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1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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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셀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을 읽었다고 하려면,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도 읽어야 할 것이다. 완역본으로 추정되는 펭귄 클래식판 『로빈슨 크루소』의 존재를 확인했으나, 아쉽게도 읽지 못하고,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에 실린 <작품해설>을 통해 개략적 정보를 얻었다.

 

문학 해설에서는 보기 드물게도 김화영은 도표를 그려 두 작품과 그것들의 모델이 된 사건을 비교해 놓고 있다.

   

 

 

 

실존인물인 셀커크라는 선원은 1703년에 무인도에 혼자 남았고, 디포의 로빈슨과 투르니에의 로빈슨은 각각 1659년과 1759년에 무인도에 난파되었다. 다니엘 디포가 소설을 발표한 것은 1719년, 미셸 투르니에는 1966년 이다.

 

디포의 시대는 17C의 과학 혁명을 거쳐 18C 말의 산업 혁명으로 넘어가는 시기다. 서구 사회가 이성과 과학을 바탕으로, 자신감에 넘치던 때이다. ‘산업사회의 탄생’을 상징하는『로빈슨 크루소』가 탄생하기에 가장 적절했던 시기인 셈이다. 이에 반해 1,2차 세계 대전을 겪은 20C 중반의 서구는 근대 합리주의의 폐허 위에 포스트모던의 이상을 세우고 있었다.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이 『로빈슨 크루소』를 뒤집어야 했던 것은 역사의 마땅한 귀결인 셈이다. 그러므로 『로빈슨 크루소』가 자연에 대한 문명의 지배를 역설한 반면,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이 문명에 대한 자연의 귀환을 그리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럽다.

 

모던, 근대는 주체의 시대이다. 디포의 로빈슨은 섬을 지배하고 다스린다. 섬은 지배의 대상일 따름이다. 인간 프라이데이 역시 철저히 대상화된 타자, 야만적 노예일 뿐이다.

 

포스터 모던은 주체를 타도의 대상 또는 해체의 대상으로 본다. 주체가 물러나고 타자가 등장한다. 『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철학』에서 변광배는 포스트모던을 “서구철학사에서 중심을 차지했던 ‘일자’의 폭력으로 인해 주변부로 밀려났던 ‘타자’가 그 중심을 향해 획책한 반란p18” 이라고 정의한다. 샤르트르에서 시작해서 메를로-퐁티, 레비나스, 라캉, 리쾨르, 들뢰즈에 이르기까지, 20세기 중후반의 인문학 담론을 특징짓는 하나의 현상이 바로 타자이다. 타자에 대한 이들 철학자들의 담론은 물론 제 각각이다. 그러나 타자가 더 이상 주체를 위한 단순한 대상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투르니에의 로빈슨에게도 처음에 섬은 단순한 대상일 뿐이었다. 섬은 개척과 지배의 대상으로, 창조주인 로빈슨 자신에 의해 질서를 부여받아야 했다. 그러나 디포의 로빈슨과는 달리 투르니에의 로빈슨의 마음속에는 다른 가능태로서의 섬의 모습이 순간순간 떠올랐다 사라지곤 했다. 그리고 방드르디가 왔다. 처음에 방드르디는 무시무시한 의식을 거행하는 야만적 타자들의 일원이었다. 자신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목숨을 구해주게 된 방드르디는 부려야할 노예 - 타자였다. 그러나 방드르디는 그 천진성과 무구함으로 로빈슨이 섬에 이루어 놓았던 모든 질서를 날려버리고 동료 혹은 타로 카드가 예언한 대로 쌍둥이가 된다. 타자는 주체와 하나가 된 것이다. 로빈슨과 방드르디, 로빈슨과 섬은 모두 원소들로 화하고, 주체와 객체, 나와 타자가 구분되지 않는 한 덩어리, ‘태양의 로빈슨’으로 태어난다. 사실 세계의 모든 것은 우주가 폭발할 때 발생한 원소들로 이루어진 것이니 말이다. 유기체와 무기물, 주체와 객체, 하늘과 땅, 모두 동일한 입자들에서 탄생했으므로, 결국에는 하나이다.

 

 

 

주체는 타자와 하나이지만, 동시에 주체의 바깥에 존재해야 한다. 무인도에 난파한 후 곧 로빈슨은 혼자만의 삶에 진저리치며 타자의 존재를 갈망한다. “시각적 환상, 허깨비, 착란, 눈뜨고 꾸는 꿈, 몽환, 광기, 청각의 교란 등에 대항하는 가장 확실한 성벽은 우리의 형제, 우리의 이웃, 우리의 친구 혹은 원수, 하여간 그 누구, 오 하느님, 그 누구인 것이다! p 67~8 ” 마지막 12장의 ‘죄디’ 역시 타자의 존재가 삶의 동력임을 다시 한번 보여준다. 방드르리가 화이트버드호를 타고 떠나 버린 것을 안 후 로빈슨은 죽으려고 동굴을 찾아 간다. 거기서 뜻밖에 화이트버드호에서 탈출한 어린 소년을 만난다. 로빈슨은 그 소년의 손을 잡고 언덕 꼭대기로 올라 바다를 내려다보며, 소년에게 목요일이란 뜻의 ‘죄디’란 이름을 붙여준다. 죄디는 로빈슨에게 새로운 삶을 준 것이다.

 

   

 

추기 :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의 원제는 'Vendredi ou les Limbes du Pacifique' 이다. 불어 ‘Limbes’는 카톨릭에서 말하는 림보이다. 천주교 자체를 접하지 못했던 사람들이나 세례를 받지 못한 아이들이 사는, 천국과 지옥 사이의 중간지대이다. 말하자면 죄의 존재 자체를 모르고 사는 곳이다.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은 자연의 무구한 상태 그대로다. 디포의 산업사회가 파괴된 곳 위에 투르니에는 림보라는 이상향을 세웠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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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리 2014-06-06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루소가 <에밀>에게 권한 최초의 책이 <로빈슨 크루소> 라 한다. 투르니에가 1759년을 시작으로 삼은 이유다. 그런데 루소가 왜? <로빈슨 크루소> 를 어떤 시각으로 본 걸까? 청교도적 자본주의 윤리와 식민지 개척을 옹호한 책인데. 하긴 프랑스 혁명의 모델이 로크가 기초한 영국 자본주의 국가였다니.. 루소의 자유, 평등 개념도 비슷했을지도 모르겠다.

말리 2014-06-06 1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장 쓸모 있는 기술은 가장 빈약한 보수를 받고 있다...반면 한가한 사람과 부자만을 위해 일하는 소위 에술가라는 작자들은 불필요한 물건에 엄청한 가격을 매긴다... 부자가 그러한 것을 중시하는 이유는 유용성 때문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이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적인 유용성과 무관한 엄청난 비싼 가격을 보고, 어떤 물건이 값이 비쌀 수록 가치가 없다면, 그들 기술의 진정한 가치와 사물의 현실적인 가치에 대해 어떤 판단이 가능할 것인가.. 로빈슨은 쓸모없는 장신구보다 도구를 훨씬 더 아끼고 도구를 만드는 사람을 존경한다. <에밀>

말리 2014-06-06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빈슨 크루소는 고도에서 아무의 도움도 받지 않고 아무런 도구도 없이 자신을 보호하고, 나아가서 어느 정도 행복까지도 얻고 있었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경우에 필요한 것을 단순히 책에서가 아니라 실제로 자신이 경험하여 좀더 자세히 배우기를 바란다. <에밀>

말리 2014-06-06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분의 블로그에 보니 루소는 <로빈슨 크루소>를 통해 인간에게 실용적인 것을 가르치라고 했다고.

말리 2014-06-09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넷에서 검색한것 :

로빈슨 크루소와 마찬가지로 에밀은 끊임없이 산책하고 공터를 돌아다니면서 자연 가운데서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며 떠오르는 태양, 별자리를 관찰하면서 자연의 법칙도 깨닫게 된다.
로빈슨 크루소가 스스로 숙련된 기술로 자신이 필요로 하는 도구를 만들어 충족 했던것처럼 에밀은 공예 기술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된다.
동시에 공예 기술은 다수의 협력이 필요하며 사회를 필요조건으로 한다는 것을 깨닫고 에밀은 직업기술을 배운다.

직업을 배우는데 있어서 우선 극복해야 할 것은 그것을 경시하는 편견이다.
루소는 이 시기를 육체 노동, 수공업적 기술 습득과 연결된 직업 교육에 힘쓰는 시기라고도 할 수 있으나 여전히 이론적 지식은 금기이며 오로지 모든실험을 일종의 연역에 의해 연결시키면서 올바른 지식을 깨닫게 해야 한다.
이렇게 형성된 육체의 교육은 앞으로 행해질 감성 교육의 토대를 이룬다.
 
페스트 알베르 카뮈 전집 7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199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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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뮈에 의하면 『이방인』과 『시지프의 신화』, 『페스트』와 『반항인』은 각각 하나의 쌍을 이룬다. 앞의 쌍은 부조리 즉 부정의 계열, 뒤의 쌍은 반항 즉 긍정의 계열에 속하는 작품이다. 그러나 독자로서 눈에 딱 들어오는 단순한 구별 방법도 있다. 앞의 쌍은 책이 얇은 반면, 뒤의 쌍은 두껍다. 거의 두 배 정도 차이가 난다. 그런데 읽기는 오히려 『페스트』와 『반항인』이 쉽다. 『이방인』과 『시지프의 신화』가 운문 같다면, 『페스트』와 『반항인』은 산문이다. 특히 『페스트』는 카뮈가 이렇게 술술 읽혔나 싶을 만큼 편안하다. 『이방인』을 덮고 뭔가 잡힐 듯하면서도 아련하다면, 『페스트』를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훨씬 명료한 카뮈의 세계를 만날 수 있다.

  

 

 

 

 

『페스트』는 전체 5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페스트 발병, 2부는 페스트를 대하는 사람들의 자세, 3부는 페스트에 의해 파괴된 삶, 4부는 페스트와 싸우며 변화하는 사람들, 5부는 페스트의 종말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전체적인 구성은 최근에 베스트셀러로 이름을 떨친 정유정의 『28』과 비슷하다. 그러나 내용은 전혀 다르다. 『28』이 장르 소설의 형식을 따르며 사건의 전개에 치중한다면, 『페스트』는 페스트가 발생했다는 사실 이외에는 별달리 극적인 사건은 없다. 폭동도 거의 없고, 대단한 혼란도 없다. 현대 재난물의 공식인, 재앙의 발병원인이 인간의 탐욕이라는 식의 반성적 도입부도 없다. 평온하고 따분하던 일상에 쥐들이 죽어나가기 시작하고 곧바로 페스트가 창궐한다. 소설 『페스트』가 집중하는 것은 오직 사람들이다. 사람들은 어떻게 페스트에, 죽음에 대항하는가? 『페스트』는 전쟁, 특히 나치가 일으킨 전쟁에 대한 비유이지만, 인간 실존의 조건인 죽음 그 자체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서술자가 주목하는 인물들의 태도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초월적 태도, 도피적 태도, 투쟁적 태도이다. 그러나 이들의 태도는 페스트가 진행됨에 따라 변화한다. 폐쇄된 도시에서 그들의 운명은 결국 하나로 수렴되기 때문이다.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다.

 

 

랑베르는 파리의 신문기자다. 취재차 왔다가 억류된 이방인이다. 랑베르는 어떻게 해서든 오랑을 빠져 나가려고 한다. 자신은 이 도시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의사 리유에게 페스트에 감염되지 않았다는 증명서를 부탁하지만, 거절당한다. 리유 자신도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리유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감수해야 한다고 달랜다. “하지만 나는 이 고장 사람이 아닌데요!” “지금부터는 유감입니다만, 선생은 이 고장 사람입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페스트와 무관한 사람은 없다. 죽음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처럼. 하지만 랑베르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도시를 탈출하기 위해 갖은 방법을 시도한다. 거듭된 좌절 끝에 마침내 기회가 찾아온다. 그 때 랑베르는 돌연 떠나지 않겠다고 말한다. “나는 늘 이 도시와는 남이고 여러분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고 생각해왔어요. 그러나 이제는 볼대로 다 보고 나니, 나는 내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간에 이 곳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이 사건은 우리들 모두에게 관련된 것입니다.p282”

 

파늘루 신부는 페스트가 발병하자, 신의 징벌이며, 겪어 마땅할 불행을 겪는 것이라 설교한다. “오늘 페스트가 여러분에게 관여하게 된 것은 반성할 때가 왔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사람들은 조금도 그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악한 사람들이 떠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우주라는 거대한 곳간 속에서 가차 없는 재앙은 짚과 낟알을 가리기 위해서 인류라는 밀을 타작할 것입니다. ... p135” 그렇다고 파늘루 신부가, 몇 년 전 동남아시아의 쓰나미를 두고 신을 믿지 않기 때문에 죄를 받은 것 운운했던 우리나라의 목사라는 인간들과 같은 부류는 아니다. 파늘루 신부는 보건대에 자원하여 페스트에 대항해 함께 싸운다. 페스트가 절정에 치달았을 때, 카스텔이라는 의사가 죽어가는 어린 아이의 몸에 혈청을 주사한다. 새로운 혈청을 개발하기 위해서이다. 이 어린 아이는 자원 보건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다 죽는다. 리유는 파늘루 신부에게 말한다. “허, 이애는, 적어도 아무 죄가 없었습니다. 당신도 그것은 알고 계실 거예요! p293” 파늘루 신부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대답하지만, 그 역시 어린 아이의 고통을 어떻게 의미화해야 하는지 혼란에 빠진다. 두 번째 설교에서 파늘루 신부는 고백한다. 그 아이를 기다리고 있는 영생의 환희가 그 고통을 보상해 줄 것이라 말해버리는 것이 쉽겠지만, 실상은 그 점에 대해서는 자기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고. 그리고 외친다. “여러분, 드디어 때는 왔습니다. 모든 것을 믿거나, 모든 것을 부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대체 우리들 중의 누가 감히 모든 것을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p301” 페스트는 이제 그 누구보다 파늘루 신부 자신에 대한 신의 ‘타작’ 인 셈이다. 어린아이의 죽음 앞에서, 파늘루 신부는 신에 대한 사랑이냐 혐오냐의 선택을 강요받는다. 그는 선택하지 못한다. 타루의 말에 의하면 “죄 없는 사람이 눈알을 잃게 될 때, 한 기독교인으로서는 신앙을 잃거나 눈알이 빠지거나 해야 마땅하죠. 파늘루 신부는 신앙을 잃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러니 그는 갈 때까지 갈 거예요. 그가 하고 싶었던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p308” 파늘루 신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그런데 그의 사인은 ‘미상’ 이다. 의사는 페스트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그 증세에 이름을 붙이지 못한다. 죽은 아이에게 유죄를 선언할 수도 없고, 신을 부정할 수도 없던 파늘루 신부는 스스로 페스트에 걸려 죽어야 했던 것이다. 신부는 아마도 상상임신처럼 상상의 페스트를 앓았을 것이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죽음뿐이었다.

 

타루는 자원 보건대를 만든 사람이다. 열일곱 살 때 아버지가 재판에서 한 남자에게 사형선고 하는 것을 목격한 타루는 가출한다. 고생과 성공을 맛본 그는 언제나 뇌리를 떠나지 않던 사형선고에 맞서 싸우기로 하고 정치 운동에 뛰어든다. 인간은 누구도 다른 인간을 죽일 권리가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형선고와 싸우고 있다고 생각해 온 자신 역시 그 싸움을 통해 오히려 사형선고에 동참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내가 간접적으로 수천 명의 죽음에 동의한다는 것, 숙명적으로 그러한 죽음을 가져오게 했던 그런 행위나 원칙들을 선이라고 인정함으로써 그러한 죽음을 야기시키기까지 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딴 사람들은 그런 것으로 속을 썩이는 것 같지 않았고, 적어도 자발적으로 그런 이야기를 꺼내는 일은 결코 없었습니다. .... 그들은 나에게 붉은 제복이 옮음을 인정하는 태도는 곧 그들에게 사형선고를 전적으로 일임하는 것이라고 지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일단 한번 양보하게 되면 끝도 없이 양보를 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역사는 내 생각이 옳다는 것을 증명해주었습니다. 오늘날에 있어서는 많이 죽이는 자가 승리하는 모양이니 말이예요. 그들은 모두가 살인에 미친 듯이 열중해 있습니다. 달리 어쩔 도리가 없기 때문이지요. p336”

 

타루의 말은 『반항인』에서 까뮈 자신의 주장과 같다. 붉은 제복은 레닌-스탈린주의에 대한 유비로 볼 수 있다. 또한 프랑스 혁명정부에서 이름을 떨친 ‘죽음의 대천사’ 생 쥐스트 이기도 하다.

 

「유럽 정신은 전 인류와 함께라면 신에 대항하여 투쟁할 수 있으리라고 오랫동안 믿어온 연후, 이제 스스로 소멸되지 않으려면, 도리어, 인간들에 대항하여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된다. 죽음에 항거하여 몸을 일으켜, 인류 위에 억센 불멸성을 세우고자 했던 반항자들은, 이번에는 그들 자신이 살인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을 보고 기겁을 한다. 만일 그들이 후퇴한다면, 그들은 죽기를 받아들여야 한다. : 만일 그들이 전진한다면, 그들은 죽이기를 받아들여야 한다. 반항은, 그 기원으로부터 이탈되고 파렴치하게 변장된 채, 온갖 차원에서 희생과 살인 사이에서 동요하고 있다. 배분적 정의이고자 했던 반항의 정의는 요약적 정의가 되고 말았다. 은총의 왕국은 정복되었다. 그러나 정의의 왕국 역시 붕괴되고 있다. 유럽은 이 실망으로 죽어가고 있다. 유럽의 반항은 인간의 무죄성을 변호했었다. 그러더니 이제 자기 자신의 유죄성에 대하여 완강하게 버티고 있다. 반항이 전체성을 향해 몸을 던지자마자, 반항은 가장 절망적인 고독을 자기 몫으로 받는다. 반항은 전 인류의 공동체 속으로 들어가고자 했었다. 그런데 이제 반항은 통일성을 향해 나아가는 고독자들을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오랜 세월에 걸쳐 모아가는 희망 외에 다른 희망을 갖고 있지 않다.『반항인』p308」

 

반항은 통일성을 요구하지만, 역사적 혁명은 전체성을 요구한다. 전체주의에의 길이 열리는 것이다. 혁명은 도래할 유토피아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기를 강요한다. 정의의 왕국을 위해 살인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혁명은 반항의 정신을 배반한다. 반항은 불가피한 살인은 어쩔 수 없다 해도, 논리적인 살인은 결코 허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황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만으로 세계를 통일하고 정의를 실현할 수는 없다. 반항자는 반항을 포기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살인하지 않으리라고 주장할 수 없다. 반항자는 살인에 동의할 수도 없고, 전적으로 거부할 수도 없다.

 

「반항자는 그러므로 휴식을 찾을 수 없다. 그는 선을 알고 있지만 본의 아니게 악을 행한다. 그를 지탱하는 가치는 결코 그에게 결정적으로 주어지지 않으며, 그는 이 가치를 끊임없이 유지시켜 나가야 한다. 그가 획득한 존재는 반항이 다시 그것을 지탱해 주지 않으면 무너져버린다. .. 암흑 속에 빠진 그의 유일한 미덕은 암흑의 어지러운 현기증에 굴복하지 않는 데 있다. : 악에 얽매인 그의 유일한 미덕은 집요하게 선을 향하여 나아가는 데 있다.『반항인』p314」

 

반항자는 휴식을 취할 수 없다. 그는 밀어 올리면 굴러 떨어지고, 또 밀어 올리면 또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끊임없이 밀고 올라가는 시지프이기 때문이다. 반항자는 아름다운 영혼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카뮈는 반항자의 손이 깨끗할 수만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반항은 선과 악의 긴장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전적인 선을 추구할 때 반항은 무력해 지며, 악의 효율성에 손쉽게 넘어갈 때 반항은 살인이 된다. 악의 중력에 대항해 비상하려는 그 노력만이 반항인의 유일한 덕이다.

 

타루는 모든 살인을 거부한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을 죽게 하는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타루는 이 모순 속에 마음의 평화를 잃고 말았다고 고백한다. “그러다 보니 나는 내가 이 세상에 대해서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 죽이는 것을 단념한 그 순간부터 나는 결정적인 추방을 선고받은 인물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역사를 만드는 것은 다른 사람들입니다. 나는 또한 내가 그 사람들을 표면적으로 비판할 수도 없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나에게는 이성적인 살인자가 될 자질이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그것은 우월성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본래 있는 그대로의 내가 되기로 했고 겸손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다만 나는 지상에 재앙과 희생자들이 있으니 가능한 한은 재앙의 편을 들기를 거부해야 한다고 말하렵니다. 아마 좀 단순하다고 보실지 모릅니다. 단순한지 어떤지 나는 잘 모르지만, 아무튼 그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너무 여러 가지 이론들을 들어서 머리가 돌아버릴 뻔했고 그 이론들 때문에 실제로 다른 사람들은 살인 행위에 동의할 정도로 머리가 돌아버렸어요. 그래서 나는 인간의 모든 불행은 그들이 정확한 언어를 쓰지 않는데서 온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정도를 걸어가기 위해 정확하게 말하고 행동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p339” 타루가 추구하는 것은 결국 성인이 되는 것이다. 신을 안 믿지 않느냐는 리유의 물음에 타루는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 내가 아는 단 하나의 구체적인 문제는 사람은 신이 없이 성인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p341 ”

 

인간이 성인이 될 수 있을까? 타루는 페스트가 패퇴하여 물러갈 즈음에 페스트에 결려 죽는다. 타루를 보는 카뮈의 시선은 복합적이다. 타루를 반항인의 전형으로 묘사하는가 싶으면, 실패한 반항인의 씁쓸한 모습을 그린 것처럼도 보인다. 페스트에 대항해 자원 보건대를 앞장서서 꾸리며 열심히 싸우지만, 그는 마치 모든 사람들을 다 이해한 듯 옳고 그름을 구분하지 않는다. 그가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사형선고 뿐이다. 타루는 성인이 될 수 없으므로 죽어야 한 것일까? 죽어서 성인이 된 것일까?

 

『페스트』는 알제리의 오랑시를 몇 개월 간 휩쓸었던 페스트에 관한 기록물의 형태를 띠고 있다. 이 충실한 기록의 서술자는 마지막에 가서야 밝혀지는데 의사 리유이다. 리유는 맨 먼저 페스트의 징후를 알아채고, 시 당국에 적절한 조치를 요구하고, 타루의 자원 보건대를 이끌며 페스트와 직접 맞서 싸운 중심인물이다. 처음 보건대 조직을 위해 리유를 찾아갔을 때 타루는, 신을 믿지도 않으면서 왜 그렇게 헌신적이냐고 리유에게 묻는다. “ .. 만약 어떤 전능한 신을 믿는다면, 자기는 사람들의 병을 고치는 것을 그만두고 그런 수고는 신에게 맡겨버리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심지어는 신을 믿는다고 생각하는 파늘루까지도, 그런 식으로 신을 믿는 이는 없는데, 그 이유는 전적으로 자기를 포기하고 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며, 적어도 그 점에 있어서 리유 자신도 이미 창조되어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거부하며 투쟁함으로써 진리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p176” 리유는 페스트가 어떻게 될지, 다음에 무엇이 올지 알 수 없지만 자신은 당장 해야 할 일, 환자를 돌보는 일을 할 뿐이라고 말한다. 리유와 타루의 오랜 이야기 끝에 타루는 “그 모든 것을 누가 가르쳐 드렸나요, 선생님?” 이라고 묻고, 리유는 “가난입니다.” 라고 답한다. 리유는 타루처럼 고뇌하는 인간도 아니고 대단한 사상을 가진 인물도 아니다. 그저 눈앞의 현실에 맞서 싸우는 평범한 의사이다. 그러나 이 페스트의 지옥에서 조용히 투쟁하고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바로 리유이다.

 

 

리유는 카뮈의 마음속에 있던 반항인의 참된 모습이 아닐까 싶다. 리유는 신을 믿지도 않고, 성자가 되기를 바라지도 않는, 의사이다. 의사는 끊임없이 죽음과 싸우는 사람이다. 의사란 죽음을 막을 수는 없지만, 결국은 패배하리라는 것을 알지만, 포기하지 않고 인간의 편에 서서 죽음과 싸워야 하는 직업(소명)이다. 파늘루 신부도 타루도 죽었지만 리유는 살아남아 이 기록물의 서술자가 된 것은 바로 리유가 의사이기 때문일 것이다. 카뮈가 말하고자 하는 반항인이란 죽음과 싸우는 의사이다.

 

하지만 타루의 보건대 없이는 리유 역시 페스트와 맞서 싸우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리유와 타루는 서로를 보완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렇다고 둘을 합치면 완전한 이상형이 되는 것은 아니다. 통일된 세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통일을 향한 인간의 투쟁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완전한 반항인이 아니라 참된 반항인이 되고자 하는 다수의 반항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소설『페스트』는 이런 반항에 대한 하나의 증언이다. : “다만 공포와 그 공포가 가지고 있는 악착같은 무기에 대항하여 수행해나가야 했던 것, 그리고 성자가 될 수 없고 재앙을 용납할 수도 없기에 그 대신 의사가 되겠다고 노력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개인적인 고통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수행해나가야 할 것에 대한 증언일 뿐이다. p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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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프의 신화
알베르 까뮈 지음, 이가림 옮김 / 문예출판사 / 199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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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중대한 철학적 문제는 단 하나뿐이다. 그것은 자살이다.”

 

 

스무 세 살이었다. 치기였겠지, 스무 다섯 이후의 삶은 치욕이라고 주절대며 다닐 때였다. 더 살아야 할 이유는 알지 못했고, 살지 말아야 할 이유는 단순했다. 추하잖아. 삶은 권태로웠고, 세상은 불편했다.

 

까뮈를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의 두 편의 시론試論, 『시지프의 신화』와 『반항인』에 빨려들었지만, 여전히 ‘웃는 시지프’는 상상하기 힘들었다. 희망 없는 무익한 노동 속에서 어떻게 진정한 자유를 느낄 수 있다는 말일까?

 

그리고 두 배의 시간이 흘러, 다시 두 권의 책을 꺼내들었다. 꾹꾹 눌러 그은 밑줄들과 여백에 빼곡한 메모들이 낯설기도 정답기도 하다. 내 밋밋한 삶은 까뮈 이전에도 이후에도 지루하지만, 까뮈는 내 암울했던 한 때의 버팀목이었다.

  

 

<시지프의 신화 89년 중쇄(重刷), 반항인 87년 중판(): 둘 다 지금은 절판이다>

 

 

시론試論이 무엇일까? 시험할 시試자를 쓰는 시론은 ‘시험 삼아 해보는 평론이나 논설’ 혹은 ‘간단한 논설이나 논문’ 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까뮈는 소설가로 알려졌지만, 그 자신이 가장 사랑한 책은 시론인 『반항인』이다. 까뮈는 항상 세 개의 기본 테마를 염두에 두고 그것을 소설, 희곡, 시론이라는 세 개의 장르로 표현하려고 애썼다고 고백했다. 세 개의 테마는 부조리 혹은 부정, 반항 혹은 긍정, 사랑 혹은 중용이다.

 

부조리 혹은 부정의 계열에는 소설 『이방인』, 희곡 『깔리귈라』혹은 『오해』, 시론 『시지프의 신화』가 있다. 까뮈하면 떠오르는 이방인과 부조리는 ‘부정’의 계열이다. 부정은 곧바로 ‘자살’의 문제와 연결된다. 이것은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있는가?” 란 질문에 답하는 과정이다. 모든 것을 잃고 버림받은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모든 것이 다 좋다고 판단한다.” 신이 정해 놓은 운명 속에서도 그의 두 눈을 찌른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의 두 손이다. 자신의 운명에 들어온 신을 추방하고 그 운명을 온전히 자신의 것, 인간의 것으로 만든 ‘오만한 자’, 오이디푸스의 ‘다 좋다’는 바로 시지프의 행복이기도 하다.

 

「시지프의 말 없는 기쁨은 바로 거기에 있다. 그의 운명은 곧 그의 것이다. 그의 바위는 그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조리한 인간은 자기의 고통을 바라볼 때, 모든 우상을 침묵하게 한다.」『시지프의 신화』p160

 

오이디푸스의 ‘모든 것이 다 좋다’ 도 시지프의 ‘행복’ 도 삶에 대한 구원을 의미하지 않는다. 세계는 여전히 부조리하다. 인간은 이 세계에 의미 없이 내던져진, ‘피투된 존재’이다. 우리 모두에게 어김없이 예정된 죽음 역시 아무런 의미도 없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는 아무 상관없이 던져졌다, 버려지는 존재이다. 세계는 낯설다. 인간은 세계에도, 자기 자신에게도 ‘이방인’ 이다. 물론 세계-내-존재로서, 혹은 매트릭스 안의 ‘미스터 앤더슨’으로 살아갈 수 있는 한, 우리는 이방인이 아니고 세계는 말할 수 없이 친밀하며, 인생은 수많은 의미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모든 것이 시작된다.

 

「다만 어느 날 ‘왜’하는 물음이 고개를 들어 놀라움에 물든 이 권태 속에서 모든 것이 시작된다. ‘시작된다’는 말은 중요하다. 권태는 기계적인 생활의 행위 끝에 오는 것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의식의 운동을 시작하게 한다. 권태는 의식의 운동을 눈뜨게 하고 그에 따르는 운동을 야기한다. 그에 따르는 운동이란 일상적인 연쇄 속으로의 무의식적인 회귀이거나 결정적인 자각이다. 자각 끝에는 시간과 더불어 자살 또는 재기라는 결과가 온다. 권태는 그 자체 속에 무엇인가 진저리나게 하는 것을 지니고 있다. 」 『시지프의 신화』p22

 

근면·성실을 강조하는 이면에는 권태에의 두려움이 있다. 권태와 더불어 의식이 깨어나기 때문이다. 월,화,수,목,금,토,일의 바퀴를 멈춰 세우고, 낯설어진 세계에서, 의미를 찾는 의식의 활동이 시작된다.

 

「나의 논증은 그것을 각성시켜 준 명증에 충실하고자 한다. 이 명증이란 곧 부조리이다. 그것은 희구하는 정신과 실망을 주는 세계 사이의 단절, 통일에 대한 나의 향수, 여러 갈래로 분산된 우주, 그리고 그것들을 사로잡는 모순이다.」 『시지프의 신화』p68

 

부조리란 세계와 나 사이의 단절, 간극이다. 세계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데, 나는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려 한다. 신이 있던 시대에 인간은 의미에 매달리지 않았다. 의미란 신의 뜻 속에 있고, 인간에게는 신의 은총과 구원만이 문제였다. 세계는 창조될 때부터 조화와 통일 속에 있었다. 그러나 근대의 이성은 신을 죽였고, 세계는 온통 인간의 손에 맡겨졌다. 모든 것이 허용된 것이다. 인간은 자유로워 진 것일까?

 

「이 무죄는 두려운 것이다. “모든 것은 허용되어 있다”라고 이반 카라마조프는 외친다. 이 말에도 역시 그의 부조리를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이것을 통속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서 말이다. 사람들이 이점을 잘 주의했는지를 나는 모른다. 즉 모든 문제는 해방과 기쁨의 외침이 아니라 쓰디쓴 확인이라는 것이다. 삶에 의미를 부여할 그런 신의 확실성은 벌 받지 않은 악을 행하는 힘보다 훨씬 많은 매혹을 지니고 있다. 선택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선택의 여지는 없으며 이때에 쓰라린 고통이 시작된다. 부조리는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결박한다. 그것은 모든 행동을 용납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허용되어 있다는 것은 아무것도 금지된 것이 없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시지프의 신화』p91

 

까뮈는 구원의 호소 없이 살 수 있는가를 묻는다. 신의 속박이 오히려 전적인 자유보다 훨씬 견디기 쉽다. 그렇다면 신에게 돌아갈 것인가? 자살해야 할 것인가?

 

「하나의 경험, 하나의 운명을 산다는 것은 전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운명이 부조리임을 알면서, 만약 우리가 의식에 의해 밝혀진 이 부조리를 자기 앞에 유지하기 위해 모든 일을 다 하지 않는다면, 운명을 살아가는 것이 아닐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대립의 항목 가운데 하나를 부정하는 것은 그것에서 도망치는 것이 된다. 의식적인 반항을 그만둔다는 것은 문제를 피하는 것이 된다. 」『시지프의 신화』p74

 

까뮈는 자살도 신도 아니라고 한다. 화해하지 않고 죽는 것이 문제지, 자진해서 죽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자살은 하나의 착각일 뿐이다. 그리고 신으로 말하자면, 이미 죽었다. 부조리한 인간은 신 없는, 아무런 희망 없는 세상을 꿋꿋이 견디며 말없이 미소 짓는다. 비합리적인 세계를 은폐하고 신의 섭리를 선택하거나, 이 세계의 무익함에 절망하여 자살하는 것, 그 어느 쪽도 문제를 회피하는 것일 뿐이다. 그리하여 일관성 있는 유일한 철학적 입장은 ‘반항’ 이다.

 

「반항은 인간과 인간 자신의 어둠과의 끊임없는 대결이다. 그것은 불가능한 투명성에 대한 요구이다. 반항은 순간순간마다 세계를 문제 삼는다. .... 반항은 인간 자신에 대한 인간의 끊임없는 현존이다. 반항은 갈망이 아니다. 그리고 반항에는 희망이 없다. 이러한 반항은 짓누르는 운명의 확인일 뿐, 그에 따르기 마련인 체념은 아니다. 」『시지프의 신화』p74~5

 

부조리한 인간은 이 낯선 세계의 이방인이다. 그리하여 반항인이 되어야 한다. 반항은 부조리한 인간의 자유이며 열정이다.

 

  

 

 

 

까뮈는 긍정 계열의 삼부작으로 소설 『페스트』, 희곡 『계엄령』혹은 『정의의 사람들』, 시론 『반항인』을 남겼다. 『반항인』은 까뮈 최고의 문제작으로, 이 책으로 인해 까뮈는 샤르트르와 철학적 결별을 맞게 된다. 자신에게 친구보다 적을 더 많이 만들어준 곤혹스러운 책이지만 그럼에도 까뮈는 자신의 가장 사랑하는 책으로 『반항인』을 꼽았다.

 

『반항인』과 『시지프의 신화』는 하나로 연결된 책이다. 『시지프의 신화』가 자살에 대한 질문이라면, 『반항인』은 살인의 역사에 관한 고찰이다. 까뮈는 “이 시론의 목적은 자살과 부조리의 개념에서 시작된 하나의 성찰을 살인과 반항의 지평 위에서 추구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라고 함으로써 두 시론의 연속성을 밝히고 있다.

 

「삼십 년 전에는, 살인을 결심하기 전에 사람들은 자살로써 스스로를 부정할 정도로 철저히 부정했었다. 신이 속임수를 쓰고, 신과 더불어 만인이 속임수를 쓰며, 그리고 나 자신마저도 속임수를 쓰니, 그러므로 나는 죽는다. : 즉 자살이 문제였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는, 오늘날, 유일한 기만자들인 타인들만을 부정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살인을 한다. 새벽마다 요란한 몸치장을 한 살인자들이 슬그머니 독방으로 발을 들여놓는 것이다. : 즉 살인이 문제이다.」『반항인』p11

 

부조리한 감정은 어떻게 살인에 이르게 되는가?

 

「부조리의 감정이란, 사람들이 그것으로부터 어떤 행동규범을 이끌어내고자 할 때, 살인을 적어도 상관없는 것으로, 그리고는 결국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만약 사람들이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면, 만약 아무것도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만약 우리가 그 어떤 가치도 긍정할 수 없다면, 모든 것은 가능하게 되고 또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게 된다. 찬성도 반대도 없으며, 살인자는 그르지도 옳지도 않게 된다. 」『반항인』p11

 

옳은 것도 그른 것도, 어떤 가치도 없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 것인가? 아마도 자연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선악의 개념이 사라진 곳에는 강자의 논리가 들어설 것이다. 힘이 지배하는 곳에서 살인은 특권이 된다. 그러나 부조리의 마지막 추론은 자살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부조리한 인간은 인간의 질문과 세계의 침묵 사이의 대결을 유지해야 한다. 자살은 그 팽팽한 긴장을 놓아버리는 도피 행위이다. 그러므로 삶은 선으로 인정된다. 삶이 선이라면 그 선은 모든 사람의 것이어야 한다. 자살이 부정되어야 한다면 살인 역시 마찬가지다. 부조리의 사상을 인정하는 사람이라면 운명적인 살인은 인정할지언정, 추론에 의해 도출된 살인은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살인이 문제가 되는가? 신성과 신성의 절대적 가치가 사라진 세계 속에 인간은 스스로의 규범을 찾아내어야 했다. 반항이 제기하는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그 형이상학적 반항과 역사적 반항의 위태로운 노정에서 살짝 삐끗하기만 해도 집단적 살인의 광기 속으로 곧바로 굴러 떨어진다.

 

「신의 왕관이 전복될 때, 반역자는 자신의 인간조건 속에서 헛되이 찾아 헤매었던 그 정의, 그 질서, 그 통일을 이제 자기 손으로 창조해야 하며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신의 실권을 정당화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필요하다면 범죄를 저질러서라도 인간의 제국을 건설하기 위한 절망적인 노력이 시작될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은 무서운 결과들 없이 진행되지는 않을 것인데, 우리는 아직 그 중의 몇 가지 밖에 알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 결과들이 추호도 반항 그 자체에 기인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이 결과들은 반항자가 자신의 근원을 잊어버리고, ‘위’와 ‘농’ 사이의 힘든 긴장에 지쳐버리며, 마침내 전적인 부정이나 혹은 전적인 복종에 자신을 내팽개치는 한에 있어서만 발생한다.」

 

그 무서운 결과들은 반항 자체의 잘못이 아니다. 반항이 부정과 긍정 사이의 긴장을 놓쳐 버릴 때 발생한다. 까뮈는 프랑스 혁명의 공포정치, 마르크스주의, 허무주의와 러시아 테러리즘, 나치즘, 소련의 스탈린 독재 등을 통해 반항이 어떤 비극적 행로를 밟아 왔는지 보여준다. 그것은 유럽의 오만의 역사이기도 하다. 사드, 니체, 헤겔, 로트레아몽, 초현실주의, 허무주의의 역사를 통해 형이상학적 반항들이 어떤 유혹에 굴복했는지도 보여준다. 『반항인』이 긍정의 계열에 속한다지만, 이 책이 펼쳐 보여주는 근대 이후의 유럽의 역사는 절망적이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서구 형이상학은 극심한 허무주의에 시달리다 테러리즘의 길을 열어 주었다.

 

까뮈는 5장 <정오의 사상>에서 참다운 반항의 태도를 제시하고 있지만, 역사가 암시하듯 그다지 낙관적이지 않다. 까뮈의 반항인은 ‘아름다운 영혼’을 닮아 있다. 그러나 광란의 밤이 지나면 ‘다음날 아침’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잔해를 치우고 새로운 것을  세우는 손이 처음처럼 깨끗할 수 없다. 아름다운 영혼은 더러운 손을 참지 못한다. 그러므로 새로운 세계를 만들지도 못한다. 그에게 가능한 것은 영원한 반항뿐인 것일까? 까뮈의 세 번째 테마, 중용 혹은 사랑의 작품들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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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 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7
소포클레스 지음, 강대진 옮김 / 민음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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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이디푸스 왕』은 희랍의 비극작가 소포클레스의 대표작이다. 그리스를 뜻하는 ‘희랍’ 이란 낱말은 예전 세로쓰기 신문에서나 보았을 법한 낡은 말처럼 들린다. 그런데 이 단어는 최근에 희랍어 원문을 직접 번역하는 학자들이 즐겨 사용하며, 그리스란 영어 대신 널리 퍼뜨리고 있는 추세이다. 고대 그리스어로 그리스는 ‘헬라스’ 이며, 이것의 중국어 음차가 희랍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플라톤이 <국가>에서 헬라스라 한 것을 그리스라고 번역하는 것은, 외국인이 일연의 삼국유사를 번역하면서 신라를 코리아라 하는 것처럼 어색하다. 세종대왕이 “우리 코리아는..” 한다면 얼마나 우스꽝스럽겠는가. 전문가들은 헬라스가 익숙하지 않을 바에야 차라리 음차지만 희랍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물론 현대의 국가 자체를 지칭할 때는 공용어-영어 표기인 그리스가 별 문제가 없지만, 고대 그리스의 작품들을 직접 다룰 때는 내 생각에도 희랍이나 헬라스가 더 적절할 것 같다. 그래서 아직 입에 달라붙지는 않지만 나도 ‘희랍’에 정을 붙이는 중이다. 참고로 아테네를 아테나이로, 스파르타를 스파르테로, 테베를 테바이로 바꾸어 부르는 모양이다. 도시명은 여성 복수명사로 불러야하기 때문이라는 것 같은데 일반인의 입장에서는 복잡하다. 여하튼 고유명사에 관한 번역은 논란을 부르기 마련일 테지만, 일어판이나 영문판의 중역이 아닌, 원본 직역이 많아지면서 보이는 변화라 흥미롭다.

 

 

『오이디푸스 왕』은 오이디푸스 삼부작 중의 하나이다. ‘오이디푸스 왕 -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 안티고네’ 로 완결되는 이 삼부작은 막장 중의 막장 가족인 오이디푸스 집안이 거의 씨를 말리며 쫄딱 망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소포클레스의 비극 7편 중 대표적인 세 작품인데, 재미있는 것은 이 작품들이 만들어진 순서가 이야기의 전개 과정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맨 먼저 상연된 것이 내용상으로는 맨 마지막인 ‘안티고네’ 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뒤가 빈틈없이 딱 맞아 떨어진다. 그 이유는 소포클레스가 천재적인 이야기꾼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 이야기들이 이미 희랍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소포클레스의 순수 창작물이 아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이 그랬던 것처럼 줄거리는 이미 전해 내려온 이야기나 누군가가 만들어 낸 이야기이다. 소포클레스는 다만 이것을 비극의 형식으로 훌륭하게 완성해내었을 뿐이다. 희랍 비극뿐만 아니라 셰익스피어의 작품까지도 공동창작에 속한다고 한다. 골방 속에서 창작의 산고를 겪는 고독한 작가의 이미지는 근대의 산물에 불과하다. 희랍 비극의 양식과 그것의 상연 과정은 강유원의 『고전인문강의』나 <CBS 강유원의 라디오 인문학>을 통해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이 링크는 작년 말에, 희랍 비극에 대한 강유원의 강의를 내가 조금 정리해 둔 것이다.

 

 

고전을 읽다보면 현대 드라마의 전형을 발견할 때가 있다.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은 모든 신데렐라 드라마의 원형(?.. 내가 아는 한)이다. 우리가 흔히 캔디로 통칭하는 주인공은 사실 엘리자베스이다. 별 볼일 없지만 자존심 하나는 꼿꼿한 여자가 사랑과 왕자님이라는 양손의 떡을 얻어내는 최고의 성공사례가 이미 19세기 영국에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영국의 엄마들은 딸들에게 반드시 읽어야 할 책으로 『오만과 편견』을 권한다고 하며, 얼마 전 영국은 10파운드 화폐에 다윈 대신 오스틴의 초상을 넣을 것이라 발표하였다. 이 책과 오스틴의 가치에 대한 평가는 독자들마다 다를 것이지만, 이 책과 저자에 대한 식을 줄 모르는 인기는 문학사적 가치의 이면에 내포된 신데렐라를 향한 여성들의 숨겨진 욕망 때문이 아닐까 살짝 의심도 해본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도 그렇다. 지적이고 듬직한 남편과 열정적이고 매혹적인 청년 사이에서 방황하는 아름다운 여인, 비극적 결말. 삼각관계와 불륜을 소재로 한 소위 막장 드라마의 아름다운 원형이 여기에 있다. 『안나 카레니나』와 『차탈레이 부인의 사랑』역시 이 범주에 속한다.

그러나 무어라 해도 막장 드라마의 최강자는『오이디푸스 왕』이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여 아들, 딸을 넷씩이나 둔 근친상간의 참극은 아무리 막 나가는 현대의 막장 드라마도 감히 넘보지 못할 절대 금기의 영역이다. 박찬욱 감독의 <올드 보이>가 어떤 이들에게는 구역질을 불러일으켰던 이유도 그 금단의 영역을 넘본 아슬아슬함 때문일 것이다. 기껏해야 계모나 계부, 사촌이나 사돈 정도로 호들갑을 떠는 막장 드라마는 감히 『오이디푸스 왕』의 상대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장 드라마의 원형처럼 보이는 이 작품들이 고전이라는 세계적 명성을 얻는 까닭은 무엇일까? 각자 생각이 다르겠지만, 고전 완역판을 한번 정독해 본다면, 조금이나마 혹은 어렴풋이나마 그 차이를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제 세 편에 걸쳐 펼쳐지는 오이디푸스 가족의 비극적 역사를 잠깐 훑어보자. 알다시피 오이디푸스는 신탁의 운명을 피하기 위해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다. 그런데 살아남아 우여곡절 끝에 신탁대로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했다. 물론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죽인 아버지가 테바이의 왕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오이디푸스가 테바이의 왕이 된 것은 그 유명한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고 테바이를 재앙으로부터 구해냈기 때문이다. 아침에 네발, 점심에 두발, 저녁에 세발 어쩌고 하는 수수께끼는 그 출처를 몰랐지만 우리 어린 시절 추억의 한 귀퉁이에도 존재하는 유명한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순전히 자신의 능력으로, 한 도시를 구한 영웅으로, 인간들 중의 가장 현명한 인간으로 테바이의 왕이 되었다. 그러니 오이디푸스 자신의 자부심 또한 대단하다. 희랍어 ‘휘브리스 hybris' 의 뜻은 오만이다. 미국 대통령 오바마가 취임 당시 자신은 휘브리스라는 말을 듣지 않는 대통령이 되고 싶다고 했다는데, 휘브리스라는 단어를 쓴 것 자체가 ‘나 고전 좀 읽었다’는 휘브리스질 같아 우습기도 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희랍 비극의 주제는 대부분 인간의 휘브리스를 경계하는 것이라고 한다. 영웅은 오만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오만함 때문에 신의 영역을 넘보는 잘못된 판단(하마르티아, hamartia)으로 비극을 맡게 된다. 여하튼 오이디푸스는 희랍 비극의 영웅답게 휘브리스와 하마르티아를 두루 겸비(?)한 인물이다. 그런데 아들, 딸 낳고 한껏 휘브리스의 절정에 서 있을 때 갑자기 불행이 닥쳐온다. 테바이에 역병이 돌고, 이 재앙의 원인에 대한 신탁을 받아 오는데, 그 신탁이야말로 오이디푸스 가족에게는 진짜 재앙의 발단이 되어 버린다. 결국 출생의 비밀과 오이디푸스가 저지른 모든 죄가 밝혀지자, 어머니이면서 아내인 이오카스테는 자살을 하고, 오이디푸스는 이오카스테의 가슴에 꽂힌 브로치로 자신의 눈을 찌르고, 테바이로부터 추방시켜달라고 탄원한다. 여기까지가 『오이디푸스 왕』의 줄거리다.

그런데 오이디푸스는 즉각 테바이로부터 추방되지는 않는다. 새로 테바이의 왕이 된 오이디푸스의 처남, 크레온은 이 재앙 같은 인물을 어떻게 처리해야 신의 노여움을 사지 않을지 몰라서 우물쭈물 세월을 보내는데, 그 사이 오이디푸스는 추락한 장님으로서의 삶에 적응하여 그럭저럭 살아간다. 그런데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느닷없이 크레온은 오이디푸스를 추방하고, 오이디푸스의 큰 딸 안티고네는 아버지의 지팡이를 자처하며 희랍세계를 떠돌다가 콜로노스에 도착한다. 콜로노스는 아테나이의 한적한 교외로 소포클레스의 고향이기도 하다. 희랍의 모든 도시들이 이 불행하고 불길한 인간을 재앙으로 여겨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아테나이는 그가 최후를 맞을 수 있도록 입성을 허락한다. 그런데 오이디푸스가 아무것도 아닌자, 'nothing'으로서 죽음의 문턱에 서 있을 때 갑자기 테바이의 왕 크레온, 아들 폴리네이케스가 앞뒤를 다투며 그를 찾아 달려온다.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은 장성한 뒤 테바이를 번갈아 가며 통치하기로 했는데, 둘 사이 싸움이 일어나 한 아들인 폴리네이케스가 외국으로 달아나 군대를 이끌고 테바이로 쳐들어와 두 아들 간에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이 전쟁에 대한 신탁은 오이디푸스가 지지하는 아들이 승리한다는 것으로, 크레온과 폴리네이케스는 서로 오이디푸스를 데려가려고 한다. 그러나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장님이 되어 희랍세계를 떠돌 때, 그를 가혹하게 내친 크레온과 자신을 전혀 도우지 않은 두 아들 모두를 저주하며, 제우스신의 계시에 따라 콜로노스의 숲 속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한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아무것도 아닐 때 (nothing) 비로소 중요한 무엇인가가(something) 되었다는 유명한 대사를 남기는데, 정확한 문장은 잊어버렸다. 여하튼 이때의 something이란 nothing의 반대가 아니라 오히려 (지젝이 말하는) 'less than nothing' 이다. 속된 말로 하면 바닥을 봐야 비로소 인간이 된다는 것. 오이디푸스가 수수께끼를 풀고 테바이의 왕으로 휘브리스의 절정에 섰을 때가 아니라, 모든 것을 잃고 장님이 되어 죽음을 눈앞에 두었을 때에야 비로소 ‘어떤것something’ 이라는 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이것이 삼부작 중 두 번째 작품인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이다.

오이디푸스가 죽자 안티고네는 테바이로 돌아온다. 그러나 전쟁으로 두 오빠 모두 죽고, 테바이의 왕이자 외삼촌인 크레온은 테바이를 침략한 오빠인 폴리네이케스의 매장을 금지한다. 크레온은 인간의 법을 들어, 이민족을 데리고 조국에 쳐들어온 폴리네이케스를 처벌한 것이다. 안티고네는 크레온에 맞서 신의 법에 따라 오빠의 시신을 몰래 매장한다. 국법을 어긴 죄로 안티고네는 산채로 동굴에 갇히고, 안티고네의 약혼자이자 크레온의 아들인 하이몬은 아버지 크레온을 설득하지 못하자 안티고네와 함께 동굴에서 죽는다. 크레온의 아내 또한 아들의 죽음 소식을 듣고 자살한다. 『안티고네』로 오이디푸스 삼부작은 완결되는데, 오이디푸스의 일가족 중 살아남은 자는 안티고네의 동생이자 오이디푸스의 딸인 이스메네와 처남인 테바이의 왕 크레온 뿐이다. 이스메네는 오빠 폴리네이케스의 매장을 두고, 국법을 먼저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며, 언니 안티고네와 대립했다. 크레온은 살아남았지만 아내와 자식을 잃고 파멸한다.

 

 

『오이디푸스 왕』의 마지막 대사는 유명하다.

 

   오오 조국 테바이의 시민들이여, 보라, 이분이 오이디푸스다.

   그는 유명한 수수께끼를 풀고 권세가 당당했으니

   그의 행운을 어느 시민이 선망의 눈으로 보지 않았던가!

   보라, 그러한 그가 얼마나 무서운 고뇌의 풍파에 휩쓸렸는지를!

   그러니 우리의 눈이 그 마지막 날을 보고자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는

   죽어야 할 인간일랑 어느 누구도 행복하다고 기리지 말라,

   삶의 종말을 지나 고통에서 해방될 때 까지는.

 

소크라테스의 저 유명한 “너 자신을 알라!”는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 현관 기둥에 새겨진 경구다. 소크라테스의 말을 새겨놓은 것인지, 이미 새겨진 말을 소크라테스가 유행시킨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아 보인다. 여하튼 소크라테스의 말이 인간의 무지를 강조한 것이라면, 신전의 경구는 신 앞에 선 우리 모두는 인간일 뿐이므로 그 한계를 알라는 경고에 가깝다. 죽을 때까지 인간의 운명은 신만이 아는 것이니 까불지 말라는 소리다. 즉 인간의 휘브리스에 대한 경고이다.  코러스가 비통하게 노래하듯 가장 현명한 인간 오이디푸스도 오만에 빠져 파멸의 구렁텅이로 떨어졌다. 신이 내린 운명은 아무도 피해갈 수 없고 함부로 속단할 수 없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전부일까? 다음 장면은 오이디푸스가 이오카스테의 브로치로 눈을 찌른 후의 것이다.

 

   코러스 : 오오 그대 무서운 일을 저지른 분이여, 어떻게 감히 그처럼

              자기 눈을 멀게 할 수 있었나이까? 어떤 신이 그대를 부추겼나이까?

 

   오이디푸스 : 친구들이여, 아폴론, 아폴론 바로 그분이시다. 내 이

                    쓰라리고 쓰라린 고통이 일어나도록 하신 분은, 허나

                    이 두 눈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가련한 내가 손수 찔렀다.

 

 

어쩌면 오이디푸스의 진정한 오만함, 휘브리스는 이 마지막 문장에 있다. 신의 운명을 피해가지는 못했지만, 그 운명에 대한 책임만은 신이 아니라 인간인 자신의 뜻에 따라, 스스로 짊어지겠다는 이 처연한 의지야말로 신에 대한 인간의 가장 오만한 도전이 아닐까?

 

이인화라는 작가의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란 소설이 있다. 오래 전에 재미있게 읽은 책인데, 제목이 너무나 멋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얼마 후 이 제목은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중 “Who is it that can tell me who I am?”에서 따온 것이라는 걸 알았다. 『오이디푸스 왕』역시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삶의 종말을 지나 고통에서 해방될 때 까지는” 행복하다 기리지 말라는 코러스의 경고는, 인간은 결코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이디푸스는 신의 경고와 이오카스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누구인지 끝까지 파헤치고야 만다. 오이디푸스는 "Who am I ?" 에 대한 답을 얻은 대가로, 그 휘브리스의 대가로 두 눈을 잃은 것이다. 그러나 마땅히 알아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보아버린 그 두 눈을 찌른 것은 신이 아니라 ‘가련한’ 오이디푸스 자신이다.

 

 

오이디푸스 왕을 통해 우리가 느끼는 카타르시스는 오만한 인간의 처절한 파멸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이 내린 파멸 앞에서도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눈을 찌르는 인간의 그 도저한 의지에 있다. 그것은 징벌인 동시에 구원이다. 손수 자신의 눈을 찌른 순간 오이디푸스는 신이 쳐놓은 운명의 그물을 벗어나 자유로운 인간이 된다. 칸트는 인간은 거대한 자연 앞에 두려움에 떠는 한없이 미약한 존재이지만, 그 거대함을 인식할 수 있는 이성을 가졌기 때문에 자연보다 더 위대하다고 했다. (숭고에 관한 칸트의 개념이라고 내가 알고 있는 것이다.) 신이 예정한 파멸에 의해 오이디푸스는 아무것도 아닌 자-nothing로 추락했지만, 바로 그 순간 스스로의 눈을 찔러 파멸의 책임을 온전히 떠맡음으로써 그는 마침내 어떤 무엇인 자 - something가 되었다.

 

 

 

 

 

* 반년 전쯤 나는 민음사판 『오이디푸스 왕』을 읽었다. 독서회 발제를 위해 이글을 쓰면서 인용문은 인터넷과 강유원의 CBS 강의를 참조했는데, 아마도 천병희의 번역판을 바탕으로 한 것 같다. 인용문의 정확한 출처 (번역자)는 잘 모르겠음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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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공주는 왜 자꾸 문을 열어 줄까 - 동화로 만나는 사회학
박현희 지음 / 뜨인돌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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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공주는 왜 자꾸 문을 열어 줄까』

왜 그랬을까? 일곱 난장이들이 그렇게 신신당부 했는데, 왜 백설공주는 문을 열어 주고 말았을까? 저자의 답은 간단했지만, 책을 넘겨보기까지 머리 굳은 나는 그럴듯한 답을 찾지 못했다. 이 책에는 15개의 동화가 나오고, 양치기 소년이 왜 거짓말을 했는지, 피노키오는 사람이 되어 행복했는지, 라푼젤은 누구를 위해 머리를 길렀는지 따위의 질문이 쏟아진다. 굳이 책을 읽지 않아도, 목차를 들여다보며 굳은 머리를 살살 풀어보는 것도 쏠쏠한 재밋거리가 될 법하다.

 

그러나 이 책은 아이들을 위한 책이 아니다. 이 책의 목적이 동화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독자 또한 이제는 동화의 세상과는 거리가 먼 어른들이 맞을 것이다. 동화는 아이들의 세계다. 나무인형이 사람이 되고, 늑대가 말을 하고, 왕자님이 수시로 우리를 구하러 달려오는 세상은 아직은 꿈꿀 수 있는 아이들의 세상이다. 그런데 저자는 왜 닳고 닳은 어른들에게 이 순수한 동화의 세계를 들이미는 것일까?

 

동화는 알려진 것만큼 그렇게 순진하지 않기 때문이다. 동화는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 대에서 어린 시절 읽었다는 명심보감이나 동몽선습만큼 전통적인 가치관을 내재하고 있다. 명심보감은 ‘어린이들의 인격 수양을 위해 중국 고전에서 선현들의 금언과 명구를 편집하여 만든 책’ 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한마디로 선현들의 훌륭한 말씀을 깊이 새겨야 된다는 말이다. 동화는 이 직설적인 ‘금언’에 상상과 꿈을 덧입혀 화려한 치장을 해놓았다. 그 알록달록 신기하고 재미있는 세상에 푹 빠져들 때, 아이들이 진정 빠져들어 가는 곳은 어른들의 가치관이 촘촘히 짜놓은 기성 세계의 법칙 속이다. 아이들은 동화와 함께 어른들의 세계에 길들여지기 시작한다.

 

<빨간 모자 소녀>는 할머니 댁에 심부름 가는 길에 엄마의 말씀을 잊어버리고 샛길로 들어갔다가 죽을 뻔 한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큰 길은 안전하지만 흥미로운 것도 새로운 것도 없다. 엄마가 금지한 샛길은 온통 궁금하고 새로운 것들이 가득하다. 누구도 다니지 않아, 온전히 피어 있는 꽃들과 갖가지 작은 생명들, 어디로 이어져 있는지 알지 못해 더 궁금한 굽어진 길들. 소녀는 그 끌림을 뿌리치지 못하고 샛길로 빠졌다가 죽을 고생을 한다. 교훈은? 엄마 말씀 잘 듣고 남들이 다니는 큰 길로만 다녀야 안전하다. 그럼 엄마 말씀은 어떤 것?

 

<피노키오> 의 ‘엄마’ 요정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부지런해야 해. 게으름은 아주 무서운 병이야. 어렸을 때 빨리 고치지 않으면 어른이 되어서는 고칠 수가 없단다.~ 학교가기 싫어하고 놀기 좋아하던 피노키오는 첫 등굣길에 책을 팔아 유랑극단의 공연을 보러갔다가 엄청난 고생을 한다. 납치되고 팔려가고 죽도록 일하고. 집나가서 갖은 개고생을 겪은 끝에 피노키오는 할아버지를 위해 열심히 일을 하게 되고, 마침내 나무 인형 피노키오는 진짜 사람이 된다. 학교에서 부지런히 공부를 하든, 그게 싫거나 안 되면 부지런히 일을 해서 돈을 벌든, 그래야만 비로소 인간이 된다는 교훈이다. 사람이 되고 싶어? 그럼 말 잘 듣고 부지런히 일해!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는데, 칸트는 교육이란 어떤 내용을 가르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형식 속에 교육의 목적이 있다고 했다. 단체로 앉혀 놓고 정해진 시간 동안 선생님의 지시를 따르도록 만드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다. 근대 산업사회는 그렇게 규율에 잘 적응하는 인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학교는 온전한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데 필요한 것보다는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을 가르친다. 이것은 정해진 시각에 출근해서 정해진 자리에서 정해진 일을 하는 산업 사회의 일터 모습과 놀랍도록 닮았다. 이때 사람들이 하는 일은 자신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것이다. p41」

 

이 책의 저자는 고등학교 선생님이다.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은 단지 동화 속에 내재된 이데올로기를 까발리는 것에 있지 않다. 그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우리의 교육이 아이들을 그리고 우리 어른들을 과연 행복하게 만들고 있는가를 다시 한 번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질문은 너무 많이 들어서 듣고 싶지도 않을뿐더러 답이 없어 더욱 외면하고 싶은 질문이다. 몰라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알아도 못하는 것을 도대체 어쩌라고 자꾸 이런 지적질 인가 짜증도 난다. 근대 교육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말 잘 듣는 인간을 길러내는 것일 뿐 아니라, 거기에 우리나라의 교육은 가히 1%를 위해 99%가 죽어나가는 미친 시스템 이다. 시스템 앞에 선 개인은 한없이 무력하다. 그런데 왜 자기만 안다는 듯이 잘난 척인가 싶다.

 

그러나 외면한다고 시스템이 깨지는 것도 아니다. 시스템이 바라는 것이야말로 개인들의 외면이다. 그것이 무지이든 체념이든 냉소이든 결과는 동일하다. 시스템의 작은 틈도 가느다란 균열도 막아주는 것이 바로 구성원들의 외면이다. 북한산 인수봉의 바위도 가느다란 틈 속으로 흘러들어간 물이 얼었다 녹으면서 결국 깨져 떨어졌다. 인명이 다친 불행한 사고이지만, 하루에도 수만의 발길을 받아내고도 끄떡없던 바위도 작은 틈과 세월의 흐름, 계절의 변화에 갈라졌다. 모든 시스템에는 틈이 있기 마련이다.

 

이렇게 말했지만, 이 책이 번연한 소리를 지겹게 하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이 책은 재미있다. 어릴 적 읽었던 동화에 나도 이렇게 길들여졌구나 새삼 깨닫게도 되고, 수업시간에 잠만 자는 아이, 죽어라고 치마 길이를 줄이는 아이, 거울만 쳐다보이는 아이들이 우리 교육의 부산물이 아니라 필연적 산물임을 아프게 느끼게도 된다. 선생님 저자는 매일 부딪히는 학교의 현실을 동화에 빗대어 불같이 토해낸다. 다혈질에 직설적인 성격일 것 같은 저자의 문장도 꾸밈없고 거침없다. <동화로 만나는 사회학> 이라는 부제답게 교육 현장 그리고 사회 곳곳의 문제를 입바르게 지적한다.

 

그렇지만 이 책이 그렇게 매끈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여기서 동화는 목적이 아니라 일종의 도구다. 그러다보니 딱 맞춤으로 떨어지는 동화 해석도 있지만, 무리하게 꿰맞춰 어색한 해석도 있고, 왜곡이다 싶을 만큼 편향된 해석도 있다. 그러나 조금 거슬리는 몇 편을 못 본 척 눈감아 주면, 무릎을 딱 치며 얻게 되는 깨달음의 기쁨이 있다.

 

그런데 백설공주는 왜 자꾸 문을 열어주었을까요? 

책장을 넘기기 전에 각자의 해답을 찾아 보시길 권유드린다.

 

 

 

 

 

 

<칸트의 '훈육' 부분, 5월 13일 추기>

** 어디서 읽었던지 기억해 내지 못하고 두어 달이 지났다. 어제밤 누워 희미한 기억을 따라 이 책, 저 책 넘기다, 딱 마주쳤다. 찾았다! 기억과는 다르게 칸트를 직접 인용한 것이 아니라, 다른 저자의 책에서 재인용한 것이었다.

 

지젝의 『까다로운 주체』 p66~67

 

  인간이 동물적 충동들 때문에 자신의 정해진 목표인 인간다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막아주는 것은 바로 훈육이다. 예컨대 훈육은 인간이 야생적이고도 무분별하게 위험을 무릅쓰는 일을 못하게 해야 한다. 그리하여 훈육은 단지 부정적인 것이며, 그것의 작용은 인간의 자연적 제어불능을 막아내는 것이다. 교육의 긍정적 부분은 가르침이다.

   제어불능은 법으로부터의 독립에 있는 것이다. 훈육에 의해 인간은 인류의 법에 종속되며 법의 제약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이는 초기에 성취되어야 한다. 예컨대 어린이를 학교에 보내는 것은 뭔가를 배우려는 목적에서가 아니라 조용히 앉아서 시키는 그대로 행동하는 데 익숙해지기 위해서다....

   자유에 대한 사랑은 인간에게 있어서 자연적으로 너무나 강력한 것이어서 일단 자유에 익숙하게 성장하게 되면 자유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것이다.... 자유에 대한 자연적 사랑 때문에 인간의 자연적인 거친 상태를 승화시키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동물들의 경우에는 그들의 본능이 이를 불필요하게 만든다.

(Kant and Education, London : Kegan Paul, French, Trubner & Co, 1899, pp 3~5) 

 

  한편으로 칸트는 훈육이 인간 동물을 자유롭게 만들고 자연적 본능의 손아귀에서 해방시키는 절차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른 한편으로 훈육의 표적은 직접적으로 인간의 동물적 본성인 것이 아니라 자유에 대한 과도한 사랑, 천성적 ‘제어불능’임이 분명한데, 이는 동물적 본능에 따르는 것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다. 즉 이 제어불능 속에서, 고유하게 예지적인 또 하나의 차원이, 즉 인간이 자연적 인과율의 현상적 연결망에 얽매여 있는 상태를 중지시키는 차원이, 폭력적으로 출현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도덕성의 이야기는 자연 대 문화라는, 즉 도덕 법칙이 우리의 자연적 ‘정념적’ 쾌락 추구 성벽을 제약한다는 표준적 이야기가 아니다. 반대로 투쟁은 도덕법칙과 비자연적인 난폭한 제어불능간에 있는 것이며, 이 투쟁에서 인간의 자연적 성벽들은 오히려 인간의 안녕을 위협하는 제어불능의 과잉에 대항하여 도덕법칙의 편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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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6-02-07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화는 어른이 아이를 위해 쓰고 남긴 것이 아니라 저자가 아이들의 견해를 궁금해 한 나머지 자 ~너희는 어떤 답을 가지고 있는지 볼까 하고 던져놓은 미끼 같단 생각을 저는 가끔 해요.
어릴때도 그랬고 커서도 순수하게 보이지 않던 동화 ㅡ
왜일까요? 늘 어른은 아이들에게 이래야만 뭔가 얻을 수있다 ㅡ라는 식. 이라서 ..저는 순수하게 안본 것 같아요. 거래로 봤지.. 교육은 훈육이란 ㅡ말그대로 거래인셈이죠. 사회와 부합하기위한 ..그게 인격형성에 는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는 알수없지만, 착한 아이표가 되는 것 만큼은 그리 썩 달가운 건 아니에요. 한번쯤 스스로 틀리다 말한 길도 가보고 스스로 어른이 되는걸
아이들은 아는 데 ..어른들이 편하자고 막는 걸 수도 있단 ㅡ심각한 문제적 시선도 ..한번 가져보는 중예요. 인간은 자연인여야하는데..자꾸 규격화 시키는 힘 ㅡ 이게 뭘까 ..하고요. 기성세대ㅡ의 잣대로 만든 교육론이 아닌가 ㅡ하고 말이죠.
순 ㅡ얼토당토 인 엉망 진창 이야기라는거 아는데..
그냥 그럴 수도있지않냐 ..하는거죠.
아이들은 그리 순수하지도 못말리게 천사같지도 않아요.
어쩌면 어른보다 현명하기까지 하죠.
자꾸 틀에만 가두는 이 시대의 교육이 도움이 될지 모르겠어요. 많은 공부는 어른이 더 필요하단 생각예요.
동화도 역시 어른에게 필요하죠.
순수한 (?)아이들이 필요한 것처럼.
왜...삐딱하지...!? (저 동화 좋아해요!^^)

왜 문을 열어주느냐...그거야말로 백설이 자신의 의지가
원하니까 ㅡ아닐까요?
그 어릴적에 버려는 졌어도 숲은 그녀에게 관대했다면 관대했어요. 그러니 그녀는 그리 꺼리낄 만한 것이 없는
셈 ㅡ이고요.딱히 트라우마가 숲 이나 문 자체엔 없기에..
(뭐래니, ㅎㅎ)
문열면 안된다는 말이 없었다면 그런 의식˝을 아예 하지도 않았을텐데. ..안그런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