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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쉬러 나가다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수십 년 만에 어릴 적 다녔던 초등학교 교정에 다시 섰다. 교문에서 교실까지 까마득하게 멀기만 했던, 우리 학교 운동장이 전 세계에서 가장 크다고 생각했던 그 운동장이 주위를 둘러보며 몇 걸음 걷자 금세 본관에 닿을 정도로 작았다니, 여름철에 우리에게 큰 그늘을 드리워졌던, 내 팔뚝보다도 굵었던 등나무 줄기가 저렇게 가늘고 보잘 것 없었다니, 책걸상이며 칠판이며 유리 창문이며 현대식으로 말끔히 단장해서 예전 모습은 찾아볼 수 는 없었지만 크기만큼은 변함없는 저 작은 교실에 60 여 명이 넘는 아이들이 어떻게 다 들어갈 수 있었는지.........다람쥐 쳇바퀴 돌듯 반복되는 일상을 벗어나 여유로움을 찾기 위해 수십 년 만에 떠난 초등학교 시절로의 추억 여행은 아련한 향수(鄕愁)를 느끼기 보다는 너무나도 변해버린 풍경에 생소함과 낯섦만 확인했던 그런 시간이 되고 말았다. <1984>, <동물농장>으로 이제 고전 작가  - 시대적인 의미가 아니라 누구나 꼭 읽어야 할 “필독서(必讀書)”라는 의미이다. 동시대를 살았던 “헤르만 헤세” 작품처럼 말이다 - 반열에 오른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숨쉬러 나가다(원제 Coming up for air(1939) / 한겨레출판 / 2011년 4월)>은 이처럼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 20년 전 떠나온 고향으로 돌아가지만 너무나도 변해 버린 고향 모습에 안식은 커녕 숨이 막히는 것 같은 경험을 했던 한 중년 남성의 이야기이다. 

 “징그럽게” 뚱뚱하지도 않고, 뱃살이 반쯤 아래로 처지는 것도 아닌, 엉덩이 둘레가 좀 불룩해서 술통 같아 보이는 경향이 있을 뿐인 마흔 다섯 살의 중년 남성 “나(조지 볼링)”는 올헤 서른 아홉이자 시시한 “재앙”- 버터 값이 오른다거나 가스 요금이 엄청나게 나오는 것 등의 - 을 내다보는 것에서 살아갈 힘을 얻는 타입의 수다스러운 아내 “힐다”와 아침마다 들소 떼 몰려오듯 우당탕거리는 소리를 내며 욕실로 들이닥치는 두 아이를 기르고 있는 평범한 가장이다. 징글맞은 1월의 어느날, 새 틀니를 하던 그날 아침에 하루 휴무보다도 나를 더 기분 좋게 하는 일은 친구가 무릎 꿇고 빌며 사정하여 경마(競馬)에 돈을 걸고 말았는데, 걸었던 암말이 가볍게 우승하면서 내 몫으로 17파운드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조용히 은행에 돈을 넣어둔 나는 그 돈을 어디다 쓸까 고민하다가 20년 이 넘게 가보지 못하고 있는 고향을 떠올린다(책에서는 회상 장면이 꽤나 길게 소개된다). 아웅다웅하기만 한 현실이 주는 중압감을 떨쳐 버리고 오로지 자신 혼자만의 공간에서 편히 쉬고 싶다는 생각 - “숨 쉬러 나가다” - 에 어린 시절의 옛 마을로 떠나 일주일을 보내다 올 계획을 세우고 마침내 알리바이를 꾸며 고향으로 떠나게 된다. 부푼 기대를 안고 도착한 옛 고향 마을, 그런데 옛 모습은 온데 간데 없고 큰 공업타운으로 변해 버린 모습에 당황스럽게까지 느껴진다. 고급스러운 호텔로 변모해버린 주점, 멋 부린 찻집으로 변해버린 나의 생가이던 가겟집,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성당의 신부님, 정신병원이 되어 버린, 비밀의 연못이 있던 주택 등 어느 하나 옛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변해버린 고향의 풍경과 뒤태가 익숙해 따라가 본 퉁퉁한 중년여인인 알고 보니 옛 연인 “엘시다”였는데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모습에 실망스럽기까지 한, “숨 쉬러” 왔는데 “숨 쉴 공간”은 이미 아득히 사라져 버린 그런 상황을 맞닥뜨리고야 만다. 결국 쉼 쉴 공간을 찾지 못하고 집으로 되돌아와야 만 했던 나는 혹 고향에서 들었던 아내가 위독하다는 라디오 방송 - 속임수로 치부했던 - 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부랴부랴 돌아오지만 다행히 라디오 방송은 동명이인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런 나에게 아내는 딴 여자와 놀아난 것이 아니냐고 다그치고, 내가 바랄 수 있는 건 가장 말썽이 적을 노선, 즉 아내에게 사실대로 말하든지, 아니면 기억이 안난다는 둥 구태의연하게 능글거리며 버티던지, 그냥 딴 여자랑 있었다고 생각하게 놔두고 벌을 받든지 세 가지 가능성을 떠올린다. 그런데...... 

“젠장할! 셋 중에 어느 것을 택해야 하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 

 이 작품이 발표된 게 1939년이었으니 주인공 조지 볼링이 살았던 시기는 2차 세계 대전이 막 시작될 혼란스러운 유럽이었고, 그가 회상하는 20년 전 고향 마을은 1910년대, 역시 1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었던 그런 시기였으니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이야기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지금 현대 상황과 비교해도 전혀 다르지 않는, 그 시대를 짐작하게 하는 몇 가지 상황들 - 런던 상공을 가로 질러 날아다니는 폭격기,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전쟁 소식 등 - 을 제외한다면 지금 현대 사회 어느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는 놀라운 싱크로율을 보이고 있어 마치 수십 년 후의 지금 사회를 내다보고 쓴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게 한다. 물론 조지 오웰의 걸작이라는 사회성 짙은 소설들인 <동물농장>,<1984년> 이전에 발표된, 낭만주의와 정치풍자 소설 경향을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하는 작품이라고 하니 의도한 바는 아니겠지만 “현대화” - 지금은 “개발”이라는 말이 더 익숙한 - 라는 이름 하에 자꾸만 과거의 질서와 가치관이 사라져만 가는 상황은 100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전혀 변함이 없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수십 년 만에 다시 찾아본 “초등학교”에서 낯섦만 느꼈던 나처럼 주인공에게 더 이상 숨 한번 제대로 쉬어볼 공간이 되지 못하는 “고향”은 이제는 다시 되찾을 수 없는 그런 공간이 되어버리고 만 셈이다. 

사실 조지 오웰의 <1984년>과 <동물농장>을 제대로 읽지 못했던 - 두 권 모두 청소년 시절에 읽었던 터라 함의(含意)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텍스트만 읽었었으니 엄밀히 말하면 “제대로” 읽지 못한 셈이다 - 나로서는 이 책도 조지 오웰 특유의 정치 풍자나 사회 비판을 담고 있는 “어려운” 책이겠니 하는 선입관에 쉽게 시작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막상 읽고 시작하고 나니 평범한 중년 가장의 짧은 일탈이라는 이야기가 주는 재미에 푹 빠져 전혀 막힘없이 술술 읽히는 참 재미있는 책이었다. 물론 책 곳곳에 당시 정치, 사회적 상황에 대한 비판 의식이 담겨 있지만 시대적 배경으로서만 이해한다면 굳이 책을 읽는 데 방해할 정도로 그리 심각하지 않고, 그래도 어렵다면 건너 뛰고 읽어도 전혀 무리가 없을 정도로 무난한 수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야기 전개에 있어서도 심각함과는 거리가 먼, “이 작품이 조지 오웰 작품 맞아?” 하고 의문이 들 정도로 가볍고 재미있는 장면들이 등장하는데, 특히 마지막 페이지에서 주인공의 부재(不在)를 닦달하는 아내에게 주인공이 세 가지 변명꺼리를 떠올리는 장면에서는 웃음이 절로 터져 나올 정도로 코믹스러워 마지막 페이지까지 부담 없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물론 세계대전이라는 대혼란기에서의 시대적인 모순과 불안을 다룬 작품으로 평가할 수 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런 심각한 부분은 싹 걷어내고 그저 평범한 중년 남성의 소심한 일탈을 그린 재미있는 소설이라고 내 멋대로 이해해버린, 그래서 더 재미와 공감을 불러일으킨 그런 작품이었다.

 부담감으로 시작했지만 의외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던 그런 책이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조지 오웰”, 그에 대해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검색해보니 그저 <1984년>, <동물농장> 정도만 알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꽤나 많은 작품들이 우리나라에 번역 출간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한 권으로 그에 대한 부담감을 떨쳐 버렸다고 말 할 수 는 없겠지만 이 책이 나에게는 조지 오웰이라는 작가를 새롭게 알아가게 만드는 즐거움과 기쁨을 주는 “전환점”과 같은 작품이었음에는 분명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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