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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자 잔혹극
루스 렌들 지음, 이동윤 옮김 / 북스피어 / 2011년 11월
평점 :
절판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다(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

안중근 의사의 명언(名言)처럼 책을 읽지 않으면 가시가 돋을 정도는 아니지만 “활자중독증(活字中毒症)”을 염려할 정도로 글 읽기에 집착을 보이곤 한다. 인터넷에 소개되어 있는 활자중독증 테스트를 해보면 20개 중 15개 이상이 해당되니 거의 중증(重症) 수준인 것 같다. 특히 화장실에 갈 때는 신문이나 잡지, 책을 꼭 챙기고 챙기지 못할 때는 주변에 보이는 글들을 꼼꼼히 읽으며, 집을 떠나게 되면 꼭 책이나 잡지를 챙겨가고, 서점에 가면 평균 3시간 이상 서서 책을 읽는다는 항목들에는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물론 이런 활자중독증이 “난독증(難讀症, dyslexia)" - 소아 혹은 성인이 단어를 정확하고 유창하게 읽거나 철자를 인지하지 못하는 증세 - 과 같은 심각한 학습 장애가 아닌, 어쩌면 자신의 책읽기를 은연중에 과시하는 의도가 다분히 담겨 있으니 괜한 염려 축에도 못 끼는 그런 것일테다. 그렇다면 아예 글을 읽지 못한다면 - “문맹(文盲,illiteracy)” - 어떤 느낌일까? 전국민 의무 교육 시대를 살고 있으니 글을 읽지 못하는 것을 상상할 수가 없지만 - 굳이 상상해보면 “아랍어(Arabic Language)" 책을 읽는 느낌이라고 할까? - 활자가 넘쳐나는 요즈음 시대에 글을 읽지 못한다면 ”매우“ 불편할 것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이며, 어쩌면 당사자들에게는 불편을 넘어서 수치스러움마저 느낄 수 도 있을 것이다. 최근에 이런 문맹이 불러온 끔찍한 살인을 그린 소설을 만났다. 영국 미스터리 소설계에서 거장의 대접을 받고 있다는 ”루스 렌들“의 <활자잔혹극(원제 A Judgement In Stone(1977) / 북스피어 / 2011년 11월)>이 바로 그 책이다.

 

 

“유니스 파치먼은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기 때문에 커버데일 일가를 죽였다.”

“추리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강렬했던 도입부를 선사했던 작품”이였다는 역자(譯者)의 말처럼 이 책은 첫 문장에 이 책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주인공인 “유니스 파치먼”이 뚜렷한 동기나 치밀한 사전 계획도 없이, 금전적 이득도 안전 보장도 없이 단지 읽고 쓸 줄을 몰랐기 때문에, 즉 “문맹”이었기 때문에 “커버데일” 일가를 죽였단다. 그래도 그렇지 뭔가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커버데일 일가가 문맹이라는 이유로 유니스 파치먼을 엄청나게 구박을 하고 놀려댔거나 또는 협박을 해서 돈을 갈취했다던가 하는 그런 이유 말이다. 절로 궁금증이 드는 대목이다. 작가는 여기에는 더 깊은 사연이 존재한다며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침실 여섯 개, 응접실, 식당, 거실,욕실 셋, 주방, 다용도실, 그리고 넓직한 마당이 있는 “로필드 홀”에 살고 있는 커버데일 가족은 고학력에 문화생활을 즐길 줄 아는 전형적인 영국 중산층 가정이다. 안주인인 “재클린 커버데일”은 자신의 몸을 치장하는 데는 시간을 아끼지 않고 신경을 쓰지만 집 안을 돌보는 데는 영 젬병인 그런 여인이다. 남편 “조지 커버데일”과 상의하여 새 가정부를 들이기로 한 그녀는 자신의 집보다 백십킬로미터나 떨어진 런던까지 와서 런던 출신 가정부 면접을 보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데, 짙은 감색 레인코트를 입고 나타난 미혼 중년 여성 “유니스 파치먼”를 한눈에 마음에 들어 한다. 그녀의 공손한 침묵과 마음에 쏙 드는 수수한 외모가 마음에 든 것인지만 첫인사부터 “마님”이라고 부르는 유니스의 말이 그만 재클린의 크나큰 약점인 허영심과 속물 근성을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약점이 유니스의 섬뜩하리만치 차가운 인상이나 “그 분위기”라고 표현했을 그 느낌을 받지 못하게 만들고 결국 그 자리에서 유니스를 채용하고 만다. 그런데 유니스는 이제껏 커버데일 가족이 만났을 법한 사람들 중 가장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들이 만일 유니스의 과거를 알았더라면, 그대로 달아나 버리거나 전염병이라도 발생한 양 문을 닫도 빗장을 질러 버렸으리라. 유니스는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글도 깨우치기 전에 수천 명의 다른 런던 학생들과 함께 시골로 피신해야만 했었고, 그 이후 드문드문 학교에 다녔지만 적응을 하지 못하고 졸업할 때가 다 되었는데도 자신의 이름으로 서명하는 일과 몇 문장 밖에 읽지 못하는 “문맹”이었던 것이다. 손재간이 좋았던 턱에 어찌어찌 살아온 그녀는 병을 앓고 있지만 당최 죽을 기미가 보이지 않은 아버지를 베개로 눌러 죽이고, 연금을 부정 수령하는 이웃을 협박하여 연금을 갈취하며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날, 커버데일 집안의 구인 광고를 본 “이웃”이 그녀에게 권유 - 사실은 유니스를 쫓아 버리기 위해 작정한 것이지만 - 하고 유니스는 이웃이 써준 편지로 커버데일가에 보내어 가정부에 응모하게 되고 채용이 된 것이다. 유니스는 이런 과거를 철저하게 숨긴 채 커버데일 집으로 내려가 가정부 생활을 시작한다. 완벽한 일솜씨로 집안일을 척척 해내고 겸손하고 과묵한 성격의 유니스를 커버데일 부부는 매우 마음에 들어 하는데, 다만 한 가지 불만이 있다. 재클린이 종종 쪽지로 지시한 일들은 제대로 처리가 되지 않는 것이다. 일부러 잘 보이는 데 붙여 놔뒀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어디 외출하는 법도 없어 운전을 배우라고 권유도 해보지만 영 묵묵부답이다. 이처럼 아슬아슬한 상황은 계속 일어나고, 결국 그녀의 꼭꼭 숨겨둔 비밀을 커버데일 가족에게 들키고야 만다. 가장인 조지는 “글을 못 읽는다는 걸 알고 있소”라는 동정심 어린 말을 건네지만 유니스는 참기 힘든 수치심을 느끼게 된다. 결국 유니스는 책 첫 문장에서 언급한, 커버데일 가족 학살 사건, 일명 성 발렌타인데이 학살 사건이라는 끔찍한 살인을 저지르고야 만다.

 

 

책 시작과 함께 결말이 등장하고 그 결말의 깊은 사연을 풀어내는 구성이라 맥이 빠질 법도 하지만 읽는 내내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놓을 수 없는 꽤나 재미있는 책이다. 유니스가 자신의 비밀을 감춘 채 자신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커버데일 가에 적응해나가지만 그 과정이 언제 깨질지 모르는 얇은 유리잔을 손에 쥐고 서서히 힘을 가하는 것 같은 긴장감을 점점 고조시켜 읽는 내내 불안감을 가시지 않게 한다. 결국 비밀은 드러날 수 밖에 없었고, 커버데일 가족은 어쩌면 우리도 그런 상황이라면 같게 했을 행동, 즉 유니스를 동정하고 그녀에게 글을 가르치려 한다. 그러나 결국 그런 동정심이 지난 40여 년 동안 글을 읽지 못했어도 자기 방식대로 크게 불편하지 않은 삶을 살아온 유니스 파치먼에게 크나큰 수치심을 불러일으키고, 결국 수치심은 분노로 이어져 끔찍한 살인으로 이어진다. 어쩌면 유니스의 살인은 자신들은 그런 의도는 없었겠지만 한 인간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버릴 수 도 있었던, 그래서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한 방어적인 행위는 아니었을까? 작가는 이 책을 통해서 자신과 다른 불우한 처지의 사람들에게 가지게 되는 동정심과 선의가 그 사람들에게는 의도한 바와는 전혀 다르게 큰 상처가 될 수 있음을 경계하라고 말하려고 한 것인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작가는 유니스의 극단적인 행동에 대한 어떤 정당성이나 또는 일말의 연민을 부여하려고 하진 않는다. 그 집을 떠나버리면 그만이었을 것을 살인까지 저지르는 유니스의 극단적인 행동은 아무리 값싼 동정심의 해악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도 영 납득이 가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렇기에 다 읽고 나서 유니스의 과거와 수치심의 크기가 어떻했는지 알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값싼 동정심의 결과가 이런 끔찍한 살인이었다는 결말이 충격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무 과장된 화법이라는 아니었을까 하는 그런 느낌을 지울 수 가 없었다.

 

 

그렇다면 추리소설로써의 재미는 어떨까? 사실 미리부터 결말을 제시했고, 그 과정도 쉽게 예측할 수 있으며 마지막 유니스의 범죄 사실이 드러나는 대목도 이렇다 할 트릭이나 반전을 찾아볼 수 가 없었으니 미스터리한 면은 그다지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굳이 분류하자면 <죄와 벌>과 같은 “범죄소설” 쯤으로 볼 수 있을까? 

 

 

기발한 트릭과 멋진 반전을 기대한다면 실망스럽겠지만 충격적인 첫 문장과 함께 읽는 내내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놓을 수 가 없는, 독특하고 이색적인 추리소설을 맛보고 싶은 분들에게 추천하고픈 책이다. 특히 최근 독서 일기 책들을 여러 권 출간한 장정일 작가의 해설은 꼭 챙겨 읽기 바란다. 사실 책의 재미에 비해 너무 과분한 해설이 아닌가 싶은 느낌이 없진 않지만 그래도 미처 느끼지 못한 재미와 감상을 일깨워주는 멋진 서평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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