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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하맨션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9년 5월
평점 :
우리는 누굴까. 본국 사람도 아니고 타운 사람도 아닌 우리는 누굴까.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성실히 하루하루를 살아가면 뭐가 달라지지? 누가 알지? 누가, 나를, 용서해 주지?
종이배 접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이 제정되었다고 했다. 한 유치원에서 색종이로 배를 접어 바다 그림이 그려진 교실 벽에 붙이는 수업을 했다가 담당 교사와 원장이 벌금형을 받았다고 알려졌다. 교사는 수업 의도를 해명해야 했다. 경찰 조사는 강업적이었고 모욕감을 느낀 교사가 자살 기도를 했다가 한 종합병원에 입원했단다. 병원 이름도 떠돌았다. 모두 사실이 아니었다. 종이배 금지법 같은 것은 생기지 않았다는 사실이 아니라 종이배 금지법이라든지, 유치원 교사의 벌금형 같은 소문이 그럴듯하게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이다.
나비 폭동이 희미해질 즈음이 되자 원주민이던 L2보다 그 2세와 3세들의 비율이 더 높아졌다. 애초에 L2로 태어난 아이들에게는 의문도 저항도 없었다. 당위나 의무라는 말은 정확하지 않고 운명이라기에는 너무 거창하다. 원래 그런 삶이다. 각자에게 주어진 일을 해서 돈을 벌고, 함께 자란 아이들의 진로를 궁금해하지 않고, 2년마다 체류권을 갱신하며 살다가 비슷한 사람을 만나고 사랑하고 병원에 아기를 낳고 나오는 삶.
나는 드라마를 보면서 유독 불편한 장면이 있는데, 나이 지긋한 운전 기사가 자신의 보스에게 허리를 반이나 접어가며 인사를 하면서 차 문을 열어주는 장면이다. 그 때 그 보스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차량 뒷자석에 타서 명령을 내린다. 때론 극단적인 장면이지만, 자신의 부하 직원에게 위험하고 부도덕적인 일을 지시하게 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드라마 상에는 그 임무를 받은 그 누구의 도덕적 갈등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런데 대체로 우리는 그런 장면을 불편해하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내면화된 자발적 복종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드라마 속 장면을 하루에도 수차례 목격하게 되니까. 그게 '돈'이 가진 힘이라고 받아들이고, '돈을 자긴 자'를 향하여 등허리를 굽힌다.
멍에를 지고 태어나 노예 상태에서 성장하고 교육받은 사람들은 전 세대가 어떤 삶을 누렸는지 알지 못하고 그들이 태어난 대로 사는 것에 만족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재산, 어떤 권리를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선 더 이상 생각도 하지 않고 출생 당시부터 주어진 삶의 조건을 자연스러운 상태로 여기게 된다. - 엔티엔 드 라 보에시 『자발적 복종』 중에서
이 작품 속 세계관인 '타운'에는 세 가지 계급이 존재한다. 돈과 기술을 가진 주민, 일할 노동력을 지닌 L2, 그 외 '사하'라 불리는 사람들. 이 비유는 현실에서 따온 듯하다. 이 계급 사회적 구조 속에서 '인적 자원'이라는 명칭으로 국가는 우리를 이렇게 분류하기도 하고, 기업의 구조 속에서 정규직, 계약직, 임시직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내가 조남주 작가의 탁월함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은 사람들의 인식을 파고들지 못하는 아주 세밀하고 일상적인 순간을 포착해내는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82년생 김지영』을 처음 읽었을 때의 충격과 비슷했다. 너무나 일상적이고 누구나 겪어왔던 아주 평범한 이야기인데 그것이 '부당한 일'이라고 여겨보지 않은,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이야기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받은 충격은 '왜 나는 이게 부당하다고 생각하지 못했지?'에서 오는 충격이었다. 그리고 『사하맨션』을 읽었을 때도 동일하게 생각했다. '사하'들을 향해 세상이 던지는 부당함은 그들의 잘못 때문이 아니다. 가난한 부모에게 태어나서, 주민이 아닌 부모에게 태어나서.
지금 우리에게 세상이 던지는, 사회 구조와 자본 권력이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부당함'을 우리도 무어라 설명할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사라처럼, 진경처럼, 우미처럼 의문도 저항도 없이 받아들였다. 우리가 내면의 억울함을 풀어내는 방법은 고작 스스로의 부모를 흙수저라 부른 것 아닌가.
과거에는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이 사실이었을지 모른다. 이 말에 성공은 당연히 '부'를 의미했고, 그 '부'는 가난했던 시절 가족들을 배불리 먹이고 보호할 수 있는 정도를 의미했다. 그래서 많은 '성공'이 존재했다. 모두가 가난하던 시절, 열심히 노력하고 고생하면 내 가족 배불리 먹이고 보호할 수 있게 성공할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시대의 '성공'과 '행복'의 기준은 예전과 많이 다르다. 우리가 왜 같은 것을 가져도 행복하지 못하고, 노력하면 성공한다는 말에 자조적인 웃음을 짓는 이유는 모두가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한다고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대가가 보장되지 않는 단순한 일을 기계처럼 반복하는 삶은 뒷걸음질 같았다. 두렵고 더디고 힘들게 도착하고 보면 늘 더 못한 자리.(p.74) 사하들이 느꼈던 노동의 부당함.
'사하'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존중'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에 없는 사람처럼, 세상에 필요없는 사람처럼 외면하지 않고 그들은 그냥 '사람'으로 봐주고, 이웃으로 여겨주는 것. 당신들과 다르다고 여기지 않는 것. 나도 그렇다. 우리가 보스에게 등허리를 굽히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다르다고 여기지 않고 이웃으로 여겨주는 마음가짐이 중요하지 않았을까. (내가 너무 이상적인가)
사람들은 말한다, 우리는 언제나 복종하는 백성이었다고. 조상들도 그렇게 살아왔으며 그 고통을 참고 견디도록 운명이 정해져 있고, 이대로 자손을 낳으며 살아야 한다고. 그들은 심지어 복종 상태가 지속된 시간의 길이를 통해 그들 위에 군림하는 폭군의 지배를 정당화하기도 한다. 하지만 세월은 결코 악을 정당화하지 못한다. - 엔티엔 드 라 보에시 『자발적 복종』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러한 부당함에 대해 '인식'으로 변화해가고 '변화'를 갈망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변화가 비록 아주 더딜지라도, 내 세대에서 이뤄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 것. 누군가는 『사하맨션』의 마지막에 대해 답답함을 호소할 수 있지만, 나는 '사하'들의 인식이 변화되고 사회적 변화가 일어났다면 오히려 '판타지'라고 생각했을 것 같다. 현실은 그렇게 가볍지 않으니까.
이 작품의 마지막 진경의 선택은 사실 답답하리만큼 더디고 눈에 보이지 않는 아주 작은 나아감이다. 그 나아감이 결코 작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세상에는 단 한 걸음도 스스로 내딛지 못하고 끝나는 인생들도 많으니까. 그 한 걸음을 후회하지 않았길. (p.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