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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를 바탕으로
델핀 드 비강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16년 10월
평점 :
절판
그녀는 나에게 조용히 다가와 내 모든걸 빼앗은 약탈자였다.
그때의 난 자서전적인 소설을 낸 덕분에 내 가족으로부터 외면을 받고 흔들리고 있었고 내게 아주 많은 영향을 미치는 아이들이 성장해 내 품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으며 옆에서 나의 흔들림을 잡아줄 오랜 연인은 자신의 일로 바빠 나의 이런 위험한 상황을 미리 알아챌수 없었다.
이렇게 마치 모든것으로부터 외면받아 오로지 세상에 나 혼자 남아있는것처럼 느끼고 있을때 그녀 L은 조금씩 다가와 어느새 내 모든것에
간섭하고 잠식하고 있었다는 걸 그때는 미처 몰랐다.
내가 이런 모든걸 알았을땐 이미 난 작가로서의 자존감이 떨어졌을뿐 아니라 심지어는 컴퓨터로 단 한줄의 글도 쓸 수없었고
내 모든 일상이 무너져 내렸지만 더 무서운 건 그녀의 존재를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내가 어떻게 작가이면서도 단 한줄의 글도 쓸수 없게 되었는지 그 2년간의 과정을 그리고 있는 델핀 드 비강의 소설 `실화를
바탕으로`는 자신이 겪은 일을 회상하는 형식으로 고백처럼 써 내려간 수기 같은 글이었지만 처음의 잔잔하고 덤덤한 말투같은 글과 일상을
읽어가다보면 어느순간 그녀 즉 소설속 내가 느낀 숨막힘과 긴장을 책을 읽는 나도 느끼면서 호흡이 빨라지게 한다.
어떨땐 자신과 같은 취미를 공유하고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친구이자 동지같고 어떨땐 자신의 고민을 들어주고 수다를 떨어주는...자신이
원했지만 가질순 없었던 10대 소녀친구같고 어떨땐 자신의 소설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 날카로운 비평을 가하고 조금이라도 자신이 원하는 방향과
다르면 가차없는 말로 찔러대는 L의 모습은 매력적이면서도 한편으로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해 소설 속 내가 그녀 L에게 빠져들고 매혹당하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일수도 있을 정도로 L은 사람을 조정하는 힘이 대단한 여자였다.
그렇다고 누가 죽거나 엄청난 사건이 등장하지않지만 오로지 그녀가 L과 만나면서 겪게 되고 변화된 일상을 그리면서도 마치 엄청난 음모나
비밀이 숨겨져있는 스릴러 소설과 같은 긴장감을 맡보게 한다
그녀 L의 정체는 무엇일까 하는 궁금증부터 시작해서 책을 읽어가다보면 책 속에 나오는 사람들이 주인공인 나에게 품게 되는 의심에도 동조하게
되는 부분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과거를 회상하는 주인공에게 L은 틀림없이 실체가 있는 존재지만 아무도 그녀를 본 적이 없고 어디에서도 그 흔적을 찾을수 없으며 심지어 심한
우울증과 무기력증에 걸려 휘청거리는 그녀의 모습에서 다른사람의 의심처럼 진짜 L은 그녀가 만들어 낸 환상의 존재는 아닐까 하는 의심을 심어주기에
충분하고 아마도 이런 설정을 작가는 노렸던게 아닐까 생각한다.
책을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진짜 L이라는 여자가 실체하는 지 아님 이 모든게 그녀의 망상이 그려낸 인물인지 끝까지 헷갈리게 하는거...마치
미스터리 소설 `환상의 여인`에 나오는 그녀처럼
그래서 제목이 암시하는 바도 상당히 이중적이고 의미심장하다.
이 소설속 내용이 실화를 바탕으로 소설을 쓴 것이라는 것인지 아님 소설속의 L 이 줄곧 주인공에게 주장한것처럼 모든 문학은 더 이상 픽션이
아닌 실화를 바탕으로 실화를 쓰는것이 문학이 나아갈 길이라는 걸 의미하고 하는건지...
상당히 감각적이고 매력적인 글을 쓰고 있는 델핀 드 비강의 소설은 이제 2편을 읽었지만 2편 모두 생각도 못한 방향으로 독자를 이끌어
가는...그래서 그 끝을 짐작하기 어려운 매력을 가지고 있어 다음편에 대한 기대감도 높혀준다.
과연 다음엔 또 어떤 매력적인 이야기를 이끌어갈지..몹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