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토끼 (리커버)
정보라 지음 / 아작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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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토끼』는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에 후보작으로 올라 단숨에 화제가 된 정보라 작가의 소설집이다. 검색해보니 한국인 영한번역가인 얀톤 허님이 도서전에서  『저주토끼』를 알게 되고 흥미를 느껴 마침 자리에 있던 정보라 작가님께 번역을 하고 싶다고 요청해서 영어 번역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부커상 인터내셔널 특성 상 외국인 번역가가 번역한 작품들이 많이 채택되는데 한국인 번역가가 번역한 작품이 후보작으로 선정되는 건 이례적이라고 한다.

 

나 역시 고백한다. 공포 소설을 그리 좋아하지 않고 단편보다 장편을 선호하는 내 취향상 이 소설이 부커상 후보작에 오르지 않았더라면   『저주토끼』를 만나지 못했으리라는 걸. 부커상 후보작이라는 명성은 내 취향을 극복할 정도로 힘이 세다. 

 

소설에는표제작인 <저주토끼>을 포함하여 <머리>, <즐거운 나의 집> <재회>, <차가운 손가락>등   9편의 단편이 수록되어있다. 

 

개인적인 용도로 저주 용품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가업으로 만든 물건을 개인적인 저주에 사용해서도 안 된다. 

불문율에는 이유가 있다. 

'남을 저주하면 무덤이 두 개'라는 일본 속담이 있다고 한다. 

타인을 저주하면 결국 자신도 무덤에 들어가게 된다는 뜻이다. 

 

<저주토끼>는 읽으면 알 수 있다. 왜 이 단편이 표제작으로 선정되었는지를.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저주토끼 이야기. 유일하게 자신에게 친구가 되어주었던 친구의 원수를 갚기 위해 저주토끼를 만들어 친구의 원수를 몰락하게 만드는 이야기가 그려진다. 저주토끼가 서서히 그리고 급격하게 어떻게 한 가문을 파괴시켜나가는지 그려지는데 이 소설의 특징은 글의 묘사가 너무 담담하여 더욱 오싹함을 자아내게 한다. 소설에서 왜 저주에 쓰이는 물건이 이쁘게 만들어야 하는지 그리고 왜 함부로 만들어서는 안 되는 물건인지 책 곳곳에 나와 있는 암시는 이야기 결말의 복선이었음을 알게 되어 등골을 더 오싹하게 만든다. 여러 단편도 좋았지만 다른 단편들보다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이 매우 강하다. 

 

두 번째 단편 <머리> 또한 평이한 이야기 속에 반전이 매우 강렬한 작품 중의 하나이다. 주인공의 배설물로 만들어진  존재인 '머리' 배설물로 만들어졌기에 배설물의 주인인 주인공에게 "어머니"라고 부르는 이 '머리'의 존재를 주인공은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건 당연하다. 매번 화장실에 갈 때마다 나타나는 '머리' 가 끔찍해 가족에게 말하지만 반응은 미지근하다. 

 

" 알을 스는 것도 아니고 무는 것도 아니면 그냥 두지 그러니." 

 

이 심드렁한 반응은 후에 결혼한 남편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뭐 별거 아니네. 그냥 내버려둬요. 기어 나와서 집안을 돌아다니는 것도 아니고, 알을 까는 것도 아니잖아?" 

 

주인공의 고통에 무관심한 가족들. 주인공에게는 별 일인데 주변에서는 그냥 내버려둬요라고 말한다. 그리고 후에 깨닫게 된다. '그냥 내버려 둬요.'와 같은 무관심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그리고 이야기 결말 후에도 이 무관심으로 인해 주인공은 더 외로워지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 더욱 슬프게 만든다. 

 

표제작인 <저주 토끼>도 좋았지만 내게 가장 좋았던 작품은 <즐거운 나의 집>이었다. 솔직히 표현한다면 답답하지만 모든 이야기들 중 가장 반전이 무서웠던 작품이면서 한국형 호러 소설다운 작품이라고나 할까. 가장 즐거워야 할 집이 어떻게 가장 무서운 집이 되는지 알게 되는데 이 강력한 반전 앞에서 나는 뒤통수를 치는 강렬한 느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 밖에도 AI의 공격을 그린 <안녕, 내 사랑>, 옛날 이야기를 듣는 듯한 <흉터>와 <바람과 모래의 지배자>, 피임약의 부작용으로 임신하게 된 여성이 어떻게 파멸되어 가는지 보여주는 <몸하다> 등 다양한 소재 속에 이야기들은 다채로운 매력을 빛낸다. 

 

이 책에 대한 호불호가 강하지만 내게는 요즘 인기있는 SF소설과 다른 한국형 호러 소설을 보는 듯한  이 소설집 또한 매우 재미있었다. 그리고 작가의 다른 소설집 <여자들의 왕> 또한 읽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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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초록을 내일이라 부를 때 - 40년 동안 숲우듬지에 오른 여성 과학자 이야기
마거릿 D. 로우먼 지음, 김주희 옮김 / 흐름출판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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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지구의 미래를 바꿀 수 있는 한 사람이 되어주길 바라는 과학자의 초청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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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초록을 내일이라 부를 때 - 40년 동안 숲우듬지에 오른 여성 과학자 이야기
마거릿 D. 로우먼 지음, 김주희 옮김 / 흐름출판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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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기후위기라는 단어는 가장 많이 접하는 단어가 되었다. 기상이변, 빈번해지는 가뭄과 홍수의 연이은 재앙을 접하며 우리는 '기후위기'를 쉽게 말하곤 한다. 이제 기후위기는 이 세상의 표준이 되어 버린 것 같다. 여기 『우리가 초록을 내일이라 부를 때』의 저자이자 나무 탐험가인 마거릿 D. 로우먼은 사라져가는 숲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과학자이자 숲지킴이이다. 더 숲이 나빠지기 전에 우리가 바꿀 수 있다고 강조한다.

《우리가 초록을 내일이라 부를 때》의 저자의 마거릿 D. 로우먼을 뭐라고 소개할까. 나는 그녀를 나무에게 선택받은 과학자라고 말하고 싶다. 나무를 사랑하는 천성, 어려서부터 식물과 나무를 사랑하는 마거릿 D. 로우먼은 자연이 놀이터이자 친구였다. 누군가 알려주는 사람이 없어도 자연에 둘러싸여 꽃과 식물을 채집하며 어떤 식물인지 스스로 배우는 저자는 어린 시절부터 천상 과학자였다.


자연을 탐험하면서

평온하게 어린 시절을 보내지 않았다면

나는 현장 생물학자를 직업으로 삼지 않았을 것이다.

대부분 나무였다. 대부분 고독이었다.

대부분 야생화였고, 나뭇잎이었고,

자연의 작동 원리를 궁금해하는 호기심이었다.


나무를 사랑했고 자연이 하나의 놀이터이자 학습터인 저자가 현장 생물학을 선택한 건 당연한 이치였다. 그녀에게는 이 당연한 선택이 저자가 자란 1950년대에는 결코 당연한 선택이 될 수 없었던 시대였다. 과학계, 특히 생명과학 분야인 생물학에 여성은 전무후무했던 시대, 저자는 여성에 대한 편견, 그리고 온갖 성추행을 견디며 공부해야 하는 쉽지 않은 길이었다.

사랑은 상대방을 알고 싶어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취향, 기쁨과 슬픔 등 모든 것을 알고 싶어한다. 저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무와 식물을 알고 싶기에 무엇이 나무를 해치고 나무가 언제 행복해하는지 현장 탐험을 시작한다. 그 궁금증이 이어져 미국 윌리엄스 대학교에서 다시 먼 호주로 오게 한다. 현장에서 밤을 지새우며 나뭇잎을 관찰하며 알게 된다. 나무를 보려면 나무 우듬지, 즉 나무의 상층부 또한 제대로 보아야 함을. 이제까지 나무 중간 부분까지만 이루어졌던 관찰 범위는 결국 사람의 엄지 발가락만 보고 병명을 진단하는 것과 마찬가지임을 알게 되고 저자는 나무의 우듬지를 향해 연구를 시작하는 첫 번째 과학자가 된다. 나무에 오르기 위해 슬링샷을 만들고 장비를 만든다. 나무를 훼손하지 않고 더 잘 알기 위해 우듬지 통로까지 만들며 나무의 탐험을 더욱 확대해간다.

《우리가 초록을 내일이라 부를 때》에서 저자는 많은 나무를 소개시켜준다. 코치우드, 유칼립투스, 거인가시나무, 적나왕나무 등등 수많은 나무를 소개하며 그 나무의 특징을 이야기하며 호주와 미국을 넘어 말레이시아, 아프리카 등 나무와 숲을 지키기 위한 저자의 여정은 매우 다급하게 느껴지게 한다. 저자의 어린 시절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기후위기'. 이 기후위기가 조금씩 생태계 다양성을 파괴되는 안타까움을 토로한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음에 저자는 고령의 나이에도 숲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저자는 숲을 살리기 위해 한 사람의 힘을 강조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나무와 가까이 할 기회를 얻고 나무를 경외하는 마음을 회복하는 것. 거기서부터 시작할 것을 말한다. 그 경외심과 사랑이 나무를 지키는 데 관심을 갖게 하며 우리의 소비 등이 나무를 살리기 위한 선택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한 사람이 지구의 미래를 바꿀 수도 있다.


그 한 사람이 바로 내가 될 수 있고 여러분이 될 수 있다. 이 책은 그 한 사람이 되어주길 바라는 초대장이다.

저자는 묻는다. 지구의 미래를 바꿀 수도 있는 숲 지킴이에 함께 해 줄 수 있겠느냐고.

이 책을 읽는다면 당신은 어느 새 저자에게 Yes라고 외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읽고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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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땅의 야수들
김주혜 지음, 박소현 옮김 / 다산책방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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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진 작가의 소설 <파친코>의 등장으로 한국의 이야기는 세계적인 이야기가 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이민진 작가는 말했다. "우리가 매력적이기 때문에 한국인 이야기를 쓴다". 역사 소설 또는 드라마를 우리만의 이야기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글을 썼고 증명해냈다. 이것이 또 하나의 신호탄이 되어 또 다른 한국의 역사를 다룬 작가가 탄생했다. 바로 『작은 땅의 야수들』을 쓴 김주혜 작가이다.

 

『작은 땅의 야수들』의 시작은 사냥꾼 남정호의 사냥에서 시작된다. 눈이 내리기 시작하는 한 겨울, 집에서 굶주림과 추위에 떨고 있을 아이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급하다. 빨리 뭐라도 잡아야 할텐데. 아이들이 기대하고 있을 텐데. 하지만 한겨울에 동물들은 모두 겨울잠에 빠져들었는지 도통 볼 수가 없다. 그렇게 사냥감을 찾아 헤매던 그에게 큰 사냥감이 발견된다. 호랑이다. 어린 호랑이. 일제의 무자비한 포획으로 호랑이를 찾기 힘든 이 때 이 호랑이만 있으면 아이들을 충분히 먹일 수 있는 것은 물론 떼돈도 벌 수 있다. 하지만 그는 끝내 호랑이를 떠나 보낸다. 바로 같은 사냥꾼이었던 아버지의 말씀 때문이다.

 

"호랑이가 널 먼저 죽이려 들지 않는 한, 절대로 호랑이를 죽이지 말아라."

 

그렇게 호랑이를 보내고 추위와 배고픔에 쓰러진 남정호. 그는 일본군 일행에게 발견되고 그 중 야마다 대위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한다. 마침 산길에서 길을 헤매고 있던 일본군 일행은 남정호에게 산길 안내를 명령하고 산길에서 남정호는 호랑이의 위협으로부터 무리를 구한다. 그 답례로 야마다는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은제 답뱃갑을 몰래 쥐여 주며 힘든 일이 있을 때 자신을 찾아 오라고 말한다.

 

우리는 보통 드라마를 볼 때 드라마 속 등장인물이 서로를 알 수 있는 표식을 언제 상대방에게 보여줄 지 전전긍긍하곤 한다. 가령 헤어진 연인을 알 수 있는 펜던트 목걸이라든가 출생의 비밀을 알 수 있는 어린 시절 옷이라든가. 그것만 보여주면 짠 끝날 것 같은데 그 표식들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저 보는 시청자만 애태울 뿐이다. 소설도 마찬가지다. 야마다 대위가 건넨 은제 담뱃값이 언제 야마다의 손에 들어갈지 긴장을 하며 이야기를 읽게 되는 하나의 축이다. 하지만 드라마의 작가가 비밀을 쉽게 이야기하지 않듯, 소설에서도 이 은제 답뱃값의 이야기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사냥꾼이 이 비밀을 말하지 않은 채 죽고 홀로 남겨진 어린 아들 남정호만이 숨겨진 비밀도 모른 채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파친코>가 선자의 가족 이야기를 중심으로 다룬 가족의 역사를 다룬 대하드라마 성격을 띈다면 『작은 땅의 이야기들』은 박경리 작가의 <토지>와 같은 여러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대하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토지>가 최참판댁을 기점으로 평사리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듯, 『작은 땅의 이야기들』은 평안도 기생인 옥희, 연화 그리고 월향과 그들을 돌보는 사촌이모 단이를 중심으로 그들과 관련된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를 폭넓게 다룬다. 1918년부터 1964년까지 이 긴 한국의 일제시대와 격랑기를 통과해가는 사람들을 이야기한다.

 

일제 시대의 신문물에 맞게 달라져가는 사회의 모습, 3.1 독립운동은 물론 신문물에 맞추어 점점 궁지에 몰리는 인력거꾼의 모습, 일제 시대에 기생으로서 끊임없는 위협 속에서 고통을 감내해야 했던 기생의 모습, 길거리에서 시작한 하층민의 모습부터 일제 시대 친일의 모습을 하고 부귀영화를 누리는 부유층의 모습 등 각계각층의 모습 속에 전체적인 역사를 보여 준다는 점이 <파친코>와 비교되는 점이자 큰 강점이기도 한다. 물론 그 은제 담뱃값의 비밀은 쉽게 봉인되지 않아 끝까지 애를 태운다는 점이 약점이긴 하지만.

 

이 소설이 일제 시대 독립 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대했다면 다소 실망할 수 있다. 물론 독립 운동을 하는 인물도 나오지만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주로 독립운동과 거리가 먼 하루를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평범한 인물들의 우정과 사랑 그리고 미움 등 살아가는 이야기니까. 이게 무슨 야수들의 이야기냐고 따질 수 있다. 하지만 소설을 읽다 보면 알게 된다. 시시때때로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꿋꿋이 삶을 선택하고 살아갔던 평범한 모든 사람들이 바로 야수였음을. 그들의 삶 자체가 야수와 같은 쉽지 않은 하루 하루의 전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힘겨운 시대를 통과하며 살아 남은 삶 자체가 야수였음을 알게 된다.

 

모든 인물들이 숨쉬는 듯한 거대한 대하 드라마를 보는 듯한 깊은 여운. 이 장대한 이야기가 바다 건너 미국에 있는 한국계 미국인이 쓴 소설이라는 사실에 다시 한 번 감탄을 하게 된다. <파친코>와는 다른 매력으로 다가오는 이 소설로 우리는 알 수 있다. 한국적인 것이 어떻게 세계적인 것이 될 수 있음을. 꿋꿋하게 살아나간 우리 모두의 삶이 바로 감동이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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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
아니 에르노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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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 많으신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이 있다.

"내 이야기를 책으로 엮는다면 책 몇 권을 써도 남는다". 혹은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는 책이다." 라고.

자신의 이야기를 몇 권의 책으로 엮는 사람이 있다. 바로 2022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아니 에르노이다.

프랑스 소설가 아니 에르노.

아니 에르노는 자신의 체험만을 쓰기로 유명한 작가로 자신이 직접 겪은 일만을 쓰는 작가이다. 자신의 일생만으로 수많은 책을 써내려온 작가는 '삶이 이야기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해냈다.

《빈 옷장》 《세월》 《단순한 열정》 그 외 수많은 작품 중 그녀의 짧은 소설 『한 여자』를 펼쳐든다.

한 여자. 바로 자신의 어머니를 한 여자로 어머니의 일생을 객관적인 시점에서 펼쳐 보이는 이 짧은 소설이기 때문이다. 소설을 펼쳐들며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겨난다. 엄마의 인생을 딸이 과연 객관적으로 쓴다는 게 가능할까?

애증의 모녀관계. 끈끈하면서도 끈끈하기에 더욱 얽어매져 있는 이 모녀 관계가 단순히 한국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비비언 고닉의 <사나운 애착>도 그렇고 미셀 자우너의 <H마트에서 울다> 에서도 모녀 관계는 사나우면서도 다정한 애착을 보여준다. 과연 아니 에르노는 자신의 어머니를 어떻게 써내려갔을까?

나는 어머니에 관한 글을 계속 써나가겠다.

어머니는 내게 진정 중요했던 유일한 여자이고, 2년 전부터는 치매 환자였다.

 

소설은 어머니의 부고로부터 시작된다. 노인요양원에서 삶을 마감한 어머니. 그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룬다.

어머니는 이제 안 계시지만 저자는 글로써 어머니의 삶을 소환한다. 한 여자의 삶을 복기하고 되새긴다.

요양원에서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저자는 함께 방을 쓰던 어떤 여자를 보며 생각한다.

"나는 그 여자는 아직 살아 있는데 내 어머니는 죽었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어머니의 부고 또는 질병 앞에서 슬픔과 동시에 떠오르는 건 분노이다. 왜 저 사람은 살아있는데 우리 엄마만, 아빠만 이런 고통을 겪는 것인가. 에세이 <H마트에서 울다>에서 저자도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엄마의 부재 앞에서 동년배의 한국 아줌마를 보면서 분노한다. 짜증이 난다고. 부아가 난다고. 엄마는 세상에 없는데 이 생면부지의 여인은 살아 있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어 오른다. 저자 역시 마찬가지다. 똑같은 방을 쓰는데 왜 우리 어머니만 죽었는가. 다른 사람들은 저자에게 이제 다 끝났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제부터 시작이다.

소설 『한 여자』 는 그렇게 어머니의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1906년 프랑스 이브토에서 여섯 아이 중 넷째로 태어난 어머니. 엄한 어머니, 다감한 아버지 밑에서 자라났고 그 당시 대부분의 삶이 그러했듯 교육은 겉치장에 불과했던 시대. 산업 혁명 시절과 맞물려 대규모 공장에서 일을 하며 노동자로 삶을 살아가는 어머니의 청년기 시절이다.

여자에게 결혼이란 삶 또는 죽음이었으니,

둘이 되어 보다 쉽게 궁지에서 벗어나리라는 희망일 수도 있고

결정적인 곤두박질로 끝날 수도 있다.

 

한 여자의 삶. 나의 엄마도 그렇고 다른 대부분의 어머니들의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는 이야기가 결혼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쓰여진다. 희망, 또는 추락. 그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한 이야기. 저자의 어머니 또한 그랬다.

현실에 안주하며 정착하길 바랐던 아버지, 더 높은 삶을 갈망한 어머니, 삶은 더 바라는 자에게 선택이 주어진다. 아버지의 안정보다 어머니의 갈망이 더 컸기에 어머니와 아버지는 살던 곳을 떠나 새로운 도시에서 카페 겸 식료품점을 시작한다. 이제 스물다섯의 어린 나이에 실질적인 가장 역할을 해나가는 여자는 말한다.

"날 보고 자갈을 팔래도 팔 수 있었을걸!"

장사 하시는 어머니, 전쟁중에도 어린 딸을 산책시키기 위해 아주 잠깐의 찰나에도 유모차를 끌던 어머니.

한 명의 고객이라도 더 붙들기 위해 변해가는 어머니. 그 어머니의 모습은, 단순히 저자만의 어머니, 한 여자가 아니었다. 바로 우리 시대의 모든 어머니들의 이야기였다. 그렇게 한 여자의 삶은 보편적 여자의 삶을 그려나간다.

저자가 커가면서 자연스레 생기는 모녀간의 갈등. 시간이 주는 괴리. 담담하게 써내려가지만 그 사이의 여백을 딸이라면 느낄 수 있다. 그 여백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숨겨져 있는지는 딸들만이 알 수 있다.

어머니는 자기 자체로는 사랑받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며,

자신이 주려는 것으로 사랑받기를 바랐다.

 

책을 읽으며 나의 엄마와 저자의 어머니에게서 가장 공감했던 부분이였다.

아니 나는 비로소 엄마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해야하겠다. 매번 내려갈 때마다 차 한 가득 음식을 퍼주시는 엄마. 그것도 모자라 며칠 후 택배 한 상자를 보내오는 엄마. 우리는 극성이라고 말하며 그만 주라고 말한다.

나는 엄마의 표현이 과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서야 알겠다.

그 음식들이 사랑받고 싶다는 반어적인 표현이라는 걸. 사랑해달라는 표현이었음을 이제서야 알겠다.

끊임없는 헌신, 손주들을 돌보며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싶어했던 한 여자. 하지만 세월은 한 여자의 희망을 서서히 그리고 급격히 무너뜨린다. 알츠하이머라는 무서운 지우개로 머리 속의 기억을 지워나간다. 한 여자는 그렇게 아이가 되어가고 삶의 마지막을 향해 다가간다.

나는 내 딸이 행복해지라고 뭐든지 했어.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걔가 더 행복한 건 아니었지.

 

기억을 잃어가는 중에도 문득문득 자신이 알지 못했던 한 여자의 기억. 어머니는 삶을 잃어가는 중에도 가끔씩 인식하고 기억했다. 그렇게 삶의 끝자락을 한없이 붙잡았고 마무리해갔다.

이 책에는 어머니의 삶을 최대한 무미건조하게 써내려간다. 제3자의 시선인 것처럼. 감정을 절제하고 한 여자의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듯하다. 하지만 나는 다시 궁금해진다. 딸이라면, 여자라면 이 글들을 건조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나는 그럴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왜? 한 여자의 삶은 나의 어머니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그 시대를 이겨낸 수많은 여자들의 삶이기도 했다. 자식을 위해선 뭐라도 하고 살아남기 위해서 카멜레온처럼 변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우리 모두의 삶이었다. 그래서 저자는 '나의 어머니'가 역사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삶이 최고의 이야기'라는 걸 그렇게 증명해냈다.

이 소설을 읽고 아니 에르노의 다음 소설을 읽는다면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를 권하고 싶다.

어머니의 마지막을 지켜나간 저자의 기록이 담긴 이 소설이 저자의 어머니와 저자의 이야기를 더욱 풍성하게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줄 것이라 믿는다.

 

노벨문학상은 아니 에르노 수상자에 대한 평을 "개인적 기억의 뿌리, 소외, 집단적 구속 밝히는 용기와 임상적 예리함"이라고 말했다. 개인적 기억의 뿌리. 그 시작을 이 『한 여자』로 시작해 보는 것도 꽤 많은 도움이 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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