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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칠 수 있겠니
김인숙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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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문학상, 동인 문학상을 수상한 중견 여성 작가 김인숙의 신작 장편소설 <미칠 수 있겠니(한겨레출판/2011년 5월)>, 제목만 보면 참 도발적이다. “워커홀릭(Workaholic)"라고까지 평가받는 한국인 - 파이낸셜 타임스(FT) 독일판은 지난 7월 11일, 한국의 장시간 노동, 업무의 비효율성, 일 중독, 휴가를 꺼리는 문화 등을 지적하는 기사를 게재했다고 한다 - 이니만큼 “일”에 미칠 수 있냐는 뜻인지, 아니면 드라마나 영화의 단골 소재인 “사랑”에 미칠 수 있냐는 뜻인지 “무엇” 이라는 단어가 빠지다 보니 여러 상상이 든다. 그러나 낡은 집과 꽃나무 가지 표지 그림을 보면, 그리고 “미칠 수 있겠니, 이 삶에”라는 표지 문구를 보면 이 책이 “남녀의 사랑”을 그린 책이겠구나 하고 지레 짐작을 하게 한다. 그녀의 작품은 이 책이 처음인지라 새로운 작가를 만난다는 기대감과 함께 한편으로는 낯선 작가에 대한 저어함도 같이 느끼면서 읽기를 시작했다.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는 부부 “진”- 구분하기 위해 남편의 이름은 성(姓)을 붙여 “유진”이라고 부른다 - “진”. 7년 전 동남아 어느 섬 - 인도네시아 발리로 짐작되는 데 정확한 명칭은 언급하지 않는다 - 으로 건너와 가구공장을 운영하던 유진의 집 현지인 가정부( Servant)가 살해당하는 끔찍한 살인이 발생한다. 범인은 정신이상자이자 가정부의 남자 친구로 밝혀지지만, 가정부가 남편의 아이를 임신했던 터라 진이 범인이 아닐까 하는 의심스러운 눈총을 받는다. 그 사건 이후 유진 또한 실종되어 버리고, 진은 그런 그를 찾아 7년 동안 매번 섬을 찾아온다. 관광객을 안내하는 현지 드라이버 “이야나”는 차를 타고 가다가 개 한 마리를 치었다. 드문 일은 아니었지만 사고를 내기는 처음이었던 그는 차를 그대로 크게 꺾어 죽은 개를 지나쳐간다. 얼마 후에 다시 그 자리에 돌아왔을 때, 개 대신에 택시를 기다리는 외국인 여자가 서있었다. 바로 섬을 찾아온 “진”이었다. 이야나의 소개로 힐러를 찾아가 치료를 받은 진은 잊고만 싶었던 7년 전 살인사건을 다시 기억에 떠올리게 된다. 남편을 잃은 진과 사랑하는 약혼녀 수니와 헤어진 이야나, 둘 다 사랑을 잃어버렸다는 상실감에 가까워지고 급기야 하룻밤 사랑을 나눈다. 그 후 섬에 지진이 일어나고 섬은 일대 아수라장이 되어 버린다. 약혼녀 수니를 찾으러 가는 이야나에게 진은 구해달라는 문자를 보내오고, 거대한 쓰나미가 둘을 덮쳐 버리지만 둘은 기적적으로 목숨을 구하게 된다. 다시 해후한 둘은 7년 전 살인 사건에 서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진은 유진을 찾으러 7년 전 과거의 집으로 찾아가고 가정부를 죽였다고 알려진 청년을 교도소에 찾아가 만난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진 앞에 유진이 나타난다. 

과연 이 소설의 주인공인 “진”과 “이야나”는 무엇에 미쳐있는 걸까? 유진이 섬에 이주해오면서 둘의 사랑에 불안감을 느낀 진은 유진의 아이를 임신한 가정부가 자신의 침대에 누워있는 것을 보고 심한 배신감을 느껴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르고, 사라져 버린 유진을 찾아 섬을 7년 동안이나 헤맨다. 즉 이제는 과거가 되어버린 사랑에 아직도 집착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야나는 사랑하는 약혼녀 수니가 자신보다 나은 조건의 남자에게 떠나버린, 즉 자신을 배신한 그 사랑을 못 잊어 아직도 괴로워한다. 진과 이야나의 시계는 각각 7년 전과 약혼녀와 헤어진 그 시간에서 한 발짝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멈춰서 버린 것이다. 어쩌면 둘은 바로 “과거의 사랑”이 남기고 간 씻을 수 없는 화인(火印)에 미쳐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저 드라이버와 관광객으로 만난 둘의 인연이 하룻밤 사랑을 나눌 정도로 급속히 가까워진 이유도 같은 아픔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기에 서로의 상처가 얼마나 견디기 힘든지를 금세 알아볼 수 있었던 일종의 “동질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진이 잊지 못했던 유진과의 사랑은 여느 드라마나 영화에서처럼 서로에게 열광하는 “미친” 사랑이었을까? 한국에서 유진과 진이 어느 공원에서 만난 노부부의 모습을 보고 나누는 다음 이야기를 보면 그런 “미친” 사랑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노부부로 보이는 나이 든 두 사람이 잔디밭에 자리를 깔고 앉아 과일을 깎아 먹고 있는 게 보였다. 잔디밭은 입장 금지 구역이었음에도 두 사람의 모습이 너무 평화롭게 보여 관리인이라 할지라도 그들을 내쫓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늙은 남자가 자리에 눕자 늙은 여인이 양산을 기울여 남자의 얼굴에 내려앉은 햇살을 가려주었다. 

언젠가 우리도 저렇게 늙어가겠지. 

진이 말했을 때, 또 한 사람의 진이 가만히 손을 잡았다. 세상이 언제나 그 오후처럼 평화롭지는 않을 것이다. 많은 일이 일어날 것이며, 그중의 어떤 일은 감당하기 어렵게 가혹하기도 할 것이다. 그런 정도는 짐작할 수 있을 만큼 진과 진은 나이가 들어 있었다. 그렇더라도 닥쳐오지 않은 삶 앞에서, 진과 진은 소망했던 것이다. 가급적이면 그 어떤 일이라도 순하게 지나가기를....... 혹, 그 어떤 가혹한 일이 벌어지더라도 서로가 서로의 등을 바라보는 일만큼은 없기를....... 설령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누군가 먼저 그 등을 건드려 다시 돌아볼 수 있게 되기를.......그리하여 그러한 모든 시간들이 지나면 저 노부부처럼 고궁의 잔디밭에서 고요히 가을 햇살을 쬘 수 있게 되기를.......-p.262~263

진이 바라던 사랑은 여느 부부처럼 함께 늙어가는 그런 평범하고 소박한 사랑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사랑에 대한 믿음이 깨지는 순간, 더 이상 평온함을 기대할 수 없는 그런 순간 진의 손에는 어느새 칼이 쥐어지고 만 것이다. 그렇다면 7년을 찾아 헤맨 진이 유진과 다시 만나게 된다면 저렇게 평온한 사랑을 다시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었을까? 아닐 것이다. 진은 유진과의 사랑을 다시 찾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유진과 나누었던 사랑의 기억에 집착한 것일테다.

그렇게 과거에 머물러 있는 그들의 시계 바늘이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한 것이 바로 대지진과 쓰나미라는 자연재앙을 겪고 나서라는 점은 아이러니하기까지 하다. 죽음이라는 극한 상황을 겪고 나서야 진은 회피하고만 싶었던 7년 전 진실을 마주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기고, 약혼녀의 생사를 찾아 헤매던 이야나는 드디어 이제 그녀를 놓아줄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 그리고 하룻밤 풋사랑인 줄 알았던 둘은 국적과 신분을 떠나 진심으로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 줄 수 있음을, 그것이 “사랑”일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렇게 과거의 집착을 놓아 버리니 나이까지 붙들어 매고 7년 전 얼굴로 살아가던 진은 늙지 못한 7년의 세월까지 더해 늙어버리고, 7년 만에 다시 나타난 유진을 이제는 떠나보낼 수 있었으며, 이야나 또한 돈이 아닌 살아가는 일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수니를 보며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을 것이다. 과거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랑을 찾은 진과 이야나, 그래서 그들이 엮어나갈 사랑을 머릿 속에 그리며 나 또한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수 있었다.

 작가가 말하는 “미칠 수 있겠니, 이 삶에”라는 물음에 정확한 답을 찾아내지 못했다. 두 주인공의 삶과 사랑이 그 누구보다 처연하고 아픈 것은 사실이지만 과연 미칠 것 같은 그런 사랑이었는지 금세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 읽고 나서 가슴 속에 쉽게 가시지 않는 여운을 남긴다. 그 여운이 두 주인공의 아픈 사랑 때문인지 아니면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앞으로 이어나갈 둘의 사랑 때문인지 곰곰이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끝으로 작가의 어느 인터뷰 기사 글을 옮긴다. 작가가 이 책을 통해서 하고 싶었던 말일 것이다. 

“삶은 늘 흔들리는 것 같다. 그런데 그게 중요한 것 같지 않다. 언제나 그 순간에는 그게 최악의 흔들림인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처음 같은 설렘도 지나가면 옛사랑이고, 마지막 같은 절망도 지나고 나면 옛 상처다. 행여 매혹 때문에 겪은 흔들림이라고 해도, 굳이 과거의 상처를 꺼내보고 싶지 않다. 항상 과거에 겪은 것보다 더 대단한 일들이 앞으로 올 거라고 믿고 산다. 소설 속에서 지진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지만, 내가 전달하고자 한 지진은 이런 것이다. 자기 삶을 뒤흔드는 상처이기도 하지만, 극복해낸 사랑. 독자들도 그렇게 봐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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