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1985년, 대학 1학년....

 

그냥 스무살의 나이, 내가 알면 얼마나 알았고 내가 자라면 얼마나 자랐으랴.

그냥 좀 달라지고 싶었다.

고교생활  3년동안  좋은 친구들을 만난 것 외에 특별한 개성도 재주도 없이 자랐던 나는

돌이켜보니 초중고 12년동안 옳은 별명 한 번 제대로 들은 적이 없었다.

 

겨우 고3때, 수염 안깎고 좀 터프해 보일려고 꾸지리 해가다닌 탓에 산적,또는 원시인이라는

말을 잠시 듣긴 하였지만 지금도 그 당시의 벗들을 불러 놓고 물어보면 아무도 내 별명은

모를 것이다. 없었으니까...

 

대학에 들어가며 이제는 달라져야 하지 않겠나라고 생각하고 스스로 다짐하였고

- 아마도 지그 지글러의 [정상에서 만납시다]를 본 영향도 컷으리라 -

1985년 3월 2일, 입학과 동시에 인사를 나눈 학과 동기들을

학교 정문에서 기다리다 먼저 손 내밀고 술 먹으러 가자 한 것이 내 삶을 바꿔놓았다.

 

나는 그 날 이후로 과에서 좀 설치는 녀석으로 대우를 받았었고 그 여세를 몰아

특별활동 - 당시에는 써클이라 부르던 - 으로 <극예술 연구회> 동아리에 가입하였다.

그리고 동시에 학과 학생회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그때가 1985년 이었다.

 

 

Ⅱ.  그 해 봄날

 

<극예술 연구회>에는 나의 소심한 성격을 바꿔보려고 들어갔는데 과연 도움이 될 듯하였다.

공연준비를 도우며 배우는 것도 있었지만, 학과 동기 선배들과는 또 다른 각 과에서 모인

선배들이 전해주는 매력은 대학생활의 낭만이었다.

특히 무용과 선배들은 당연 선망의 대상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나는 결국 연극반, <극예술 연구회>를 한 학기만에 접고 말았다.

까닭이야 여럿 있었지만 공식적인 이유는 "학생회"활동과 병행하기에

시간이 모자란다는 것이었고  - 사실 힘든 시간들이었다.

1985년~1987년까지 이어진 민주화 운동 속에 당연히 나도 있었으니까 -

속 까닭은  5~6월쯤 진행되던 첫 무대에 설 기회가

심한 사투리 탓에 좌절된 것이었다.

 

이제서야 고백하지만 당시 나는 꽤나 상처를 받았던 것 같다.

연극에 대한 열정은 줄어들지 않았지만 자신이 무대에 서지 않는 연극은

또 무엇이냐며 비겁하게 줄행랑을 쳤던 것이다.

 

그 날 이후 연극관람은 가급적 자제하였지만 책으로, 극본/희곡으로는 나름대로 열심히

극을 만나곤 하였다. 그래야만 삶의 작은 위로가 될 것처럼 여겨졌기에....

 

 

Ⅲ.  김정환, [햄릿]

 

젊은날 내 가슴을 울리던 시인 중 한 사람이 김정환이었다.

지금도 그의 시집이 내 책장에 몇 권 꽂혀 있고 나는 그의 초기시들 몇 편을

아내에게 연서로 보내기도 하였다.

 

 가을에 - 김정환

우리가 고향의 목마른 황토길을 그리워 하듯이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것은
그대가 내게 오래오래 간직해준
그대의 어떤 순결스러움 때문 아니라
다만 그대 삶의 전체를 이루는,
아주 작은 그대의 몸짓 때문일 뿐
이제 초라히 부서져 내리는 늦가을 뜨락에서
나무들의 헐벗은 자세와 낙엽 구르는 소리와
내 앞에서 다시 한번 세계가 사라져가는 모습을
내가 버리지 못하듯이
내 또한 그대를 사랑하는 것은
그대가 하찮게 여겼던 그대의 먼지, 상처, 그리고 그대의 생활 때문일뿐
그대의 절망과 그대의 피와
어느날 갑자기 그대의 머리카락은 하얗게 새어져 버리고
그대가 세상에서 배앗긴 것이 또 그만큼 많음을 알아차린다해도
그대는 내 앞에서 행여
몸둘바 몰라 하지 말라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것은
그대의 치유될수 없는 어떤 생애때문일 뿐
그대의 진귀함 때문은 아닐지니
우리가 다만 업수임 받고 갈가리 찢겨진
우리의 조국을 사랑하듯이
조국의 사지를 사랑하듯이
내가 그대의 몸한 부분, 사랑받을 수 없는 곳까지
사랑하는 것은

 

가슴을 때리던 이러한 서정과 변혁의 시대를 노래하던 환희가 어울려 빚어낸

그의 시집 [기차에 대하여](1990)는 아직도 즐겨보는 시집중의 한 권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번역을, 그것도 셰익스피어의 연극에 손을 대어 우리 곁에 다가 왔다.

그냥 [햄릿]이라면 만나지 않았으리라. 읽지 않고도 다 안다고 생각하였기에.

김정환 시인이 새롭게 번역한 [햄릿]은 도대체 어떤 느낌으로 다가올까>라는 생각에

선뜻 이 책을 만나게 되었다.

 

 

 

선명한 붉은색 표지에 간결한 제본, 맘에 들었다. 책을 펼치고 읽어내려가니, 먼저

다가오는 것이 읽는 맛이 까끌까끌 하다는 것. 적절한 표현인지 모르겠지만

기존에 보아왔던 번역과는 다른게 읽기가 수월치 않다.

 

그동안 너무 부드럽게 다듬어져온 책들만 보아서인가? 이것 참 만만치 않네 하며 따라간다.

그리고 다시 드는 생각, 허 참, 읽다보니, 대사를 읊조리듯 읽고 있다. 물론 속마음으로이지만...

 

하지만 네 아버지도 아버지를 잃었음이니,

그 아버지는 또 그 아버지를 잃었고, 살아남은 자는

자식된 도리로 얼마 동안

순종의 슬픔을 치러야 하는 법. ( "1막2장"에서 ) (21)

 

따라가며 나도 마치 연극 속의 배우가 된 듯 하다.

그리고 이 대사가 특히 가슴에 와닿은 것은

마침 이 대사를 읽기 시작할 때쯤 친한 친구의 아버님이 돌아가셨기 때문이리라.

 

김정환의 번역은 글을 글 자체로만 훑고 지나갈 수 없도록한다.

그래서 극의 효과를 올리도록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마치 그의 시를 읽고 있을 때처럼...

 

죄지은 자 미치게 하고 죄 없는 자 간담을 서늘케 하리.

모르는 자 어리둥절케 하리. 그리고 정말 당혹케 하리. ( "2막2장"에서 ) (83)

 

살 것인가, 아니면 죽을 것인가. 그것이 문제다.

마음에 더 숭고한 태도는, 고통으로

난폭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견디는 것인가,

아니면 무기를 쳐들어 난관의 바다에 맞서는,

그리고, 거부하며 그것을 끝장내는 것인가, 죽는다,잠든다 -

그뿐, 그리고 잠든다는 말이 끝장,  ( "3막1장"에서 ) (89)

 

김정환은 "역자 해설"에서 '셰익스피어 문학은 자연의 비유에서 인간의 비유로 넘어가는

대목을 흥미진진하게 보여주지만, 그렇기 때문에 비유 또한 너무 매끄럽게 다듬지 않았다.'

(212) 고 예기하는데 내가 느낀 껄끄러움이 그 탓이라면 나도 제대로 [햄릿]을 만난 것일까?

 

이야기를 하다보니 또 하나의 고백이 더해진다.

그러고보니 제대로 [햄릿]이라는 책을 만난 적이 몇 번이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집에 있는 "동화출판공사"의 70년대판 [세계문학전집]에서 한 번 보고는 이번이 제대로 만난

거의 처음의 [햄릿]이라는 사실, 조금은 부끄럽기도 하지만 뭐, 이런 일이 한 두번 이랴.

 

워낙 유명한 작품들은 마치 다 알고 있고 다 만나본 것 같은데 제대로 만나보면

이번이 처음이라는 놀랍지만 당연한 사실들을 이번에도 경험하는데 아마도 단순히

개인의 기억탓만은 아니리라.

 

우리 주변에 퍼져있는 지식과 추억의 혼재, 특히 내가 잘 저지르는,에서 벗어나

객관적으로 사물을, 세상을 바라보고 인식하는 훈련을 제대로 해보지 않았었기에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에서처럼 읽지 않고도 다 아는 것처럼 되는 것이리라.

 

결국, 진실을 알고도 복수를 망설이던 햄릿으로 인하여 사건은 더 확장되고

아버지도, 삼촌도, 어머니도, 사랑하는 연인도,그의 가족들도 모두 죽어버리는

어처구니 없는 결말에 이르러서야 나는 책을 덮는다.

 

우리네 삶에 대한 '난해'함이라고 역자 김정환은 짚어주지만

뭐, 꼭 [햄릿]이 아니어도 우리는 힘들고 어려운 세상 속을 살아가고 있고

그래서 이 책에서 만나는 [햄릿]의 고뇌가 갖고 있던 선입견처럼 아주 심각하고

무겁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그점에서는 다행이다.

 

이 말은 우리삶의 무게가 그만큼 무거워졌다는 이야기이자,

이 책이 씌어지던 시대로부터 400년이 지난 지금에는

이 정도의 비극은 감내할 수 있다는 무덤덤함이리라.

 

오늘도 우리는 [햄릿]처럼 고뇌하는 삶을 산다는 이야기는

이제는 모자라게 느껴지는 세상이 되었나보다. 젠장...

 

나는 또 어떤 계기가 오면 오래전 그 날로 돌아가 잊어버린 내 기억의

한 자락을 꺼내어 이처럼 갈무리해둘 수 있을까?

 

2008.10.31.  밤, 흔들리는 가을이다. 그래도 좋다

 

들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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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환 / 늦가을 노래

 

  저문 날, 저문 언덕에 서면
  그래도 못다한 것이 남아 있다
  헐벗은 숲속 나무 밑, 둥치 밑에
  스산한 바람결 속 한치의 눈물 반짝임으로
  마지막인 것처럼, 가랑가랑 비는 내리고
  그래도 손에 잡힐듯
  그리운 것이 있다
  살아남은 것들이여 부디
  절규하라 계절이 다하는 어느 한숨의 끝까지
  우리들 사랑노래는 속삭여지지 않는다
  기억해다오 어느 외침의 미세한 부활과
  절망과 거대와
  그리고
  어떤 질긴 사랑의 비린 내음새를.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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