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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와 게의 전쟁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일본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들이라면 낯설지 않을 이름인 “요시다 슈이치(吉田修一)”, 국내에 번역 출간된 스무 권 남짓의 그의 작품들 중 <퍼레이드>, <동경만경>, <악인>, <요노스케 이야기>, <일요일들> 등 다섯 권을 읽었으니 나에게도 꽤나 익숙한 일본 작가들 중 한 명에 속할 것 같다. 그의 작품들 중 추리소설인 <악인>을 제외한 네 권은 그다지 감흥이 없었던 것을 보면 나는 그를 추리소설 작가로 기억하고 있는 듯 하다. 이번에 그를 “일반소설”로 다시 만났다. 일본 전래 동화인 “원숭이와 게의 이야기”를 빗대어 평범한 듯 하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원숭이와 게의 전쟁(은행나무/2012년 12월)>이 바로 그 소설이다.
나가사키의 외딴 섬 “후쿠에지마”에 있는 술집 “주얼”에서 호스티스를 하던 “미쓰키”는 돈을 벌겠다며 뭍으로 나간 남편 “도모키”가 한달 넘게 감감무소식이자 그를 찾기 위해갓난 아기를 들춰 업고 물어물어 도쿄까지 찾아온다. 남편이 호스트로 일했다는 클럽을 찾아갔지만 남편은 이미 그곳을 그만두었고, 막막해하던 참에 남편이 근무한 클럽과 같은 건물에 있는 한국식 술집 “란(蘭)”의 바텐더이자 몇 번인가 남편을 자신의 집에 재워졌을 정도로 친분이 있던 “준페이”를 만나 하룻밤 그의 집에서 머물게 된다. 준페이는 미쓰키에게 남편의 집이 자신의 집에 있으니 언제고 자신에게 다시 연락을 해올 것이며 연락이 오면 미쓰키에게 꼭 연락하라고 하겠다며 미쓰키 모자(母子)를 섬에 돌려보낸다. 며칠 후 준페이의 집에 돌아온 도모키는 준페이의 말대로 섬으로 돌아간 미쓰키에게 연락을 한다. 그런데 준페이와 도모키는 무슨 일인가를 꾸미고 있다. 준페이가 얼마전 뺑소니 사건을 목격했는데, 범인이라고 자수한 사람이 자기가 사건 당시 본 사람이 아닌, 말그대로 누군가가 진짜 범인을 대신해 거짓 자수를 한 것이다. 조사를 해보니 뺑소니 사건을 저지른 장본인은 거짓 자수한 사람의 동생이자 세계적인 첼리스트인 “미나토”였고 준페이와 도모키는 그를 협박해 돈을 뜯어내려고 한다. 그런데 이런 협박에는 영 초짜인 이 둘의 협박은 영 어설프기만 하고, 미나토의 행동을 의심쩍어하는 그의 매니저 “유코”가 이 일을 알게 되고 해결사로 나서면서 일은 점점 꼬이게 된다. 여기에 미나토를 대신해 감방에 들어간 형의 가족들과 미나토의 고령(高齡)의 할머니, 준페이가 근무하는 술집의 마담과 주변인물 등 다양한 사람들의 사연이 연이어 등장하고 그 시점에서 이야기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방향으로 전개된다. 원래 정치인 비서였던 유코가 술집 바텐더이자 어설픈 협박범에 불과한 준페이를 국회의원 후보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5선(選) 의원인 거물 정치인과의 격돌이라니. 이 불가능할 것 같은 해프닝에 대한 결말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이만 줄이기로 하자.
초중반까지는 그저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이야기 - 도시로 상경한 남편을 찾아오는 아내, 도시의 뒷골목에서 살아가는 소시민들의 삶 등 - 를 그리고 있겠거니 하고 사실 별 기대 없이 읽기 시작 - 자리에 누워서 설렁설렁 페이지를 넘겨가면서 - 했다. 뺑소니 사고가 나오고 준페이와 도모코가 어설프게 협박하는 장면에서도 결국 이 두 친구, 호되게 당하고 삶의 무상함을 깨닫고 끝맺겠군 싶었고 준페이와 도모코, 두 인물 위주로 진행된 이야기가 점점 주변 사람들로 확대될 때도 물론 저마다의 사연이 꽤나 짜임새있게 그려져 읽는 재미가 제법 쏠쏠했지만 그냥 분량을 채우려는 것이겠니 했었다. 그런데 이 책에서 초반 주인공인 준페이와 도모코, 미쓰키에 이어 가장 유력(?)한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유코가 등장하면서 초반의 다소 지루한 전개가 막을 내리고 이야기는 급물살을 타게 된다. 그저 도시 어두운 곳에 살고 있는 실패한 청춘들의 삶의 단편들 쯤으로 여겨졌던 이야기가 뺑소니 사건으로 등장인물들이 서로 얽히고설키는 어우러짐이 전혀 이야기를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어내는 것이다. 특히 바텐더에 단순 협박범에 불과했던 준페이가 엉뚱하게도 정치인으로 나선다는 설정은 처음에는 일견 당황스럽게까지 만들었는데, 이미 일본의 여러 문학상을 수상한 대중성과 작품성을 두루 갖춘 작가로 평가받는다는 작가의 명성답게 치밀하면서도 개연성있는 글솜씨는 비현실적인 설정에 따른 위화감이 아니라 오히려 이런 상황이라면 실제에서도 가능할 법도 하겠구나 하고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고 어느새 준페이와 그의 무리(?)들을 응원하게 만들 정도로 절로 공감을 이끌어낸다. 이때부터 느슨했던 책읽기는 바짝 탄력이 붙었고, 어떻게 결말이 날까 하는 궁금증에 마지막 페이지까지 단숨에 읽게 만들었으며, 만족스러운 결말에 기분 좋은 끝맺음을 할 수 있었다. 특히 미나토의 할머니인 96세 고령의 “사와” 할머니가 유치원 아이들에게 옛날 이야기보다 더 재밌는 이야기를 해주겠다며 이 책의 주인공들의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책의 마지막 장면은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던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이 소설의 메시지를 찾고자 한다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원숭이와 게의 이야기”의 교훈처럼 보잘 것 없는 약자들이 한데 힘을 합쳐 통쾌한 승리를 거둔다는 면에서 “희망”의 메세지 쯤으로 요약해볼 수 있겠지만 굳이 이런 메시지를 염두해 두지 않더라도 이야기 자체 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고 자못 감동적이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아뭏튼 이 소설은 이제 “요시다 슈이치”를 추리소설 작가로만 여긴 나의 오해를 한 번에 불식(拂拭)시켜준, 아니 글 참 잘 쓰는 작가이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만든 소설이었다고 평가하고 싶다. 요시다 슈이치, 앞으로 계속 만나봐야 하는 작가임에는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