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루다의 우편배달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4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지음, 우석균 옮김 / 민음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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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검은 물이야말로 생명의 근원이고, 나무뿌리를 장식하고 있던 거무스름한 수공예품이자, 결실의 밤을 일궈낸 내밀한 금은 세공품이며, 만물의 모태가 대지라는 확고한 신념까지 준 바 있다. 또 모든 언어가 찾아 헤매고, 고대하고, 적합한 이름으로 명명하지 못해 주변만 맴돌거나 침묵함으로써 명명하던 것이 바로 그 검은 물이었다. _p.158

 

 

 

 

응급차가 네루다를 산티아고로 싣고 갔다. 도중에 여러 차례 경찰 바리케이드를 통과하고 군 검문을 거쳐야 했다. 1973년 9월 23일 네루다는 산타마리아 병원에서 최후를 맞았다. 사경을 헤매는 동안 산크리스토발 언덕 기슭에 있는 네루다의 산티아고 집은 약탈당하고 유리창이란 유리창은 죄다 박살이 나고, 수도꼭지를 틀어놓아 집이 잠겼다. 조문객들은 그 난장판 속에 네루다의 시신을 안치해 놓고 밤을 지새웠다. _p.159

 

 

 

BOOK.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십여 년 전에 어떤 유명 작가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 때 갑작스런 비로 며칠 동안 그 곳에 갇혀 지내게 되었는데, 그 때 만났던 한 가족이 있었다. 수년 전에 사업이 망했다고 호탕하게 말하는 부부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이 아이의 입에 나오는 모든 말이 신기하게도 '시'였다. 그 부부는 아이에게 아직 '단어'를 가르치지 않았다고 말했다. 세상 만물을 보며 이름을 지어주던 아담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아이는 단어를 몰랐지만 눈에는 아름다운 것들이 가득했다. 같은 공간에서 내가 바라본 그 때의 광경은 '폭우'와  단어였다면, 그 아이가 바라보는 산과 계곡, 내리는 비는 모두 아름다운 이미지였다. 그 아이는 '명명한 이름'을 몰랐기 때문에 보이는 것을 그대로 표현했을 뿐인데, 나는 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선생님은 온 세상이 다 무엇인가의 메타포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는 70년대 초 칠레의 작은 어촌 마을 이슬라 네그라를 배경으로 시인 '파블로 네루다'에게 우편물을 전달하는 우체부 마리오 히메네스와의 우정을 그린 작품이다. 마리오는 어부로서의 삶에 적응하지 못하다 네루다의 우편물만 배달하는 우체부로 채용되었다. 처음에 마리오는 우편물을 배달하며 유명 시인인 네루다와 친해져 그의 시집에 특별한 헌사를 받고 싶어했다. 그러기 위해 마리오는 네루다의 시집을 구매하여 읽게 되었고, 네루다와의 대화를 통하여 '시'라는 것, '메타포'라는 것에 대해 알아가게 된다. 마리오는 내가 만났던 아이처럼 네루다를 통해 '단어'가 아닌 '말'을 배워가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름은 사물의 단순함이나 복잡함과는 아무 상관없거든. 자네의 이론대로라면 날아다니는 작은 것은 마리포사(나비)처럼 긴 이름을 가지면 안 되겠네. 엘레판테(코끼리)는 마리포사와 글자 수가 같은데 훨씬 더 크고 날지도 못하잖아. (p.28)

 


작중에 네루다가 메타포의 뜻을 가르쳐주려고 비를 하늘이 우는 것이라고 비유해서 설명하고 바다를 관찰하면 메타포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라고 하자, 마리오는 '온 세상이 다 무엇인가의 메타포라고 생각'하느냐 질문한다. 네루다의 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따분한 일상 혹은 평범한 삶을 시적으로 볼 수도 있다는 표현을 통해 그가 진정한 시인임을 느낄 수 있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에 등장하는 파블로 네루다는 남미 사람이라면 지금도 누구나 그의 시를 한 두 편 읊을 수 있다고 할 정도의 국민 시인이다. 우리나라로 생각하면 윤동주나 김소월 정도의 시인이 아닐까. 이 작품에서도  당시 마리오나 과부 같은 무지한 민초의 입에서도 자연스럽게 네루다의 시가 흘러나올 정도로 국민적인 사랑받는 시인의 모습이 그려진다. 사람을 좋아했던 파블로 네루다는 실제 이슬라 네그라 집에 방문객을 위한 바를 따로 만들고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칵테일을 만들어 줄 정도로 인간미를 지닌 사람이었다고 한다. 작품 속 마리오가 소녀들에게 폼을 재려고 네루다 시집을 사서 헌사를 부탁하는 모습이 만들어진 모습만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남미에서 처음 선거에 의해 합법적으로 세워잔 '사회주의 정부'는 군사 쿠데타에 의하여 전복되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살바도르 아옌데는 대통령 궁을 지키다 사망하고, 파리 지사로 있던 파블로 네루다는 이슬라 네그라에 돌아왔으나 쿠데타 2주만에 병세가 악화되어 사망했다. (군사 쿠데타 이후 칠레에는 피노체트를 의장으로 하는 칠레 군사평의회가 설치되어 17년 동안 군사 독재가 시행되었는데, 정치적 이유로 목숨을 잃은 이들이 모두 3197명에 이를 정도로 칠레 국민들은 군사독재정치로 극심한 고통을 받았다.)


평생 시를 쓰며 살아왔고,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칠레의 정치 상황을 국제에 알렸던 파블로 네루다는 국민적인 사랑을 받는 시인이었지만, 쿠데타 직후 우익 과격파들이 집으로 난입해, 가구들을 부수고 물을 틀어놓아 온통 아수라장으로 만들어놓았다. 아내 마틸데는 평생 시만 쓰고 사회 정의를 부르짖으며 살아 온 시인의 마지막 가는 길이 얼마나 참담했는지 알아달라고 호소했다고 한다.


이 책을 읽고 한 가지 이미지가 머릿속에 남았다. 파리지사로 갔던 파블로 네루다가 마리오에게 녹음을 부탁했던 이슬라 네그라의 소리, 바람에 울리는 종소리와 물이 떠밀려가는 파도소리, 시장에서 사람들이 욕지거리하며 떠드는 소리, 그에게는 지나가는 모든 것이 '시'였을 것이다. 모든 것에 귀기울이고 그리워했던 네루다를 통해 '시'가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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