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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그림 이야기 - 옛그림의 인문학적 독법
이종수 지음 / 돌베개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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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 참 어렵다.
이미지보다 이야기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미술관 관람만큼 곤혹스러운 것도 없다. 교과서에 실린 유명 화가의 그림을 보아도 그저 잘 그렸구나 일뿐 별 감흥이 없어 그저 동선에 따라 훑어보는 수준에 그치고 만다. 최근 들어 그림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감상을 소재로 한 책들을 몇 권 읽게 되면서 그림에 대해 조금씩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한 책은 그림과 음악을 연계한 일종의 크로스 오버처럼 소리와 시각이라는 상이한 감각을 통해서 서로를 연상케 하는 책이었고, 또 다른 한 책은 미술사가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 이미지에 걸 맞는 명화들을 소개하는 그런 책이었는데, 그림의 문외한인 내가 읽어도 그림을 새롭게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하는 색다른 감흥을 느낄 수 있었던 “그림 읽기”였다. 그렇다면 아예 이야기를 형상화한 “이야기 그림”들이라면 어떨까? 기독교 예수의 최후의 만찬 장면을 그림으로 형상화한 미켈란젤로의 “그리스도 최후의 만찬”이나 도연명의 이상향을 마치 꿈 속에서나 볼 법한 그런 모습으로 그려낸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감상할 때 자연스레 그림의 원천인 이야기를 떠올리게 된다면 훨씬 더 이해가 빠르고, 활자 속에서 자신이 형상화한 이미지와 비교해보는 그런 재미와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이종수의 “이야기 그림이야기”(돌베게, 2010년 7월)는 중국의 문학 작품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린 “이야기 그림”에 대한 이야기로 문학, 즉 이야기와 어우러진 옛 그림을 이해하는 안목을 넓힐 수 있었던, 그림이라는 새로운 장르에 한발 더 다가갈 수 있는 유익한 “그림 공부”가 되었던 책이다. 
 

작가는 프롤로그에서 그림을 “읽는다”는 것은 문자로 구성된 이야기를 대할 때와 유사한 체험을 동반하다는 의미이며 곰곰이, 시간을 들여 천천히 살펴보면서 그 안에 담긴 이런저런 생각들을 만나보라는 뜻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런 의미를 넘어 정말로 “읽어야”할 그런 그림이 있는데 바로 중국의 문학 작품을 바탕으로 그려져 말 그대로 그 이야기를 짚어가며 감상해야 하는 그림, 즉 “이야기 그림”이 바로 그런 그림으로 이 책은 그런 장르를 읽는 방법에 관한 것이라고 책의 집필 목적을 소개한다. 그러면 과연 어떻게 읽어야 좋을까. 작가는 ‘동양미술사’라는 거창한 것에 경도되지 말고 그냥 솔직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읽으라고 이야기한다. 이야기 그림은 ‘문자’가 ‘이미지’로 전환되는 과정을 이미지의 입장에서 고백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화가의 마음으로 돌아가 이야기를 어떻게 그림으로 풀어낼 것인가, 즉 이야기 전개에 어울리는 화면을 선택하는 일에서 화가의 고민이 출발했다면 우리도 그 형식을 존중하며 따라 가보자고 우리에게 제안한다. 책에서는 권(두루마리), 축(족), 병풍, 삽화의 4가지 형식으로 그려진 이야기 그림을 각기 2편씩 골라 다루고 있는데, 모두 텍스트에 대한 해석, 그 독특한 시각이 빛나는 작품들을 선택했다고 한다. 그리고 작품을 읽어가는 즐거움을 넘어 중국의 이야기 그림을 읽는 것은 ‘한자’ 문화권에서 오래도록 공유해온 사상과 체험의 문제를 생각해보는 데서 의미가 있으며 그저 이웃 나라의 것일 수 만은 없었던 중국 그림을 읽는 이유 또한 이러한 배경에서 생각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작가가 소개하고 있는 여러 그림들 중에서 걸어놓고 음미하는 그림, 축(족)에서 20세기 최고의 회가라는 장대천(張大千)의 도원도(桃園圖) 편을 소개해보자. 말 그대로 복숭아 꽃이 만발한 그림이어야 할 도원도에 장대천은 엉뚱하게도 매화를 그려 넣었다. 작가는 ‘매화로 이야기하는 도원도하니, 뭐 이런 실없는.....’이라는 반응이 절로 나올 이 그림에서 장대천이 찾아낸 숨겨진 길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동진의 유명한 문사 도잠(도연명)이 썼다는 “도화원기”는 어쩌면 서양 기독교 신화의 ‘에덴동산’에 버금가는 동양에서 가장 유명한 이상향을 그린 그런 작품일 것이다. 도연명은 이야기의 화자로 ‘나’가 아닌 제 3자인 어부, 즉 ‘그’라는 타인이 이야기를 전달하는 형식을 도입했는데 이것이 바로 도원의 이미지가 누군가, 즉 도연명의 주관적인 형상이 아니라 모두가 이 도원을 이상향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보편적 이상향’으로 자리잡게 된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고 말한다. 즉 도원이라는 곳이 어떤 구체적 장소가 아니라 독자 스스로 알고 있는 어느 시내에 배를 띄우면 될 일인 즉 열린 공간으로서의 가능성이 더욱 커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도원의 모습이 대단히 상세히 묘사되어 있어 그림으로 재현하기에 좋은 조건을 두루 갖춘 ‘도화원기’는 여러 화가들에 의해 형상화되는 데, 책에서는 텍스트 그 자체였던 문징명의 “도원문진도”와 전통적인 방식과 달이 이야기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끌어낸 석도의 “도원도”, 길게 늘어뜨린 화면 가득 화가의 특유의 필선이 넘실대는 왕몽의 “도원춘효도”를 설명하고 드디어 문제작(?)인 장대천의 “도원도”를 보여준다. 장대천이 85세에 그린 대형 축화도인 “도원도”는 앞에서 소개했던 여러 그림들과는 그 궤를 달리하는 전혀 새로운 도원도이다. 복숭아꽃 대신 매화를 그려넣은 것도 그렇고, 추상과 구상이 절묘하게 섞여 이야기는 구상 쪽, 회화적 효과는 추상 쪽으로 나누어 맡은 형국의 그림 또한 그렇다. 제목을 추리할 수 있는 소재들은 화면 한쪽에 작게 그려졌을 뿐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한 것은 형체를 알 수 없이 신비롭게 번져 나가는 색채들인 이 그림은 이야기보다는 중국 전통에서 비롯된 그의 창조적인 회화기법인 발묵(潑墨;먹물이 번지어 퍼지게 하는 산수화법) 기법쪽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어 이 발묵이 대단히 효과적으로 구사되어 있는, 멋진 표현법이 적절한 주제를 만난 덕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한다. 시선을 압도하는 것은 주제를 암시하는 소재들이 아닌, 이 거대한 발묵의 효과인데 굳이 ‘도원도’라 불렀다는 것은 화가가 분명 이야기적인 요소를 신경쓰고 있었으며, ‘회화’ 자체에 집중한 이 추상적인 작품이 이야기 그림으로서도 매력적인 이유는, 도리어 그 모호한 추상성이 감상자의 상상을 더욱 자극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그가 그린 것이 매화인가 도화인가는 문제가 되지 않으며, 우리가 이 아름다운 한 촉의 축화 앛에서 환상의 도원을 꿈꿀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작가는 설명한다. 그리고 장 마지막에는 도연명의 ‘도화원기’ 한글 번역본을 실어 글을 읽고서 다시 한번 그 장을 반복해서 읽고 그림들을 눈여겨보게 만든다. 

이처럼 이야기와 어우러진 그림들을 읽으니 어느 정도 그림에 대한 이해가 훨씬 쉽게 되는 그런 생각이 든다. 이야기가 그림을 읽는 길잡이가 되고 그림이 이야기를 이해하는 바탕이 되는, 서로에게 이해의 지평을 제공하는 ‘이야기 그림’의 전통이 이미 이천년 전인 위진 시대부터 시작되었다니 그 역사가 정말 깊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의 말대로 이 책은 이론적 연구서도 아니고, 그림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을 엮은 에세이도 아닌, 그 중간의 그냥 ‘그림이야기’로서 나처럼 그림을 모르는 문외한들이 오랜 전통의 이야기 그림을 이해하는 길라잡이로서 참 유익한, 그렇다고 결코 쉬운 책이 아닌 다소 어려운 그런 입문서로 평가하고 싶다. 최근 읽은 그림 이해서들 덕분에 이제 미술관이 마냥 따분하고 지겨운 그런 곳이 아닌, 조금은 즐겁고 재밌는 나들이 장소가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조만간 그림을 ‘읽으러’ 미술관에 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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