. ‘무녀리’는 덩치가 작고 약하지만 존재 자체가 가족을 위험에 빠뜨릴 경우가 있기 때문에 야생의 본능이 남아 있는 어미돼지는 물어죽이기도 한단다. 크리스는 운이 좋은 경우였다. 그는 슈즈 박스에 담겨 작가의 품에 안겼다. 살아날 확률은 적었다. 그리고 작가는 가혹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작가는 병든 아버지와 크리스를 동일시했고 둘 다 살리기 위해 노력한다. 하나의 희망이 다른 희망으로 이어지듯이.

어렸을 적 돼지 사육장에 들어가 본 적이 있었다. 가족과 함께 물놀이를 갔다 만난 마을 분의 집이었는데 수컷 돼지 한 마리와 암컷 돼지 10마리를 키우고 계셨다. 분홍 돼지들이 끊임없이 꿀꿀거리고 출산을 앞 둔 암컷 돼지가 누워 있는 광경은 내 눈에 정말 멋져 보였다. 돼지고기를 즐겨 먹었지만 그 돼지들은 식용으로 보이지 않고 귀여운 동물이자 친구로만 보였다. 난 새끼가 태어나면 한 마리 달라고 졸랐고 아저씨는 그러마하고 약속하셨지만 그 약속은 당연하게도 지켜지지 않았다. 자라고 난 뒤엔 난 그 즐거웠던 기억을 저편에 묻고 이 <돼지의 추억>을 보기 전까지 꺼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책의 표지를 본 순간 기억은 되살아났고 책은 나를 멋진 돼지의 세계로 데려다 놓았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책은 사랑스러운 돼지 크리스가 잔뜩 나온다. 크리스는 헛간을 탈출해 이웃의 상추밭에 들어가거나 도로를 질주하는 말썽꾸러기지만 사람을 좋아하고 맛있는 음식을 주면 만족하는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다. 돼지가 본능에 충실한 만큼 아름다운 모습은 없다는 게 작가의 지론이다. 행복과 소망이 늘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크리스의 매력적인 모습에 이끌린 사람들이 점점 늘어 크리스를 찾아오면서 그에게도 많은 친구들이 생겼다.

나도 점점 크리스의 매력에 빠져 들었다. 크리스가 기쁠 때 낸다는 낮은 음역의 꿀꿀 소리도 듣고 싶었고 돼지마사지로 크리스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또 돼지고원에서 크리스와 함께 뒹굴 거리고 싶기도 했다. 그만큼 크리스에게 열중했다. 돼지가 똑똑하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크리스는 그 이상이었다. 그는 한 번 본 사람은 절대 잊지 않고 열심히 가꾼 정원을 망치지도 않았다. 아이들을 좋아했고 사람마다 반기는 꿀꿀 소리가 다 달랐다고도 한다. 

하지만 사랑스러운 동물과 사람의 교감을 그린 책은 항상 끝이 슬프다. 이 책도 크리스의 죽음을 전했다. 14년이라는 오랜 시간을 살았지만 직접 동물을 키운 사람들은 알 것이다. 그 시간도 짧게 느껴진다는 것을.
크리스는 뉴햄프셔의 스타였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 그리고 그가 죽은 뒤에도 많은 친구들이 생전의 크리스에 대한 추억으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책은 크리스의 이야기 뿐 아니라 동물학자인 작가 개인의 이야기와 이웃 친구들, 가족이야기, 일 이야기가 함께 실려 있다. 이는 작가의 동물에 대한 관점과 주변 상황, 가족의 갈등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리고 그 모든 상황에서 크리스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도 이야기 한다. 또 작가는 동물들을 이해하면서 자신의 가족을 이해하고 용서의 마음을 배우기도 한다. 다른 종[種]을 이해한다는 것, 그 존재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 그것은 서로 다른 개성을 가진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데에도 큰 연관이 있다. 작가는 그 마음을 배웠고 글을 씀으로써 독자들에게도 그 마음을 가르쳐 준다.

나에게도 교감을 나누는 동물이 있다. 이 강아지는 나에게 온지 8년째이고 우리는 그 세월만큼 서로를 알아왔다고 확신한다. 우리는 서로가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또 재밌어 하는 일들을 안다. 지금도 옆에서 이불을 꺼내 달라고 조르는 강아지가 사랑스럽다. (절대 바닥에서 자지 않는다.) 작가가 크리스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듯이 나도 하루하루 배움의 길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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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를 막고 밤을 달리다
이시모치 아사미 지음, 김주영 옮김 / 씨네21북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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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여기 당당하게 사람을 살해하겠다고 선언하는 사람이 있다. 그것도 한명이 아닌 세 명씩이나. 사람을 살해하면 안 된다는 상식은 있다.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번듯한 직장을 가진 사회의 일원이다. 하지만 그 모든 위험을 감수해서라도 죽여야 할 사람이 세 명이 있다. 괜찮다. 그 세 명을 죽이고 체포되지 않으면 되니까. 그러려면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 
 

첫 장부터 독자들을 확 사로잡는 이 선언은 책의 주인공인 나미키 나오토시의 독백이다. 무엇 때문에 살인을 저지르려 하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나미키가 살인을 하려는 의도는 뒤에 순차적으로 나오게 되는데 나는 책을 다 읽은 순간까지 작가의 생각대로 움직였다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책은 나미키의 생각과 행동들을 독자들에게 낱낱이 고한다. 살인이라는 추악한 행위를 나미키 스스로가 정당화 시키고 무고한 사람을 죽일 때조차 변명으로 일삼는 나미키의 행동에 속이 뒤틀리기까지 하는데 그 모든 게 작가가 의도한 것이라 생각됐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작가 이시모치 아사미는 심리전에 능한 대단한 작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미키의 표적은 야타베 히토미, 기시다 마리에, 구스노키 유키까지 세 사람이다. 원한으로 살인을 저지르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나미키가 돌보던, 불쌍한 사람들이다. 히토미와 마리에, 유키는 각각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쓰고 사망한 아버지들의 딸들이다. 나미키는 이런 ‘원죄 사건’들의 피해자 가족들의 상처를 치유하는 지원자 그룹의 한 사람이었고 세 사람은 지원자들의 보살핌을 받고 성장했다. 나미키는 왜 어릴 때부터 함께 해왔던 그 세 사람을 죽이려는 것일까. 그것도 절대 잡히지 않기 위한 완벽범죄를 계획하면서까지.

이야기는 우연치 않게 나미키가 그 세 사람이 아닌, 같은 지원자 그룹의 아카네를 먼저 죽이면서 꼬여간다. 철저한 계획을 세우고 살인을 시행하려한 나미키의 생각과는 달리 ‘악랄한 교사’가 집에 찾아오면서 살인은 그날 밤 모두 끝내야할 나미키의 의무가 되어버렸다. 하룻밤 안에 세 사람을 살해해야 한다. 나미키의 머리는 그때부터 재빠르게 돌아간다. 독자는 살인자의 머릿속에 들어가 그가 계획하고 실행하는 살인에 동참하게 된다. 동조할 수도 그렇다고 말릴 수도 없는 살인행위에 공범자가 되는 기분을 느끼는 것이다. 이유를 쉽사리 알려주지 않는 불친절한 살인자에게 끌려 다니는듯한 기분 또한 함께 느껴진다.

사건은 대부분 나미키의 시선으로 이어진다. 실행하기까지 끊임없이 생각하고 현장을 그려보지만 원래 사람이라는 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살인이 계속될수록 일은 꼬여만 가고 나미키의 자기변명은 계속 된다. 

작가는 살인자란 원래 비겁하고 비참하고 추악하고 약해서 결국에는 패배하기 때문에 일부러 그런 식으로 쓰고 싶었다고 말한다. 나미키는 그 세 사람을 살해하는 것이 자신의 정의와 사회의 행복에 부합된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그건 자기만족에 지나지 않는다. 제목 그대로 귀를 막은 살인자를 떠올리면 된다. 

이시모치 아사미의 책을 만난 건 두 번째이다. <문은 아직 닫혀 있는데>도 그랬지만 독자에게 “왜”라는 질문을 던지고 풀어나가는 방식이 독특하다. 또 복선을 깔아놓는 방법도 어색하지 않아 독자가 끝까지 책에 집중할 수 있게 만든다. 한 마디로 말해 다음에도 이 작가의 책을 읽을 거란 얘기다. 앞으로 우리나라에서 일본 스릴러 작가라 하면 떠올릴 작가 중 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으며 다음 작품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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