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킨슨병 환자의 더 행복한 인생을 위한 10가지 비밀
Michael S. Okun 지음, 이호원 옮김 / 경북대학교출판부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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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 있는 내용은 아니지만 파킨슨병 환자와 가족이 상식으로 알아야 할 기본 내용을 다루고 있다. 쉽게 방치하기 쉬운 우울과 불안 증세를 적극적으로 치료해야 함에 동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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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신속히 치료하지 못하면서 현실적인 낙관, 실증주의, 그리고 희망을 주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나는 가능하다고 믿는다. 당신이 핵심 가치들을 발전시키고 믿음을 키운다면 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환자들은 믿음의 씨앗을 심었으며, 희망을 키우는 법을 배웠고, 만성질환을 앓고 있으면서도 행복을 찾기 위해 필요한 핵심 가치들을 발견한 사람들이다. 이 책의 목표는 단순하다. 비밀들을 공유해서 전 세계의 파킨슨병을 앓고 있거나 앓게 될 모든 이들이 알도록 하는 것이다.


1/ 증상을 알아야 한다
환자와 가족 모두가 파킨슨병이 알츠하이머병과 다르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두 질환을 직접 비교함으로써 임상 증상과 질병 경과의 명백하고 중요한 차이를 알 수 있고, 뇌 조직을 분석해 보아도 세 가지 신경퇴행성 질환(알츠하이머, 루게릭병, 뇌졸중/뇌종양) 모두 파킨슨병과 혼동되지만 다른 질병인 것을 알 수 있다.
파킨슨병에서 흔히 나타나는 증상들: 진전(20퍼센트에서는 나타나지 않음), 강직, 느려짐, 보행과 균형 문제, 작은 글씨, 우울증, 불안, 정서 장애, 무관심, 정신병(착시와 환각) 인식기능 이상(사고 장애), 자율신경 기능 이상(직립 시 저혈압, 위장 장애, 변비, 발한, 배뇨 장애, 성기능 이상), 수면 장애
알츠하이머에서 나타나는 고전적 패턴의 기억 상실, 단어 찾기 어려움, 방향감각 이상이 보통 파킨슨병 환자에게서는 나타나지 않으며, 이것이 두 질환의 결정적인 차이다.

파킨슨병은 알파시누클레인이라는 다른 단백질의 침착에 의한다. 1912년에 베를린에서 태어나 후에 미국에서 활동한 프레드릭 루이 Frederick Lewy라는 병리학자가 우연히 특이한 뇌 축적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축적은 단백질 침착이라 불렸으며, 파킨슨병과 깊이 연관되어 있음이 밝혀졌다. 루이가 발견한 이 단백질의 침착이 파킨슨병을 일으키는 근원적 문제로 널리 받아들여졌고 이 비정상적 단백질 덩어리를 그의 이름을 따서 ‘루이소체‘라고 부르고 있다.
파킨슨병이 진행되면 비정상 단백질은 하부 뇌간에서 상부 또는 대뇌 피질로 퍼져 나가며, 그 과정에서 단백질이 여러 운동 및 비운동 뇌 회로를 파괴하여 중요한 증상들이 겉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나쁜 단백질이 뇌에서 퍼져 나가는 것은 사실이지만, 파킨슨병이 감영증 자체에 의한 것이 아니다. 이 나쁜 단백질의 작용 양태의 정확한 원인과 그 기능은 여전히 의문인 상태다. 초기의 수개월 또는 수년간의 퇴행 과정 후, 루이소체는 뇌의 깊숙한 곳으로 이동하여 운동(진전, 강직, 완서)과 비운동 기능(우울, 불안, 무관심, 성기능 이상, 기억, 사고)을 담당하는 두 영역 모두 침투한다. 파킨슨병에서는 인지와 관련된 증상이 더 경증이고 몇 년 더 늦게 나타난다. 과학자들은 파킨슨병에서 증상이 늦게 발현되는 이유가 뇌 심부의 회로에서부터 인지와 행동을 담당하는 ‘더 위쪽의‘ 부위로 퍼지는 퇴행 과정에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으로 생각하고 있다.
도파민 대체요법은 환자들에게 ‘각성‘을 이끌어 내며, 몇 가지 다른 약물학적 전략 덕택에 현대의 파킨슨병 환자들은 운동성 또는 비운동성 장애가 나타나기 이전 수년간 완전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다. 환자에게 이 수년의 시간은 인생의 본질과 의미를 달성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파킨슨병 환자는 건강염려증과 불안 증상을 보일 수 있다. 수년간 이것이 ‘스트레스‘와 관련된 문제라고 여겨졌지만, 이제 우리는 활동성 퇴행 질환 과정에 의한 것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파킨슨병을 조기에 예고하는 잠재적 증상과 증후들이 있다. 뇌에서 도파민을 생산하는 세포들(흑질)의 약 60퍼센트 이상이 증상이 나타나기 전에 상실된다고 추정되고 있으며, 이러한 세포 상실은 항상 증상 발현 이전에 발생한다. 현재로서 파킨슨병에 있어 일부 가족들에게서 알려진 유전자 변형을 보이는 것 외에는 신뢰할 만한 생체지표자가 없다. 일반적으로 조기에 발견할 수 있는 증상들은 ‘운동‘ 증상들(진전, 강직, 서동)이고 대개 몸의 한쪽에서 나타난다.
약물 요법을 받기 전에, 파킨슨병 환자는 강직과 굳어 버리는 현상 때문에 병실에서 간호를 받는다. 도파민 대체요법(레보도파 또는 시네메트 요법)의 출현은 게임의 양상을 완전히 바꾸었다. 환자가 일어나서 완전히 정상 기능을 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었다.
파킨슨병의 더 행복한 생활을 위한 첫째 비밀은 단순하다. 파킨슨병이 어떤 것인지 알고 이해하는 것인데, 이것만으로 당신의 여행의 튼튼한 토대가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2/ 파킨슨병에서 시기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희망의 불씨를 살리고 행복을 달성하는 비밀 중 하나는 마법의 지렛대를 당기면 완치가 되는 그런 것을 기대하지 않는 것이다.
MPTP는 뇌간에 있는 작은 흑색의 도파민성 세포들(흑질)에 독성이 있는 물질이었다. MPTP가 파킨슨병을 일으키는 것이 이제는 전 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고, MPTP에 의해 유도된 결핍은 레보도파를 투여함으로써 구제될 수 있다. MPTP를 독소 기반 모델로 개발하게 되었고, 이 모델은 파킨슨병과 매우 근접해서 현재 가장 좋은, 그리고 가장 많이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동물모델 중 하나가 되었다.
파킨슨병에서 가장 중요한 비밀 중 하나는 약물 투여의 시기가 약물 용량 자체보다 더 중요한 때가 많다는 것이다. 파킨슨병이 진행되면 약 80퍼센트 환자들에서 안정기 진전이 나타나고, 강직, 완서, 보행 문제는 모든 환자들에게서 나타난다. 5년이 경과하면, 대부분의 환자들은 약물과 관련된 켜짐/꺼짐 변동(도파민성 약물의 효과가 다음 용량 복용 전에 사라지거나 혈중 도파민 치료 농도 도달이 지연되면서 나타나는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파킨슨병에서는 무릎반사 반응에 따라 증량할 경우 환자가 응급실에 실려 가거나 조절되지 않는 움직임이나 환각 때문에 입원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 환자들을 다시 추적 관찰하는 과정에서 용량 증가가 단기적인 해결책이고 장기적으로는 많은 부작용을 일으키는 것을 발견했다. 우리는 파킨슨병을 앓는 경주용 자동차 선수를 치료한 바 있는데, 그는 흥미롭게도 차를 운전할 때는 굳어 버린 적이 없었지만 많은 인파 속에서나 공항에서는 굳어 버리는 현상을 경험했다. 이 현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간단한 시각적 효를 이용했는데, 레이저 포인터를 사서 걸어가는 진행 방향의 바닥 앞쪽에 쏘고 그 적색 점에 따라 걸음을 옮겼더니 굳어 버림이 사라졌다.
환자들이 큰 소음으로 놀라게 해서 굳어 버림을 깨고 움직임을 개선한 방법을 발견하기도 했다. 파킨슨 환자가 희망을 찾고 보다 행복한 생활을 하도록 돕는 둘째 비밀은 시기이다. 시기가 이 질병 치료법이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3/ 뇌 전기 자극을 통해 파킨슨병을 개선할 수 있는지 의시에게 물어보라
뇌심부자극술이 뉴런은 억제하고 각 뇌세포로부터 뻗어 나오는 관인 축색돌기는 자극하는 것이 밝혀져서 사람들을 놀라게였는데, 이 놀라운 발견의 의미는 뇌심부자극술의 작용기전이 자극이나 흥분 중 한 가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작은 부위의 전기 자극이 매우 광대한 신경 구조의 상하 흐름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었다. 직경이 겨우 3밀리미터인 곳에 전기가 전도됨으로써, 전체 뇌와 몸에 극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 입증된 것이다.
전기가 뉴런, 성상세포, 연접부에 직접 작용하면, 이들은 칼슘의 배출과 함께 연이어 아데노신 및 글루타메이트 같은 중요한 뇌 화학물질들을 전달한다. 전기 자극에 반응하여 ‘배출된‘ 화학물질들을 신경전달물질이라고 한다. 이 신경전달물질들의 배출이 뇌심부자극술의 작용 기전을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로 대두되었다. 뇌심부자극술이 화학적으로만이 아니라 전기적으로도 작용한다는 생각을 하면 참으로 놀라울 따름이다. 뇌심부자극술 기구를 켜면 뇌심부에서 자극된 세포들과 대뇌 피질 사이에 있는 세포들이 동시에 활성화되는 새로운 공조성을 보임으로써 이 두 지역에 있는 세포들 사이에 복잡한 관계가 있음을 밝혀냈다.
새로운 이 수술 방법에 있어서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사전에 대상 환자 선정을 어떻게 하느냐에 달린 것으로 드러났다. 부적절하게 선정된 환자들은 실망스럽고 재앙적인 결과로 이어졌다. 파킨슨병에서 학문간 통합적 뇌심부자극술 평가의 탄생은 점차 환자 치료의 수준을 향상시켜서 환자와 가족들의 만족도를 크게 개선했다. 뇌심부자극술 도선의 최종 위치가 몇 밀리미터만 잘못되어도 극적인 성공과 참담한 실패 사이를 오갈 수 있기 때문에, 완전한 지도야말로 뇌심부자극술 과정 중에서 결정적인 부분이다. 실패가 의미하는 것은 치료 효과가 없는 것이 아니라 환자가 영구적으로 뇌졸중 유사 증상을 갖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파킨슨병이 더 진행되면, 이 약들의 부작용 때문에 마치 춤추는 것 같은 팔다리의 움직임이 조절되지 않는 운명의 잔인함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를 이상운동증이라고 하는데, 질병이 많이 진행되거나 파킨슨 치료제들을 장기간 복용한 직접적인 결과로 나타날 수 있다.
파킨슨병 환자들은 처음에는 약물에 반응하지만, 몇 년의 시간이 지나면 약물 관련 켜짐/꺼짐 변동과 이상운동증이 불가피하게 나타난다. 이런 질병 관련 변동을 해결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치료법으로서 뇌심부자극술이 대두되었다.
또 다른 유망한 발전 방향은 환자별로 각각의 맞춤 치료법을 제공하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어떤 뇌표적은 진전 증상에 가장 좋을 수 있고 또 다른 표적은 언어 증상에 선호되며 세 번째 표적은 보행을 위해 선택될 수 있는 것이다. 한 환자에게 두 개 이상의 뇌심부자극술 도선을 설치하는 것도 곧 현실이 될 것이다.
한 가지 도발적인 연구 개발 분야는 뇌심부자극술과 다른 새로운 치료법을 병용하자는 생각이다. 특히 뇌심부자극술 도선을 유전자 요법, 줄기세포, 성장 인자에 주입하는 도관으로 사용하자는 것이다. 개략적인 아이디어는 질병의 진행을 늦출 수 있는 방법을 뇌 자극과 같이 강력한 대중요법과 함께 조합해보자는 것이다.
과학분야, 그리고 파킨슨병 부문에 있어서 가장 최근의 보람이라면 생체지표자의 개발일 것이다. 국립보건원은 생체표지자를 ‘치료를 위한 정상 생물학적 병리학적 약리학적 반응의 표지자로서 객관적으로 측정 및 평가 가능한 특징‘으로 정의하고 있다.
전기적 생체지표자에 대한 이해로 더 똑똑한 장치의 개발이 가능해지고, 새로운 장치가 베타 띠와 같은 특이적 비정상 신호를 감지해서 자동적으로 반응하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바람이다. 특별한 임상적 문제나 증상이 나타나기 이전에 뇌에 문제가 발생할 경우 바로 해결하자는 것이고, 이렇게만 된다면 개별화된 치료의 시대가 도래하는 것이다.


4/ 우울증과 불안을 공격적으로 치료하라
파킨슨병 환자에서 우울증은, 정상인보다 거의 두 배의 비율로 발생한다. 또한 우울증이 질병의 초기, 중기, 후기 언제 어느 때고 나타나며 치료받지 않으면 해소되지 않는다. 파킨슨병이 단순히 도파민 결핍에 의한 질환이 아니라 세로토닌, 노르에피네프린, 아세티콜린의 세 가지 주요 물질 모두의 결핍이 퇴행 과정과 강력히 연관됨을 알 수 있었다. 조기 발견과 우울증/우울 증상에 대한 공격적 치료가 파킨슨병의 성공적 치료를 위한 중요한 비밀 중의 하나다. 도파민 효현제를 부족한 용량으로 복용하거나 충분한 횟수를 복용하지 않으면 우울증이나 우울 증상이 나타날 수 있으므로 최적으로 투여되어야 한다. 경증의 우울증에서는 한 가지 약물의 추가(예: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 삼환계 항우울제, 세로토닌과 노르에피네프린 재흡수 억제제)로 충분할 수 있다.
파킨슨병 환자의 30~40퍼센트가 불안 증상을 갖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어 왔다. 파킨슨병 환자들은 공황 발작을 경험할 수도 있다. 공황 발작은 극도의 전반적 불편함 또는 제어할 수 없는 공포가 단시간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대개 갑자기 시작되어 한 시간 정도까지 지속될 수 있으며 환자는 공황 발작 중 파멸감을 느끼거나 나쁜 일이 생길 것이라거나 심지어 죽음에 대한 통제되지 않는 공포를 느낄 수 있다.
파킨슨병 환자를 돌보는 사람들의 5분의 1 역시 불안을 느낄 수 있다는 것도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환자를 돌보는 이들에게도 우울증이 흔히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환자뿐만 아니라 보호자와도 진료 약속을 잡아야 한다. 간병하는 사람이 행복해야 그 행복이 파킨슨병 환자에게 전파될 것이기 때문이다.
환자의 불안이 약물의 ‘꺼짐‘ 상태에 악화되거나 발생한다면 약물 투여 간격을 좁히는 것에 치료의 초점을 맞추게 되고 용량을 올릴 수도 있다.


5/ 수면 문제를 해결하라
파킨슨병에서의 수면 장애가 흔하고, 치료 가능하고, 과소평가되어 있다. 뇌에서의 퇴행 또는 세포 소실이 수면 기능 이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 파킨슨병의 증상인 진전, 강직, 서동이 밤에 나타나 수면을 방해할 수 있다. 치료하는 약물들도 수면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첫 번째는 진단을 명확히 하는 것으로, 수면 장애의 성격에 따라 치료법 선택이 결정된다. 수면제가 모든 종류의 불면을 치료한다는 것은 잘못된 믿음이다.
두 번째 규칙은 야간수면다원검사를 주저하지 않는 것이다. 일반 개원의나 신경과 전문의들은 간단하고 올바른 진단을 한 이후 치료를 시작하기보다는 먼저 고용량 수면제를 처방하고 보는 경우가 너무 많다.
마지막 문제는 환자가 복용 중인 모든 약물 리스트(파킨슨병 약뿐만 아니라 그 외의 모든 약물들도)를 자세히 검토해야 한다는 점이다. 도파민 효현제는 파킨슨병의 수면 기능 이상과 연관되어 있을 수 있고, 레보도파 역시 피로와 수면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 환자가 꿈을 실연하듯이 행동하며 많은 경우 의식하지 못한 채 꿈꾸는 도중에 배우자를 때리는 경우가 발생하여(렘 수면 장애), 그로 인해 결혼 생활에 불화가 생기고 각자 다른 침대에서 자게 된다. 이 문제는 저용량의 벤조디아제핀계 약물(예: 클로나 제팜, 로라제팜, 디아제팜)을 자기 전에 복용하도록 처방함으로써 쉽게 개선될 수 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은 치료되지 않은 우울증의 증상일 수 있다. 이에 대한 처방으로 밤에 레보도파 용량을 추가함으로써 파킨슨 증상의 재발을 억제하여 수면의 질을 개선할 수도 있다.
매일 7시간 이상 자도록 노력한다.
9시간 이상의 수면은 오히려 주간 졸림을 유발한다.
자기 전 몇 시간 동안은 술을 마시지 않는다.
식후와 자기 전 카페인(커피, 차, 소다수, 초콜릿)을 줄인다.
어둡고 편안한 수면 환경을 조성한다.
수면 장소에서 텔레비전과 전자 미디어 제품을 없앤다.
매일 운동을 하되 저녁식사 이후에는 하지 않는다.


5/ 파킨슨병에서는 중독 유사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
‘펀딩‘이라는 현상은 레보도파, 때로는 도파민 효현제를 복용하는 일부 환자들에게서 나타난다. 펀딩은 기술, 기계적 장비의 반복적 조작, 계속적인 핸들링, 검사, 물체의 분류, 손질, 보관, 비정상적으로 증가된 글쓰기,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는 과도한 춤추기 등에 극도로 집착하는 것이다. 모든 파킨슨병 환자나 간병인은 도파민 치료 중에 특이한 행동이 나타나면 의사에게 알려야 한다. 펀딩을 포함한 특이적 행동은 간단한 약물 조정이나 쿠에티아핀, 클로자핀, 신경안정제 등의 약물을 추가함으로써 치료할 수 있다.
도파민 대체요법(예: 시네메트 또는 마도파) 중에 드물게 발생할 수 있는 문제로 도파민 조절 장애 증후군이 있다. 환자들의 1~3퍼센트에서 드물게 나타나는데, 환자는 약물을 갈망해서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그 약물들을 대량 복용한다. 치료법에 약물 조정, 인지 행동 요법, 상담 등이 있고, 펀딩에서와 같이 쿠에티아핀, 크로자핀, 신경 안정제가 정상 생활 회복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도파민 효현제는 1990년대에 로보도파 같은 도파민 대체요법에 대안적 또는 보조적 치료제로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현재는 오히려 도파민 효현제 사용이 더 많은 부작용과 문제점이 있고 레보도파는 파킨슨병에 우수한 약물로 인식되고 있다. 도파민 대체요법은 독성이 없으며 질병의 진행을 가속시키지 않는다.
한편, 우리는 도파민 효현제를 투여받는 환자 여섯 명 중 한 명 꼴로 중증 부작용이 발생할 심각한 위험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환자와 가족들이 도파민 효현제의 이러한 위험성을 미리 알고 있으면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에 즉시 치료법을 중지하고 다른 치료로 바꿀 수 있다.
도파민 효현제 사용으로 인한 충동 조절 장애의 발생은 임상에서 매우 큰 이슈가 되었고 여러 종류의 소송으로 거대한 법적 문제가 되었다. 도박이 5퍼센트, 강박적 성적 행동이 3.5퍼센트, 충동구매가 5.7퍼센트, 폭식 장애 4.3퍼센트, 두 가지 이상의 문제가 함께 나타나는 경우가 3.9 퍼센트, 도파민 효현제를 복용하지 않은 경우(6.9퍼센트)보다 복용한 경우(17.1퍼센트)에 이러한 이상이 더 많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7/ 운동이 뇌 기능을 개선한다
파킨슨병의 운동 평가 점수에서 고강도 운동이 가장 큰 효과를 보여, 특히 고강도 운동이 증상을 개선한다는 점을 지지해 주었다. 이제는 대부분의 운동 장애 전문가들이 환자들에게 매일 운동을 하라고 말하고 있다.
많은 진료의들이 파킨슨병의 경과 중 조기에 운동을 시작하는 것이 질병 조절 또는 신경보호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믿고 있지만, 이러한 생각은 아직 입증되지 않았다. 운동으로 인해 운동성 및 비운동성 장점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건강상의 이점도 나타나는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매일 운동하는 프로그램을 고안하는 것이 합리적이나 기억해야 할 것은 열심히 땀 흘리지 않으면 효과가 없을 수 있다는 점이다.


8/ 입원에 대비하라
지난 40년간 발표된 논문을 검토한 바, 대부분의 논문에서 높은 입원율과 합병증의 요인으로 운동 장애를 꼽고 있었다. 그 외의 다른 여러 조건들(운동 합병증, 이동성 감소, 지시 불이행, 부적절한 신경이완제(도파민 차단제) 사용, 낙상, 골절, 폐렴 및 기타 심각한 질환)도 입원의 직접적 원인들로 보고되고 있는데, 다양한 문제점들이 관련되어 있으며 대부분은 예방되거나 개선할 수 있는 문제였다.
파킨슨병에서 제1의 사망 원인이 흡인성 폐렴이므로, 교육 프로그램, 권고 및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며 이러한 가이드라인이 생명을 구하고 의료 시스템의 비용을 절감하며 결과를 향상시킬 것이다.
도파민을 억제하는 약물 파킨슨병을 악화시키고 도파민 대체요법(카비도파/레보도파, 시네메트, 도파민 효현제)은 증상을 완화시킨다. 파킨슨병 환자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정신증(환각, 환상, 피해망상과 같은 행동 변화)이다.
도파민 대체 약물의 효과를 상쇄시키지 않기 때문에 파킨슨병을 악화시키지 않는 도파민 제제가 두 개 있는데, 하나는 쿠에타핀(세로켈)이고 또 다른 하나는 클로자핀(클로자릴)이다. 둘 중에 클로자핀이 더 강력하지만 매주 혈액 검사를 실시해야 한다. 신경이완제(예: 할돌)로 불리는 다른 도파민 억제제는 파킨슨병을 악화시킨다.
두통이나 위장관 운동 이상에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약물이 도파민을 억제할 수도 있으며 그로 인해 파킨슨병이 악화되고 파킨슨증(파킨슨병과 유사한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환자들을 잘 모른다. 프로클로페라진(콤파진), 프로메타진(퍼너간), 메토클로프라마이드(레글란)가 이에 해당되는 약물이며 피해야 한다. 레저핀이나 테트라베나진과 같이 도파민을 고갈시키는 약물 또한 파킨슨병을 악화시킬 수 있으므로 피해야 한다. 대신에 파킨슨병을 악화시키지 않는 대체 약물, 즉 오심(가슴속이 불쾌하면서 토할 듯한 기분이 생기는 현상)에는 온단세트론(조프란)을, 위장관 운동 이상에는 에리스로마이신 또는 돔페리돈을 사용한다.
항우울제, 항불안제, 안정제, 갑상선 호르몬 대체 약물, 항고혈압제는 대체적으로 안전하며 파킨슨병을 악화시키지 않는다.
파킨슨병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 약물 상호작용은 모노아민산화효서-B 억제제(셀레길린, 라자질린, 아질렉트, 젤라파, 용해성 염산세레길린)을 메폐리딘(데메롤)과 같은 진통제와 함께 복용하는 경우다. 모노아민산화효소-A 억제제(예: 필린돈)는 항우울제와 같이 복용하면 안 된다. 모노아민산화효서-B 억제제는 대부분 항우울제와 병용해도 안전하지만 많은 약사들이 그 상호작용을 우려해 조제를 거부할 수 있다. 이러한 거부에 대해서는 담당 주치의가 이의를 제거해 주어야 한다.


9/ 새로운 치료법에 대해 물어보라
현재 LRRK2는 가장 흔한 파킨슨병의 유전자 형태이다. 환자와 가족이 유전자 상담 전문가와 마주 앉아 유전자 상태를 알게 되는 것의 의미를 알고 난 뒤에는 절반의 환자는 유전자 검사를 받지 않기로 결정한다.
어떤 사람이 유전자는 가지고 있지만 질병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이 놀라운 현상이 의미하는 바는, 유전자 결함을 지니고 있는 것이 100퍼센트의 유동적인 위험이 있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미래의 유전학에서는 어떤 잠재적 환경 요인들이 DNA를 켜짐 또는 꺼짐이 되도록 만드는지에 대한 정보를 찾아야 한다.
DNA에 LRRK2 돌연변이를 가진 사람은 파킨슨병뿐만 아니라 소화기계 질환인 크론병에 걸릴 위험도 높아진다. LRRK2 돌연변이는 세포의 기능을 저하시켜서 세포 괴사로 이어지므로, 완치를 위해서는 결국 세포 괴사를 막는 치료법을 개발해야 하는 것이다.
삼염화에틸렌이 남성의 파킨슨병 발병 위험을 6.1배 높이는 것으로 관찰되었다. 또한, 삼염화에틸렌 또는 테트라클로로에틸렌에 노출된 남성은 파킨슨병 발병 위험이 8.9배 높이진 것으로 나타났다. 다음이 삼염화에틸렌을 방출하는 물품들의 목록이다:
기름 제거제
타자기 용액
페인트 및 페인트 제거제
카펫 세정제 및 얼룩 제거제
접착제
컴퓨터 부품 세척제
디카페인 커피
드라이클리닝
직물 플랜트
수술실에서의 마취제
삼염화에틸렌 노출 관련 위험군 직업군:
전기기사
드라이클리닝 업자
산업 기계 조작 및 수리 업자
의료계 종사자
삼염화에틸렌 노출과 파킨슨병을 이야기할 때는 만성의 장기간 노출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살충제와 제초제, 특히 유기 염소 및 유기 인산 화합물이 가족력이 없음에도 파킨슨병 발병 위험을 높인다고 발표하였다. 유전자는 총을 장전하고 환경적 혹은 알려지지 않은 원인이 방아쇠를 당기는 것이 사실이다.
최근의 획기적인 발견은 피부 세포를 조작하여 다기능 줄기세포로 만든 것이다. 다기능이 의미하는 것은 체내의 다른 여러 세포 형으로 분화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피부 세포 외의 다른 세포 형으로도 줄기세포를 만들 수 있다. 핵이식, 세포융합, 체외 세포 배양, 형질도입 등의 새로운 기술들이 체내 여러 조직을 이용해 줄기세포를 만드는 것을 가능케 하였다. 다기능 줄기세포는 전 세계 모든 파킨슨병 환자와 가족에게 완치의 희망을 안겨 주었다. 이러한 기술을 이용하여 맞춤 세포를 만들고 신경계 치료법으로 사용할 수 있을까? 다기능 줄기세포를 임상에 사용하기 위해 넘어야 할 난관이 있다. 미래에 종양으로 변할 수 있는 미분화세포가 전혀 없어야 하며 순수한 다기능 줄기세포로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다기능 줄기세포를 환자에게 정확하게 전달하고 복잡한 파킨슨 회로망에 적절히 접목시킬 기술이 가장 어려울 것이다. 뇌 기저핵의 운동 및 비운동 회로가 매우 정교하고 복합적이어서 한두 곳에 이식하는 것으로는 완치가 어렵다.
유전자 요법은 파킨슨병 환자의 세포와 조직에 유전자 정보를 넣는 것으로, 가장 순수한 형태로 손상된 게놈을 새로운 유전자로 대체하는 것이다. 파킨슨병의 진행을 막을 수 있는 표적이 필요하며, 유전자 및/또는 영양 인자를 충분한 효과를 나타낼 만큼 환자에게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짧은 RNA는 특정 유전자의 발현을 간섭하거나 촉진시키는 이중가닥 RNA 분자다. 짧은 간섭 RNA 기술 이중가닥 RNA를 이용하여 DNA의 발현을 수정하고자 하는 설계인 것이다. 연구자들이 더 나은 짧은 간섭 RNA 요법의 세부적인 방법을 찾게 된다면 이는 매우 강력한 대중요법이 될 수 있을 것이고, 파킨슨병에서 보이는 일부 유전자 형태의 경우에는 완치가 가능할지도 모른다.
광학유전학이란 무엇인가? ‘광학‘은 빛을 뇌에 전달해 채널 또는 효소를 활성화시켜 결국 뇌세포의 활성화를 변화시킬 것이다. 이 기술은 특이적이며 뇌세포의 활성화 패턴을 추가하거나 삭제할 수 있고, 0.001초 단위로 조절할 수도 있다. 또한 광섬유를 두개골이나 뇌 안쪽에 넣을 수도 있다. 광학유전학이 흔히 나타나는 신경퇴행성 질환의 앞날에 빛을 비추었지만 단독으로나 줄기세포 및 다른 치료법과 병용하였을 때 완치가 가능할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파킨슨병은 알파시누클레인이라는 뇌 단백질의 침착에 의한 신경퇴행 질환이다. 파킨슨병이 진행되면서 이 단백질이 뭉쳐지고 뇌 전체로 퍼져 나가는데, 전문가들은 파킨슨병으로 인한 손상은 뇌가 이 단백질을 처리하고 분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파킨슨병 백신에 대해 환자가 알아두어야 할 점은 아직 연구 초기 단계에 있다는 것, 그러나 새로운 개념이며 희망적이라는 것이다. 파킨슨 관련 뇌 단백질을 분해하는 것이 병의 경과 변화로 이어지기만을 바랄 뿐이다. 알츠하이머병, 당뇨병, 동맥경화증과 같은 질환에도 유사한 방법이 시도되고 있다.


10/ 행복하고 의미 있는 삶을 위한 희망의 불을 붙여라
내 임무는 환자들의 걱정과 근심을 덜어주어, 그들이 충만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 기회를 가질 수 있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파킨슨병 환자의 여정은 희망에 의해 앞으로 전진하며, 환자를 행복으로 이끄는 것 또한 결국 그 희망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다음은 희망에 불을 붙여 행복으로 가는 중요한 힌트들이다:
파킨슨병 및 다른 만성 질환 환자와 그들의 가족과 여정을 함께 한다.
약물, 복용 시간, 이상반응을 숙지한다.
매일 운동하며 예상치 못한 입원에 대비한다.
뇌 전기 요법으로 증상이 좋아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도록 한다.
대중요법을 극대화하고 완치법을 찾기 위해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는다.
돈을 목적으로 당신의 희망을 앗아가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글루타티온 요법, 킬레이트화, 줄기세포 치료를 위한 비용, 기적 같은 완치).
당신의 종교나 정치적 성향과 상관없이, 희망이 파킨슨병과 맞서 싸우기 위한 가장 강력한 무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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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핵심진리 102가지 - 기독교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그 성경적 근거
R.C.스프룰 지음 / 생명의말씀사 / 2013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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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핵심 교리를 정리해 놓았다. 나의 경우 하나하나 생각하면서 읽어야 했기에 빠른 속도로 읽어지지는 않았지만, 그래서 더 오래 남는 책이었다. 성도들이 꼭 읽고 알아야 할 내용들이 가득하다.

별점: ★★★★☆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성숙을 방해하는 요소들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과 ”어린아이의 믿음“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어린아이의 믿음은 젖만 먹으려 하고 단단한 음식은 거부한다. 비록 신학계에 회의적 신학이 만연되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새로운 일은 아니라는 점이다. 해로운 신학을 피하기 위해 모든 신학과 신학 교육을 거부하는 것은 영적 자살행위다. 신학은 그리스도인에게 필수 과목이다.

 
안이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일단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단하거나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기도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그분을 주님으로 모실 필요는 없다고 주장한다. 성경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뜻이다. 따라서 그 호칭이 의미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제자에게는 하나님의 것을 학습하기 위한 훈련이 요구된다.

논쟁은 신학 연구에 전념하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다만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논쟁을 해야 한다. 논쟁의 긍정적 측면 한 가지는 진리, 특히 신학적 진리가 영원토록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점이다.

중요성이라는 우선순위에서는 마음이 먼저다. 머릿속에 올바른 교리가 있다 해도 마음속에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하나님 나라를 잃게 된다.

우리는 쾌락주의, 물질주의, 향락주의 등의 세속적인 것들이 우리를 어떻게 유혹하는지 알고 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우리를 유혹하는 가장 강한 힘은 ‘오늘날의 문화가 선호하는 진리에 대한 시각’을 받아들이라는 유혹이다. 

진지한 성경 연구는 그 자체가 하나의 개인 예배다. 많은 사람이 자리에 앉거나 무릎을 꿇고 경건 서적을 읽을 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손에 펜을 들고 까다로운 신학을 파고들 때 마음에서 찬양이 울려나는 체험을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깨닫기 위해서는 보다 더 집중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개인 경건 시간의 말씀 읽기는 진지한 성경 공부를 훌륭하게 보완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것이 진지한 성경 공부를 대신할 수는 없다. 

게으른 그리스도인은 애써 공부한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삶에 적용하지 않기 때문에 어린아이 상태로 남아 있게 된다. 



1부/ 계시

˝계시한다(reveal)“는 말은 가려져 있는 어떤 것의 덮개를 여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일반계시를 통해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지식을 얻는다. 햇빛이 모든 시간, 모든 장소, 모든 사람에게 비치듯 날마다 하나님의 일반계시가 주어진다. 자연을 생명의 근원으로 여기는 것은 피조물과 창조자를 혼돈하는 것이다. 특별계시는 자신의 말을 듣는 자들에게 나타나신 구원자 하나님이시다. 특별계시는 하나님의 현현, 꿈, 환상,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가장 중요한 예수 그리스도를 포함한다. 특별계시의 궁극적 형태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인간은 결코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하나님에 관한 것들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의 무능력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해 계시한다. 우리는 세 인격이자 본질적으로 하나인 존재(삼위일체), 혹은 인간인 동시에 하나님이라는 두 가지 본성을 가진 한 분(그리스도)을 이해할 만한 판단 기준을 가지고 있지 않다. 역설은 모순과 같아 보이지만 면밀히 살펴보면 그 속에 확고한 뜻이 있다. 신비란 우리가 지금 당장 알 수 없지만 이후에 알게 될 어떤 것이다. 모순은 피조물도 풀 수 없고 하나님도 풀 수 없으며, 이 세상에서도 풀 수 없고 장래 세상에서도 풀 수 없다. 모순은 거짓말하는 자(진리를 멸시하는 거짓의 아비)가 사용하는 도구다.


간접 일반계시는 뭔가를 통해서 전해지는 계시다. 하늘이 하나님을 드러낼 때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매개체, 즉 수단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전 우주는 하나님의 계시의 매개체다. 하나님은 또한 사람의 마음에 직접 자신을 계시하신다(직접 일반계시). 우리는 하나님이 존재하시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의 법을 주셨다는 사실을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이러한 내면의 소리를 잠재울 수는 없다. 억제할 수는 있어도 없애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은 선천적으로 종교적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에게 하나님을 아는 선천적인 지식을 심어주셨다. 이것이 직접 일반계시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성경은 많은 인간 저자들에 의해 기록되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교회가 믿고 있는 대로, 성경을 기록할 때 인간 저자들은 자신의 의견을 기록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영감을 받았다는 주장에 근거한다. 사도 바울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딤후 3:16)라고 썼다. 영감 Inspiration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이 숨결을 불어넣으신‘이라는 헬라어를 번역한 것이다. 성경은 인간 저자에게서 나온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원천은 하나님이시다.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이 무류하고 무오하다고 단언한다. 성경의 저자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틀린 것을 영감하실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의 번역본이 오류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성경 원본이 절대적으로 정확하다는 의미다.


하나님의 성품은 도덕적으로 완전할 뿐 아니라 완전함의 근원적인 표준이 된다. 하나님은 언제나 올바르게 행하신다. 하나님의 피조물인 우리 또한 옳게 행해야 한다. 하나님의 법은 궁극적인 의의 기준이며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궁극적인 규범이다. 하나님은 우주를 법으로 다스리시며 하나님의 도덕법은 십계명에 나타나 있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의 법을 파기하실 권한이 있다.


선지자들의 예언서는 ‘소선지서‘와 ‘대선지서‘로 분류된다(대선지서: 이사야, 예레미야, 예레미야애가, 에스겔, 다니엘, 소선지서: 호세아, 아모스, 요나, 나훔, 스바냐, 스가랴, 요엘, 오바댜, 미가, 하박국, 학개, 말라기). 이것은 선지자들의 중요도가 아닌 정경으로 인정된 글의 분량에 따른 것이다. 구약의 선지자는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는 대언자였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직접 받은 사람만 선지자가 될 수 있었다. 


˝정경 canon˝이라는 용어는 헬라어의 ‘측정하는 잣대‘, ‘기준‘, 혹은 ‘표준‘이라는 말에서 나왔다. 즉 역사적으로 성경은 믿음과 교회의 예배 의식을 위한 권위 있는 기준이 되어왔다. 신약성경의 정경에 관해서는 로마 카톨릭과 개신교 사이에 완벽한 동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구약성경에 어떤 책을 포함시킬 것인가에 관해서는 양측이 심한 불일치를 보이고 있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외경을 정경으로 간주하는 반면 개신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성경의 외경들은 신구약 중간기에 기록되었다). 2세기경 영지주의 이단자들이 쓴 위조본 중 진지하게 고려된 책들은 클레멘트전서, 헤르마스 목자서, 디다케다. 그러나 이 책들은 사도들이 기록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정경에 포함되지 않았다. 개신교도들은 하나님께서 특별한 섭리의 돌보심으로 타당한 책들을 포함시키도록 보장해주신다고 믿는다. 교회는 성경의 정경을 인식하고,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그것에 복종한다. 정경성의 지표들은 다음과 같다. 1) 저자가 사도이거나 사도들의 승인이 있어야 한다. 2) 초대교회에 의해 권위가 인정되어야 한다. 3) 다른 정경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교회는 정경을 ‘창출해낸‘ 것이 아니라 단지 책들이 정경성을 가지고 있다고 ‘인정‘했으며, 그 인정으로 말미암아 교회 안에서 권위 있는 것이 되었다.


성경 해석의 주된 규칙은 ‘성경은 자기 자신의 해석자다.‘라는 원칙이다. 이 말은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하다는 뜻이다. 애매했던 성경의 어떤 부분이 다른 부분에서 명확해진다. 즉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성경의 한 본문을 다른 본문과 대립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모든 텍스트는 직접 접해 있는 문맥뿐 아니라 성경 전체의 문맥에 비추어 해석해야 한다. 성경이 우리 자신의 욕망이나 선입관에 따라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성경이 실제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이해해야 하며, 우리 자신의 견해로 보려는 마음을 억제해야 한다. 사탄이 그리스도를 죄에 빠지게 하려고 유혹할 때도 성경을 인용했다(마 4:1-11). 

성경의 해석 원리: 문자적으로, 교훈적 본문에 비추어, 명시적인 것에 비추어, 논리 법칙에 따라.


신자들은 성경의 진리를 발견할 자유가 있다. 그러나 자신들의 진리로 꾸며낼 자유는 없다. 따라서 신자들은 성경 해석의 건전한 원리를 이해하고 주관주의의 위험을 피해야 한다. 삶에 말씀을 적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먼저 말씀이 무어라 하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특정 말씀에 수많은 개인적 적용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말씀의 올바른 의미는 한 가지다. 



2부/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

유한한 존재가 어찌 무한한 존재를 이해하겠는가? 이 원리는 정통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교리 한 가지를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불가해성‘이라는 교리다. 하나님의 불가해성이란 우리가 하나님을 전혀 알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지식이 부분적이고 제한적이어서 초에적이고 완벽한 지식에 못 미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계시해주시는 만큼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삼위일체는 그 통일성과 다양성에서 하나님의 충만하심을 정의하려는 용어다. 본질은 하나이고 위격은 셋이신 하나님이라는 이 삼위일체의 역사적인 공식이다. 교회는 양태론과 삼신론이라는 이단을 거부해왔다. 양태론 modalism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단지 표현 방법에 불과하므로 하나님 안에 위격의 구별이 없다고 주장한다. 반면 삼신론 tritheism은 하나님을 구성하는 세 존재가 있다는 그릇된 주장을 한다. 각각의 위격은 하나님의 모든 속성을 가지고 있다. 구원의 역사는 어떤 의미에서 삼위의 모든 위가 공통으로 하시는 일이다. 그러나 활동 방법에서 성부는 창조와 구속을 주도하시고, 성자는 창조물을 구속하시고, 성령은 구속을 적용시키면서 성도들을 거듭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신다. 삼위일체 교리는 하나님의 신비로운 성품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다만 우리가 발을 내디뎌서는 안 될 곳의 경계를 정해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는 능력을 갖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계속 존재하게 하는 외부의 도움이 필요 없다. 이것이 ˝스스로 계신다˝라는 뜻이다. 피조물에게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해서 창조주에게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자신을 창조하실 수 없지만 우리와 달리 스스로 존재하신다. 스스로를 창조한다는 개념은 비합리적이다. 스스로 존재한다는 것은 합리적 개념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들어 옮길 수 없을 만큼 큰 바위를 만드실 수 있나요?˝ 어떻게 대답하든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시키는 셈이다. 이것은 그릇된 딜레마다. 신학용어로서의 전능이란 하나님께서 무엇이든 하실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하실 수 없는 일을 몇 가지 언급한다. 하나님은 거짓말하실 수 없다(히 6:18). 하나님은 죽으실 수 없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동시에 누군가로부터 창조되실 수 없다. 하나님은 자신의 본성을 거슬러 행하실 수 없다. 하나님은 같은 시간, 같은 관점에서 하나님인 동시에 하나님이 아니실 수 없다. 그러므로 전능하심이란 하나님께서 그의 피조물에 대한 모든 능력을 갖고 계시다는 뜻이다. 우리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하나님께 가능하다. 하나님께 불가능한 것이 없다는 말은 그분이 하고자 하는 일은 무엇이든 하실 수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유한한 것에 제한받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은 그분의 하나님 되심에 제한받는다. 하나님께는 죄가 불가능하다.


하나님은 모든 장소에 계실 뿐 아니라 어느 곳에나 충만하게 임재하신다. 이것을 하나님의 광대하심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시간이나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고 그것을 초월하신다. 하나님의 편재에는 그분의 광대하심이 포함된다. 그 광대하심으로 인해 하나님은 모든 시간, 모든 공간에 충만하게 거하실 수 있다. 


‘전지’(omniscience)라는 단어는 ‘모든(omni) 지식(science)을 갖는다’는 뜻으로 하나님께만 적용되는 말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모든 것을 주장하시기 때문에 모든 것을 아신다. 하나님은 우주의 주권자로서 우주를 통치하신다. 오직 무한한 존재만이 무한한 지식을 가질 수 있다. 


성경에서 나오는 “거룩(holy)”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그 첫 번째는 ‘구별됨’, 혹은 ‘다름’이라는 뜻이다. 두 번째로 거룩은 하나님의 순결하고 의로우심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옳은 일을 하신다. 우리를 향한, ˝거룩하라˝라는 부르심은 타락한 죄성으로부터 구별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결코 변하지 않으신다. 또한 “회전하는 그림자”가 없다(약 1:17). 하나님께는 ‘어두운 면’이 없다는 비유적인 표현, 혹은 도덕적 의미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완전히, 시종일관 선하시다. 하나님은 궁극적인 선의 기준일 뿐 아니라 모든 ‘좋은 것’(선)의 원천이시다. 우리는 재난, 불행, 불의, 그 밖의 많은 악을 만난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심은 이 모든 것을 초월하여 결국 우리에게 선이 되게 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비극이 없다. 하나님은 스스로 법이 되신다. 


자비란 잘못을 범한 자에게 벌을 덜 줄 때, 혹은 상 받을 자에게 더 큰 상을 줄 때 나타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엄한 공의를 자비로 누그러뜨리신다. 은혜가 하나님에게 요구되는 것이고 하나님이 은혜로우셔야 하는 의무를 갖고 계시다면, 우리는 이미 은혜가 아닌 공의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공의로우시다는 것은 그가 옳게 행하신다는 것이다. 공의는 마땅히 받을 것을 주는 것이다. 자비는 공의의 범주에 들지 않지만 공의를 침해하지는 않는다. 



3부/ 하나님의 행하심과 뜻

분명하게 시작이 있는 사물과 사람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것에 시작이 있다고 결론지으려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결론은 불합리의 깊은 심연으로 빠져들게 하는 치명적인 비약이다. 모든 것에 시작이 있다는 것은 논리적으로나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말이다. 무는 그 자체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무는 존재할 수 없다. 무는 존재가 아니기에 아무런 능력도 없다. 그러므로 무엇인가가 존재하려면 어딘가에 그 시작을 갖지 않는 다른 무엇이 있어야 한다. 문제는 그것이 ‘무엇’, 혹은 ‘누구’냐다. 하나님은 시작을 갖지 않으시므로 최고의 존재라 불린다. 다른 모든 존재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으며 하나님은 그 자신 외에 아무로부터 말미암지 않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최고이시다. 영원한 창조자이시다. 현재 뭔가가 존재한다면 시작을 갖지 않는 무언가가 존재해야만 한다. 창조되지 않은 존재는 어디에 사느냐에 관계없이 피조물보다 우월하다.


섭리라는 말의 어원적 의미는 ‘앞서서 보다’, 혹은 ‘공급하다’이다. 하나님이 우주를 통치하신다는 것이 섭리 교리의 핵심이다. 섭리에는 하나님께서 피조물의 의지를 통해 그의 뜻을 이루신다는 협력의 개념도 포함된다.


기적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비상한 능력을 지칭하는 일상의 일을 언급할 때 사용된다. 이차적 수단을 통해 적절한 시간과 장소에서 역사하시는 것을 본다. 자연법칙에 반하는 하나님의 역사다. 기적은 초자연적인 일이다. 그러나 초자연적인 일이 모두 기적은 아니다. 


하나님 뜻의 세 가지 의미: 1) 주권적이고 작정적인 뜻으로서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일은 반드시 일어나며 실제로 일어날 때까지 우리에게는 숨겨진다. 2) 교훈적인 뜻으로서 하나님의 계시된 율법과 계명이다. 우리에게는 이것을 어길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권리는 없다. 3) 하나님의 성향적 뜻으로서 하나님의 마음과 성향을 나타낸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맺으신 관계의 기본 구조는 언약이다. 성경에서의 언약은 평등한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고대 근동 지방에서 볼 수 있는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계약과 같다.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계약은 정복하는 왕과 정복 당하는 자들 사이에 맺어진다. 즉 쌍방 간 협상 같은 것은 없다. 언약 형태의 마지막 부분은 축복과 저주로 되어 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언약을 따를 때 주실 축복을 나열하신다. 또한 백성들이 자신의 책임을 수행하지 않을 땐 저주를 받으리라고 말씀하신다. 


본래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언약은 행위 언약이다. 이 언약 안에서 하나님은 그의 규례를 온전하게 순종할 것을 요구하셨다. 하나님은 그의 율법을 순종하는 자들에게 영생을 약속하셨지만 불순종하면 죽으리라고 경고하셨다. 아담이 죄에 빠졌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자비하심을 좇아 새로운 은혜 언약을 더하셨다. 그리고 그 은혜 언약은 우리의 구원을 가능하고 실제적이게 했다. 오로지 한 분만이 행위 언약을 지킬 수 있었다. 바로 예수님이다. 둘째 아담, 즉 새로운 아담으로서 이루신 그의 일은 우리가 하나님과 맺었던 언약의 모든 조항을 만족시켰다. 또 예수님이 이루신 그 일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이에게도 동일하게 유효하다. 이이와 같이 우리는 은혜로 말미암아 행위 언약을 만족시킨다.



4부/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존재‘는 바로 하나님이다.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고백은 신약성경에 나타난 다양한 증거로부터 유추된 것이다. 성육신한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피조물보다 선재하실 뿐 아니라 영원하시다. 그리스도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가 곧 하나님이시다(요 1:1-3). 신약성경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분명하게 말한다. 


하나님의 구속 계획에서 아들은 자발적으로 아버지께 복종하신다. 순종으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일을 성취하셨다. 첫째는 힘없는 어린 양, 우리 구주가 되신 것이다. 둘째는 예수님의 완전한 순종으로 말미암아 언약을 지키는 모든 자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상을 얻으신 것이다. 예수님은 복종하는 한 사람으로서 복종하지 않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셨다.


성자 하나님이 실제로 인간의 본성을 입으셨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기독교가 가지는 지극히 중요한 교리 중 하나다. 구속에는 이중적 교환이 있다. 즉 우리의 죄는 예수님께 전가되고 그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이다. 그는 우리의 불완전한 인성 때문에 심판을 받으시고 우리는 그의 완전한 인성으로 인해 축복을 받는다. 예수님께 죄가 없으셨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그 인성 속에 우리 모든 인류가 갖고 있는 한계가 있었다.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은 시공간의 제한을 받으셨다. 땀 흘리셨고 배고프셨고 우셨고 고통을 견디셨다. 그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고 죽음을 괴로워하셨다. 이 모든 면에서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인간이셨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한 희생 재물의 자격을 갖게 되신 이유는 바로 죄가 없으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완전한 자로서 불완전한 자를 위해, 죄 없는 자로서 죄인을 위해 죽으셨을 뿐 아니라 우리의 구원에 필요했던, 완전한 순종의 삶을 사셨다.


동정녀 탄생이란 예수님의 탄생이 육신의 아버지 없이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마리아의 태에 기적적으로 잉태된 결과라는 교리다. 여자에게서 났다는 말은 그가 참으로 인간이며 우리 중 하나같이 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인성은 우리와 정확하게 똑같지 않다. 우리의 원죄를 가지고 태어났지만 그리스도에게는 원죄가 없었다. 예수님이 육신의 아버지에게서 나시지 않았다는 사실은 아들로서의 신성을 나타낸다. 


성경에 예수님을 ˝아버지의 독생자˝(요 1:14)라고 언급한 부분은 교회사에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또 예수님은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골 1:15)라고 불리시는데, 이 구절도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 다만 높여진 창조물이라고 논쟁거리가 되었다. ˝독생하다˝라는 용어는 신약성경에서 제한적으로 사용된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서 ˝아버지의 독생자(only begotten)˝라고 언급된다. 그러나 요한복음 1장 18절에서는 ˝독생하신 하나님(only begotten God)˝이라 표현했다. 예수님은 ˝독(only)˝생하셨다(monogenais). 교회가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대해 말하는 것은 이것을 제대로 다루려는 시도다. 아들은 영원히 아버지로부터 비롯된다. 피조물로서가 아니라 삼위 중 제 2위로서다. 예수님이 ˝아버지의 독생자˝, 그리고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라고 불리는 사실은 교회사에서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예수님이 요한의 세례를 받으려고 요단강가에 가신 것은 지상 사역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다. 예수님은 셰레 받으실 때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받았고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사 61:1)라는 이사야의 기록대로 메시아의 사역을 이행하기 시작하셨다. 예수님이 세례 받으신 것은 죄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구원하실 죄인들과 동일시되기 위해서였다.


그리스도의 변형은 그 모습의 변화로서 자연과 초자연 사이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영광은 단순히 하나님 영광의 반사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 자신의 영광이다. 


그리스도의 승천은 크나큰 중요성을 갖는 구속 사건의 하나다. 그것은 재림에 앞서서 그리스도께서 가장 높아지신 순간을 나타낸다. 즉 그리스도께서 그의 영광으로 들어가신 때였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우편으로 가셨다. 우주의 권세의 자리로 올라가셨다. 대관식을 위해, 만왕의 왕이신 것을 확증하기 위해 하늘로 가셨다. 그리스도는 승천과 함께 우리의 대제사장 역할을 시작하셨고 무한한 권세의 자리인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 


구원받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화목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화목을 위한 하나님의 요구를 만족시키셨다. 그리스도와 아버지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중보자가 되시는 것에 영원 전부터 동의하셨다. 


예수님은 구약 예언의 성취이며 그 자신이 선지자이셨다. 예수님은 제물인 동시에 제물을 바치는 분이셨다. 제사장으로서 그는 죄에 대한 완벽한 제몰로 드리셨다. 예수님은 기름부음 받은 만왕의 왕이시며 만유의 주시다. 


그리스도라는 호칭은 예수님의 신분과 메시아로서의 사역을 의미하는 호칭이다. 그리스도와 메시아 모두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의미다. 신약에서 두 번째로 자주 사용되는 예수님의 호칭은 ˝주˝다. ˝주˝라는 호칭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부여하신 것이다. 교회가 고백하는 예수님의 두 가지 본성에 따라 예수님은 참사람이시며 참하나님이시다. 인자라는 호칭이 인성의 요소를 포함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우선적으로 예수님의 신성과 관련된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호칭 역시 신성과 관련되지만 그보다는 아들로서 예수님의 순종에 초점을 둔 것이다. 이 호칭의 중요성은 구약에서 다니엘이 사용했다는 점과 관련이 있다(단 7장 참조). 여기서 인자란 우주의 심판자 역할을 하는 하늘의 존재를 나타낸다. 따라서 예수님이 이 용어를 사용하신 것은 분명한 신적 권위를 선포하신 것이었다. 인자는 예수님이 가장 자주 사용하신 호칭으로 온 우주의 심판자로서의 역할을 나타낸다. 로고스라는 말은 단순히 ˝말씀˝으로 번역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다 풍성한 의미를 주는 철학적 용례의 역사를 가진다. 이 용어가 헬라의 철학적 개념으로 채워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에서 사용하는 로고스의 용례는 헬라 철학에서의 용례 수준을 훨씬 넘어선다. 창세기 1장 3절은 ˝하나님이 이르시되 … ... 있으라 하시니 ... … 있었고˝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창조는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로고스의 개념이 헬라 철학과 구별되는 가장 중대한 점은 신약에서의 로고스가 인격이시라는 점이다. 즉 말씀(로고스)는 사람이 되셔서 이 세상에서 사시고 죽으셨다. 



5부/ 성령

구약에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은 곧 성령이 말씀하신 것이라 기록되었다. 즉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되˝와 ˝하나님의 영이 가라사대˝라는 표현이 반복적으로 번갈아 쓰인다.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속성을 성령에게 돌린다. 


성령의 인격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삼위의 제3위가 영향력이 아니라 인격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16장 13절에서 예수님은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말씀하신다. 성령은 인격이시므로 그에게 기도하는 것이 합당하다. 성령은 택함 받은 자들을 ˝위로하시고˝, ˝인도하시고˝, ˝가르치신다˝(요 16장). 성령은 살피시고 선택하시고 계시하시고 위로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권고하신다.


성령은 우리를 말씀의 확실한 증거에 순응하고 굴복하게 만든다. 그는 우리를 움직여 하나님 말씀의 명백한 가르침에 굴복하게 하며 완전한 확신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성령이 말씀으로 우리에게 확증하시면서(롬 8:16) 우리 영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거하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령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확증하여 준다. 


그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주시는 메시지를 듣고 받아들이고 정확하게 이해하도록 도우신다. 하나님의 가장 깊은 생각을 아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성령은 지금도 성경의 계시를 조명하는 사역을 계속하신다. 성령은 우리가 성경을 이해하고 그 안의 진리를 깨닫고, 그 진리를 우리 삶에 적용하도록 도우신다. 또 성령은 말씀을 가지고, 말씀을 통해 역사하신다. 성경은 성령의 책이다. 


중생은 성령이 신자에게 새 생명을 주셔서 죄로 죽었던 자를 살리는 것이며 성령세례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사역을 맡기시기 위해 능력을 부어주시는 것이다. 신약 교회의 모든 신자들이 방언을 말한 것은 아니지만 모두가 성령을 선물로 받은 것은 사실이다. 요엘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다(행 2:16-21). 성령께서 신자에게 주시는 것 가운데 성령세례는 사역을 맡기시기 위해 주시는 은사와 구별된다. 사도행전의 네 부류(유대인, 사마리아인,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 이방인)에게 성령을 부어주신 것은 그들 모두가 신약 교회에 포함됨을 가리키는 것이다. 오순절은 성령이 제한된 소수에게만 임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고 한 구약 예언의 성취다. 


보혜사란 위로자, 혹은 상담자로 번역되는 말로 헬라어 ‘파라클레테(paraclete)‘에서 유래되었다. 예수님은 이 땅을 떠나시면서 아버지께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시기를 기도하셨다. 그는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최고 대리인이시다. 보혜사의 개념에는 위로자의 역할도 있다. 먼저 그는 상처받은 자, 실패한 자, 슬픔에 빠진 자에게 부드러운 위로가 되신다. 


성도란 ‘거룩한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좇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다. 성화는 평생 동안 계속된다. 성화는 신자와 성령이 함께 협력하는 일이다. 



6부/ 인간과 타락

우리의 정체는 전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연관된다. 즉 하나님이 누구신지 모르고서는 자신이 누구인지 이해할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되지 않았고 하나님과의 관계있는 피조물이 아니라면 우리는 우주 속의 우발적인 산물이다. 우리의 기원은 무의미하고 우리의 운명 역시 무의미하다. 우리가 우연히 암흑으로부터 출현했으며 종국에는 무(無)의 심연 속으로 해체되어 버린다면 우리는 출생과 사망이라는 절대적인 무의미의 양극 사이에 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과 관계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계시면 우리는 존엄성을 갖고,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남자와 여자 모두)을 자신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하셨다. 인간이 타락하면서 그 안의 하나님의 형상이 손상을 입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이다. 그는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회복시키신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된 인간은 물질인 육체와 비물질인 영혼으로 구성된 피조물이다. 성경적 관점에서 보면 육체는 선하게 창조되었으므로 신체에는 본질적인 악이 없다. 다만 육체도 영혼과 마찬가지로 도덕적 타락으로 인해 고통받는다. 인간의 죄악됨이 육체와 영혼 모두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또한 기독교는 ‘육체로부터의‘ 구원을 가르치는 것이 아닌 ‘육체의‘ 구원을 가르친다. 정통 신학은 인간을 육체와 영과 혼, 이 세 가지로 구분하는 삼분설을 거부한다. 영혼은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본질적으로 영원하지 않다. 영혼은 물질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물리적인 힘으로 파괴될 수 없지만 하나님에 의해서는 파괴될 수 있다. 즉 영혼은 하나님이 유지하시는 능력 없이 한순간도 존재할 수 없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행 17:28). 우리는 육체가 죽어도 영혼은 신자와 불신자 모두 계속 산다. 다만 신자는 그들의 육체의 부활과 영화가 이루어질 구원의 마지막 날을 기다리는 반면, 회개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을 기다린다. 인간은 전체적으로 타락했으므로 영혼, 육체 모두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은혜의 대상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령 충만하다. 성령 ‘충만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께 의지하는 정도에 따라 어느 정도 차이를 나타내지만 성령께서는 모든 그리스도인 속에 거하신다.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될 때, 우리가 타락한 본성(육)의 힘은 어느 정도 정복당하지만 완전히 말살되지 않는다. 따라서 평생의 성화 과정에서 그리스도인이 성령과 은혜로 자라 가려면 매일 옛 본성과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다. 옛사람(육신)과 성령 사이의 이 싸움은 우리가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 어떤 그리스도인도 완전히 육적일 수 없고 육적인 것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사탄을 마녀나 도깨비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진지하고 냉정하지 못한 행동이다. 성경에서 사탄은 ‘대적‘이라는 의미다. 우리는 그가 마귀라는 것을 안다. 그는 인류가 창조되기 전에 창조된 천사와 같은 피조물이며 하나님을 대적하여 인간, 그리고 하나님과 전쟁을 하게 되었다. 그는 어둠의 임금, 거짓의 아비, 참소자, 미혹하는 뱀으로 불린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탄은 훨씬 더 세련된 모습이다. 그는 광명의 천사로 등장한다. 이러한 모습은 사탄에게 자신을 선한 모습으로 위장하는 교활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사탄은 신적 능력이나 성품이 없는 유한한 피조물이다. 


귀신은 사탄을 수종드는 초자연적인 존재다. 그들은 사탄과 마찬가지로 한때 천사였다. 그러나 사탄의 반역에 가담했다가 그와 함께 하늘나라에서 쫓겨났다. 사도바울은 이교도들이 숭배하는 신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하는 것은 그런 것을 부추기며 퍼지게 하는 귀신들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이러한 이교도들의 의식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사실상 귀신을 경배하며 귀신의 통제를 받고 있는 것이다. 부활과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인해 사탄과 그의 졸개들은 심각한 제약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바울과 요한은 마지막 때에 사탄과 그의 졸개인 귀신들의 활동이 증가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귀신은 실재하고 힘이 있지만 그가 그리스도인을 정복할 수 있다고 믿을 근거는 없다. 우리는 귀신에게 괴롭힘당하거나 유혹 받거나 참소당할 수 있지만 통제받지는 않는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성령이 내주하시기 때문이다. 그의 임재가 우리를 귀신 들림으로부터 보호한다. 성령은 우리를 공격하는 그 어떤 귀신보다 강하시다. 


죄의 성경적 정의는 활시위를 당겨 화살을 쏘았을 때 과녁을 빗나가는 것으로 묘사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나간 목표는 하나님이 주신 율법의 규범을 말한다. 죄는 ‘이성적인 피조물에게 규칙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법을 순종함에 있어서 부족하거나 위반하는 것‘이라고 정의되어왔다. 성경은 어떤 죄가 다른 죄에 비해 더 극악하다고 간주한다. 하나님의 의의 심판대에서 언도되는 처벌에도 각각 정도의 차이가 있듯 사악함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다. 모든 인간은 죄인이다. 죄에는 하나님의 율법을 불순종(해야 할 것을 하지 않는 죄)하는 것과 하나님의 율법을 위반(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는 죄)하는 것이 포함된다. 


원죄는 본래 아담과 하와가 최초로 지은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원죄는 첫 번째 죄의 결과(인류의 타락), 즉 우리가 태어날 때의 타락한 상태를 말한다. 우리는 죄를 짓기 때문에 죄인이 아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다. 그런 까닭에 다윗은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라고 한탄했다. 죄의 보편성은 사회적 요인이나 환경적 요인으로 설명할 수 없다. 죄의 보편성은 인류의 타락에 기인한다. 


사담 후세인이나 아돌프 히틀러에 비하면 평범한 범죄자가 성자처럼 보인다. 그러나 눈 들어 궁극적인 선의 기준인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에 시선을 두면, 세상에서 근본적으로 선해 보이는 것들이 속속들이 부패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성경은 인간의 전적(Total) 타락을 가르친다. 우리는 우리가 범하는 것보다 더 자주, 더 심하게 죄지을 수 있다. 즉 우리는 완전히 타락하지 않았지만 전적으로 타락했다. 인본주의는 죄를 인간 삶의 가장자리나 끝부분에 위치한 것으로 보고, 인간이 근본적으로 선하다고 생각한다. 성경적인 기독교는 죄가 우리 삶의 중심에 퍼져 있다고 가르친다. 


양심은 하나님이 주시는 내적 음성이며 우리 마음은 양심을 통해 죄를 고소하기도 하고 변명하기도 한다.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야 하고 말씀에 사로 잡혀야 한다는 것이다. 양심은 말씀을 잘못 알 수도 있고 반복되는 죄로 인해 무감각해지고 둔해질 수 있다. 설령 죄가 아니라 할지라도 악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행하는 것은 죄다. 


복음은 죄를 회개하는 모든 사람에게 값없이 용서를 주지만 이 죄에 있어서만큼은 한계를 갖는다. 예수님이 경고하신 용서할 수 없는 죄, 또는 용서받지 못할 죄란 성령을 훼방하는 죄다. 예수님께서는 이 죄를 현재에도 미래에도 용서받을 수 없다고 선언하셨다. 모독이란 사람이 말이나 글로 하는 행위이다. 즉 모독에는 말이 포함된다. 또한 신성 모독은 어떤 형태든지 하나님의 성품을 심하게 모욕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용서받을 수 있는 죄로 간주된다. 예수님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몰랐던 사람들이 범한 모독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셨다.


혼합주의는 한 종교의 여러 면이 다른 종교에 동화되거나 융합되는 과정을 말한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혼합주의의 압력과 유혹에 대하여 크게 걱정하신다. 하나님의 법은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분명하게 금지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동시에 다른 신을 섬기는 것도 금지했다. 또한 선지자들은 백성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이방의 가르침과 관행에 융합시키는 것에 대한 심판을 경고했다. 기독교 신조의 역사는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 종교의 속임수와 철학들로부터 자신을 구별시키려는 노력의 역사다. 이 문제는 오늘날의 교회 안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기독교의 고유한 것을 포기하는 한편, 마르크스주의나 실존주의와 같은 비기독교 철학이 기독교 내에서 힘을 얻고 있다. 혼합주의는 계속적으로 하나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부터 떼어 놓는 강력한 무기다. 오늘날의 교회는 기독교 사상과 이방 종교와 세속 철학을 연합하려는 시도에 위협받고 있다.



7부/ 구원

성경의 주제는 구원이다. ‘구원하다‘라는 동사의 가장 간단한 의미는 ‘위험하고 위협적인 상황에서 구출되다‘라는 뜻이다. 그러나 성경은 구원을 우리가 죄로부터 궁극적으로 구속받는 것, 그리고 하나님과의 화해를 얻는 것을 나타내는 특수한 의미로 사용한다. 끝으로 구원에 관한 성경의 또 다른 관점에 주목하는 것이 필요하다.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 구원은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이 완성하시고 하나님이 시행하신다. 구원은 주님의 것이며 주님으로부터 온다. 다시 말해 우리를 주님의 진노로부터 구원하시는 분은 바로 주님이시다. 성경은 과거, 현재, 미래의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말하면서 여러 가지 시제로 구원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예정론만큼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든 교리는 없다. 때문에 예정론은 대단히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하는 어려운 교리이다. 예정론이 의미하는 가장 기본적인 것은, 천국이든 지옥이든 우리의 극적인 목적지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우리가 존재하기도 전인 영원 전부터 하나님은 인류 가운데 어떤 자들은 구원하시기로 결정하셨고 나머지는 멸망하도록 두셨다는 말이다. 

비개혁주의적 관점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을 택할 자들이 누구인지 아시고 그들을 선택하여 영생을 주신다. 이것을 예정은 선견적(prescient) 관점이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결정과 행동을 미리 아신다는 점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혁주의의 관점은 하나님의 선택이 주권적이다. 그것은 미리 아신 바 된 인간의 결정이나 반응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그러한 결정들이 진실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에서 나온 것이라고 본다. 믿음은 거듭남에서 오는 선물이다. 오직 선택받은 자만이 믿음 안에서 복음을 따를 수 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를 선택한다.

예정론에서 우리를 괴롭히는 문제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선택하여 구원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께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자비로우셔야 할 의무가 없다. 그가 얼마나 자비로우셔야 할지는 그의 결정에 달려 있다. 결코 하나님께서 불의하시다는 비난을 받을 수 없다(롬 9:14-15). 


예정론에서는 선택과 유기 두 가지가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성경을 진지하게 살펴본다면 이중적인 예정론을 피할 수 없다. 초칼빈주의는 하나님께 선택과 유기 모두에 책임이 있다고 가르친다. 이중적 예정론을 보는 개혁주의 관점은 소극적-적극적 형이다. 그는 선택받은 자들을 일방적으로 거듭나게 하시고 그들의 보증을 확증하신다. 반면 유기된 자들의 경우, 하나님은 그들에게 죄악이 역사하게 하시거나 그들의 믿음을 방해하시지는 않는다. 다만 그들에게 개입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자신들의 죄악된 뜻 가운데 버려두신다. 


하나님께는 세상이 존재하도록 부르시고, 무덤에서 시체를 부르시고, 사람을 영적 죽음에서 영적 생명으로 부르시는 능력이 있다. 사람은 하나님의 외적 부르심인 복음을 듣고 그것을 거절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내적 부르심은 언제나 효과가 있다. 그 부르심은 기대되는 결과를 낳는다.


중생(重生)은 거듭남을 가리키는 신학 용어다. 중생은 새로운 탄생, 새로운 기원, 새로운 시작을 말한다. 중생은 철저하게 새로워진 사람이 새 삶을 시작하는 것이다. 어머니의 배 속에서 세상으로 나오는 출생이 우리의 시작인 것처럼, 영적 거듭남은 영적 생활의 출발점이 된다. 중생은 하나님의 거룩한 주권으로 일어나는 것이며 주권적이고 즉각적이고 순간적인 일이다. 또 중생은 믿음의 필수 조건으로 믿음에 앞서는 것이다. 


십자가상에서 아버지의 진노를 당하심으로써 그리스도는 그의 백성들을 위해 속죄를 이루셨다. 그는 십자가상에서 아버지에게 버림받으셨고 지옥을 온전히 경험하셨다. 그리스도의 속죄는 대속과 만족 두 가지를 다 이루셨다. 성부와 성자는 우리와의 화목을 이루시기 위해 함께 일하셨다. 


하나님은 온 세상을 사랑하신다. 그러나 온 세상을 구원하시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곳으로부터 사람들을 구원하신다. 넓은 의미에서 속죄는 모든 모든 사람에게 주어졌고, 좁은 의미에서는 선택받은 자들에게만 주어졌다. 


우리의 욕망에 따라 선택하는 것, 이것이 자유 의지의 본질이다. 칼빈주의자들은 성령께서 거듭나게 하시기 전에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달아나려 한다는 주장을 고수한다. 즉 거듭남은 우리의 욕망을 변화시켜 자유롭게 회개하고 구원받게 한다. 성경이 말하는 참된 자유는 우리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선택하는 자유, 혹은 능력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선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바꾸셔야 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다른 방법으로는 가질 수 없는, 하나님을 향한 소원을 주신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이다. 


‘믿음(faith)‘이라는 말의 어원은 ‘신뢰하다(trust)‘라는 의미다. 히브리서에 믿음의 정의가 나와 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믿음은 미래에 대한 우리 소망의 본질이다. 간단히 말해서 이것은 과거에 하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것을 믿는 믿음에 근거하여 미래의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계심을 믿는 것과 하나님을 믿는 것은 별개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바로 우리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며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다. 신앙은 맹목적으로 어둠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어둠에서 빛으로 불러내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성경이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고 가르치는 이상, 믿음은 구원의 필요조건이다. 누구나 자기에게 믿음이 있노라 고백할 수 있다. 그러나 고백만으로는 아무도 구원에 이를 수 없다. 믿음의 열매가 없는 입술의 예배는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아니다. ˝성실하기만 하다면 당신이 무엇을 믿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이러한 생각은 성경과 반대되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무엇을 믿느냐가 매우 중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잘못된 일에도 성실할 수 있다. 우리는 복음을 믿고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역을 믿는다. 또한 구원을 얻기 위해 복음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지만 그 지식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에 관련된 사실에 동의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기독교 신학 시험에서 A 학점을 받을 수 있다. 즉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복음의 진리에 동의하는 것이 포함된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우리가 복음을 사랑하고 그 진리대로 사는 것을 요구한다. 단지 신앙을 고백하는 것만으로는 의롭다고 칭함을 받지 못한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복음에 관한 지적인 동의를 요구한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에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그를 향한 사랑이 포함된다. 


칭의란 불의한 죄인이 의롭고 거룩하신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다고 여김을 받는 것이라 정의할 수 있다. 우리의 칭의는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더해진 것이고 전가된 것이다. 즉 믿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시킨 것이다. 


믿음이 아닌 선행으로 칭의를 얻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율법주의의 이단에 빠지는 것이며 아무런 행위 없이 믿음으로만 칭의를 얻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율법폐기론의 이단에 빠지는 것이다. 믿음과 선행은 구분될 수 있지만 분리될 수 없는 관계다. 진정한 칭의에는 언제나 성화가 타난다. 즉 성화가 따르지 않는다면 처음부터 칭의가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 누구도 선행으로 칭의를 얻지 못한다. 칭의는 오직 믿음으로 얻지만 열매 없는 믿음은 아니다.


회개는 구원을 위해 선행되어야 할 필요조건이다. 진정한 회개에는 오직 고백, 보상, 죄로부터 돌아서는 결단이 포함된다. 하나님은 진정으로 회개하는 모든 자에게 용서와 회복을 약속하신다. 


공로와 은혜의 문제는 로마 카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역사적 논쟁의 핵심이다. 종교개혁의 주요 선언 중 하나는 솔라 그라티아(sola gratia)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얻는 구원-이다. 그리스도의 공로는 믿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은혜로 주어진다. 은혜는 우리의 공로 없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다. 우리는 은혜 안에서 자라가지만 우리 안에 있는 은혜의 분량에 따라 자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자비로운 도움을 주시는 성령의 은혜 안에서 자란다. 로마 카톨릭 신학은 적정공로, 재량공로, 여분의 공로를 구별하지만 개신교는 이 세 가지를 모두 부정한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주시는 선물이며 자비이다. 


개혁주의 신학은 ‘성도의 견인’이라는 교리를 가르친다. 이 교리의 핵심은 만일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졌다면 결코 그것을 잃어버릴 수 없으며, 만일 그것을 잃었다면 애초부터 갖고 있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다. 

씨를 뿌리는 자가 그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릴 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렸고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싹이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매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눅 8:5-8). 이 비유는 처음에는 믿었다가 나중에는 타락한 사람을 언급한 것일 수도 있고, 개혁주의 신학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믿었던’ 사람이 거짓되고 위선적인 믿음을 가졌었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오직 좋은 밭에 떨어진 씨만 순종의 열매를 맺는다. 예수님은 이러한 사람을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는”(눅 8:15)자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잠시 넘어질 수 있지만 최후까지 타락할 수는 없다. 진정한 신자는 하나님의 손에서 빼앗길 수 없다(요 10:27-30). 성도의 견인은 성도를 보존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다. 성령의 인 치심을 받은 우리는 구원을 확신할 수 있다. 그는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보증이다. 


구원의 확신을 구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다. 이것은 우리 영혼에 관한 쓸데없는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진정한 확신을 얻으려면 우리의 마음을 살피고 믿음의 열매를 점검해보아야 한다. 온전한 확신은 성령이 증거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다. 


카톨릭에서 죽음 이후 천국으로 가기에는 부족하지만 지옥으로 갈 만큼의 죄를 짓지 않은 영혼이 잠시 머문다고 생각하는 곳이 연옥이다. 이곳에서 죄를 씻고 정화한 후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기독교는 연옥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영혼가면설은 죽음과 부활 사이의 영혼이 ‘가사 상태’로 의식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통 기독교 교리에서 벗어난다. 중간 상태는 죽음과 우리 몸의 부활 사이에 육체가 없는 우리 영혼이 의식을 가지고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것을 말한다.


성경은 성도의 마지막 부활에 대하여 분명하게 가르친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이 그 첫 열매라고 선언한다. 이 땅에서 죽게 되는 몸과 우리가 받을 부활의 몸 사이에는 연속성이 있다. 우리의 현재 몸은 부패할 것이다. 그러나 비록 변화되셨을지라도 그 몸을 가지고 돌아오신 예수님처럼 우리의 현재 몸도 부활할 것이며 그 정체성을 파괴시키지 않으면서 변화될 것이다. 장차 우리 몸이 어떤 모습으로 부활할지는 신비에 싸여 있다. 


하나님의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29-30). 영화의 교리는,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 진정한 신자들 모두(산 자나 죽은 자나) 그들 몸의 온전하고 최종적인 구속을 받아 마지막 상태에 이른다는 것이다. 장래의 영화에 대한 약속은 현재의 우리에게 위로와 영감을 준다.



8부/ 교회와 성례전

‘사도 apostle’란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사도들은 그리스도께 부름받고 위임받았으며 그리스도의 권위를 가지고 말했다. 그러므로 사도의 권위를 거부하는 것은 그를 보내신 그리스도의 권위를 거부하는 것이다. 사도의 조건은 다음과 같다. 1) 예수님의 지상 사역에 함께했던 제자 2) 부활의 증인 3) 그리스도께서 직접 부르시고 위임한 자. ‘제자’와 ‘사도’는 동의어가 아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도’이셨다. 오늘날에는 성경적 의미의 사도가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날 사도의 권위는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역사적으로 참교회의 표지는 다음과 같은 것들로 교정 지어졌다. 1) 하나님의 말씀을 참되게 선포함. 그리스도의 신성, 삼위일체, 이신칭의, 속죄, 그리고 구원에 필수적인 그 밖의 교리들을 공식적으로 부인할 때, 교회는 그릇되거나 배교하는 것이다. 2) 제도에 따라 성례를 행함. 그리스도가 제정하신 성례전을 부인하거나 모독하는 것은 교회를 오류에 빠지게 하는 행위다. 3) 교회의 권징을 행함. 교회가 공개적으로, 그리고 완고하게 추잡하고 악질적인 죄를 허락하고 행하며 그것을 징계하지 않는다면 참교회의 표지를 나타내는 데 실패한 것이다. 


출교는 교회의 징계 중 가장 극단적인 것이며 회개하지 않는 죄인을 신실한 자들의 공동체에서 제외하는 일이다. 출교를 포함한 모든 과정은 회개하지 않는 사람을 다시 교제권 안으로 이끌기 위한 징계의 과정이다. 즉 출교의 목적은 처벌이 아니라 죄지은 자에게 그의 죄를 일깨워주는 것이다. 교회의 징계가 사소하고 작은 일들에서 이루어지면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셨던 것처럼 서로에게 대하여 참고 인내하는 정신을 가져야 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허다한 죄를 덮는” 사랑을 가지라고 말씀하신다. 교회의 징계는 지나치게 느슨해서도 안 되고 지나치게 가혹해서도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서로 참고 인내해야 한다.


‘성례전 sacrament’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은혜의 약속을 외적 형태로 보여주시는 수단으로 정의되며 물, 떡, 포도주 등의 눈에 보이는 요소들과 그러한 상징들과 관련하여 계획하신 하나님의 뚜렷한 행위, 그리고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구속, 은혜 등의 요소로 구성된다. 개신교에서는 성례전을 세례와 성찬 두 가지로 제한했다. 성례전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의식이므로 기쁨으로 엄숙하게 참여해야 한다. 


세례는 선택된 자들이 은혜의 언약 안에 있음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것이며 우리의 죄를 깨끗게 하시고 용서해주셨다는 표징이다. 또한 성령에 의해 거듭났다는 것,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 성령이 내주하신다는 것,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 그리고 성령으로 거룩하게 되었다는 표징이다. 세례는 물로 씻는 것을 의미하므로 침수, 담금, 뿌리기로 시행될 수 있으며 세례의 유효성은 세례를 행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의 성품에 달려 있지 않고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미쁘심에 있다. 세례가 자동적으로 중생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세례의 유효성은 하나님의 약속의 신실함에 그 기반을 두며 한 사람에게 한 번만 줄 수 있다. 


신약성경은 유아세례를 명백하게 명하지도, 금하지도 않는다.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신약과 구약 사이의 차이점을 지적하고 세례가 믿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유아세례의 옹호자들은 믿음의 표징으로서 할례와 세례의 연속성을 지적한다.


칼빈은 성찬 시 그리스도의 육체의 임재를 부정했지만 그리스도의 실제적 임재는 확실하게 주장했다. 예수님의 인성은 하늘나라에 제한되어 있지만, 그의 신성은 무소부재하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화체설’을 가르친다. 화체설은 의식에 사용하는 떡과 포도주가 성찬식 도중에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된다는 주장이다. 화체설을 둘러싼 논쟁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인성에 관련된 문제다. 몸과 피는 예수님의 인성에 속한 것이다. 즉 세계 방방곡곡에서 동시에 미사를 드린다면 예수님의 인성(몸과 피)이 어떻게 같은 시간에 한 장소 이상에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칼빈과 다른 신학자들은 이러한 개념을 불법으로 여겼고 칼케돈 공의회에서는 그리스도의 두 가지 속성인 인성과 신성이 혼합, 혼란, 분열, 분리됨 없이 각각의 속성을 보유한 채로 연합되어 있다고 확언하며 화체설이 이단의 한 형태임을 명백히 했다. 


하나님은 엿새 동안 세상을 창조하신 후 일곱째 날에 안식하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다. 그리고 그날을 다른 날과 구분하시며 하나님께 바치는 거룩한 날로 정하셨다. 안식일 sabbath이라는 말은 ‘일곱 번째’라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몇몇 사람들이 토요일만을 안식일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그러나 기독교는 신약성경에 나온 그리스도의 부활의 날인 주의 날이 일요일(안식 후 첫날)이기에 일요일을 안식일로 지킨다. ‘칠일 중 하루’이라는 안식일의 원칙이 손상되지 않은 채 사도들에 의해 지켜지면서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안식일에는 정기적인 노동으로부터 휴식하고 성도가 모여 함께 예배해야 한다. 


신자의 “예”는 “예”, “아니오”는 “아니오”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신실한 제자가 갖는 책임이다. 인간에게는 거짓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진리의 근원이신 하나님은 거짓말하실 수 없으며 진리의 수호자시다. 경솔하게, 혹은 심중 유보를 가지고 서원하면 안 된다. 



9부/ 영성과 이 세상에서의 삶

그리스도인들보다도 더 훌륭한 온화함과 인내를 보여주는 비그리스도인이 많다. 이처럼 사람이 성령과 관계없이 ‘성령의 열매’를 가질 수 있다면 어떻게 이러한 방법으로 우리의 영적 성장을 측정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생기는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등의 덕목들과 비그리스도인들이 보여주는 덕목들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가 있다. 비그리스도인들은 이기적 동기에서 이러한 것들을 행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열매를 나타낼 때는 궁극적으로나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향하는 성품을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가 성령 충만하다면 성령의 열매를 드러낼 것이다. 물론 이것은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하룻밤에 생겨나는 피상적인 성품이 아니다. 우리는 성령의 은사를 받은 후에도 여전히 미성숙할 수 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재다(갈 5:22-23).


성경에서는 사랑을 훨씬 더 능동적인 의미로 사용한다. 사랑은 의무다. 구약에서는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히브리어 “아헤브 aheb”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필레오 phileo”와 “아가페 agape”라는 헬라어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반면에 ‘에로스 eros’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사용되지 않는다. 이것은 성적이고 에로틱한 사랑을 말하며 우리가 로맨스와 결부시키는 사랑이다. 아가페는 오래 참고 온유하며 자랑하지 않고 투기하지 않는다. 교만하지 않고 무례히 행하지 않으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 이 사랑은 용서하는 데 빠르다. 또한 선과 진리를 구하며, 보호해주며, 소망하며, 언제나 참아준다. 이 사랑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는 사도 바울의 말처럼 아가페는 성령의 궁극적인 열매다. 


성경이 말하는 소망은 하나님의 약속이 미래에 성취되리라는 굳건한 신념이다. 소망은 미래에 이루어질 일들에 대한 확신이다. 하나님 자녀들의 부활과 하나님 나라가 오리라는 것에 대한 완전한 확신이다. 따라서 소망은 종말론과도 연결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성공보다 고난으로 특징지어짐(고전 4:8-13, 고후 4:7-18)에도 불구하고 소망의 기초는 하나님께 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이미 이루신 일을 신뢰하는 것이고 소망은 하나님이 미래에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신 바를 신뢰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고난 가운데 소망을 준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교통한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주권적인 뜻을 이루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수단이다. 기도는 삼위일체의 하나님, 혹은 각 위의 하나님 한 분께만 드리는 것이다. 피조물에게 기도하는 것은 우상 숭배다. 기도는 진실하게 경외심을 가지고 겸손하게 드려야 한다. 믿음의 기도는 하나님의 지혜와 자비하심을 신뢰하면서 드리는 기도다. 


율법 폐기론(antinomianism)이란 문자 그대로 반율법주의(anti-lawism)다. 이것은 신자의 삶에서 하나님 율법의 중요성을 무시하거나 경시하는 것이다. 즉 율법 폐기론은 율법주의 이단과 반대되는 이단이다. 

‘협화신조(formula of concord, 1557)’에서 율법의 용도를 다음의 세 가지로 설명했다. 1) 죄를 드러냄 2) 일반적으로 사회생활에 필요한 예의를 갖게 함 3)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거듭난 사람들의 삶에 규율을 제공함. 

율법 폐기론의 기본적 오류는 성화와 칭의를 혼동한 것이다. 우리는 행위와 상관없이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는다. 그러나 모든 신자는 하나님의 거룩한 계명을 지킴으로써, 즉 하나님의 은혜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주어진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믿음 안에서 성장한다. 율법과 은혜는 구약과 신약 전체에 나타난다. 


율법주의(legalism)는 율법 폐기론과 반대되는 이단이다. 율법주의는 율법을 은혜보다 우위에 둔다. 율법주의는 율법의 정신의 배제된 채 율법의 형식에만 매달리는 것으로 나타난다. 율법주의는 사소한 것을 중요한 것으로 만들고 중요한 것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종교개혁은 율법이 아닌 은혜에 기초를 둔 것이다. 그러나 종교개혁가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 율법의 첫 번째 기능은 거울의 용도다.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데리고 가는 엄한 몽학선생의 역할을 한다. 율법의 두 번째 기능은 악을 제지하는 역할이다. 율법은 마지막 심판이 실현될 때까지 제한된 범위에서 이 세상의 정의를 허용한다. 율법의 세 번째 기능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는 율법에 순종함으로서 칭의를 얻는 것이 아니라 율법에 순종하기 위해 칭의를 얻었다. 


완전주의(perfectionism)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거룩함이나 완전한 사랑을 모든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으며 그것이 신자들을 고의적인 죄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교리다. 그러나 여기에서 두 가지 오류가 있다. 첫째로 이것은 율법의 준엄한 요구를 축소시킨다. 하나님 율법의 넓이와 깊이를 진정으로 이해한다면 완전주의자의 견해를 가질 수 없다. 둘째로 완전주의는 사람이 자신의 영적 성취를 과장해서 생각하는 것이다. 개신교에서는 이러한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들을 의롭다 여기신다. 그리스도의 공로를 떠나 신자들 자체만 보았을 때는 그대로 죄인이다. 성화를 통해 신자들이 죄인의 모습을 점점 벗어가지만 성화는 신자가 영화를 입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끝나지 않는 과정이다. 우리는 여전히 죄인이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 하신다. 


교회가 얼굴을 붉히지 않고 정치적일 수 있는 이유가 있다. 바로 예수님이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시기 때문이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에게 어디서든 시민으로서 복종을 보여주는 모범이 되라고 권한다. 우리는 우리를 다스리는 권세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이 정한 규율에 복종하고 순종함으로써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린다. 통치자들이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을 하라고 하지 않는 한, 그리고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을 못 하게 하지 않는 한 통치자들에게 복종해야 한다. 교회와 정부는 모두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서로 다른 기관으로서 각각의 임무에 대한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져야 한다.


혼인관계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육체적, 정서적, 지적, 영적으로 연합하여 한 몸이 되는 것이다. 혼인은 평생 지속되도록 의도된 것이며 성스러운 맹세와 언약으로 보장되고 육체적인 결합으로 완성된다. 부부간의 정절과 서로를 소중히 여기는 것, 그리고 서로를 뒷받침해주는 것은 결혼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혼인은 말씀 속에서 그리스도와의 결합 관계를 상징적으로 묘사하는 데 사용된다.


예수님께서는 혼인이 평생 지속되도록 고안된 것임을 강조하셨다. 그는 한 몸이 된 남편과 아내의 결합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고 하셨다. 모세는 이혼의 근거들을 ‘명령’한 것이 아니라 ‘허용한 것이었다. 예수님은 이러한 허용이 오직 죄(마음의 곧어짐) 때문에 일어난 것이며 이것이 혼인의 본래 의도를 무효화시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상기시키셨다. 그 후 바울은 믿지 않는 자에게 버림받은 믿는 자의 경우, 이혼을 할 수 있다고 허용의 범위를 확장했다(고전 7:10-15). 성경은 ‘무과실’ 이혼을 허용하지 않는다.



10부/ 마지막 때

‘적(anti-)‘이라는 접두사는 ‘-에 반하는’, 혹은 ‘-를 대신하는’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적그리스도는 그리스도를 대적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정당한 자리를 침해하려는 존재다.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참그리스도라고 속이는 거짓 그리스도다. 요한은 “많은 적그리스도”(요일 2:18)와 “이미 이 세상에 있는 적그리스도의 영”(요일 4:3)에 대하여 말한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적그리스도의 특별한 출현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 “불법의 사람”은 사탄의 역사를 따라 일할 것이며 “하나님의 성전”에서 자기의 능력을 나타낼 것이다(살후 2:1-12). 적그리스도는 그리스도께 패할 것이다. 


재림은 성도의 부활과 마지막 심판과 세상의 종말을 수반하게 된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날과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그리스도는 승천하실 때처럼 영광의 구름 속에서 재림하실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가 오실 날을 깨어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그분의 재림의 날과 시간을 독단적으로 예측하는 어리석음은 피해야 한다. 


신약은 예수님이 오시고 보좌에 오르심으로써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음을 선언한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존재하지만 예수님의 영광을 재림 때에 완전히 완성될 것이다.


천국에 없는 것들은 다음과 같다. 1) 눈물, 2) 슬픔, 3) 죽음, 4) 고통, 5) 흑암, 6) 불경건한 자들, 7) 죄, 8) 성전, 9) 해와 달, 그리고 아담의 죄로 인한 저주(창 3:14-19 참조). 반면 천국에 있는 것들은 다음과 같다 1) 성도들, 2) 생명수가 흐르는 강, 3) 생명나무, 4) 하나님의 어린양, 5) 예배, 6) 어린양과 신부의 결혼 잔치, 7) 드러난 하나님의 얼굴, 8) 의의 태양. 또한 천국에서 누리게 될 행복에는 등급이 있다. 바울은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여 같은 하늘에서 빛나는 별들 사이에도 밝기의 차이가 있다는 점을 비유로 들었다.


천국에 관해서는 우리 앞에 많은 신비가 놓여 있지만 요한은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요일 3:2)라는 말씀으로 우리가 이것을 확신할 수 있음을 약속해준다. 이 약속은 하나님께서 신현(불타는 떨기나무처럼 하나님의 영광이 외적으로 현현되는 것)과 같은 방법을 넘어 천국에서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실 것을 확실하게 말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온전한 형상을 보이셨다. 그를 보는 것은 아버지를 보는 것이다. 미래에 보게 될 하나님의 모습은 우리의 영혼을 행복으로 충만케 하기 때문에 “지극히 복되다”(지복)고 불린다.


인간의 경험 중 지옥에 견줄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여기에서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고통 중에 가장 지독한 것을 상상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상상은 지옥의 무시무시한 실제에 미치지 못한다. 지옥이 갖는 가장 무서운 면은 아마도 영원성일 것이다. 사람들은 아무리 큰 고통이라도 그것이 결국에는 끝날 것을 기대하며 참아낸다. 그러나 지옥에서는 그런 희망이 없다. 성경은 지옥의 형벌이 영원하다고 분명하게 가르친다. 지옥은 영원하다. 거기서는 회개할 수도, 소멸될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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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최고들은 왜 심플하게 일하는가 : 언제나 기대 이상의 성과를 내는 사람들의 습관 - 언제나 기대 이상의 성과를 내는 사람들의 습관
마거릿 그린버그.세니아 메이민 지음, 박선령 옮김 / 토네이도 / 2015년 5월
평점 :
판매중지


책의 마지막 부분에 책의 핵심적인 내용이 모두 요약되어 있어, 마치 책을 두 번 읽는 느낌을 받았다. 책의 전반에 걸쳐 ‘심플‘이라는 제목과 다른 내용을 전개한 것 같아 아쉬웠다(제목에서 던졌던 질문에 대답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 건지…?).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효과적인 방법‘ 정도가 더 적당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리더가 가져야 할 휴식, 집중하여 한 가지에 몰두하기, 완벽하려 하지 않기, 부정적 감정을 팀원에게 전염시키지 않기, 강점에 집중하기, 칭찬을 자주 할 것 등 중요한 교훈을 준다.

별점: ★★☆☆☆




생산성이 떨어지는 이유: 단순한 시간 관리를 뛰어넘자

사람들의 생산성을 앗아가는 세 가지 공통점을 발견했다. 바로 과로와 멀티태스킹 그리고 일을 미루는 습관이었다.

프레젠테이션 초안을 작성하고 있는데 이메일 수신을 알리는 팝업창이 뜬다고 상상해보자. 이메일에 답신을 보낸 뒤 다시 프레젠테이션 작업을 재개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문자메시지가 와서 답을 해야 한다. 연구에 따르면 이런 상황에서 집중력을 회복해 작업을 끝내는 데는 한 가지 일에 계속 몰두했을 때에 비해 시간이 오래 걸린다. 이게 바로 주의력 전환 비용이다. 최고의 아이디어는 여러 일 사이를 왔다 갔다 하지 않고 한 가지에만 집중했을 때 찾아오는 일이 많다.

완벽주의는 생산성의 적이다. 일을 미루는 습관이 있는 사람은 완벽주의자일 수 있다. 생산적인 리더가 되려면 자신의 일을 효율적으로 완수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고 적당한 시간에 사무실 문을 나설 수 있도록 일을 처리하는 법도 배워야 한다. 이것이 바로 심플하게 일하는 기술이다.

일에 뛰어들기 전에 간단한 계획이라도 세우는 것이 실제로 생산성 향상에 도움이 된다. 언제 어디에서 일할지를 미리 정해놓을 경우 그 일을 완수할 가능성이 그렇지 않을 때보다 두 배나 높아진다. 예를 들어 “조, 그 보고서를 오전 10시 회의가 끝난 뒤에 회의실로 가져다주겠어요?”라고 요청하면 “조, 그 보고서를 내일 줄 수 있겠어요?”라고 평범하게 요청할 때보다 보고서를 받을 가능성이 커진다.

프로젝트를 반쯤 완료한 채 책상에 올려놓으면 다음 날 아침 책상 앞에 앉았을 때 바로 시작할 수 있는 일이 눈앞에 놓여 있게 된다. 이것이 자이가르닉 효과다. 일을 하다가 중간에 그만두는 것이다. 글 한 단락을 다 쓰기 전에 개요를 서술하고, 완제품을 만들기 전에 시제품을 선보이자.

성공 그리고 생산성과 관련해서는 긍정적인 습관과 일상적인 틀을 만드는 것이 목표를 세우는 것만큼이나 도움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있다. 습관은 뇌 구조를 바꿔놓는다. 이 주제에 관한 유명한 연구자 가운데 한 명인 MIT의 앤 그레이비엘에 따르면 오래된 습관을 완전히 버리기는 불가능하다. 습관은 뇌 안에 깊숙이 새겨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전 습관 위에 새로운 습관을 형성하는 것은 가능하다. 보험 청구 처리 부서의 콜센터 책임자인 데보라는 이메일 때문에 업무에 지장을 받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이메일이 왔다는 알림창이 뜰 때마다 확인하지 않고 하루 네 번(오전 8시, 오전 11시, 오후 2시, 오후 6시), 따로 10분씩 시간을 내서 이메일을 확인하는 습관을 들였다. 주의력을 전환하는 데 따르는 숨은 비용을 기억하자.

습관이란 곧 뇌의 자동화된 부분에 할 일 몇 가지를 아웃소싱하는 것이라고 생각해보자. 많은 기업이 반복되는 업무 공정 일부를 인도나 중국에 아웃소싱하는 것처럼 당신의 업무 일부도 그렇게 할 수 있다. 모든 것을 습관에 아웃소싱해야 할까? 아니다. 다른 일에 비해 규칙적이고 복잡하지 않으며 반복적인 일들만 아웃소싱해야 한다.

벳시는 뛰어난 성과를 올리기로 유명하다. 아침에 출근할 때부터 저녁에 퇴근할 때까지 종일 급한 불을 끄는 일에 열중한다. 경력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는가? 그렇지 않다. 이렇게 남들보다 일을 많이 하면 피로가 극심해지고 친구나 가족과의 관계가 점점 소원해지는 한편 경력에도 해가 될 수 있다. 왜일까? 남을 이끄는 리더가 아니라 자기 일만 하는 실무가로 비춰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게 뭐가 나쁘냐고? 늘 급한 불을 끄는 데만 매달린다면 상사는 당신이 전략적으로 사고할 수 있으며 애초에 불이 나지 않게 막는 아이디어나 계획을 마련할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없다. 《스마트폰 끼고 살기(Sleeping with Your Smartphone)》라는 책을 쓴 레슬리 펄로 하버드 대학교 경영대학원 교수는 4년간의 연구 끝에 업무 시간을 늘리는 것보다 휴식 시간을 미리 정해놓고 일하는 것이 개인과 조직의 생산성을 실질적으로 높인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소니는 모든 직급의 직원들에게 하루 중 특정 시간 동안 이메일 확인을 중단하고 중요한 프로젝트나 업무에 집중하며, 매일 오후 중반에 산책을 하거나 업무 시간에 회사 체육관에서 운동을 하는 등 구체적인 습관이나 의식을 만들어 활력을 되찾는 방법을 가르쳤다. 훈련에 참여한 직원의 88퍼센트가 이 방법을 통해 생산성과 집중력이 높아졌다고 느꼈고, 84퍼센트는 업무에 따르는 부담을 잘 관리할 수 있게 되었다고 여겼다. “사람이 가진 가장 중요한 자산은 그 사람의 시간입니다.” 2012년에 골드만삭스가 선정한 100대 기업가 중 한 명으로 꼽힌 데이비슨의 말이다. “어떤 사람이 자기 시간을 제대로 관리하리라 믿지 못한다면 다른 일에서도 그를 신뢰할 수 없을 겁니다. 심신이 지치고 낡은 패턴에 얽매여 있는 상태에서는 새롭고 혁신적인 방법으로 사고하기가 힘들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우리의 생산성이 새어나가는 구멍 가운데 두 개는 일을 미루거나 여러 일을 동시에 처리하려고 하는 태도다. 또 다른 구멍은 외부에서 주도하는 경우가 많은데, 바로 과로다. 예전에는 일을 많이 하려면 사무실에 남아 있어야만 했지만 오늘날에는 기술 발전 덕분에 언제 어디에서나 업무를 처리할 수 있다. 우리는 주변에서 점점 일에 중독되어 그 이외의 생활은 전부 일을 방해하는 존재로 여기는 이들을 종종 본다.

적게 일하고 많이 이루자. 휴식 시간을 미리 정해두면 실제로 생산성이 더 높아진다는 것이 생산성의 역설이다. 책상에 묶인 죄수가 되지 말자. 자리에서 일어나 주기적으로 휴식을 취하자. 뇌에 까다로운 문제를 처리할 수 있는 시간을 줘야 명확한 해결책이 떠오른다.

더 오래, 열심히 일한다고 해서 생산성이 높아지지는 않는다.



어려운 일일수록 쉽게 극복하는 기술: 일은 더 즐거울 수 있다

단순히 생산적인 리더가 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따르게 하려면 생산성을 넘어 어려움을 극복하는 리더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직장을 잃거나 경제 사정이 나쁠 때 수입과 지출의 균형을 맞추려고 애쓰는 등 외부적인 사건 때문에 스트레스가 생긴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때때로 스트레스는 외부 사건 자체가 아니라 사건에 대한 우리의 반응에서 온다. 이 사실의 장점은 스트레스가 심한 사건에 보다 건전한 방식으로 반응하도록 자신을 훈련할 수 있다는 것이다. 회복력이 가장 필요한 때는 우리가 스트레스나 두려움, 무능함을 느낄 때다. 가장 비참한 처지에 있을 때 수렁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주는 도구와 기술이 필요하다. 때로는 자신에게 심리적인 자극을 줄 필요도 있다.

˝기꺼이 실패를 감수하고 당장 제대로 인정받지 못해도 괜찮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성공적인 발명을 위해서는 많은 실험이 필요하니까요.” 전문가가 되려고 노력하는 대신 적극적인 학습자가 된다면 어려운 상황에도 잘 대처할 수 있다. 어려움을 극복하는 능력이 커질수록 우리는 더 많은 혁신을 이룰 수 있다.

누구나 때때로 실패를 경험한다. 그것이 인생이다. 하지만 실망감과 부정적인 사건들을 얼마나 신속하게 극복하느냐에 우리의 성공과 행복, 성취감이 달려 있다. 회복 속도는 평범한 리더와 훌륭한 리더를 판가름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정말 중요한 건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생각하느냐다.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직원이 아닌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라

해를 끼치고 불쾌한 상사를 지나치게 오래 참고 견딜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기술적인 역량과 단기적인 결과를 과대평가하고, 부정적인 영향을 과소평가하며, 불만을 털어놓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해로운 상사의 상관은 물론이고 때로는 인사과에서조차 그런 상사가 직원들에게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깨닫지 못하거나 일부러 무시하며 과소평가한다. 기분은 전염된다. 이는 업무 성과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네 명에서 아홉 명 정도의 인원으로 구성된 팀을 이끄는 영업 책임자 쉰세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리더들이 긍정적인 기분을 느낄수록 판매량이 늘었다. 안타깝게도 상사가 불쾌한 기분일 때는 그 반대의 결과가 나왔다. 전망 이론은 이익을 얻었을 때의 기쁨보다 손해를 봤을 때의 고통이 더 크다는 흥미로운 행동 경제학 개념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좋은 소식이 있을 때는 하루 또는 한 주에 걸쳐 퍼뜨려도 되지만 나쁜 소식의 경우에는 듣는 사람이 덜 괴롭도록 한꺼번에 모아서 전해야 한다. 이익은 분산시키고 손실은 모으는 것이다.

울적한 기분이 든다면 자기 기분에 꼬리표를 붙인 뒤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살펴보자. 자기가 느끼는 기분에 이름을 붙이는 행위 자체만으로도 부정적인 감정을 최소화할 수 있다. 부정적인 기분을 떨쳐내는 또 하나의 방법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부정적인 정신 상태에 빠졌을 때 할 수 있는 가장 나쁜 일은 책상 앞에 가만히 앉아 있거나 사무실로 들어서는 사람에게 화풀이를 하는 것이다.

“직접 하거나, 위임하거나, 연기하거나, 중단하라”라는 비즈니스계의 슬로건을 들어봤을 것이다. 당신의 해야 할 일 목록에 있는 모든 일은 이 네 가지 범주 중 하나로 분류할 수 있다. 불행히도 많은 관리자가 가장 어려워하는 부분이 바로 위임이다. 위임이 본인의 업무량을 관리하고 다른 사람의 능력을 키우는 데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다른 사람에게 맡길 만한 일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그냥 직원들에게 물어보자. 남에게 위임할 수 있는 작업이나 프로젝트가 얼마나 많은지 알면 놀랄 것이다.

세세한 부분까지 간섭하면 더 많은 일을 완수할 수 있으리라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이런 행동은 역효과만 낳는다. 직원들은 자기 일에 어느 정도 통제감을 느낄 때 최고의 성과를 발휘한다. 직원들에게 필요한 교육과 코칭을 제공한 뒤 직접 업무 수행 방식을 정할 수 있도록 그들의 앞길에서 물러나줘야 한다.

에취 효과를 인식하라. 자신의 기분이 전염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오랫동안 나쁜 기분에 젖어 있으면 당신 자신의 생산성뿐만 아니라 직원들의 생산성에까지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 모든 걸 자기 뜻대로 해서는 안 된다. 이런 성향이 있다면 자신이나 다른 팀원들의 업무 성과에 해를 미치기 쉽다. 다른 직원들에게 일을 위임한 다음 그들이 자기 방식대로 일할 수 있도록 한발 물러서자.




무엇을 먼저 볼 것인가: 강점은 해결의 지름길이다

리더들도 잘못된 부분만 조사하고 고치려고 하는 경우가 많다. 그에 반해 강점 중심의 리더들은 잘 되어가는 일에 좀 더 관심을 가지고 우수한 사례를 다른 분야에 반복해서 적용한다. 강점 중심의 리더들은 사람들이 잘 못하는 일(그들의 약점)보다는 잘하는 일(그들의 강점) 쪽에 더 관심을 집중한다. 강점 중심의 리더가 되는 것은 상당히 쉬워 보이지만 실제로 이런 리더가 되기까지는 네 가지 장애물이 존재한다. 다른 사람을 관리하기를 싫어하고, 문제 해결에 집중하며, 직원들을 문젯거리처럼 대하고, 뇌가 부정적인 방향으로 고착되어 있다는 점이다. 대부분 사람은 잘못된 부분을 조사하는 일에 상당히 능숙하다. 우리는 문제를 분석하고 근본 원인을 파악하고 가능한 해결책을 논의한 뒤 그 가운데 최선의 방법을 실행에 옮기도록 훈련받았다. 우리는 잘 된 일을 조사하고 이용할 때에는 잘못된 일을 분석할 때만큼 철저하고 엄격하게 임하지 않는다. 문제와 주의사항을 살필 때보다는 우수한 결과를 평가할 때 변화가 발생할 가능성이 더 높다. 직원들이 문젯거리를 안고 당신을 찾아왔을 때 어떤 식으로 대응하느냐가 정말 중요하다. 버럭 화만 낸다면 골치 아픈 문제에서 빠져나오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항상 나쁜 소식을 너무 늦게 접해 조치도 취해볼 수 없어서 좌절하는가? 그렇다면 직원들이 당신에게 문제를 들고 찾아가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일 수 있다. 화를 내기보다 직원들이 다른 관점으로 상황을 바라보면서 해결책을 찾도록 도와주자. 문제를 처리하려고 애쓰는 직원들에게 또 다른 문제를 지워줘서는 안 된다.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그래도 오늘 하려던 일을 하고 싶은가?’ 잡스는 자신이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기 한참 전부터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여러 날 계속해서 ‘아니’라는 답이 나오면 변화가 필요한 때라는 걸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알맞은 인재를 채용하는 방법: 적합성 판단하기

채용 담당자 대부분은 직무 기술서에 적힌 기술적 능력과 경력, 학력을 지닌 사람을 찾기만 하면 만족스러운 인재를 채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섣부른 단정이다. 고용주들이 입사 지원자에게 원하는 중요한 자질 가운데 하나는 다른 직원들과 잘 어우러져서 일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력서만 봐서는 대인관계 능력을 제대로 평가할 수 없다. 우리는 입사 지원자들을 면접할 때 3분의 1에 해당하는 기술적 역량에 지나치게 집중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래서는 안 된다. 지원자의 협업 능력, 스트레스 관리, 주도적인 태도처럼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다른 속성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자기 일을 단지 직업으로 생각하는 사람을 채용한다면 주어진 일은 잘 해낼 것이다. 그러나 당신의 회사가 경쟁사들과 진정으로 차별화되려면 일을 경력이나 소명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을 많이 끌어모아야 한다.

과정에 대한 칭찬은 “다른 할 일도 많은데 이 보고서를 분석하는 데 시간과 노력을 들여줘서 정말 고맙습니다”와 같은 말로 어떤 결과를 얻기 위해 사용한 노력이나 전략을 살피고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런 칭찬은 직원들의 자신감과 회복 탄력성을 높여 향후 힘든 일에 부딪혔을 때도 잘 극복해내게 한다.

요점은? 일이 잘못되었을 때 야단만 칠 것이 아니라 평소에 칭찬을 많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에버파이 톰 데이비슨의 말에 따르면 “야단은 앞에서, 칭찬은 뒤에서”라는 철학이다. “팀원이 기대했던 성과를 올리지 못하면 우리는 매우 솔직한 대화를 나눕니다. 그 사람 면전에서 비판적인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가슴에 비수를 꽂는다고 표현하기도 하죠. 이에 반해 그가 등을 돌리고 있을 때는 칭찬을 많이 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믿습니다. 팀원들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기는 어렵지 않기에 대부분 회사가 전체 회의에서 칭찬을 하는데, 우리 회사는 직원들 등 뒤에서 응원하는 치어리더를 자청합니다.”




어떻게 성과를 검토할 것인가: 현재에 머물 것인가 미래로 나아갈 것인가

성과 검토의 주된 목적은 성과를 평가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 성과 검토는 다음 해에 대비해 팀 전체의 열정을 북돋워줄 좋은 기회다. 평가하려고 들기 전에 팀원들에게 힘을 불어넣어 줄 방법을 생각하자. 혁신적인 기업들 가운데는 이미 성과 검토를 폐지한 곳이 많다. 스탠퍼드 대학 경영학 교수 로버트 서튼은 성과 검토가 “대부분 엉망진창”이라고 평하며 “직원들과 자주 대화를 나누고 그들이 자신의 현재 위치를 잘 안다면 굳이 따로 시간을 내어 성과를 평가할 필요가 없다˝라고 지적한다. 성과 검토는 명칭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전통적으로 직원들이 지금까지 이룬 일을 되돌아보는 시간이다. 하지만 성과 검토를 이용해서 앞으로의 성과를 미리 내다보고 성공적인 한 해를 맞이하기 위한 조건을 마련한다고 상상해보자. 프로 운동선수들은 예전부터 이런 심리적인 준비 또는 연습 기술을 이용해왔다.

긍정적인 분위기에서 회의를 시작하면 참석자들에게서 최고의 아이디어를 이끌어내는 데 도움이 된다. 프레드릭슨은 사람들이 잘한 일을 인정받거나 성취한 업적을 이야기하는 등의 긍정적인 정서 경험을 통해 꾸준히 심리적 자본을 축적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기분이 좋을 때는 좀 더 열린 마음으로 가능성을 받아들이거나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고, 상황이 힘들어졌을 때 의지할 수 있는 내부 에너지원이 가득 차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또 다른 학자 마셜 로사다는 업무 성과가 좋은 팀과 좋지 않은 팀은 부정적인 의견 대 긍정적인 의견의 비율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밝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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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언제 할 것인가
다니엘 핑크 지음, 이경남 옮김 / 알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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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해야 하는가… 타이밍을 생각하여 같은 일을 해도 시너지를 낼 수 있는 방안들이 소개되어 있다. 그런데, 이 책일 읽다 보니 예전에 어머니가 한 말이 기억났다. 이발소는 너무 늦게 가지 말 것. 이유는 시간이 늦을수록 이발사의 피로도가 높아지므로 예쁜 머리가 될 수 없다는 말이었다. 이 책은 병원 진료 시간, 시험 시간, 낮잠, 운동, 커피를 마시는 시간, 합창, U자 곡선, 고객 응대 등 다양한 내용들을 타이밍과 연관 지어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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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밍이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문제는 우리가 타이밍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점이다. 우리의 삶은 ‘언제when’라는 결정의 끊임없는 연속이다. 언제 직장을 바꿀지, 언제 안 좋은 소식을 전할지, 언제 수업 일정을 정할지, 언제 결혼생활을 청산할지, 언제 마라톤을 할지, 언제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할지 등등…. 그러나 이런 결정들은 직관과 억측들로 난무하기 십상이다.




생체시계의 비밀: 최적의 시간을 찾아서

몇 해 전 코넬대학교의 사회학자 마이클 메이시와 스코트 골더는 2년 동안 84개국에서 240만 명의 유저들이 올린 5억 만 개가 넘는 트윗을 연구했다. 그들은 이 자료를 통해 트위터를 하는 사람들의 정서를 분석했다. 긍정적 기분은 오전에 올라갔다가 오후에 떨어지고 저녁에 다시 올라간다. 어느 대륙이든 어느 표준 시간대이든 하루의 진폭, 즉 ‘최고점-최저점-반등’의 주기는 늘 같아서 바다의 조수처럼 예측이 가능하다. 사람들의 기분은 오전 중에 점점 좋아지다. 오후에는 안 좋아지며 저녁에 다시 좋아진다.

생체시계는 모든 살아있는 생물의 하루 일상의 패턴을 정하는 소위 24시간 주기 생체리듬은 생체주기를 관리한다. 시교차 상핵의 타이머로 하루는 지구가 한 바퀴 자전하는 시간보다 조금 더 길어 약 24시간 11분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내장된 시계는 업무 일정이나 버스 시간표 같은 사회적 단서와 일출이나 일몰 같은 환경적 신호 등을 사용하여 내부와 외부의 주기를 조금씩 조정해가며 서로 맞춘다. 이를 ‘동조同調, entrainment’라고 한다.

DRM 연구에 따르면 하루 중 기분이 가장 좋지 않을 때는 통근시간이고 기분이 가장 좋을 때는 사랑을 나눌 때였다. 2006년에 카너먼과 크루거 팀이 DRM을 작성한 것은 사람들이 흔히 놓치기 쉬운 감정의 질, 즉 하루 동안 감정의 기복을 측정하기 위해서였다. 사람의 감정을 포착한다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어떤 방법론이나 연구도 결정적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게다가 이 DRM은 여성만을 대상으로 작성했다는 단점이 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감정은 오전 중에 점점 좋아지다 오후에 차차 희미해지고 저녁에 다시 좋아진다. 사람들의 즐거운 감정은 오전 중에 갈수록 높아지다 오후에는 시들해지고 다시 저녁때 높아진다. 정서적 균형은 오전에 올라가고 오후에 내려갔다가 저녁에 다시 올라간다. 역시 최고점-최저점-반등의 주기다.

미국의 경영대학원 교수 세 사람이 이 문제를 밝혀보기로 했다. 첫 단계로 그들은 트위터 연구에서 사용했던 것과 비슷한 언어 알고리즘을 가지고 6년 반 동안 2,100개 이상의 상장회사에서 시행한 2만 6,000건이 넘는 전화회의를 분석했다. 그들은 하루 중 특정 시간대가 이런 중요한 대화를 진행하는 동안 정서 상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그 결과에 따라 회사의 주가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연구했다. 회의가 다른 어떤 아침 일정보다 앞서 첫 번째로 열리면 매우 활기차고 긍정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그러나 회의를 여는 시간이 늦어질수록 말투들이 부정적으로 변하고 결의도 부족해졌다. 점심시간 앞뒤로는 기분이 다시 조금 좋아졌다. 오후 회의에서는 아침 회의에 비해 부정적이고 짜증이 섞인 시비조의 말이 많이 나왔다. 특히 투자자들이 눈여겨봐야 할 것은 회의를 여는 시간과 그로 인한 기분이 회사의 주가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다.

하버드대학교 비즈니스 스쿨 교수인 프란체스카 지노는 덴마크 전문가 두 명과 함께 덴마크 학생 200만 명을 대상으로 4년 동안 그들의 시험 결과와 시험시간을 대조해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조금 산만하기는 해도 흥미로운 상관관계를 찾아냈다. 오전에 시험을 본 아이들의 성적이 오후에 본 아이들 성적보다 더 높았던 것이다. 시험 시간이 늦을수록 성적은 조금씩 떨어졌다. 시간대가 전부는 아니지만 그래도 상당한 문제임에는 틀림이 없다.

시카고대학교의 경제학 교수 놀란 폽은 로스앤젤레스의 200만 명 가까운 학생들을 대상으로 그들의 표준화검사 결과와 학교 성적을 조사했다. 수업 시작 시간과 관계없이 수학 시험이 마지막 2교시가 아닌 아침 2교시 중 한 곳에 배정되었을 때 캘리포니아 주 통합 시험은 물론이고 교내 수학 평균 평점도 올라갔다. 이유를 정확히 짚어낼 수는 없지만 이른 시간에 시험을 본 학생들은 성적이 좀 더 좋았다. 수학에서는 이런 경향이 특히 두드러졌다.

이런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중요한 일을 점심시간 이전으로 죄다 몰아넣기 전에 한 가지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다. 사람들의 두뇌작용 방식이 전부 같지는 않다는 사실이다. 컨디션이 좋지 않을 시간에 통찰력이 필요한 문제를 푼 사람들은 컨디션이 좋은 시간에 푼 사람들보다 답을 잘 맞혔다. 머릿속에서 뭔가 번쩍하는 순간은 초병들이 없을 때 더 잘 다가온다. 긴장이 해이해지고 방심한 순간에는 여과 장치가 촘촘히 작동해서 놓쳤던 연결 회로를 찾아내는 기능이 활성화된다. 혁신과 창의력은 컨디션이 최적의 상태가 아닐 때 가장 커지고 24시간 주기 생체리듬과 관련될 때 가장 작아지기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이런 현상을 ‘영감의 역설inspiration paradox’이라 부른다.

하루는 누구에게나 24시간이지만 모두가 그 시간을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에디슨은 늦은 크로노타입이었다. 이런 부류들은 해가 중천에 뜬 뒤에야 잠자리에서 일어난다. 이들은 아침을 싫어하고 늦은 오후나 초저녁이 되어서야 두뇌가 제 기량을 발휘한다. 이른 크로노타입도 있다. 이들은 잠자리에서 벌떡 쉽게 일어나고 낮 시간에 에너지가 넘치지만 저녁이면 빨리 피곤을 느낀다. 세상에는 올빼미 형도 있고 종달새 형도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유형과 과제와 시간 조절이다. 사회학자들은 이것을 ‘싱크로니 효과synchrony effect’라고 한다. 예를 들어 보통 사람들은 밤에 운전하는 것이 더 위험하지만 올빼미들은 이른 시간에 하는 운전이 더 서툴다. 아침에는 그들의 조심성 주기와 각성도의 주기가 일치되지 않기 때문이다.

여러분의 보이지 않는 일상의 패턴은 최고점-최저점-반등인가 아니면 반등-최저점-최고점인가? 그런 다음 싱크로니를 찾아라. 일정을 조절할 수 있다면 맑은 정신으로 집중력이 필요한 중요한 일을 최고점에 배당하고 두 번째로 중요한 일, 즉 탈억제로 혜택을 받는 일은 반등 시간에 넣어라. 어찌 됐든 대수롭지 않은 일을 최고점 시간에 넣는 일은 없어야 한다.

아침에 운동하면 몸무게를 줄일 수 있다 잠자리에서 일어난 순간은 적어도 8시간째 아무것도 먹지 않은 상태여서 혈당이 떨어져 있다. 조깅을 하려면 연소해야 할 혈당이 있어야 하는데, 공복에 우리의 몸은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하기 위해 섬유질에 저장되어 있는 지방을 사용하게 된다. 수영이나 조깅 같은 심장 강화 운동을 하거나 심지어 개를 산책시켜도 기분이 올라간다. 아침에 운동을 하면 하루 종일 이런 효과의 혜택을 누릴 수 있다. 늦은 오후나 저녁에 운동을 하면 부상 위험을 줄일 수 있다. 근육이 따뜻하면 탄력이 생겨 부상 위험이 줄어든다. 오후에 운동을 하면 부상 위험을 줄일 수 있을 뿐 아니라 무거운 것을 드는데도 유리하다. 오후에는 폐 기능이 최고조에 달해, 산소와 영양분이 더 많이 공급되기 때문이다.

눈을 뜨자마자 물 한 잔부터 마시면 이른 아침에 공복감을 줄이고 정신을 차리는 데 도움이 된다. 잠자리에서 눈을 뜨는 순간 우리 몸은 코르티솔을 분비하기 시작한다. 코르티솔은 탁한 정신을 빠르게 수습해주는 스트레스 호르몬이다. 그러나 카페인은 코르티솔 분비를 방해한다. 오후에 능률을 높이려면, 코르티솔 수치가 다시 떨어지는 오후 2시와 4시 사이에 커피숍을 찾는 것이 좋다. 아침에 정신이 빨리 들지 않고 몸이 둔하다면 햇볕을 많이 쬐는 것이 좋다. 전구와 달리 태양빛에는 다양한 색깔의 광선이 담겨있다. 파장이 아주 높거나 낮은 광선은 우리 눈에 닿는 순간 뇌에 신호를 보내 수면 호르몬의 분비를 멈추고 각성도를 높이는 호르몬을 분비하도록 명령한다.



타이밍의 과학: 휴식의 놀라운 위력

듀크메디컬센터는 자신들이 행한 9만 건의 수술을 분석하여 그들이 ‘마취 유해 사례’라고 이름 붙인 사고를 조사했다. 사고는 마취사의 실수일 수도 있고 수술팀으로 인한 유해 사례일 수도 있고 그 둘 다일 수도 있었다. 최저점은 특히 불안했다. 유해 사례는 오후 3시와 4시 사이에 훨씬 더 자주 나타났다. 오전 9시에 문제가 발생하는 확률은 약 1퍼센트였던 반면, 오후 4시에는 4.2퍼센트였다. 다시 말해 약을 투여해서 환자를 마취시키는 동안 일이 어긋날 확률은 최저점 시간이 최고점에 비해 4배나 높았다. 24시간 주기 생체리듬이 낮아지는 오후에는 의사들의 각성도가 떨어져 ‘마취 단계에서 필요한 복잡한 임무를 수행하는 데 이상이 생긴다’라고 조사자들은 결론 내렸다.

대장암 사례를 1,000건 넘게 연구한 유명한 보고서에 따르면 검사 시간이 늦을수록 폴립을 찾아낼 가능성은 눈에 띄게 줄어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1시간이 지날수록 폴립을 발견할 확률은 거의 5퍼센트씩 줄어들었다. 우리는 경험이 있는 전문가를 만날 수 있느냐의 여부에 따라 ‘누가 병이 있고 무엇이 문제인지’ 판가름 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결과는 대부분 ‘언제’ 병원 예약을 하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타임아웃을 ‘기민성 브레이크vigilance breaks’라 부른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실수가 없도록 지시사항을 검토하기 위한 짧은 휴지기다. 기민성 브레이크를 적용한다면 오후에 까다로운 일을 해야 할 때도 집중력을 다시 높일 수 있다.

덴마크 학생들의 경우, 시험 보기 전에 20~30분 정도의 놀고먹고 잡담할 휴식 시간을 주자 그들의 성적은 떨어지지 않고 올라갔다. 즉 정오가 지나고부터는 점수가 내려가지만 휴식을 취하고 난 뒤에는 더 큰 폭으로 점수가 올라갔다. 오후에 휴식시간 없이 시험을 치를 경우엔 법정 수업일수를 채우지 못하거나 부모의 소득과 교육 수준이 낮은 경우와 같은 결과가 나온다. 그러나 같은 시험이라도 20~30분 휴식 시간을 준 뒤에 치르면 수업을 3주 더 받거나 경제적으로 더 넉넉하고 교육 수준이 더 높은 부모를 둔 경우와 같은 결과가 나온다.

덴마크 학생들처럼 판사들도 한낮에 주스를 마시거나 법원의 정글짐에 잠깐 매달리는 등 회복성 브레이크를 취하고 난 뒤에는 이른 아침과 같은 비율로 돌아가 죄수들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렸다. 죄수가 휴식시간 전에 판사 앞에 선다면, 몇 년 더 감옥에 있어야 할지 모른다. 누군가를 석방하느냐 아니면 창살 안에 남겨두느냐를 결정하는 중요한 사안은 사법적 결정과 아무런 관계도 없고 정의와도 무관한 요소, 즉 판사가 휴식을 취했는지 또는 언제 취했는지에 따라 크게 영향을 받았다.

잠깐의 휴식은 이런 타성화를 막고 집중력을 유지하여 목표에 다시 전념할 수 있게 해준다. 휴식도 가끔 취하는 것보다 잠깐씩 자주 취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다. 짧은 휴식이 효과적이라는 사실과 잠깐 동안에도 상당한 기력을 회복할 수 있다는 증거는 부인하기 어렵다. 아주 극소량의 휴식조차 도움이 될 수 있다. 다 아는 이야기지만 앉아만 있는 것은 흡연만큼이나 해로운 습성이다. 앉아있으면 최저점의 위험도가 더 높아진다. 따라서 1시간에 단 5분이라도 일어나 걸어야 한다. 1시간마다 5분씩 일어나 걸으면 에너지 수위와 집중력이 높아져 하루 종일 기분이 좋고 오후 늦은 시간의 피로감도 줄일 수 있다.

회복성 브레이크를 연구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는 효과의 위력을 강조한다.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 사람을 마음대로 고를 수 있다면 그 효과는 더욱 커진다. 자연 속에서의 휴식은 원기 회복에 큰 도움이 된다. 나무나 꽃, 강, 냇가가 가까이 있으면 정신적 회복력이 강해진다. 휴식을 취할 때 우리는 종종 머리를 써야 하는 까다로운 활동을 같이 하려 한다. 휴식 시간에도 문자를 확인하거나 동료들과 업무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눈다. 두말할 필요 없이 잘못된 휴식이다. 휴식시간만이라도 전자기기를 잠깐 멀리하면 활력이 생기고 정신적 피로는 줄어든다.

이제는 점심식사에 조금 더 관심을 가져야 할 때다. 점심식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우리의 실적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점심시간은 건강과 복지를 증진시키는 중요한 회복 장치다.” 조사팀은 그렇게 말한다. 특히 정신적, 정서적으로 부담이 큰 업무를 하는 직장인들에게 점심은 더욱 중요하다. 또한 물리적인 면뿐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일과 분리되어야 한다. 점심 도중에도 일을 생각하거나 심지어 사교적인 목적으로 휴대폰을 사용하는 행위는 오히려 피로도만 높일 따름이다.

낮잠은 최저점에 대한 영리한 대응으로 꼭 챙겨야 할 귀중한 휴식이다. 낮잠은 두 가지 중요한 혜택을 준다. 첫째, 인식적 성과를 향상시킨다. 둘째, 정신적 신체적 건강을 증진시킨다. 낮잠을 잠깐 자면 각성도가 예리해지고 근무실적도 올라간다.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 캠퍼스의 연구에 따르면 오후의 낮잠은 두뇌의 학습 능력을 향상시킨다고 한다. 낮잠을 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정보를 간직하는 시간이 더 길다. 낮잠을 자는 사람은 낮잠을 자지 않거나 그 시간에 다른 활동을 하는 사람보다 복잡한 문제를 풀 확률이 두 배 높다. 낮잠은 단기기억력뿐 아니라 얼굴을 보고 이름을 떠올리는 것 같은 연상기억력associative memory도 높여준다. 낮잠이 두뇌에 미치는 전반적인 혜택은 나이가 들수록 더욱 커진다.

낮잠은 심지어 ‘몰입flow’의 강도를 증가시킨다. 몰입은 창의력의 강력한 원천이다. 낮잠을 자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심장병으로 사망하는 확률이 37퍼센트 낮아, 아스피린을 복용하거나 매일 운동하는 것과 같은 정도의 효과를 거두는 것으로 나타났다. 낮잠은 면역체계를 강화시킨다. 결과도 좋고 효율성도 높은 이상적인 낮잠은 훨씬 더 짧은데, 보통 10분에서 20분 사이이다. 낮잠이 20분을 초과하면 우리의 몸과 두뇌는 대가를 치르기 시작한다. ‘수면무력증sleep inertia’으로 알려진 이런 현상은 보통 낮잠에서 깬 후 느끼던 멍하고 무거운 기분이다. 1시간 넘게 낮잠을 잘 경우 인지 기능은 더 떨어져 한참 지나야 잠자기 전의 상태를 회복할 수 있다. 카페인이 혈관에 골고루 퍼지는데 약 25분 정도 걸리기 때문에 낮잠이 끝날 때쯤에는 2차 증폭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주로 커피를 통해 카페인을 섭취하고 난 이후에 10~20분 정도의 낮잠을 즐기는 것은 졸음을 떨치고 실적을 올릴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귀마개나 헤드폰이나 눈가리개를 사용하여 소리나 빛을 차단하는 것도 좋다. 잠자는 시간이 5분도 안 되면 낮잠의 효과를 거둘 수 없다. 그러나 10분에서 20분 정도 낮잠을 자면 각성도와 정신적 기능이 크게 올라가고 졸린 느낌이 많이 사라진다. 대부분의 경우 잠드는데 7분 정도 걸리기 때문에 알람을 25분 뒤로 맞추는 것이 가장 좋다.

책상머리에 이미 물병이 있을 수도 있겠다. 이제 그 물병을 치우고 훨씬 작은 병을 준비한다. 물이 떨어지면 정수기로 걸어가 다시 채운다. 병이 작으니까 자주 채워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하면 3중의 효과가 있다. 수분도 섭취하고 몸을 움직일 수 있고 기운도 회복할 수 있다.



시작과 결말 그리고 그 사이

부족한 잠이 유해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증거가 쏟아지자, 2014년에 미국 소아과학회는 중고등학교에 권고성 지침을 내려 오전 8시 30분 이전에는 수업을 시작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몇 해 뒤 이 학회는 10대들의 학습능력과 복지를 끌어올리는데 ‘학교 수업 시간을 늦추는 것만큼 효과적인 것이 없다’라고 결론 내렸다. 수업 시작 시간이 늦을수록 출석률은 늘고 지각은 줄고 성적은 더 좋아졌다.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사실은 수업 시작 시간이 늦을수록 학생들은 교실뿐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훨씬 더 잘 지낸다는 점이었다. 수업 시작 시간을 늦출 경우 학습 동기가 향상되었고 학생들이 정서적으로 안정되었으며, 우울증이 줄어들고 충동이 순화되었다.

사람들은 시간의 경계를 정하기 위해 그리고 한 시기를 끝내고 새 출발을 하기 위해 그런 날을 하나의 계기로 삼는다. 다이와 밀크맨과 리스는 이런 현상을 ‘새 출발 효과fresh start effect’라고 불렀다.

일부 직원들이 퇴직계좌에 제때 입금하지 않거나 중요한 연수 프로그램에 참석하지 않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런 직원들에게 수시로 입금이나 참석을 종용하기보다는 그들이 생일을 맞았을 때 축하 메시지와 함께 그런 요청을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임금을 올리는 가장 빠른 방법 중 하나는 일자리를 자주 바꾸는 것이다. 그러나 경제 상황이 좋지 않을 때는 직장을 바꾸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경기가 침체 상태일 때 노동시장에 들어온 사람은 자신의 능력에 어울리지 않는 직장에 장기간 묶이고 만다.

잘못된 시작을 만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처음부터 잘못된 시작을 범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소위 ‘사전부검premortem’이다. 실패를 미리 가정하면 즉 잘못된 출발의 원인이 될지도 모르는 문제를 생각해보고 그때 일어날 수 있는 문제를 예상해보면, 실제로 프로젝트가 시작되었을 때 그런 문제를 피해 갈 수 있다. 실패를 미리 가정하면 즉 잘못된 출발의 원인이 될지도 모르는 문제를 생각해보고 그때 일어날 수 있는 문제를 예상해보면, 실제로 프로젝트가 시작되었을 때 그런 문제를 피해 갈 수 있다.

경쟁자가 대단하지 않더라도 그 수가 많을 경우엔 나중에 설수록 유리하고 맨 마지막에 서면 아주 유리하다. 상황이 불확실할 때는 첫 번째로 나서지 않는 것이 유리하다. 결정권자의 기대가 어느 정도인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선발하는 사람이나 선발되는 사람 모두 명확한 기준을 잡기가 어렵다. 하지만 시간이 가면서 기준은 점점 뚜렷해진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너무 어린 나이에 결혼하면 이혼으로 끝날 확률이 높다. 종교나 교육이나 지리적 위치 같은 요소를 감안한다 해도 32세를 넘겨 결혼하면 이혼할 확률이 적어도 다음 10년 동안 매년 5퍼센트씩 증가한다. 공부를 많이 한 상태에서 결혼하면 결혼 생활에 대한 만족도가 높고 이혼율은 낮다. 에머리대학교의 앤드류 프랜시스-탠과 휴고 미알론에 따르면 결혼 전에 적어도 1년 이상 사귄 커플은 좀 더 서둘러 결혼한 사람보다 이혼율이 20퍼센트 낮다고 한다. 3년 이상 사귄 뒤에 주례 앞에 선 커플은 이혼율이 훨씬 더 떨어졌다.



미들 포인트: 반전의 기회를 노릴 수 있는 지점

노벨상 수상자인 경제학자 앵거스 디턴을 비롯한 사회학자 4명은 2010년에 <연령 분포에 따른 미국인의 행복도에 관한 단상>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의 팀은 23만 명의 대상자에게 0부터 10까지의 난간으로 된 사다리에서 자신의 위치가 어디쯤 왔을 것 같냐고 질문했다. 10이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멋진 생활을 누리는 것이고 0은 최악의 상황을 의미했다. 그들은 지금 어디에 위치하고 있을까? 소득과 인구학적 요소를 감안했음에도 결과는 얕은 U자 모양을 그렸다. 20대와 30대는 당연히 행복했고, 40대와 50대 초반에는 느끼는 행복도가 조금 떨어졌지만 55세 이후로는 다시 행복하다고 느꼈고 시간이 갈수록 그 느낌은 더욱 강해졌다. 중년에도 행복도는 삶을 바꿀 만큼 절망적이지 않았다. 그저 살짝 내려앉았을 뿐이었다. 심각한 위기가 아니라 가벼운 슬럼프로 나타나는 이런 행복의 U자 곡선은 매우 견고한 증거를 바탕으로 한 연구 결과다. “U자 모양은 남성이나 여성이 모두 비슷하다. 그리고 대서양 이쪽과 저쪽도 비슷하다.”

슬럼프를 스파크로 바꿀 수 있다는 전망은 3단계로 구성된다. 첫째, 중간지점을 알아야 한다. 못 보고 지나치는 일이 없어야 한다. 둘째, 중간지점을 “안 돼”라고 체념하기보다 “어이쿠” 하며 정신 차리는 계기로 삼아라. 셋째, 중간지점에 이르면 뒤처졌다고 생각하라. 딱 1점만. 그러면 스파크가 번쩍이고 전국 챔피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의욕을 다시 불태우기 위해서는 프로젝트를 통째로 다루지 말고 작은 단계로 쪼개야 한다. 마라톤을 할 때에도 결승점까지의 거리를 염두에 두지 말고 다음 몇 킬로미터까지 가는 데만 집중해야 한다. 어떤 프로젝트를 중간쯤 해냈을 때, 마무리하지 않은 상태에서 끝내보라. 그렇게 하면 매일 해야 할 일에 대한 의욕이 더욱 강해져 다음 단계를 확실하게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하는 일로 혜택을 받게 될 사람을 마음속에 그려보라. 내가 하는 일을 그 사람에게 바친다고 생각하면 더욱 헌신적으로 일을 수행하게 될 것이다.



엔딩 포인트: 마지막엔 감동이 필요하다

마지막 순간에 분발하도록 만드는 데는 마감시한도 큰 역할을 한다. 마지막이 가까워지면, 사람들은 조금 더 분발한다. 하지만 그 효과가 늘 긍정적으로만 나타나는 것만은 아니다. 예를 들어 결승선에 가까워졌을 때, 그것을 통과하는 방법이 많다면 전진 속도가 느려질 수 있다. 특히 창의적인 과제에서는 마감시한이 오히려 꼭 필요한 의욕을 줄이고 창의력을 무력화시킬 때가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이를 먹을수록 과거를 돌아보기보다 현재에 더 집중하는 경향을 보인다. 한정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우리는 현재에 초점을 맞춘다.

보스가 당신 편이고, 아랫사람을 비난하기보다 스스로 책임을 지고, 당신을 격려할 뿐 아니라 당신의 방식을 존중하고, 문제가 생겼을 때 발끈하기보다 유머러스하게 돌려 말하는 편이라면 그 직장은 좋은 직장이다. 그 반대라면 조심하라. 임금을 많이 받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직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직하기 가장 좋은 시기는 입사한지 3~5년 되었을 때다. 대형 인적자원 관리회사인 ADP는 이 기간이 임금을 올릴 수 있는 최적기라고 말한다. 3년 사이에는 대단한 실력을 갖추기가 어렵다. 5년이 넘으면 이미 승진 사다리에 발을 올리기 시작한 뒤여서 새 출발을 하기가 어려워진다.

아무리 정성을 들여 고객에게 서비스를 했어도, 고객이 자리를 뜰 때는 대접이 부족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래서 어떤 식당에서는 계산을 할 때 손님에게 초콜릿을 권한다. 노드스트롬 백화점의 판매담당 직원들은 계산을 치른 상품을 카운터 밖으로 나가 직접 고객의 손에 들려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위의 사례들보다 좀 더 정중하고 독창적인 결말을 생각해보기 바란다. 예를 들어 식당에서 손님이 일정 금액 이상의 식사를 할 경우 자선단체 세 곳의 이름이 적인 카드를 제시하여 손님에게 선택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어떤가? 이익금의 일부를 기부하는 쪽은 식당이지만, 손님의 이름으로 기부한다는 것을 반드시 손님에게 알려야 한다. 아니면 컴퓨터나 가전제품이나 고급 의상 등 액수가 큰 상품을 구입한 고객이 매장을 나설 때, 종업원들이 줄지어 서서 “감사합니다”라는 인사와 함께 박수로 배웅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어떤 책의 저자가 감사의 표시로 독자에게 예기치 못한 선물을 증정하는 것은 또 어떤가?



그룹 타이밍에 싱크로하라

우리의 내부 시계와 외부의 신호가 맞춰져, 일어나야 할 때 일어나고 자야 할 때 자는 과정을 ‘동조entrainment, 同調’라고 부른다. 동조 현상은 조직에서도 나타난다고 앤코나는 주장했다. 제품 개발이나 마케팅 같은 활동은 자기만의 속도를 갖고 있다. 그러나 그런 리듬은 반드시 회계연도, 매출 주기, 심지어 회사의 연혁이나 사람들의 경력 발전 단계 같은 조직 생활의 외적 리듬과 일치되어야 한다. 개인이 외부의 신호에 동조되는 것처럼 조직도 동조된다고 앤코나는 주장했다.

운동의 과학을 공부해보면 누구든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운동을 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 말이다. 합창은 새로운 종류의 운동이다. 여러 사람이 모여 노래하면 여러 면에서 좋다. 합창은 심장박동수를 안정시키고 엔돌핀 수치를 끌어올린다. 합창은 폐 기능을 강화해준다. 합창은 통증을 느끼는 최소수치인 동통역치pain threshold를 높여 진통제를 멀리하게 해준다. 합창은 심지어 과민성대장증후군 증세까지 완화시켜준다. 공연이 아닌 연습만 해도 여러 명이서 함께 노래하면 면역글로블린이 많이 생성되어 전염병에 강해진다. 암환자들도 합창 리허설을 한 직후에는 면역 반응이 개선된다. 이처럼 합창은 생리적 이득도 많지만 심리적 이득은 훨씬 더 많다. 합창을 하면 기분이 좋아지고 긍정적이 된다. 합창은 또한 자존감을 높여주고 우울증 증세나 심리적 압박은 줄여준다. 합창은 목적의식을 높여주고 하는 일에서 의미를 찾게 만들며 공감능력을 높인다. 이런 효과는 노래하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집단으로’ 노래하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디 합창뿐이겠는가? 옥스퍼드대학교의 연구진들은 군무群舞를 ‘서로 일치된 움직임을 음악에 맞추려는 인간의 편재적 활동’이라고 정의하면서, 군무를 추면 동통역치가 올라간다고 말한다. 이를 악물고 근육의 통증과 싸움을 벌여야 하는 노젓기도 마찬가지 효과를 낸다. 옥스퍼드의 조정 팀을 대상으로 실시한 또 다른 연구에 의하면 혼자서 노를 저을 때는 동통역치에 큰 변화가 없지만 팀원들이 함께 노를 저을 때는 동통역치가 크게 올라가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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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내가 사는 게 재미있는 이유 - 30년간 정신과 의사로 일하고 15년간 파킨슨병을 앓으며 비로소 깨달은 인생의 지혜 42
김혜남 지음 / 갤리온 / 201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 환자와 가족이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병이 몸을 괴롭히는 중에도, 행복한 게 사는 것에 집중하는 정신과 전문의인 저자의 생각이 존경스럽다(유튜브에서 인터뷰 영상도 찾아볼 수 있다).
파킨슨병이라는 주어진 환경에서 병을 원망하며 절망 속에 살 것인지, 그 속에서도 행복하기로 결심하고 행복을 찾을 것인지…. 환자가 아닌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입장을 모르는 말이라고 했을 수도 있겠다. 인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남은 시간 동안 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사지 멀쩡한 나를 더욱 반성케 했다. 이 책에서 소개한 실화 기반의 영화 ‘세상에서 가장 빠른 인디언‘도 한 번 시청해보길 바란다.

https://m.blog.naver.com/neobarabbas/2217053978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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