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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의 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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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 보면 지루해서 읽는 내내 하품을 하다가 건성건성 읽고 책장을 서둘러 덮어 버리는 책이 있는가 하면, 너무 재미가 있어서 앉은 자리에서 꼼짝도 못하고 내처 읽게 만드는, 읽고 나서도 그 여운 때문에 도저히 다른 책을 읽기 어렵게 만드는, 그리고 주변에게 소개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하게 만드는 그런 책들이 있다. 사실 정유정 작가의 신작인 <7년의 밤(은행나무/2011년 3월)>은 500 페이지가 넘는 분량, 페이지 당 24줄이나 되는 빽빽한 줄 간격 - 괜한 트집 같지만 요새는 줄 간격이 20줄 미만의 책들이 대세인지라 줄 간격이 빽빽하면 읽기에 부담스러워진다 - , 거기에 여성 작가 - 평소에 여성 특유의 감상적(感傷的)인 문체와 미시적인 접근이 나하고는 잘 맞지 않다고 생각해 즐겨 읽지 않는다 - 라는, 내가 싫어하는 삼박자를 모두 갖춘 책이어서 처음 시작하기가 여간 만만치가 않았던 책이었다. 그런데 막상 시작하고 나니 읽기를 주저하게 만든 세가지 모두를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할 정도로 강력한 재미와 몰입감을 선사해 준 멋진 책이었다. 

7년 전 <세령호의 재앙>이라 기록되었던 끔찍한 살인 사건을 저지른 <미치광이 살인마>의 아들 서원(“나”)은 친척집을 전전하다가 결국 그당시 아버지의 부하직원이자 같은 방을 썼던 승환을 만나 세상의 눈을 피해 네비게이션 지도에서 나오지 않는 외진 해변가 마을인 “등대 마을”에 정착하여 살아간다. 야간 스쿠버다이빙을 하다가 조난을 당한 청년들을 구조하게 되어 다시 세상에 그 존재가 알려진 서원에게 누군가가 택배를 보내온다. 택배에는 7년 전 사건이 상세하게 실려 있는, 서원이 전학 가는 학교마다 배달되어 온 잡지와 글들, 음성화일이 담긴 USB 등이 이 실려 있었는데, 그 글들은 바로 7년 전 세령호 사건을 재구성해낸 승환의 소설이었다. 서원은 소설을 통해 끔찍한 살인사건 이면에 숨겨졌던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7년 전 전직 프로야구 포수 출신이자 댐 신임 보안팀장으로 발령받은 서원의 아버지 “최수현”은 며칠 후 이사 오기로 한 세령호 수목원 사택(舍宅)을 둘러보고자 세령 마을에 내려오던 중 친구들과 술자리를 갖게 된다. 음주 상태로 운전하여 밤늦게 마을 근처까지 오다가 그만 차로 아버지의 폭행을 피해 달아나던 소녀, “오세령”을 우연찮게 치게 된다. 현수는 죽은 줄 알았던 소녀가 신음 소리를 내자 놀라서 그만 소녀를 목졸라 죽여 호수에 버리고는 달아나버리고, 마침 호수에서 스쿠버 다이빙을 하던 승환은 소녀의 시체를 발견하지만 그대로 둔 채 물 밖으로 나온다. 소녀의 아버지 “오영제”는 경찰에 실종신고를 하고 세령호 인근을 수색하지만 소녀의 종적은 찾을 수 가 없고, 며칠 전 세령과 함께 있던 승환을 의심하게 된다. 그러던 중 수현네 가족이 세령호로 이사 오게 되고, 소녀의 시체가 호수에서 발견된다. 경찰은 세령을 “교정”이라는 명목 하에 상습 폭행했던 아버지 영제를 제일 용의자로 보고 심문하지만 별다른 증거를 발견하지 못한다. 영제는 수현의 차를 사건 당일 날 밤 봤었다는 것을 기억해 내고, 수현이 자신의 딸을 죽였다고 여기고는 수현과 그의 아들 서원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음모를 꾸민다. 한편 자책감에 시달려 프로야구 선수를 그만두게 만든 왼팔 마비 증상이 재발하고,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던 수현은 영제가 설치해 놓은 덫에 걸려 다리를 심하게 다치게 된다. 주변의 만류에도 야간 당직에 나선 수현은 영제 일행에 의해 포박 당하게 되고, 영제는 꼼짝달싹 할 수 없는 수현에게 댐의 관문을 막아 호수 한복판에서 서원이 서서히 물에 잠기는 과정을 보여주며 복수를 즐긴다. 한편 역시 영제 일행에게 약물을 투입당해 마취되었던 승환은 가까스로 깨어나 서원을 구해내고, 분노한 수현은 포박을 풀고 영제와 결투를 벌인 후 댐 관문을 열게 되지만 결국 댐 수로 하류 마을이 물에 잠기면서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되는 참혹한 사고를 일으키게 된다. 수현은 세령과 영제, 자신의 아내 “은주”를 죽이고 마을 사람들까지 수장(水葬)시켜 버린 살인마로 현장에서 체포되어 살인을 언도받는다.

이렇게 7년 전 사건의 진실을 소설을 통해 알아가던 서원에게 아버지 수현의 사형이 집행되었으니 시신을 인수해가라는 전보가 날아온다. 시간이 지나도 집에 들어오지 않는 승환에게 사고가 벌어졌음을 짐작한 서원은 아버지의 부고 소식에 맞춰 영제가 7년 전 이루지 못한 복수를 자신과 승환에게 하려는 것임을 깨닫고 영제가 기다리고 있을 폐쇄된 등대로 향한다. 과연 7년 동안 이어져 온 복수는 어떻게 결말을 맺을까?

프롤로그 첫 시작을 “나는 내 아버지의 사행집행인이었다.”라는 충격적인 문구로 시작하는 이 책은 읽는 내내 자리를 쉬이 떠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재미와 몰입감을 느끼게 해준다. 7년 전 세령호 사건을 재연해내는 승환의 소설 부문에서는 여성작가 특유의 지나치게 세밀한 설정과 심리묘사가 지루하다 싶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탁월한 완급 조절로 긴장감을 다시 불러일으키는 작가의 글 솜씨에 절로 경탄을 자아내게 만든다. 또한 이 소설의 무대가 되고 있는 “세령호”나 “등대마을”, 그리고 끔찍했던 “세령호 사건”과 등장인물 모두 실재(實在)가 아닌 순전히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구성해낸 허구(虛構)라는 것이 도대체 믿겨지지 않는 치밀하고 사실적인 서사는 출판사 홍보문구인 “압도적이다”이란 말이 딱 제격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읽는 내내 숨 막히는 스릴과 긴장감을 불러 일으키며, 특히 어린 소녀 세령을 사고로 숨지게 한 후 그 죄책감과 스트레스에 스스로 무너져 버리는 수현의 심리 상태 묘사는 나라도 저런 상황이었다면 저렇게 괴로워할 수 밖에 없겠구나 하는 공감이 절로 들 정도로 그 생생함과 사실감이 압권이라 할 수 있다. 결국 모든 진실이 밝혀지고, 7년간 계속되어 온 복수극이 종지부를 찍는 장면을 읽고 나서야 팽팽하게 당겨졌던 긴장의 끈을 놓을 수 가 있었고, 쉽게 가시지 않는 여운과 아쉬움에 책장을 덮지 못하고 앞 페이지들을 다시금 펼쳐보게 만든다.  

 그렇다면 작가는 이 작품에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 작가는 책 말미에 실려 있는 <작가의 말>에서 “사실(事實)”과 “진실(眞實)” 사이에는 “그러나”가 있다고 말한다. (진실의 세계는) 이야기되지 않은, 혹은 이야기 할 수 없는 '어떤 세계', 불편하고 혼란스럽지만 한사코 들여다봐야 하는 세계이며, 우리는 모두 (사실과 진실 사이의 괴리감을 나타내는) '그러나'를 피해 갈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 소설은 (사실 이면에 감춰진 진실인) '그러나'에 관한 이야기로 한순간의 실수로 인해 파멸의 질주를 멈출 수 없었던 한 사내의 이야기이자, 누구에게나 있는 자기만의 지옥에 관한 이야기며, 물러설 곳 없는 벼랑 끝에서 자신의 생을 걸어 지켜낸 '무엇'에 관한 이야기기도 한다고 소설을 설명한다. 작가는 소설을 끝내던 날, '그러나' 우리들이 빅터 프랭클의 유명한 말인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해 '예스"라고 대답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고 털어놓는데, 과연 현실은 작가의 바람대로 “예스”가 가능할까. 최근에 범죄 자체만 보면 절로 눈살이 찌푸려 질 만한 끔찍한 살인 사건이지만 그 이면에는 절로 동정이 가는 애달프고 기가 막힌 사연이 있으며,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살인자들의 사연에 한번쯤은 귀 기울여 달라는 책(<어떻게 살인자를 변호할 수 있을까?>을 읽은 적이 있는데, 공감을 하면서도 현실에서는 사건의 당사자나 가족이 아닌 이상, 또한 그 사건을 조사하고 취재하는 형사나 변호사, 기자(記者)가 아닌 이상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것은 겉으로 드러난 “사실”일 뿐 사건 이면의 “진실”에 접근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새삼 느꼈던 것처럼, 작가의 말대로 사실과 진실 사이에는 앞으로도 “그러나”가 존재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이 책은 이처럼 현실에서 “사실”과 “진실”이 얼마나 큰 괴리가 존재할 수 있는지, 그 괴리가 얼마나 큰 충격을 줄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어 다른 책 이상의 충격과 재미를 느끼게 해준 이유일 수 도 있을 것이다. 

 감상을 호들갑으로 시작해서 호들갑으로 마무리할 수 밖에 없게 만든 이 책의 가장 큰 수확은 여성 작가에 대한 나의 생각이 편견이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해준 것과 “정유정”이라는 작가를 새롭게 알게 해준 것을 꼽을 수 있겠다. 그녀에게 세계문학상을 수상시켜준 전작 <내 심장을 쏴라>와 앞으로 이어질 그녀의 신작들을 계속 주목해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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