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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심장부에서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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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맥스웰 쿳시(John Maxwell Coetzee) - 어디서는 이름을 쿠체로 표기하기도 한다. -  신간 <나라의 심장부에서(원제: In the Heart of the Country/문학동네/2010년 11월)>을 받아들고서 낯선 작가 이름에 당황했었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200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유명 작가라고 한다. 원래 유명 문학상 수상작이나 작가를 챙겨 읽는 편이 아닌지라 꽤나 소설 읽기를 좋아하는 나로서도 처음 들어보는 작가였다. 거기에 극단적인 인종차별주의로 유명한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의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이라니...... 남아공을 배경으로 한 책은 럭비월드컵을 소재로 한 <인빅터스> 밖에 읽어보지 못했고, 알고 있는 상식이라고는 인종차별주의와 넬슨 만델라 정도, 우리나라와 지구 반대편에 있다는 거리만큼이나 아는 것이 없는 그런 국가인 곳이다. 이 책도 인종차별을 소재로 한 그런 책이겠거니, 불편할 수 도 있는 그런 이야기겠거니 하고 책을 펼쳐 읽기 시작하였다. 다 읽고 나니 책은 내 예상과는 달리 인종차별을 이야기하는 책이 아니었다. 그런데 도대체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이야기 전개에 짜증까지 일게 만드는 그런 불편하기 그지없었던 책이었다.   

  다 읽고 나서도 전체 이야기가 명징하게 정리되지 않아 꽤 당혹스러운 이 책을 어떻게 소개해야 할까? 어지러운 시점, 독백과 이야기가 반복되는 전개에 무슨 이야기를 읽고 있는지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영 감이 안 잡혀 애를 먹었다. 그래서 내가 그나마 이해하고 있는 줄거리라고는 배경은 남아프리카 공화국 어느 시골 마을 농가라는 점, 주인공인 마그다는 백인 아버지와 흑인 하인들과 살아가는 처녀로 강압적인 아버지 때문에 하녀와 다름없는 삶을 살고 있다는 점, 아버지와 새 어머니를 도끼로 죽이는 끔찍한 살인을 저지르지만 다음 장면에서는 아버지는 전혀 그런 일이라고는 없었던 듯 살아있다는 점 - 마그다의 상상 속의 일이었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이해했다 -, 새로 들어온 흑인 하인 헨드릭의 아내 안나가 아버지와 깊은 관계를 맺자 분노로 아버지를 죽이고 헨드릭과 공모해 아버지의 시체를 처리하지만 마그다 역시 헨드릭과 깊은 관계를 맺고 그에게 의존하지만 헨드릭과 안나는 달아나버리고 마그다는 텅빈 집에 홀로 남아 늙어간다고 결론 - 끝부분에 비행선이 등장하고 마그다가 그들과 연락해 보려고 돌을 쌓는 장면이 나오는데 솔직히 무슨 의미인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 맺는 정도였다. 솔직히 이야기를 시간대 순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이렇게 깨어진 거울 조각처럼 단편 단편으로만 받아들이다 보니 마그다의 의식 흐름에 따라 등장하는 은유와 상징들을 이해하고 형상화하는 데는 결국 실패하고야 말았고, 서둘러 읽고는 책장을 덮고야 말았다.

  오래된 TV가 드디어 수명이 다 되서 노이즈가 심해서 화면이 여러 겹 겹쳐 보일 정도로 초점이 잡히지 않고, 소리조차 지지직거리는 소리에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는, 드라마를 다 보고나서도 도대체 뭘 봤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그런 느낌이었다고 할까. 그러다 보니 “서구 제국주의가 식민지 땅 아프리카에 저질러온 폭력과 억압의 역사라는 주제의식과 그에 대한 쿳시 특유의 깊은 철학적 통찰력과 정교하고 예리한 문체가 돋보이는 작품”이라는 출판사 소개글을 당최 이해할 수 가 없었고, 어떤 재미나 감동조차 느껴볼 수 가 없었다. 고백하건데 읽으면서 참 여러번 책 말미에 실려 있는 역자 후기를 읽어봤음에도 난 이 책을 올곧이 읽어내는 데 실패했다. 이 책을 읽은 다른 독자들의 서평들을 보면 이 책의 주제를 제대로 이해한 호의적인 평들도 여럿 보이고 이 책이 쿳시의 문학세계를 아우르는 문제작으로 꼽힌다고 한다니 책 자체를 탓하기 보다는 명쾌한 서사(敍事)구조를 좋아하는 내 독서 경향이 이 책과는 어울리지 않는, 또는 아직 내 독서 소양이 이 책 이해해낼 만큼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탓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이 책을 다시 읽게 된다면 그때는 다른 느낌일까? 이 책을 다시 읽는 것은 쿳시의 다른 작품들을 읽어본 후에나 가능할 것 같다. 쿳시 문학의 정체를 파악하고 나서야 그의 문학의 시원이라는 이 작품이 제대로 읽혀질 것 같다. 그때가 언제쯤일지는 기약할 수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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