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조를 기다리며 위픽
조예은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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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예은 작가를 알게 된 것은 『스노볼 드라이브』를 통해서였다. 어느 여름부터 피부에 닿으면 발진을 일으키고 태우지 않으면 녹지도 않는 방부제 눈이 내렸다. 이대로 세상이 다 망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면서, 예기치 않은 재난에 일상이 무너져 버리자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모루와 이월의 이야기였다. 경쾌하면서도 애틋한 조예은만의 디스토피아. 그 이후 『뉴서울파크 젤리장수 대학살』와 『칵테일, 러브, 좀비』도 읽었다. 그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단편 소설 「오버랩 나이프, 나이프」이다. 이쯤 되면 나도 조예은 신작을 기다리는 독자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이번에 출간된 『만조를 기다리며』가 반가웠다.


“어떻게 해서든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요.”
영산에는 오래된 전설이 있다. 죽은 자의 소지품이나 뼈를 묻으면 그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전설이었다. 신령한 기운이 깃든 영험한 산이라 하여 영산. 우영은 늘 영산에 묻히고 싶어 했다. 어느 날, 정해는 우영이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는 연락을 받는다. 정해는 우영이 바다에 몸을 던졌다는 것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고, 20년 만에 우영의 고향인 미아도를 향한다. 어떤 의문도 미심쩍음도 남지 않도록. 우영은 죽기 전 정해에게 메시지를 쓰고 있었다. 「우리 숨바꼭질 기억해?」


미아도에서는 영산의 주인을 산주라 불렀다. 산주라는 호칭에는 단순히 소유자를 뜻하는 걸 넘어 마을의 대표이자 섬의 평안을 관장하는 제사장 같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대대로 영산의 주인이었던 최씨 집안이 영산의 주인이자 섬의 주인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빠르게 변했고, 간척 사업으로 섬이 육지가 되어 인구가 줄어들었고, 와중에 산주였던 최함록이 세상을 떠나자 막내딸이었던 최양희가 새로운 산주가 되었다. 재회 소망 사랑. 최양희는 영산교라는 신흥종교를 만들어 죽은 자와 재회할 수 있다는 전설을 교리로 만들었고, 사람들의 그리움과 눈물로 덩치를 키우며 영산을 지켰다. 


"늘 바다를 배경으로 쌍둥이를 그리잖아. 하나는 너일 테고, 다른 하나는?"
열두 살 때 외할머니를 따라 미아도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정해는 우영을 만났다. 산지기의 딸이었다. "우리 숨바꼭질하자." 우영에게 백까지 세도록 시키고 정해는 갯벌을 가로질렀다. 우뚝 솟은 암석을 타고 올라 가운데 작은 굴처럼 파인 공간에 몸을 밀어 넣었다. 정해는 사라지고 싶었다. 자신의 죽음으로 외할머니와 부모에게 상처를 주고 싶었다. 죽음은 빠르게 목전까지 차올랐고, 살려달라는 소리는 누구에게도 닿지 않았다. 서서히 밀물이 들어찼고, 만조에 가까웠다. 그러나 우영은 정해를 찾아냈다.

누군가의 부고는 꽤 오래 마음에 상흔을 남긴다. 더구나 그 죽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경우라면 더욱. 누군가의 죽음을 이해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지만, 남겨진 자는 죽음을 이해해야만 자신의 일상을 살아갈 수 있다. 『만조를 기다리며』는 그 죽음을 받아들이기 위해 반드시 재회하고 싶은 그리움에서 시작한다. 곧 조예은 월드로 초대될 독자분들을 위해 결말은 접어두고,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이 작품은 전략적으로 촘촘하게 짜인 플롯이 서서히 맞춰지는 과정을 통해 독자를 즐겁게 한다고 말할 수 있다. 무척 재밌게 읽은 소설, 조예은의 작품을 언제나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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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피스토
루리 지음 / 비룡소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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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제목인 메피스토(Mephistopheles)는 그리스어로 해석할 경우 메(μή, 아니다)+포스(φώς, 빛)+필로스(φίλος, 사랑하는 자)의 합성어로 '빛을 증오하는 자'를 의미하는데, 이는 파우스트 전설 속 악마의 이름이다. 악마 메피스토는 평생을 학자로 살아온 파우스트를 두고 신과 내기를 한다. “내기를 할까요? 당신은 결국 그 자를 잃고 말 겁니다.” 악마는 그를 타락시킬 수 있다고 했고, 신은 그를 구원할 수 있다고 했다. 신은 "착한 인간은 비록 어두운 충동 속에서도 무엇이 올바른 길인지 알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 이야기는 검은 개로 변한 메피스토의 유혹을 받아 한 소녀를 만나면서부터 시작된다.​

"내기를 할까요? 당신은 결국 그 자를 잃고 말 겁니다. 허락만 해주신다면 녀석을 슬쩍 나의 길로 끌어내리리이다. 주님 그가 지상에 살고 있는 동안에는 네가 무슨 유혹을 하든 말리지 않겠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이니까." ─ 『파우스트1』(민음사) 중에서



구원받지 못한 악마 메피스토는 버림받은 떠돌이 개의 모습으로 혼자 남겨졌다. 그러나 우연히 만난 한 소녀와 약속(계약)을 맺고 서로의 비밀을 숨긴 채 친구가 되어간다. 소녀와 악마는 함께 못된 짓을 벌이며 세상을 향해 말썽을 부리지만 이 둘에게는 그저 아름다운 추억이 된다. 소녀는 친구 하나 없이 외로웠던 마음을 메피스토로부터 위로받고, 함께 한 시간을 소중하게 사진으로 남긴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늙지도 죽지도 못하는 악마 메피스토는 소녀를 곁에서 지키지만, 소녀는 나이가 들고 늙어 기억을 서서히 잃어간다.



"지옥은 어떤 곳이냐고 네가 물었어. 지옥에 가면, 가장 미워했던 존재의 모습으로 평생을 지내게 돼. 그래, 지옥에 가면 너는 네 모습 그대로, 나는 내 모습 그대로 지내게 되겠지. 그럼 천국은 어떤 곳이냐고 네가 다시 물었어. 나도 몰라. 가 본 적이 없어서. 가장 좋아했던 존재의 모습으로 살게 되려나. 그래, 그럼 나는 네가 되고, 너는 내가 될 거야."


“허무하고 허무하다. 모든 것이 무의미한 밤이로다.” 괴테의 『파우스트』에서는 평생 학자로 살며 모든 것을 이루었지만 지나간 시간이 허무하게 느껴져 절망에 빠져있다. 그때 메피스토가 나타나 쾌락적 삶을 선사하는 대신 영혼을 넘겨받는 조건으로 파우스트와 계약을 맺는다. 파우스트는 메피스토에게 '젊음'을 요구하고, 마녀의 영약으로 이십 대 청년이 되어 그레트헨을 만나게 된다. 방탕한 파우스트의 마음을 정화하는 그레트헨의 고귀한 사랑을 못마땅하게 여긴 악마의 농간으로 둘은 사람을 죽이게 되지만, 감옥에 갇힌 그레트헨은 파우스트를 용서하고 죗값을 받겠다고 고백한다. 그렇다면 메피스토와 신의 내기는 누가 이기게 될까?


"나만 빼고 다들 구원받아. 난 악마니까. 그래서 유난히 별이 많이 뜬 저녁, 넌 신에게 내기를 걸었어. 악마 하나를 두고, 넌 나를 구원할 수 있다고 했고, 신은 아무 말이 없었지. 넌 내기에서 이기면 소원을 하나 들어 달라고 했고, 신은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지."



가난과 장애로 가정에서도 친구들 사이에서도 소외된 소녀는 처음으로 내 편이 되어준 메피스토를 악마인 모습 그대로 사랑해 주었다. 오히려 소녀는 소원으로 신에게 내기를 걸어 사람이 되고 싶다던 메피스토를 구원한다. 악함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루리 작가의 『메피스토』는 검은 개와 소녀의 우정과 사랑 이야기로도 감동적이지만, 파우스트의 이야기를 알고 보면 더욱 감동적이다. 나는 아직 읽지 못했지만, 많은 사람들로부터 루리 작가의 『긴긴밤』을 읽고 감동받았다는 말을 들었는데, 어쩐지 그 마음을 알 것 같다. 종종 이 그림책을 꺼내 읽을 것 같다. 『긴긴밤』도 읽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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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란한 아침의 나라
신원섭 지음 / 황금가지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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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의 장르를 뭐라고 정의하면 좋을까. 보통의 경우, 스릴러 혹은 범죄 소설이라고 말하면 자연스럽게 '살인 사건'을 떠올리게 되는데, 신원섭 작가의 『요란한 아침의 나라』는 누군가가 죽거나 범인이 누구인지 추리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문득 궁금해져서 '스릴러' 장르의 정의에 대해 검색해 보니, 서스펜스를 중심으로 한 플롯 그 자체 혹은 범죄를 소재로 한 장르소설 전체를 대표하는 이름이라고 한다. 생각해 보면 '범죄'라는 범위가 무척 넓은데 익숙하게 읽고, 영화로 봐온 내용만 한정해서 좁은 범위로 생각했던 것 같다.


​『요란한 아침의 나라』는 거대한 부지를 매입했으나 미혼모 쉼터로 인해 진입로가 막혀 개발이 지연되고 있는 부동산 투기업자 한 사장이 이 땅을 차지하기 위해 복지 법인 '사랑의 집'과 대표 오유라에 관한 비리를 파헤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한 사장은 전직 형사 출신인 청부 용역 이진수에게 의뢰해 사랑의 집에 관한 비리를 파헤치면서 인권 변호사로 얼굴을 알리기 시작한 하나연을 영입해 시민단체 간의 파워 게임으로 쉼터를 뺏을 계략을 세운다.


오유라는 한때 시민운동에 헌신하며 미혼모 쉼터를 운영했지만 이제는 자신의 잇속을 위해 단체의 기부금을 개인 용도로 사용하고, 쉼터를 별장처럼 이용하면서 어린 미혼모를 무임금에 가정부처럼 이용했고, 아내의 일을 도와 미혼모 시설을 관리하고 있던 진상은 어린 미혼모를 꾀어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다. 이에 대응하는 이진수나 하나연도 자신의 잇속을 챙기기는 마찬가지. 이들은 시민단체를 내세워 서로의 정의를 실현하고자 진실을 폭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속내는 모두 똑같을 뿐이다.


​"먼저 전국구 저명인사인 오유라가 기업들로부터 거액의 기부금을 유치한다. 대규모 자금이 흘러들면서 인근 부동산이 들썩인다. 여기에 지역 언론과 개발업자들이 가세해 분위기를 조성한다. 와중에 등장하는 절차적 장애물은 정치인과 공무원들이 치우면 된다. 물론 알짜배기 개발 정보는 내부자끼리 사전에 나눠 먹은 뒤다. 지난 몇 년간 김주미 시장이 적극적으로 추진해 온 구시가지 재생사업의 이면에는 이러한 맥락이 작동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모두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_p.213


이 소설에서 재미있는 점은 전직 형사 출신 이진수와 부동산 업자 한 사장으로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정점에서 대결하는 인물은 '사랑의 집' 대표 오유라와 '희망 연대' 대표 하나연 변호사의 대결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범인'이 누구인가를 찾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정의'인가를 고민하게 하는 지점이다. 뒤에 작품 해설을 쓴 김시인 평론가는 이를 '여성 누아르'라고 지칭했는데, 매우 근사한 표현이다. 지금까지 '누아르'는 어둠의 세계 속 피비린내 나는 남성들의 서사이자 전유물처럼 여겨졌는데 이를 전복시킨 것이다.

"어차피 세상에 무해한 인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나연은 생각했다. 인식의 범주를 끝없이 확장하다 보면 5000원짜리 커피를 마시는 일상조차도 제3세계 아동 노동을 방조하는 행위가 되어 버린다. 그래서 하나연은 그냥 합리적인 사람이 되기로 했다. 법이 허용하지 않는 일은 하지 않고, 내야 할 세금을 탈루하지 않는 것. 그것이 그녀가 발을 딛고 사는 흑과 백의 어느 중간쯤이었다." _p.298

"성범죄자에게서 훔친 돈을 피해자에게 건네는 일은 선한 행위인가? 부패한 법인의 재산을 횡령하는 일은 정의로운가? 하나연은 자신이 합리와 비합리의 경계선상 어디쯤을 걷고 있는지 마음속으로 가늠해 보았다." _p.360


부패한 시민단체와 정치인, 부동산 투기업자의 계략과 저마다의 이익을 위해 정의나 공정따위는 쉽게 무시되는 모습은 낯설지 않다. 그리고 모두가 부패한 사회에서 나도 적당히 합리적인 사람으로 눈 감고 살고 있겠지. 이들의 반격과 결말이 어떠할지는 직접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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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니비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14
박문영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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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9년 3월 4일, 인류의 절반은 다른 행성을 찾아 도망쳤다. 오염된 지구를 구할 방법은 없었다. 저무는 지구는 뇌우, 해일, 홍수, 폭우, 폭서, 혹한, 화재, 지진으로 지옥처럼 변해갔다. 버려진 이들은 그저 잠잠히 살다가 최대한 평화롭게 죽어가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고 오염된 땅에서 자연 임신은 더 이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제초제와 수은 그리고 방사능에 절여진 땅은 사람보다 일찍 생식 기능을 잃어갔고, 기술을 지닌 사람들이 모두 떠나 인공 시험관을 통한 출산도 불가능해졌다. 카오스 이후 황폐해진 지구는 더디지만 회복되어갔고 인간의 빈자리는 기증받은 난자와 정자를 통해 만들어진 클론으로 채웠다. 클론은 신생아 단계에서 희망 가구에 한 명씩 보내졌다.


"긴 암흑기를 견뎌낸 사람들은 병든 지구와 함께 늙어가며 몸을 천천히 회복해나갔다. 얼마 후 증세가 완화되자 클론을 만들었다. 그리고 늘 그렇듯 거기 안주하지 않았다.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보려는 기질. 어떤 상황에 처박혀도 잃지 않는 낙관과 용기. 욕심과 욕망을 분별하지 않는 태도. 그건 확실히 인간 습성의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_p.35


​버려진 지구를 재건한 사람들, 그리고 재건된 지구에서 태어난 인간과 클론이 공존하는 세계. 이 소설은 이러한 세계에서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논란과 화제의 중심에 선 리얼리티 쇼 <허니비>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허니비는 대한민국 민영 방송사 KO-OK의 서바이벌 관찰 예능으로 최종 커플이 된 두 사람은 반드시 아이를 낳아 길러야 하고, 양육 과정을 투명하게 시청자들에게 공개해야 한다. 이성애 유성 생식을 기반으로 한 자연 임신.  자연이 자신의 세대를 이어가는 방식은 다채로운데도 불구하고 시청자들은 자연 임신이라는 화두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러나 최종 커플이 자신들을  빼닮은 아이를 출산하자 시청자들은 모두 탄생의 신비에 감탄하고 경이로워했다.


​"시청자들은 양육자들의 모습을 빼닮은 아이의 모습을 두고두고 놀라워했다. 경이롭다, 신비롭다, 아름답다는 표현을 아끼지 않았다. <허니비>에 멍하게 빠져든 엄마 표정을 본 클론, 아빠의 테트라 시청 기록을 확인한 클론, 방송이 끝나고 씁쓸하게 혀를 차는 부모를 본 클론 몇몇이 자해를 시도했다. 시청률이 급등하자 우울감, 무기력증, 공황장애에 시달리는 클론들이 늘어났다." _p.75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등장인물의 이름으로 붙여주었다. 게토 중에서도 가장 폐쇄적인 구역인 제로에 살고 있는 자매 '조화'와 '조율'이라는 이름으로. 표준국어 대사전에 따르면, 조화란, 만물을 창조하고 기르는 대자연의 이치 또는 서로 잘 어울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고, 조율이란 문제를 어떤 대상에 알맞거나 마땅하도록 조절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이름처럼 조화와 조율 자매는 리얼리티 쇼 <허니비>를 보며 상반된 반응을 보인다. 조화는 최종 커플이 임신하여 낳은 아이에 매혹되어 자신 또한 아이를 낳아 기르고 싶어 하고, 조율은 가족들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방향을 바꾸어 <허니비>에 출연할 결심을 한다. 이들의 선택은 자신들에게 이름이 붙여진 순간 결정되었는지도 모른다.


"인륜이 뭐죠? 인간다운 것, 인간 같지도 않은 것, 인간보다 못한 것. 왜 전부 인간이 척도가 되어야 하나요. 산불이 났을 때 예전 사람들은 숲의 동식물들이 얼마나 죽고 다쳤는지 얘기하지 않았어요. 인명과 재산 피해만 보도했죠. 혹시 이런 것이 인륜인가요?" _p.105


박문영 작가가 상상한 『허니 비』는 내가 상상하는 지구의 미래와 매우 흡사하다. 지구는 서서히 망가져가고, 이 땅에 생존한 사람들은 지금처럼 자연적인 출산이 어려워진 미래. 그러나 사람은 혼자일 수 없기에 온기를 대신할 대체재를 찾을 것이고 인공지능을 통해 사람 같은 존재감을 느끼길 원할 것이다. 이러한 시대에 인류는 조화로울 수 있을까? 그러나 놀랍게도 이 이야기는 지금의 이야기 같기도 하다. 함께 공존해서 살고 있지만 인종과 재산에 따라 서로 계급을 나누고 차이에 따라 보이지 않는 선을 그어버리는 사람들, 자신의 편리를 최우선으로 추구하는 사람들과 자연과의 공존을 위해 애쓰는 사람들의 대립, 비난하면서도 호기심을 느끼고 누군가의 사생활을 담보로 흥미를 끄는 언론과 대중의 모습은 지금과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예견된 미래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 지구에 버려진 이들이 생존하고 재건하며 다시 재생의 터전으로 만들었다면, 이제 이 땅에 태어난 사람과 클론 모두 서로 공존할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조화롭게 조율하면서. 인간은 그럼에도 또 방법을 찾아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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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딜 수 없는 사랑
이언 매큐언 지음, 한정아 옮김 / 복복서가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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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딜 수 없는 사랑』으로 번역된 이 소설의 원제는 Enduring Love, 즉 '지속하는 사랑' 또는 '견디는 사랑'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사랑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의 수만큼 다양하게 정의할 수 있는데, 그중에서 변함없이 지속하는 사랑의 모습과 험난한 역경을 견디는 과정에서 강화되거나 파경에 이를 수 있는 사랑의 모습을 다채롭게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아름다운 들판에서 오랜만에 만난 연인과 소풍을 즐기던 조 로즈와 클라리사는 아이 혼자 타고 있는 헬륨 기구가 위태롭게 떠오르는 것을 발견한다. 이 모습을 발견한 사람들이 사방에서 달려왔고 기구를 붙들기 위해 밧줄에 매달리지만, 거센 바람이 불어와 그들 모두를 허공으로 들어 올린다. 그 순간 누군가 한 명이 밧줄에서 손을 놓아 땅으로 떨어졌고 이어서 사람들이 기구를 놓고 땅으로 내려왔다. 그러나 존 로건만이 끝까지 기구를 붙잡았고 더 높이 떠오른 기구에서 밧줄을 놓쳐 사망하게 된다.


사건을 함께 목격한 조와 클라리사는 죄책감을 느끼고 서로를 향한 굳건한 사랑으로 끔찍한 경험을 이겨내고자 한다. 그러나 그날 밤, 조는 사고 현장에 함께 있었던 패리로부터 한 통에 전화를 받는다. "당신 감정을 이해한다고 말하고 싶어서 전화했어요. 나도 같은 감정이니까요. 사랑해요."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패리의 전화를 클라리사에게 숨긴 '최초의 실수'를 시작으로 이 둘의 관계는 균형을 잃기 시작한다.


"그 사고 이후 우리가 느낀 고통은 우리가 실패했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줄을 놓은 것도 우리의 본성에 속하는 행동이었다. 이기심 또한 우리 마음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남들에게는 무엇을 주고 자신은 무엇을 가질 것인가. 우리는 칠턴스 언덕 위 3~4미터 상공에 떠 있으면서 '우리냐, 나냐'하는 해결할 수 없는 아주 오래된 도덕성의 딜레마에 직면했다." (29)


소설 초반부는 기구 사고와 이 사고를 함께 목격한 사람들이 느끼는 죄책감에서 시작되지만 그 이후는 스릴러의 성격을 띤다. 사고 현장에 함께 있던 패리는 조가 먼저 자신을 사랑했다고 주장하며 그 사랑의 책임을 묻고 집 앞을 서성이며 수십 장의 편지를 보내온다. 하나의 해프닝 정도로 여기던 조는 매일 자신을 미행하며 헛소리를 하는 패리의 행동을 점점 심각하게 여기고 그 문제를 클라리사와 논의하고자 하지만, 클라리사는 사고의 충격으로 조가 지나치게 패리의 문제에 집중한다고 여기며 패리가 보내온 편지가 실은 조가 쓴 것은 아닌지 의심한다. 사실 나 또한 마지막 순간까지 패리의 존재를 의심했다. 클라리사의 생일에 식당에서 일어난 총격 사건이 실은 패리가 자신을 죽이려고 사주한 사람들이 실수로 다른 사람을 죽인 것이라는 조의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그의 세상은 내부에서 결정되고 개인적인 필요성에 의해 움직이는 세상이었고, 이런 식으로 온전하게 유지되었다. 그가 틀렸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그가 옳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필요한 것도 없었다. 내가 그에게 열정적으로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를 썼어도 아무런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고안한 감방에 틀어박혀 의미를 알아내려 애쓰고, 실제하지 않는 교류에 희망이나 실망의 드라마를 채워넣었다." (215)


자신의 사랑에 전혀 반응하지 않는 상대방을 격렬하게 사랑하고 상대방도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망상에 사로잡힌 드 클레랑보 신드롬의 패리는 조의 반응과 상관없이 자신만의 망상을 이어간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인물, 기구에 매달려 죽음을 맞이한 존 로건의 부인은 차 안에서 발견된 피크닉 용품과 여성의 장미 향수가 나는 스카프를 증거로 남편이 외도 중이었고, 여성에게 잘 보이려다 사고를 당했다고 믿는다. 진실보다는 자신이 믿고자 하는 대로 믿는 사람들.


그렇다면, 지속하는 사랑은 무엇인가. 내 어릴 적 대중음악의 가사에는 '영원한 사랑'이라는 말이 흔히 쓰였다. 그래서 변함없고 영원한 사랑이 아름다운 사랑의 모습이라고 여겨왔다. 날 떠나도 돌아와 달라며 기다리고, 죽을 때까지 당신을 잊을 수 없다고 고백하는 사랑. 노래 가사 속 아름다웠던 영원한 사랑을 지금은 집착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이 소설 속 지속적인 사랑(상대방에게는 견딜 수 없는 사랑)은 제드 패리에게서만 찾을 수 있다. 패리의 사랑만이 비록 병적이고 이기적인 사랑이지만 그가 죽어 없어지는 날까지 지속되는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와 클라리사는 견디는 사랑의 모습을 보여준다. 마지막에 조와 클라리사는 화해하고 아이를 입양해 잘 키웠다고 밝히고 있다. 자신들이 믿는 사랑의 의미와 멀어지더라도 진정한 사랑으로 가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기울이는지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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