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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무해한 사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6월
평점 :
마음이 너무나 예민했던 나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두려움 가운데 서 있었다. 나는 관계 속에서 상처받는 것이 두려워서 주변에서 머뭇거리기를 반복하다가 때로는 처음부터 혼자인 게 편했던 것처럼 무정하게 굴기도 한다. 늘 그렇게 방어적으로 누군가를 바라보다가 문득 내 자신을 돌아보았을 때, 나를 가장 상처주었던 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나의 미숙함이, 나의 서툴음이, 내 부족함이 빚어낸 상황과 내뱉은 말 가운데서 내 상처들이 싹트기 시작했다. 악의는 아니었으나 내 미숙함이 누군가에게 치명상을 입힌 순간을 보게 되었을 때, 뒤늦게 깨닫게 되었을 때 나는 그 순간이 두려웠다. 그리고 그 어떤 상처보다 용서하기 어려웠다.
나는 이 작품의 7편의 단편 중 <그 여름>, <모래로 지은 집>, <고백>이라는 세 작품을 가지고 글을 쓰려고 한다. 이 세 작품의 배경은 모두 고등학생 때부터 시작된다. <그 여름>의 이경과 수이는 첫 만남부터 서로를 빼놓고는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함께 자라는 레즈비언 커플이다. 고향 곳곳에 서로를 제외하고는 추억이 없을만큼 소중한 기억을 가득안고 서로 서울로 상경한다. 수이는 고등학교 내내 하던 축구도 부상으로 못하게 되고, 대학도 가지 못한 채 자동차 부품을 만지며 일하게 되지만, 수이는 결코 스스로를 부끄럽다거나 불행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자신에게는 사랑하는 이경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경은 수이를 부끄럽게 여기게 되고 수이보다 자신을 사랑해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새로운 사랑에게 이끌린다. 결국 이경의 이기심으로 그 깊었던 서로의 사랑은 망가지고 만다.
네가 아픈 걸 내가 고스란히 느낄 수 있고, 내가 아프면 네가 우는데 어떻게 우리가 다른 사람일 수 있는 거지? 그 착각이 지금의 우리를 이렇게 형편없는 사람들로 만들었는지도 몰라요.
<모래로 지은 집>은 고등학교 동창이나 얼굴도 모른 채 천리안을 통해서만 소통하다가 대학생이 되어 처음 만나 친구가 된 나비와 공무, 모래의 이야기이다. 이들의 '우정'은 사랑만큼 깊게 이어져 서로에게 의지하게 한다. 하지만 내가 가진 아픔을, 공무가 가진 아픔을, 부족함 없이 자란 모래는 이해할 수 없다는 단죄로 그들은 흩어질 수 밖에 없게 된다. 너무나 아름답고 찬란한 우정이었지만 결국은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어적 행동들이 치명상이 되어 그들은 흩어놓는다.
나는 무정하고 차갑고 방어적인 방법으로 모래를 사랑했고, 운이 좋게도 내 모습 그대로 사랑받았다. 사랑만큼 불공평한 감정은 없는 것 같다고 나는 종종 생각한다. 아무리 둘이 서로를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더 사랑하는 사람과 덜 사랑하는 사람이 존재한다고. 누군가가 비참해서도, 누군가가 비열해서도 아니라, 사랑의 모양이 그래서. _ p.181
마지막 <고백>은 셋이 함께여서 불완전하고 외로웠지만 함께인 것이 좋았던 미주와 주나, 진희의 이야기이다. 진희의 생일 날, 진희는 가장 친한 친구들에게 자신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기로 한다. 자신이 사실은 레즈비언이라는 고백과 함께 이해받기를 원했지만, 친구들은 서툰 위로조차 건네지 못하고 헤어지고 만다. 그리고 그 날, 진희는 유서 한 장 없이 죽고 말았다. 그리고 미주와 주나는 서로 마주치기를 꺼려하며 피하기만 한다. 오랜 시간이 지나 그 둘의 상처인 진희의 일을 이야기하며 서로는 비난하기 시작한다. '나의 말이 진희를 죽인거야.', '아니, 너의 경멸하는 그 표정이 진희를 죽인거야.' 그리고 그 둘은 다시 만나지 않기로 한다. 그 전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그 누구에게도 고백할 수 없는 진실과 자신의 실수에 슬퍼할 수 밖에 없다. '그 때로 돌아간다면 좋을텐데. 그렇다면 상관없다고, 항상 진희 네 편이라고 말해줄텐데.'
시간이 상처를 무디게 해준다는 사람들의 말은 많은 경우 옳았다. 하지만 어떤 일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진상을 알아갈수록 더 깊은 상처를 주기도 했다. _p.202
결국은 모두 의도와 달리 헤어짐을 경험한다. 서로가 없으면 안될 것처럼 모든 것을 주었던 한 시절의 관계들은 결국 끝이 오고야 만다. 이 끝은 이들의 '미숙함'에서 비롯된다. 진짜 사랑을 알지 못했던 이경의 미숙함으로 인하여, 상처받는 것이 두려워 무정하고 방어적인 태도로 사랑했던 나비의 미숙함으로, 어떻게 표현해야할 지, 위로해주어야할 지 알지 못해 친구의 아픔을 쓸어주지 못했던 한 순간의 미숙함이 이들에게는 평생 지워지지 않을 상처로 남게 되었다. 이들에게 악의가 있었을까.
아니, 나는 그저 서툴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너무나 마음이 아프고, 슬펐다. 되돌아 본 어떤 날들이 푸르게 아름다운 것은 어쩌면 내가 상대의 고통을 외면했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 아름답던 시절, 나는 누구의 상처를 외면하며 자라왔을까.
이 작품을 읽으며 내 삶에 있었던 두 가지 사건이 생각났다. 하나는 중학교 시절에 어울리던 무리의 친구들이 있었는데, (지금도 그런 편이지만) 그 때도 나는 조금 무심한 편이었다. 여럿의 친구들이 모여 어울리다보면 갈등도 있을 수 있고, 감정이 상하는 순간도 있을 수 있는데 나는 번번이 그 순간을 외면했다. 좋게 좋게 넘어가자, 라는 말로 어물쩍 넘어가는 일들이 많아졌고 나와 직접적인 큰 분쟁은 없었기에 큰 문제없이 잘 지내다 졸업을 했다고 생각했다. 고등학생이 되어 길을 지나다가 그 당시의 친구를 마주쳐 나는 아주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했는데, 그 친구는 나에게 나쁜 감정을 쏟아냈다. 너무 당황스러워 그 순간을 지나치듯 외면했지만 성인이 되어 돌아봤을 때 어쩌면 나의 무관심한 방관이 그들에게 상처가 되었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미쳤다. 이미 수 년이 지난 후였지만, 그 친구의 미니홈피를 찾아가 용기를 내서 사과글을 남겼는데 그 친구가 봤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리고 고등학생 때, 낯을 많이 가려서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친구 한 명이 있었다. 2학년이 되면서 음악실을 가거나 체육 시간이 되었을 때 그 친구가 먼저 용기를 내서 같이 가자고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 아이의 가장 친한 친구와 내가 친구여서 그랬던 것 같다) 1학년 때 친구들과 함께 올라와 어울리던 친구들이 이미 많아서, 무심하게도 나는 그 친구를 잘 챙기지 못했는데, 결국 그 아이는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퇴를 하고 말았다. 꼭 그게 내 탓은 아닐 수 있지만 내가 조금 더 손내밀어주었다면 하는 생각이 내내 마음이 남는다.
결국 내 경우도 관계가 모두 끝이 났다. 나의 서툴고 미숙함때문에. 나는 어릴 때부터 타인에게 무심한 타입이었는데, 무심한 마음이 정말 타고난 것인지 상처받을까 두려워 방어적으로 행동한 것인지 아직 모르겠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우리는 누구나 미숙함으로 인한 실수를 저지르고, 그 실수가 때로는 내 미숙함에 비해 치명적이고 날카로울 때가 있다. 그 날카로움에 베여 여린 마음들이 부서지고 흩어져 파편이 박히면, 조건없이 마음을 주고 기댈 수록 치명상을 입게 된다. 누구나 자라면서 스스로의 미숙함으로 아프게 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 누구의 상처를 외면하며 자라왔을까.
이 작품을 통해 최은영 작가의 글을 처음 봤는데, 단 번에 나의 첫 번째 작가가 될 만큼 감동적이었다. 최 작가의 글은 한 번에 많은 양을 읽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의 문장들은 모래처럼 내 마음을 거칠게 돌아다니며 꺼끌거리다 이내 상처를 내었다. 악의는 아니었지만 그 미숙함으로 아팠던 그 순간들이 덫나고 새살이 날 때가지 이 글은 마음에 머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