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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 아침이슬 셰익스피어 전집 1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김정환 옮김 / 아침이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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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한 민주주의의 죽음

김정환이 번역한 <햄릿>(아침이슬)을 읽었다.
요즘에는 무엇을 읽든 이명박과 연결하는 못된 버릇이 생기긴 했지만, 현실의 치명적인 요소요소를 밝혀주는 이 고전작품은 나의 번뇌가 꽤나 보편적이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듯하다.

희곡 햄릿에 담긴 주제는 한마디로 "치명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는 자가 혼란스런 시대를 만나 파멸에 이르게 되는" 슬픈 이야기다. 셰익스피어는 인물마다 치명적인 결함을 집어넣어 현실감을 더욱 증폭시킨다. 리어왕은 끝간 데 모를 자부심과 노욕이 말년의 비극을 부추기고, 오셀로는 질투와 야심으로 자멸할 운명을 맞는다. 자못 현대인의 본질적인 특징에 닿아 있다. 우리는 저마다 치명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다. 그건 그렇고 내가 이 고전 작품에서 오늘날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죽음을 바라볼게 된 경위를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햄릿은 햄릿 왕의 어이없는 죽음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렇게 나는, 잠을 자다가, 동생의 손에, 목숨을, 왕관을, 왕비를 동시에 박탈당했니라, 내 죄의 꽃이 만개한 와중에 목숨이 잘렸니라" - 햄릿 왕의 유령, <햄릿> 45쪽

죽은 햄릿 왕만큼 지금의 '민주주의'를 잘 비유하는 인물은 없을 것이다. 우리들의 민주주의, 386 세대들이 숭앙해 마지 않던 87항전의 결실은 2008년 아예 없었던 시절로 돌아가고 말았다. 87년 이전의 시대, 아니 더 이전의 시대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형을 죽이고 왕비를 찬탈한 클로디어스는 이명박에 어울리는 인물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클로어디스에게 햄릿 왕이 너무나 허무하게 죽임을 당했다거나 이명박에게 소중한 민주주의가 너무나 쉽게 말살되었다는 사실이 아니다. 왕의 생명과 재산조차, 기본적인 민주주의의 권리조차 지키지 못했던 허약한 시대와 그 혼란상이 고스란히 우리에게 남겨졌다는 것이 이 장면이 가리키는 바다.


햄릿은 왕의 죽음, 즉 민주주의의 죽음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누가 아버지를 죽였는지 백일하에 드러났고 아버지를 죽인 자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명백한 상황에서도 클로어디스 이명박의 행동 하나하나에 신경을 곤두세워 확인을 하려 든다. 이명박의 사과나 제도개선, 혹은 사퇴라는 공허한 구호를 외치며 이명박의 행동 하나하나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우리들의 모습은 햄릿보다 더 우유부단하다. 이명박이 누구인지, 민주주의를 죽인 것이 누구인지, 왕을 죽인 자가 누구인지 드러났다면 나의 행동과 결단도 분명해야 하리라.

거트루드 왕비는 왕이 죽고 나서 두 달 만에 남편을 죽인 살인마와 같은 침대를 쓰는 사이가 된다. 민주주의에 의해 임명된 권력기관은 거트루드 왕비와 어울린다.

맙소사, 하느님은 최상의 코미디 작가지! 사람이 유쾌하지 않을 수가 있나? 봐, 내 어머니가 얼마나 명랑해 보이는지, 아버지가 죽은 지 두 시간도 안 돼서 말야. - 햄릿이 계모에게, <햄릿>100쪽

햄릿은 끝내 클로디어스 왕의 일그러진 표정을 확인하기 위해 클로디어스가 아버지를 죽였던 장면을 넣은 연극을 상연한다. 거트루드 왕비가 클로디어스를 남편으로 맞은 것은 2달이지만, 연극의 상연 시간은 2시간 남짓이기 때문에 '2시간도 안 돼서'라고 말한 것이다.

이야기의 전모를 훑어보면 마치 클로디어스 왕의 잔인한 살인과 거트루드 왕비의 변절이 눈에 들어오지만, 이들을 실질적인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명박이 국민들에게 어떤 힘을 가지지 않는 것과 같다. 그들에게 힘이 있다면 허울이 있을 뿐이다. 이들에 대한 증오로 눈을 돌린다는 것은 현실을 만든 장본인인 자신의 책임을 감추려는 술책에 불과하다. 결국 돌아오는 물음은 '허약한 민주주의' 하나뿐 없다. <햄릿>에서도 거트루드와 클로디어스 왕은 제대로 힘도 써보지 못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마지막까지 셰익스피어가 관심을 놓지 않았던 것은 주인공 햄릿이다. 햄릿은 우리들이다. 감수성 많고 우유부단하며 당대의 온갖 모순들을 짊어진 살아 숨쉬는 생활인이다. 정당한 것에 분노할 줄 알고, 분노를 행동에 옮길 줄 아는 소박한 인간형이다.


오필리아가 죽자 모든 희망이 사라졌다.

<햄릿>에서 지나치기 쉬운 장면이지만, 가장 중요한 장면이 바로 '오필리아의 죽음'이다. 

 


▲ 햄릿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미쳐버린 오필리아가 물속에 스스로 몸을 던졌다. 이것은 4막 7장에 나오는 장며니다. 그림은 존 에버렛 밀레이의 그림이며 한길 그레이트북스 <비평의 해부>에서 삽화로 첨부한 것을 스캔한 것이다.

"버드나무 한 그루가 애루에 경사져 자라는 곳, 버드나무는 유리 같은 개울 표면에 백발 나뭇잎을 비추고 그곳에서 그녀는 환상적인 화환을 만들었단다. 야생꽃들, 쐐기풀, 데이지, 그리고 어린 자주빛 난초로, 이 난초를 방종한 목동들은 좀 숭한 이름으로 부르지만, 우리나라 정결한 처녀들은 죽은 사람의 손가락이라 하지. 거기 기울어진 나뭇가지 위에 잡초 화환을 걸어 주려 오르는데, 못된 가지가 부러졌고, 그때 잡초 묶음과 그녀 자신이 떨어졌단다, 울음 우는 개울 속으로. 그녀의 옷이 넓게 퍼졌다, 그리고 인어처럼 얼마 동안 개울이 그녀를 실어 날랐다. 그러는 동안 그녀는 옛날 가락 몇 마디를 읊조렸단다. 그녀 자신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아니면 물속에서 사는 게 마땅한 피조물처럼. 하지만 오래갈 수는 없었지, 마침내 그녀 의상이, 물을 먹고 무거워져 그 불쌍한 아이를 끌어내렸단다, 감미로운 노래로부터 진흙창 죽음 속으로." - 거트루드 왕비의 증언, <햄릿> 164쪽


오필리아는 소박한 우리들의 가치를 상징한다. 예컨대 옛날에 운동을 한다, 조국을 위한다며 내팽개친 가족과 소박한 가치들이 오필리아에 모여 있다. 햄릿은 맹목적인 복수심에 불타 오필리아의 사랑을 한껏 조롱하였고 그녀의 아버지를 너무 쉽게 죽여버렸다. 그녀의 진심은 아랑곳하지 않고 대신이자 그녀의 아버지인 폴로니어스와의 관계에서만 이해할 뿐이다. 진정한 가치가 혼탁한 가치 바로 옆에 있음을 깨닫지 못했다. 소박한 가치는 배신을 당했고, 때문에 모든 것이 끝이었다.

언론인들은 언론자유와 독립언론을 외치지만 그것이 어디에서 만들어지는지 알지 못한다. '그들만의 언론자유'일 뿐이다. 독립언론이라는 '독립'조차도 동아투위, 조선투위 때 사용했던 개념에서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새로운 시대, 급격하게 돌아가고 있는 시대에 가장 한가한 사람들이 언론인들이다. 운동가들도 패권주의에 젖어 있다. 진보정당은 좁은 땅 위에서 기득권 싸움을 벌이다가 둘로 쪼개졌다. 당이 갈라짐과 동시에 민주주의의 심장이 쪼개졌다는 사실을 그들은 여태 모르고 있는 듯하다.

정치인들은 민생 민생 외치지만, 그 민생의 실체가 바로 오필리아이다. 오필리아의 죽음은 민생의 허무한 죽음이다. 월급쟁이들은 경제의 짙은 그림자를 아직 모르겠지만, 현장에서 실물경제를 느끼며 자영업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지금이 얼마나 잔인한 시간인지 아무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오필리아는 햄릿을 구원해줄 마지막 기회였지만, 오히려 아버지 왕보다 더 헛된 죽음을 맞이했다. 결국 클로디어스도 죽고, 거트루드도 죽고, 햄릿도 죽고 모두 죽고 말았다.

<햄릿>의 이야기에서 가장 시급한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햄릿이 클로디어스를 죽여 아버지의 복수를 하는 것? 배신자 거투르드 계모 왕비를 처단하는 것? 오필리아를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것?

햄릿에게 유령으로 현현한 아버지 왕은 그 답을 알고 있었다. 마치 신탁의 목소리처럼 모호하고 잔잔하게 햄릿에게 들려주었지만 햄릿은 그 진의를 알아듣지 못했다.

"비록 네가 복수를 추구하더라도, 네 심성을 부패시키지 말 것, 네 영혼이 네 어머니에게 어떤 벌도 획책하지 말 것. 그녀는 하늘에 맡길 것." - 아버지 왕, <햄릿> 45쪽

 
김정환의 <햄릿>은 독특하다. 시인이 시인을 번역했다는 사실도 재밌지만, 문체가 마치 거친 음식을 먹는 듯한 기분이다. 햄릿의 다른 텍스트를 보면 부드럽고 먹기 좋게 만들어놓은 고기 같지만 김정환의 <햄릿>은 의도적으로 투박한 언어를 많이 사용했다. 아니, 시인인데 이런 언어를 사용했을까? 그 비밀은 역자후기 맨 마지막 부분에 덧붙여 놓았다.

""'너무 매끄러움'은 인간 사회의 온갖 신분, 온갖 직업 및 분야의 현상, 상승 및 타락, 그리고 해체 과정을 셰익스피어 '당대적'으로 생생하게 보여 주는 광경을 놓치지 십상이고, 그렇게 되면 많은 것을 놓치는 것이다." - 역자해설, <햄릿>2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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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전 재산을 빼앗고 필리핀에 방치한 아들의 행각이 모 방송을 통해 소개돼 충격을 주었다. 방송에 따르면 필리핀에서 사업을 하던 임모씨는 부모에게 관광을 시켜드리겠다며 노부부를 필리핀으로 데려왔다. 한 달간 극진히 노부모를 모셨던 그는 전 재산을 정리해 필리핀에서 함께 살 것을 제안했다. 부부는 아들의 말만 믿고 약 2억 원이 넘는 재산을 정리해 아들에게 맡기고 필리핀으로 향했다. 그런데 필리핀에 도착한 지 사흘 만에 아들은 돌변했다. 재산을 돌려주지 않았고 말도 통하지 않는 타국에 부모님을 방치했던 것.


‘현대판 고려장’을 방불케 하는 이런 작태는 우리 사회에 종종 기사로 나온다. 어느 60대 재력가의 사망사건에 살인교사 혐의 용의자로 딸이 거론되기도 한다. 낳아주고 키워준 것에 대한 감사도 하늘이 마를 날 없을 터인데 부모의 재산을 갈취하려는 패륜아적인 형태는 보는 이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은 어땠을까? 리어왕이 재산을 물려주려 할 즈음 딸 셋에게 자신의 대한 사랑을 담보로 하려 한다.


큰딸 고네릴은

“시력보다, 움직이는 공간보다, 그리고 자유보다 더 소중하옵니다.

가치를 잴 수 있는 것, 비싸거나 휘귀한 것보다 더,

목숨 바로 그것, 게다가 우아하고, 건강하고, 아름답고, 명예로운 목숨 못지않게.

언어를 빈약하게 만드는, 그리고 말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사랑, 온갖 비교를 능가할 만큼 폐하를 사랑합니다.”


이보다 더 이상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표현이 있을까. 그럼에도 둘째 딸 리건도 만만치 않다.

“폐하, 저를 구성하는 실속은 제 언니와 동일합니다.

다만 언니는 너무 모자라군요, 저는 스스로

가장 소중한 감각의 광장이 누리는

온갖 다른 기쁨을 적이라 선포하고,

오로지 소중한 폐하의 살아 속에서만

행복을 느끼는 것을 아니까요.”


마지막 딸 코델리어는 사랑이 말보다 무겁다고 이야기 하며 아무 말도 않는다.

“불행하게도, 저는 제 마음을

입에까지 들어 올릴 수 없나이다. 제가 폐하를 사랑하는 것은

자식으로서 의무에 따른 것이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불쌍한 리어왕은 첫째, 둘째 딸의 말에 흡족해하는 반면 코델리어를 반역자라 칭하며 내친다.


노인 리어왕의 유산 상속의 선택은 그 자신은 물론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했던 코델리어 마저 불행의 늪으로 이끈다.

50대 후반 분들의 모임에 참석했던 한 분의 이야기이다. 옛날에는 다들 잘 나가던 사람들인데, 어떤 사람은 지금도 건강하고 좋은 데 어떤 사람은 기운도 없어 보이고 왠지 꾀죄죄 해 보인다는 거다. 가만 보니 꽤죄죄 한 사람은 모든 재산을 다 물려준 사람이다. 그런데 예전 보다 더 좋아 보이는 사람은 왜 그럴까?


그 분의 아내는 며느리들이 올 때면 패물을 있는 데로 꺼내놓고 딱으라고 이야기한다고 한다. 그러면 며느리들이 열심히 딱는다고 한다. 또, 어떤 날은 돈이 들어있는 통장을 집안 여기저기에 뿌려놓는다고 한다. 아들과 며느리들이 보라고. 그러면, 그 다음 주에는 자식과 손자들이 열심히 찾아온다는 이야기다.


우스갯소리 같기도 한 이런 이야기는 거짓으로 치부하기에는 자주 접할 수 있는 세상의 이야기라 어느 정도 그럴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이제 40, 50대로 넘어가는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교훈으로 삼아야 하는 세상이 되었을까. 리어왕이 조금 더 현명하여 위의 이야기처럼 두 딸들의 사탕발림을 거꾸로 이용하려 했다면 그와 그의 사랑하는 딸 모두가 행복했을 것 같다. 물론 그렇다면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은 그냥 이야기 거리에 불과 했겠지만.

 

 

 햄릿이 난해를 받아들임으로써 고통 받는다면 그는 받아들이기를 거부함으로써 고통 받는다. 은혜를 입은 자가 뒤통수를 치고, 그는 길길이 뛴다. 이런 배은망덕한 놈들 같으니…. 그러나 그의 은혜가 없었다면 비극도 없었다. 그의 은혜는 과도기 은혜다. 역사는 그의 은혜를 입지만 그의 마지막 예상조차 빗나간다. 더 교활한 배반, 훨씬 복잡한 이해집산이 어이지고 교차되는 와중에 찬란하고 튼튼하고 완강한 미래가 탄생한다. 그는 여러 단계의 광증과 깨달음에 달하지만, 그것을 인정할 수 없다.  - 역자 김정환 해설

 

<리어 왕 KIng Lear> (아침이슬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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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받으리라, 법률가여. 너희는 지식으로 들어가는 열쇠를 가지고 너희 자신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는 사람들까지 막았다 - 예수(누가복음 11장 52절)
좋은 법률가는 나쁜 이웃 - 루터


법률가에 대한 비판은 역사적으로 매우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그것은 법이 정의와 진실보다는 권력과 이익을 편에 붙어서 날파리같은 행태를 할 때가 더 많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특히 권력과 이익에 붙어먹으면서 말로는 정의와 진실을 외치니 지식인들이 보기에 법률가들이 얼마나 위선적으로 보였겠습니까?



▲ 윌리엄 셰익스피어(1564~1616)


법률가에 대해서 가장 강력한 비난을 한 사람은 아마도 셰익스피어가 아닌가 합니다.

『헨리 6세Henry IV』제2부 제4막 제2장에서 농민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우리가 맨 먼저 해야 할 일은 법률가들을 모조리 죽여버리는 일이다"

어떻게 이 말을 하게 되었는지 전후 사정을 살펴본다면 훨씬 설득력 있게 다가옵니다.
농민들이 무기를 들고 광장에 나와 혁명을 선언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기득권에 복무했던 인사를 하나씩 잡아들여 즉석에서 재판을 벌이기에 이릅니다.

케이드 : "자, 모두들 용감하여라. 용감한 그대들의 대장은 혁명을 일으킬 걸 선언한다. 그렇게 되면 이 나라에서 한푼에 하나 살 수 있던 빵을 세 개 이상 살 수 있게 되고, 서말들이 술동이가 아홉말들이 술도이가 될 것이다. 집에서 만든 묽은 술을 마시는 자는, 중죄로써 처단할 것이며, 나라의 토지는 공유지로 할 것이다. 칩사이드 홍등가에서는 내 말이 풀을 먹을 것이다. 왕이 된다면, 물론 왕이 되지마는..."
- 일동 : 왕 만세!
- 셰익스피어 전집2(사극편,정음사) 중에서


이 와중에 차탐이라는 자의 서기를 엠마뉴엘을 끌고 옵니다. 서기는 증서도 작성하고 법정 양식대로 글도 쓰는데, 농민들은 "놈들은 항상 서류 꼭대기에다 이렇게 쓴다. 그건 당신에게 불리하오"라고 한껏 조롱합니다. 결국 서기는 붓과 먹통을 목에 달아 죽게 되는데, 법률가를 죽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붓과 먹통을 함께 죽인다는 상징적인 행위입니다.

<법률사무소 김앤장>를 쓴 장화식 씨는 한 강연회에서 김앤장의 변호사들에 대해서 소개를 했는데, 그렇게 신사적이지 않을 수 없다고 합니다. 깍듯이 대하고 말투 역시 교양이 넘친다고 합니다. 그렇게 표정 하나 안 바뀌며 사람들의 생계를 간단히 끊어버리는 것이 그들의 실체입니다.

예컨대 핸드폰 문자 해고로 유명한 2004년 외환카드 노동자 정리해고 사건에서 휴대폰 문자해고 아이디어를 고안하고 법적 효력이 있음을 자문해준 것이 이 변호사들이었습니다. 흥국생명 역시 2년 동안 구조조정을 하지 않겠다고 했다가 1년 만에 400명을 정리해고하도록 부추긴 것은 김앤장이었습니다. 협약을 어길 경우 벌칙이나 금정 배상이 없다는 것을 가르쳐준 것 역시 김앤장의 교양 넘치는 변호사들이었습니다.
폐암 환자들이 마지막 생명줄로 인식돼 온 아스트라제네카의 독점적 특허권을 완화해달라는 시민단체의 의견을 받아들여 복지부가 약가 조정을 단행하려 하자 이것을 할 수 없게 행정법원에 가처분 신청을 낸 아스트라제네카의 소송을 맡은 것도 김앤장이었습니다.

고객의, 아니 고객이 지불하는 수임료를 위해서라면 공공성이나 정당성은 헌신짝처럼 팽개칠 수 있는 것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건들인데, 때문에 저자는 이들을 '악마의 변호사'라고 불렀습니다.



오늘 경향신문 오피니언 면을 살펴보다가 제가 법관들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분노를 가장 잘 표현한 칼럼이 있어서 좀더 취재를 더 해본 것입니다. <
법치의 종말>이라는 글입니다.


법치의 본질은 법을 통해 정부권력을 통제하고 이를 통해 권력으로부터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함에 있다. 실제 ‘법치의 확립’이란 말은 정부가 국민에게 요구할 수 있는 그 어떤 것이 아니다. 문명사회에서의 그것은 국민에게 준법정신을 강요하는 것과는 관련이 별로 없다. 오히려 그것은 국민이 정부에 대하여 내리는 엄중한 명령이다. 권력이 남용되지 않도록 국민들이 법률을 만들고 이 법률로써 정부를 견제하고 통제하는 것이 바로 법치의 실체이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는 이런 법치를 전혀 알지 못한다. 그들의 법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뜻대로 휘두르는 통로이자 수단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 그들의 법전에는 오로지 권한의 법만이 담겨져 있다. 농식품부 장관은 미국산 쇠고기 검역조건을 정할 권한이 있고, 경찰청장은 시위자들을 연행할 권한이 있고, 대통령은 KBS 사장을 해임하고 부정한 경제인들을 사면할 권한이 있다. 그 권한의 상층에 존재하는 헌법가치나 인권이념, 민주주의 혹은 정의의 원칙들은 하나같이 뒷전으로 밀려난다.
- 법치의 종말

 
   리어왕           폭풍우             햄릿               멕베스              오셀로  


네덜란드 수입지로 만든 <셰익스피어> 시리즈인데, 법관들이 무서워한다는 <헨리 6세>도 출간될 수 있을것으로 기대합니다. 현재 1차분 5권에 이어 올해 연말께 2차분으로 '로미오와 줄리엣', '한여름 밤의 꿈', '십이야' 등 7편이 출간될 예정이며 영국 사극 11편, 로마 사극 9편, 나머지 희극과 소네트가 차례로 출간돼 내년말까지 총 40권으로 완간될 계획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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