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ing 비커밍 - 미셸 오바마 자서전
미셸 오바마 지음, 김명남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8년 11월
평점 :
품절


미셸 오바마의 성장 과정과 오바마를 만나 퍼스트레이디가 되고 퇴임까지의 인생 이야기가 담겨 있다. 백악관에서의 생활을 엿볼 수 있으며 미셸 오바마의 가식적이지 않은 가치관을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그런데 오바마 정부에서 평등이라는 이름으로 동성 커플 결혼의 합법화를 추진하고 미셀 오바마 또한 인권 운동의 승리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에 대해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별점: ★★★★☆



내가 되다
우리는 부모님이 담뱃불을 붙이면 일부러 콜록거렸고, 종종 담배 심부름에 반항했다. 아주 어렸을 때 한 번은 선반에 놓인 새 뉴포트 담뱃갑을 뜯어서 그 속의 담배들을 줄기콩 분지르듯이 싱크대에서 똑똑 분질렀다. 담배 끄트머리에 일일이 핫소스를 묻혀서 도로 넣어두기도 했다. 우리는 부모님에게 폐암에 대해 설교하면서, 학교 보건 시간에 시청한 영상 속 끔찍한 장면을 중계했다. 흡연자의 폐는 숯처럼 메마르고 새카맸다. 그것은 현재 진행형의 죽음이요, 몸속에 죽음을 품고 사는 셈이었다. 반면 담배 연기에 오염되지 않은 건강한 폐는 발그레한 분홍색이었다. 이토록 명백한 대비가 또 어딨나 싶어서, 우리는 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금연은 좋고, 흡연은 나쁘다. 금연은 건강이고, 흡연은 질병이다. 자신의 미래는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부모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온 바가 바로 그런 것이었는데도, 부모님은 그로부터 한참 뒤에야 담배를 끊었다.


우리가 되다
사우스사이드에서 흑인으로 자란 탓에, 정치를 별로 신뢰하지 않았다. 정치는 전통적으로 흑인을 억압하는 수단이었다. 정치는 내내 흑인을 고립시키고 배제했고, 흑인이 교육과 고용과 고소득을 누리지 못하도록 계속해서 막았다. 나의 두 할아버지는 끔찍한 짐 크로 법과 굴욕적인 주거 차별의 시대를 살았고, 그래서 기본적으로 모든 권위를 불신했다(앞에서 말했듯이 외할아버지는 치과 의사조차 자신을 박해하려 든다고 믿었다). 아버지는 인생의 대부분을 공무원으로 살면서 사실상 반강제로 동원되어 민주당 선거구 관리자로 일했는데, 승진을 꿈이라도 꾸려면 그래야 했다. 아버지는 그 일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좋아했지만 시청의 족벌주의는 늘 못마땅해했다.
시카고로 돌아온 버락은 나를 달래는 해독제가 되어주었다. 그는 내 걱정을 들어주었고, 돈 문제를 들어주었고, 자신도 아이를 갖고 싶다고 말했다. 그도 우리가 둘 다 안락하고 예측 가능한 변호사 생활에 안주할 의향이 없으니 정확히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는 알 수 없다고 인정했지만, 이것저것 다 고려하더라도 우리는 전혀 가난하지 않으며 우리의 미래는 밝다고 말했다. 어쩌면 쉽게 계획할 수 없다는 점 때문에 더 밝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한번 해보라고 말해주는 사람, 걱정을 지우고 행복할 것 같은 방향으로 가라고 말해주는 사람은 버락뿐이었다. 그는 내게 미지의 세계로 도약해도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왜냐하면—그리고 이 주장은 나의 두 할아버지를 비롯하여 거의 모든 친척에게는 충격적인 소리로 들릴 말이었다—사람이 미지의 세계로 뛰어든다고 해서 꼭 죽는다는 법은 없으니까.
걱정마, 우리는 할 수 있어, 어떻게든 해날 거야, 이것이 버락의 생각이었다.

몸소 체험하기 전에는 남들로부터 아무 이야기도 들을 수 없는 일의 목록을 작성한다면, 첫 항목은 유산으로 하겠다. 유산은 외롭고, 괴롭고, 거의 세포 수준에서 상심하게 되는 일이다. 유산을 겪은 여성은 그것을 개인적 실패로 착각하기 쉬운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혹은 비극으로 착각하기 쉬운데, 그 순간에는 물론 비참하겠지만 그 또한 오해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지만, 사실 유산은 늘 벌어지는 일이다. 우리 생각보다 더 많은 여자들이 유산을 겪는다. 다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는 주제일 뿐이다. 나 역시 친구 두어 명에게 유산 사실을 털어놓고서야 알았다. 친구들은 애정과 지지를 보내주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유산 경험을 들려주었다. 그렇다고 내 괴로움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지만, 같은 괴로움을 겪었다는 친구들 이야기 덕에 조금은 더 잘 견딜 수 있었다. 이때 비로소 유산은 생물학적 딸꾹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확히 왜인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타당한 이유에서 수정란을 몸 밖으로 내보내는 편이 좋겠기에 벌어지는 정상적인 일이었다.

처음에 버락은 부부 상담을 내키지 않아 했다. 그는 복잡한 문제를 맞닥뜨리면 직접 고민하고 해결책을 찾아내는 데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에게 낯선 사람 앞에서 사적인 이야기를 털어놓는다는 것은 좀 드라마 같다는 점을 차치하더라도 불편한 일이었다.
상담사는—우드처치 박사라고 부르자—부드러운 말투의 백인 남성으로, 좋은 대학을 나왔고 늘 면바지를 입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가 버락과 내 이야기를 다 들어본 뒤 즉각 내 불만이 모두 타당하다고 인정해줄 거라 예상했다. 내 입장에서야 내 불만은 전부 절대적으로 타당했으니까. 모르면 몰라도 버락도 똑같이 생각했을 것이다. 겪어보니, 상담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우드처치 박사는 누구의 불만도 승인해주지 않았다. 누구의 편도 들지 않았다. 둘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대목에서 어느 쪽이 옳다고 표를 던지거나 하지도 않았다. 대신 공감하며 참을성 있게 들어주었고, 우리가 각자 감정의 미로에서 헤어나도록 도왔으며, 개인의 상처 때문에 자동으로 상대에게 무기를 휘두르지 않도록 타일렀다. 우리가 너무 변호사처럼 따지고 들면 주의를 주었고, 세심한 질문을 던짐으로써 우리가 느끼는 감정의 이유를 생각해보도록 이끌었다. 그렇게 한 시간 두 시간 이야기하다 보니 서서히 매듭이 풀렸다. 상담실을 나설 때마다 버락과 나는 서로에게 좀 더 연결된 기분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어느 날 같은 반 남자아이 하나가 나를 때렸다. 그 아이의 주먹은 혜성처럼, 난데없이, 온 힘으로 내 얼굴에 날아들었다. 우리는 점심을 먹으려고 줄을 서서, 예닐곱 살짜리들에게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문제들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누가 가장 빨리 달리는지, 크레용 색깔의 이름들은 왜 그렇게 이상한지. 그런데 그때, 퍽 하고 주먹이 날아왔다. 이유는 지금도 모른다. 그 아이의 이름도 잊었다. 하지만 아픈 데다가 어안이 벙벙해서, 벌써 붓기 시작한 아랫입술과 뜨거운 눈물이 차오른 눈으로, 멍하니 그 아이를 보았던 것은 기억난다. 나는 너무 놀라서 화도 못 내고, 집으로 달려갔다.

그 아이는 담임선생님에게 야단맞았다. 우리 어머니도 학교로 가서 직접 그 아이를 보았다. 그 아이가 내게 가한 위협이 어느 정도인지를 정확히 가늠하고 싶었던 것이다. 마침 그날 우리 집에 와 있었던 외할아버지는 할아버지답게 발끈하여 자신도 학교에 따라가겠다고 우겼다. 나는 내막을 전해 듣지 못했지만, 어른들끼리 모종의 대화를 나누었고 모종의 처벌이 내려졌다. 그 아이는 부끄러워하는 얼굴로 내게 사과했고, 어른들은 또 그럴 일은 없을 테니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나를 안심시켰다.

“그 아이는 너하고는 아무 상관 없는 다른 일 때문에 겁먹고 화났던 거야.” 나중에 어머니가 부엌에서 저녁을 지으면서 말해주었다. 그러면서 내게는 말해줄 수 없지만 속사정이 다 있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아이는 자기만의 어려운 문제를 겪고 있단다.”

우리는 친구를 괴롭히는 아이에게 그렇게 대처했다. 어릴 때는 오히려 이해하기가 쉬웠다. 친구를 괴롭히는 아이는 사실 자신이 겁나기 때문에 남을 겁주는 것이었다. 우리 동네의 터프한 여자아이 디디가 그런 경우였다. 아내에게까지 무례하고 강압적인 태도를 취했던 우리 친할아버지도 그런 경우였다. 그런 사람이 남을 휘갈기는 것은 자신의 내면을 감당하지 못해서였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피할 수 있으면 피하되, 피할 수 없다면 맞서야 했다. 아마도 묘비에 “인생은 나는 나대로, 너는 너대로 사는 것” 같은 말을 새기고 싶어 할 어머니에 따르면, 그런 상황에서 유념할 점은 상대의 모욕이나 공격을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개인적인 일로 받아들이면, 그때는 정말 상처가 된다.
내가 이 문제를 진지한 숙제로 맞닥뜨린 것은 훨씬 뒷날이었다. 40대 초반이 되어 남편의 대선 선거운동을 돕는 처지가 되어서야, 나는 초등학교 1학년 때 급식 줄에서 얼굴을 맞았던 일을 다시 떠올렸다. 난데없는 공격이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 아무 경고 없이 얼굴을 강타당한 것이 얼마나 아팠는지 기억났다.
나는 2008년의 대부분을 그런 주먹을 신경 쓰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보냈다.


그 이상이 되다
백악관에 텃밭을 일구는 것은 그 문제에 대한 내 대답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더 큰 활동의 시작이 되기를 바랐다. 버락의 행정부는 더 많은 미국인이 감당 가능한 비용으로 의료 서비스를 누릴 수 있도록 하는 정책에 집중했는데, 텃밭은 그것과 연관된 건강한 생활 방식에 관해서도 메시지를 줄 수 있었다. 또한 텃밭은 내가 퍼스트레이디로서 무엇을 성취할 수 있는지를 시험해볼 시운전 격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텃밭은 일종의 야외 교실, 아이들이 먹거리를 기르는 일에 관해서 배울 수 있는 장소였다. 게다가 자연에 관한 일일뿐 정치와는 무관해 보였고, 내가 부삽을 쥔 여성의 모습으로 수행하는 무해하고 순수한 활동으로 여겨졌다. 그러니 우리의 행동이 대중에게 어떻게 비칠까 염려하여 노상 대중의 ‘시선’을 들먹이는 웨스트윙 고문들도 달가워할 것이었다.
물론 그 정도로 끝낼 생각은 아니었다. 나는 텃밭을 통해서 사람들과, 특히 각급 학교 및 부모들과 영양에 관한 대화를 나눠볼 계획이었다. 그 대화가 더 나아가서 오늘날 식품의 생산방식, 성분표 기입 방식, 마케팅 방식을 살펴보고 그 현실이 사람들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논의하는 단계까지 진행되면 좋을 듯했다. 그리고 백악관에서 그런 주제를 언급하는 것은 거대 식품 및 음료 회사들이 수십 년간 추구해온 사업 방식에 암묵적으로 도전하는 셈일 터였다.

2011년 겨울, TV 리얼리티쇼 진행자이자 뉴욕의 부동산 개발업자인 도널드 트럼프가 버락이 재선에 나설 2012년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 예비선거에 도전하겠다는 말을 흘리기 시작했다는 뉴스가 들려왔다. 전반적인 인상으로, 그냥 소음만 빚어내다가 말 것 같았다. 그는 방송에 출연해서 버락의 대외 정책에 대하여 전문적이지도 않은 비판을 늘어놓았고, 버락의 시민권에 공공연히 의문을 제기했다. 지난 대선 기간 중 이른바 ‘벌서birther’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버락의 하와이 출생증명서가 위조된 것이고 그는 사실 케냐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하는 음모론을 퍼뜨렸는데, 트럼프가 그 주장을 되살리려고 발 벗고 나선 것이었다. 그는 방송에 나와서 갈수록 허황된 주장을 펼쳤다. 1961년 호놀룰루 신문에 버락의 출생을 알리는 기사가 실렸다는 이야기는 사기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버락이 다녔다는 유치원의 급우들이 아무도 버락을 기억하지 못하더라는 거짓 주장도 펼쳤다. 조회수와 시청률에 목매는 뉴스 매체들은—특히 보수적인 매체들은—그런 근거 없는 주장을 희희낙락 부채질하기에 바빴다.

물론 그것은 야비하고 정신 나간 소리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 속에 담긴 편견과 외국인 혐오는 누가 봐도 뚜렷했다. 하지만 그래도 위험했다. 그것은 극우파나 정신 나간 사람들을 자극하려는 고의적 발언이었다. 사람들 반응이 두려웠다. 가끔 심각한 위협이 인지될 때면 비밀경호국이 내게도 알려주었는데, 세상에는 정말로 그런 소리에 선동되는 사람이 있다는 데 놀랐다. 걱정하지 않으려 해도 걱정될 때가 있었다. 웬 정신이 불안정한 사람이 총을 갖고 워싱턴으로 들이닥치면 어쩌나? 그 사람이 우리 딸들을 찾아가면 어쩌나? 도널드 트럼프는 무모한 암시가 담긴 시끄러운 발언으로 우리 가족의 안전을 위협했다. 그 점에 대해서 나는 영원히 그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걱정을 접어두고, 여러 보호조치를 믿으면서 그냥 살아가야 했다. 우리를 ‘타자’로 규정하려는 이들은 몇 년 전부터 그렇게 해왔다. 버락과 나는 사람들이 우리가 사는 방식을 본다면 진실을 알아줄 것이라고 믿으면서, 그런 이들의 거짓말과 왜곡을 초월하려고 애써왔다. 일찍이 버락이 대통령 출마를 결심한 때부터, 많은 사람이 진심과 선의로 우리의 안전을 걱정하는 말을 건네왔다. 사람들은 유세장에서 내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 “아무도 당신을 해치지 않도록 늘 기도한답니다.” 모든 인종, 모든 배경, 모든 연령의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다. 이 나라에 선량하고 너그러운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상기할 수 있었다.

“당신과 가족을 위해서 매일 기도한답니다.”

나는 그들의 말을 가슴에 품고 지냈다. 우리의 안전을 기도해주는 수많은 선량한 사람들이 우리를 보호해준다고 느꼈다. 버락과 나는 각자의 신앙심에도 기댔다. 이제 우리가 교회에 나가는 일은 드물었다. 예배하러 걸어 들어가는 우리에게 기자들이 고래고래 질문을 던지는 등 야단법석이 벌어지기 때문이었다. 대선 기간 중 제러마이아 라이트 목사에 대한 사상 검증으로 한바탕 소란을 겪고 정적들이 신앙을 무기 삼아—그들은 버락이 ‘은밀한 무슬림’이라고 주장했다—공격하는 것을 본 후 종교 활동은 집에서 사적으로만 하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매일 저녁 식사 전에 기도를 올렸고, 딸들을 위해 백악관에서 몇 차례 교리 강습을 열기도 했다. 워싱턴의 특정 교회에 적을 두지는 않았다. 우리가 시카고에서 다녔던 트리니티 교회의 신자들이 우리 때문에 겪었던 부당한 공격을 다른 교회의 신자들에게 또 겪게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런 결정에는 희생이 따랐다. 나는 영적 공동체의 온기가 그리웠다. 매일 밤 침대에 누워 고개를 돌리면, 눈을 감은 채 조용히 기도하는 버락이 보였다.

찰스턴에서 장례식이 열린 2015년 6월 26일, 연방대법원이 기념비적인 판결을 내렸다. 미국 50개 주 모두에서 동성 커플이 법적으로 결혼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한 판결이었다. 그것은 수십 년 동안 많은 사람이 여러 주와 여러 법정에서 차례차례 체계적으로 법적 싸움을 벌여온 결과였으며, 모든 인권운동이 그렇듯이 많은 사람의 끈기와 용기가 필요했던 일이었다. 그날 나는 다른 일을 하면서도 간간이 미국인들이 그 소식에 기뻐한다는 뉴스를 접했다. 환희에 찬 군중이 연방대법원 앞 계단에서 “사랑이 이겼다!”라고 외쳤다. 동성 커플들이 전국의 시청과 지방법원에 밀려들어서 이제 헌법이 인정하는 권리를 행사했다. 게이 바들은 일찍부터 문을 열었다. 전국의 길거리에서 무지개색 프라이드 깃발들이 펄럭였다.

이 일은 같은 날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슬픔을 겪었던 버락과 나를 조금은 기운 내게 해주었다. 백악관으로 돌아온 뒤, 우리는 장례식 복장을 벗고 아이들과 얼른 저녁을 먹었다. 그 후 버락은 ESPN을 켜놓고 밀린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 트리티룸으로 사라졌다. 나는 드레스룸으로 가다가, 관저의 북면 창문들 중 하나가 보라색으로 빛나는 걸 보았다. 그제야 우리 직원들이 백악관 전면에 프라이드 깃발의 무지갯빛 조명을 쏘겠다는 계획을 세웠던 일이 기억났다.

어릴 때부터 나는 친구들을 괴롭히는 아이에게 단호히 맞서야 하지만 그러느라고 나까지 그 아이의 수준으로 떨어져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그리고 분명한 사실인즉, 우리는 이제 그런 사람을 상대하고 있었다. 약자를 비하하고 전쟁 포로를 조롱하는 사람, 내뱉는 거의 모든 말이 국가의 품위를 해치는 사람. 나는 미국인들이 말의 중요성을 이해해주기를 바랐다. TV에서 들리는 혐오의 언어가 미국의 진정한 정신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며 우리는 그에 반대하여 투표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주기를 바랐다. 내가 사람들에게 간절히 부탁하고 싶은 것은 품위였다. 품위는 내 가족이 여러 세대 동안 버틸 수 있게 해준 힘이었고, 우리가 나라 전체로도 그 중요한 가치에 의지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품위는 늘 우리를 버티게 해주었다. 그것은 선택이고, 늘 쉽지만은 않은 선택이지만, 내가 살면서 만난 존경하는 사람들은 모두 매일매일 몇 번이고 그런 선택을 내렸다. 그 문제에 관해서 버락과 내가 지키려고 애쓰는 모토가 있었는데, 그 말을 나는 그날 밤 무대에서 들려주었다. 상대가 수준 낮게 굴더라도, 우리는 품위 있게 갑시다.

그로부터 두 달 뒤이고 선거일로부터 불과 몇 주 전, 도널드 트럼프가 2005년에 어느 TV 프로그램 진행자와 무대 뒤에서 대화하던 중 자신이 여성들을 성추행해온 일을 자랑스레 떠벌리는 영상이 공개되었다. 그가 쓴 단어들은 너무 외설적이고 저질이어서, 매체들은 어떻게 하면 그의 말을 인용하면서도 언론의 체면을 유지할 수 있을까 하는 딜레마에 빠졌다. 그러다 결국에는 그냥 기준을 낮춰버렸다. 대통령 후보자의 목소리를 고스란히 실어주기 위해서.

그 발언을 들었을 때, 나는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그 영상에 담긴 위협과 남자들끼리의 농담에는 내게도 고통스러우리만치 익숙한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나는 너를 해치고도 얼마든지 무마할 수 있어. 그런 혐오 표현은 점잖은 공론의 장에서는 대체로 사라진 상태였지만, 문명화되었다고들 하는 우리 사회에도 골수에는 아직 남아 있었다. 도널드 트럼프 같은 자가 그런 표현을 태연하게 내뱉고도 무사할 만큼, 생생하게 살아 있고 널리 받아들여졌다. 내가 아는 모든 여성은 그게 무엇인지 알았다. ‘타자’로 치부되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았다. 우리가 아이들만은 결코 겪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지만, 아이들도 아마 겪을 것이었다. 지배력을 행사하는 것은, 나아가 그러겠다는 암시조차도, 상대를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 태도다. 그것은 가장 추악한 형태의 힘이다.

온몸이 분노로 떨렸다. 다가오는 주에 예정된 힐러리 클린턴을 위한 유세 연설에서는 평이하게 그녀의 능력을 알리는 데 그칠 게 아니라 트럼프의 말에 직접적으로 대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목소리로 그의 목소리에 반격하고 싶었다.

어머니가 허리 수술을 받느라 입원한 월터 리드 육군병원의 병실에 앉아서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궁리해보았다. 여러 생각이 스쳐갔다. 나는 그동안 수많은 조롱과 위협을 받아보았다. 흑인이고 여성이고 목소리를 낸다는 이유로 비하되기도 했다. 그래서 트럼프의 조롱은 내 몸을, 말 그대로 내가 세상에서 차지하고 있는 공간을 직접 겨냥한 것처럼 느껴졌다. 토론회 도중 트럼프는 힐러리 클린턴을 뒤쫒는 사람처럼 곁에서 어슬렁거렸다. 그녀가 말할 때 주변을 맴돌았고, 너무 가까이 다가섰고, 자신의 존재로 그녀의 존재를 축소하려고 했다. 나는 너를 해치고도 얼마든지 무마할 수 있어. 여성들은 평생 그런 모욕을 겪는다. 길거리에서 듣는 성희롱, 더듬는 손길, 성폭력, 억압 행위를 통해서. 그런 일들은 우리를 상처 입힌다. 우리의 힘을 앗아간다. 어떤 상처는 간신히 눈에 보일 만큼 사소하다. 반면 어떤 상처

어느 쪽이든 상처는 누적된다. 여성들은 학교나 직장을 오갈 때도, 집에서 아이들을 기를 때도, 종교 활동을 하러 갈 때도, 한 발 전진하려고 애쓰는 모든 순간에 그런 상처를 품고 다닌다.

내게 트럼프의 발언은 또 한 번의 일격이었다. 그의 메시지가 이기도록 가만 놔둘 수는 없었다. 나는 2008년부터 함께 일해온 유능한 연설문 작성자 세라 허위츠와 함께 내 분노를 말로 바꿔냈고, 곧이어—어머니가 수술에서 회복한 뒤—10월 어느 날 뉴햄프셔주 맨체스터에서 그 말을 청중에게 들려주었다. 한껏 고조된 청중 앞에서 내 감정을 똑똑히 밝혔다. “이것은 정상이 아닙니다. 이것은 정상적인 정치가 아닙니다. 이것은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참아줄 수 없는 일입니다.” 내가 느끼는 분노와 두려움을 전했고, 미국인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두 선택지의 본질을 잘 알고 있음을 이번 선거가 보여줄 거라 믿는다고 말했다. 나는 그 연설에 내 모든 진심을 담았다.
그리고 워싱턴으로 돌아왔다. 내 목소리가 사람들에게 들렸기를 기도하면서.

힐러리 클린턴은 총득표에서 상대보다 300만 표 가까이 더 얻었지만, 총 8만도 안 되는 표 차로 펜실베이니아와 위스콘신과 미시간 주에서 지는 바람에 선거인단 득표에서 트럼프가 앞섰다. 나는 정치적인 인간이 아니므로, 이 결과에 대한 분석을 시도하지는 않겠다. 누구의 책임이고 어떤 점이 부당했는가에 대한 의견을 내지도 않겠다. 그저 그날 더 많은 사람이 투표했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할 뿐이다. 그리고 왜 그토록 많은 사람이, 특히 여성들이 유례없이 자격이 출중한 여성 후보자를 놔두고 여성 혐오자를 대통령으로 선택했을까 하는 의아함을 평생 간직할 것이다. 하지만 이제 결과는 나왔고, 우리는 그것을 감당하고 살아가야 했다.


에필로그
이양이란 곧 새로운 단계로 넘어간다는 뜻이다. 성경에 손이 올라가고, 선서가 복창된다. 한 대통령의 가구가 실려 나오고, 다른 대통령의 가구가 들어간다. 옷장이 비워지고, 새로 채워진다. 그렇게 간단히, 이제 새 베개에 새 머리가 눕는다. 새 성품과 새 꿈이 눕는다. 그리고 임기가 끝나는 마지막 날 백악관을 떠난 사람은 여러 가지로 스스로를 처음부터 새롭게 만들어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나는 이제 인생의 새로운 단계가 시작되는 시점에 섰다. 정말로 오랜만에, 정치인 배우자로서의 의무에서 자유롭고 사람들의 기대에도 얽매이지 않는 상황에 있다. 거의 다 자란 두 딸에게는 내 손길이 예전만큼 필요하지 않다. 남편은 더 이상 국가의 무게를 짊어지고 다니지 않는다. 내가 느꼈던 책임감이—사샤와 말리아와 버락에게, 내 경력과 나라에 느꼈던 책임감이—살짝 달라지니, 미래를 바라보는 시각도 살짝 달라졌다. 이제 생각할 시간이 더 많고, 자연스러운 나 자신으로 있을 시간이 더 많다. 쉰네 살인 나는 아직도 발전하는 중이다. 바라건대 앞으로도 늘 그러면 좋겠다.

내게 무언가가 된다는 것은 어딘가에 다다르거나 어떤 목표를 달성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대신 그것은 앞으로 나아가는 움직임, 진화하는 방법, 더 나은 자신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과정이다. 그 여정에는 끝이 없다. 나는 엄마가 되었지만, 아직도 아이들로부터 배울 것이 많고 줄 것도 많다. 나는 아내가 되었지만, 아직도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인생을 함께하는 일에 적응하려고 애쓰는 중이며 때로 그 어려움 앞에서 겸허해진다. 나는 어떻게 보면 권력을 가진 사람이 되었지만, 아직도 때때로 불안하고 내 목소리가 전달되지 않는다고 느낀다.

무언가가 된다는 것은 하나의 과정이고, 하나의 길을 걸어가는 발걸음이다. 인내와 수고가 둘 다 필요하다. 무언가가 된다는 것은 앞으로도 더 성장할 여지가 있다는 생각을 언제까지나 버리지 않는 것이다.

버락이 물러난 뒤로, 나는 속이 뒤집히는 뉴스를 너무 많이 접했다. 지금 벌어지는 일들을 떠올리면 분통이 터져서 밤에도 잠을 못 이루곤 한다. 현 대통령의 행동과 정치적 의제 때문에 많은 미국인이 자신을 의심하고 나아가 서로를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모습을 지켜보기가 너무 괴로웠다. 약자에 대한 배려를 담아 세심하게 설계된 정책들이 역행하는 모습, 미국이 가까운 우방들과 멀어지는 모습, 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구성원들이 무방비로 노출되고 비인간적인 대접을 받는 모습, 그런 것들을 지켜보기도 괴로웠다. 가끔은 대체 바닥이 어디인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 와중에도 스스로에게 결코 허락하지 않는 것이 바로 냉소다. 너무 걱정되는 순간이면, 심호흡을 하면서 내가 평생 만나온 많은 사람이 보여준 품위와 우리가 이미 극복해낸 많은 장애물들을 떠올리려고 애쓴다. 그리고 다른 이들도 나처럼 하기를 바란다. 우리 모두에게는 민주주의 세상에서 각자 해야 할 역할이 있다. 우리는 모든 표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나는 어쩌다 그만 평범하지 않은 여정을 밟게 된 평범한 여성이다. 그런 내가 내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바라는 바는 이로써 다른 이야기와 다른 목소리가 들릴 공간이 더 넓어졌으면, 그리하여 더 많은 사람이 이 세상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게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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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이 선물이다 - 조정민 잠언록
조정민 지음 / 두란노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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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은 참된 선물이다. 고난이 있어 내가 성장할 수 있고, 고난이 있어 내가 단단해진다. 하나하나 읽으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잠언인데, 실천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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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견딘 만큼 강해지고,
고난을 이긴 만큼 깊어집니다.

많은 일을 해서 대단한 것이 아니라
오래 견뎌서 대단한 것입니다.

씨앗이 죽지 않으면 나무가 살지 못하고,
알이 깨지지 않으면 새가 날지 못합니다.
무지개를 보고 싶다면
먼저 비바람을 견딜 준비를
해야만 합니다.

가까이 가서 보면 성한 나뭇잎이 없고,
샅샅이 파고 보면 옳은 사람이 없습니다.

골짜기와 정상은 이어져 있고,
고난과 영광도 이어져 있습니다.
둘은 결코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높은 곳에서 보면 높낮이가 없습니다.

계속 실패하는 것은 오르막길을 걷고 있는 까닭이고,
더 이상 실패하지 않는 것은
내리막길에 접어든 때문입니다.

문제를 아이가 혼자 고민하면 아이의 문제이고,
아버지와 의논하면 아버지의 문제입니다.

고난은 해답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뚫고 이겨낼 의지를 요구합니다.

고난을 치워 달라고 기도하기보다
고난을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저 사람 치워 달라고 기도하기보다
저 사람 품게 해 달라고 기도해 보세요.
그 기도는 반드시 응답됩니다.

가장 밝은 별은
가장 어두운 밤에 빛나는 별이고,
가장 감동적인 노래는
가장 슬픈 밤에 부르는 노래입니다.

사람들의 기대 위에 내 인생을 짓는 것은
모래성을 쌓는 일입니다.

그 기대는 반드시 변하고
언젠가 바뀌기 때문입니다.

고통은 생명의 일부이고,
고난은 형통의 일부이고,
실패는 성공의 일부입니다.

내가 옳고
당신이 틀렸다는 것을 입증하느라 보낸 시간이
가장 무의미한 시간입니다.

비난하는 것보다 아둔한 시간이 없고,
변명하는 것보다 아까운 시간이 없습니다.

교만이란 내 생각이 가득해서
남의 생각이 들어올 틈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교만은 영적인 치매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맞고 나서 돌아서고,
지혜로운 자는 맞기 전에 돌아섭니다.
탐욕스러운 자는 맞아도 돌이키지 않습니다.

용서의 밧줄에 매달려 사는 사람은
복수의 칼로 그 밧줄을 자르지 않습니다.

그 사람을 참고 견디는 것은 약해서가 아니라
강하기 때문입니다.
정말 강하면 끝까지 참고 견딥니다.

다른 사람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습니다.
먼저 나 자신에게
걸려 넘어지고 나서
다른 사람 핑계를 찾은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실수하는 사람이 아니라
실수에서 배우지 못하는 사람이고,
미련한 사람은 넘어지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넘어진 곳에서 또 넘어지는 사람입니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져주고
더 큰 사람이 참아주고
더 아는 사람이 속아줍니다.

지고도 이기는 인생이 있고,
이기고도 지는 인생이 있습니다.
인생이 끝나봐야 압니다.

이겨야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견디고 버티는 것이 이기는 것이고,
때로는 물러서고 져주는 것이 이기는 것입니다.
이긴 자들의 말로가 말합니다.

때로는 웃을 수밖에 없어도 웃음은 큰 능력이고,
때로는 기도밖에 할 수 없어도 기도는 가장 큰 힘입니다.

꿈이 있어 의미가 있고,
고통이 있어 가치가 있습니다.

간절히 원하는 사람은 결코 핑계를 찾지 않고
반드시 방도를 찾습니다.

좁은 마음에서 좁은 생각이 나고
넓은 마음에서 넓은 생각이 납니다.
좁은 생각에서 다툼이 나고
넓은 생각에서 화해가 납니다.
마음 넓히는 것보다 큰 일이 없습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는 가장 빠른 길은
내가 좋은 사람이 되는 길입니다.
좋은 사람이 되는 가장 빠른 길은
종일 내 안에 좋은 생각을 품는 것입니다.

불만을 나에게 말하면 낙심이 되고
남에게 말하면 비난이 되고
신에게 말하면 기도가 됩니다.

모든 것이 부족하면
한 가지만 채워져도 감사하고,
모든 것이 풍족하면
한 가지만 모자라도 불만입니다.

뚜렷한 이유 없이 그가 싫은 것은
나의 못난 성품 때문이고,
특별한 까닭 없이 그가 좋은 것은
그의 선한 성품 때문입니다.
그래서 못난 사람에게는 싫은 사람이 많습니다.

쓰레기를 혐오하고 비판하고 비난해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쓰레기는 누군가 말없이 치워야 사라집니다.

외모는 돈을 들여야 가꿀 수 있고,
인격은 돈을 버려야 가꿀 수 있습니다.
신기하게도 돈을 들인 외모가
돈을 버린 인격만큼 오래가지 않습니다.

자유의 본질은
욕망을 마음껏 채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욕망이 요구하는 것을
거부할 수 있는 데 있습니다.

빛은 어둠을 몰아내지만
어둠은 빛을 내쫓지 못합니다.
어둠은 빛을 더욱 드러낼 뿐입니다.

“오늘 하루가 생애 마지막 날이라면 뭘 하고 살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답합니다.
“더 사랑하고 다 용서하고 떠나겠습니다.”
그런데 왜 꼭 마지막 날에 그래야 합니까?

더 많이 가지려고 애쓰는 동안에는
가진 것조차 제대로 누리지 못합니다.

사랑하면
이해하지 못할 사람이 없고,
미워하면
이해되는 사람이 없습니다.

두려우면 밉지 않은 사람이 없고,
평안하면 미운 사람이 없습니다.
결국은 내가 만드는 세상입니다.

중독은
한 순간에 오지 않습니다.
내가 계속해서
선택한 것입니다.

마음에 들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마음을 바꾸는 것입니다.

사랑은 더 나은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한번 붙든 사람을 끝까지 놓치지 않는
아름다운 동행입니다.

가장 큰 실수는
나는 실수하지 않는다고 착각하는 것이고,
가장 큰 교만은 실수하는 사람을
무턱대고 비난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기도의 자리에 앉아 있지 않아도
기도하는 것이고,
사랑하지 않으면 기도의 자리에 앉아 있어도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랑 받고 사랑하는 만큼 건강하고,
사랑 받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한 만큼 병듭니다.

정말 사랑하면
그가 달라는 것과
그가 좋아하는 것을 주기보다
그에게 꼭 필요한 것을 줍니다.

꿈을 이루지 못한 것이 비극이 아니라
꿈을 갖지 않은 것이 비극입니다.
사랑을 잃은 것이 슬픔이 아니라
사랑하지 못한 것이 슬픔입니다.

탐욕은 결핍감 때문이고, 폭력은 불안감 때문이고,
음란은 사랑에 목마른 때문입니다.

십자가 사랑에 빚졌기에
오늘 하루 누군가의 허물을
가려 주는 삶이 되게 하소서.

싸워 이기는 것은 작은 능력입니다.
싸운 뒤에 화해하는 것은 큰 능력입니다.
그러나 안 싸우고 더불어 지낼 수 있는 것은
가장 큰 능력입니다.

친구를 가까이하는 사람은 다정한 사람이고,
원수를 가까이하는 사람은 고결한 사람입니다.

높은 산 정상에서
보물을 캔 사람은 없습니다.
보물은 언제나
낮은 곳 깊은 땅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용감한 사람이란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두렵지만 그 두려움보다 더 큰 이유 때문에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진실은 언제나 말이 적고,
거짓은 언제나 말이 많습니다.

귀가 문제를 일으키는 법은 없습니다.
늘 혀가 말썽입니다.

제대로 알면 아는 티를 내지 않고,
정말로 친하면 친한 티를 내지 않습니다.
어설픈 사람이 항상 티를 냅니다.

실제로 한 번이라도 자비를 베푸는 것이
도덕을 50년 동안 공부하고
100년 동안 가르치는 것보다 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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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개신교의 본질 - 루터의 영혼에서 시작된 종교개혁의 핵심
칼 하임 지음, 정선희 외 옮김 / 복있는사람 / 2019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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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과 개신교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지만, 그 갈라진 노선에는 큰 차이가 있다. 가톨릭은 교황이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자로서 하나님의 지상국가가 가톨릭 교회를 통해 임했다고 보는 반면, 개신교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임명되신 그리스도의 나라는 아직 임하지 않았다고 본다. 교황직의 탄생 배경과 중세 교회의 역사, 현재 개신교회의 본질을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성경을 바로 알고 믿음을 공고히 하는데 도움을 주는 책이다.
별점: ★★★★★



해설의 글
신학은 하나님을 가르치고, 하나님께 가르침을 받고,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학문이다. 자연과학은 그것이 진정 학문이라면 하나님과 관련되는 학문이며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요청하는 학문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칼 하임의 신학은 선교적이고 봉사적인 신학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와 그 절정인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은 단지 도덕과 정신의 영역에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활동과 모든 학문 영역과 관련된다는 점을 일관되게 주장했다.
칼 하임 신학의 현대적 의미는 그가 주창한 두 가지 중심 테제로 요약된다. 첫째, 무의미와 절망의 현대 상황에서 인간에게 남겨진 유일한 삶은 하나님을 믿는 길이다. 둘째, 신학은 하나님을 배제하려고 하고 이데올로기화하려는 자연과학*과 부단히 대화해야 하며, 자연과학은 그 큰 맥락 가운데서 성찰되고 기독교적 신앙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연과학(自然科學, 영어: natural science)은 자연현상에 대한 이해를 조직화한 지식의 체계이며, 과학의 한 분야이다.
베드로에게 주어진 사도적 특권과 사명이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황권을 보증한다고 여기는 마태복음 16장 18절에 대한 해석 차이에서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라는 말씀의 진의가 무엇인가? 1870년에 열린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 말씀과 누가복음 22장 31~32절에 근거해 하나님의 교회 전체에 대한 최고 관할권이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베드로에게 직접 위임되었다는 것을 교리로 선포했다.
하임은 마태복음 16장 18절의 “반석”을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 그리고 2차적으로는 사도들과 선지자 집합체라고 본다. 그러면서 마태복음 16장 18절의 반석 말씀의 효력은 어디까지나 베드로에게 국한된다고 본다. 그렇기에 칼 하임은 마태복음 16장 18~21절을 근거로 베드로의 교황권 상속 교리를 도출하는 가톨릭 교리는 성서적으로 지지될 수 없다고 확언한다.
가톨릭교회는 예수님의 신적 사죄대권이 교황과 사제들에게 전유되었다고 믿는 반면, 모든 프로테스탄트* 예배는 그리스도의 배타적 사죄대권만을 고백한다.
루터가 와서 복원시킨 십자가에 달린 가난한 그리스도는 권력 장치를 통해 인간의 외적 행동만 지배하는 세속적 군주가 아니라 인간의 양심과 내면을 설득시키고 감화감동시켜 마침내 정치 및 사회 체제 전체를 바꾸도록 격동하시는 영적 통치자다. 영적 통치자인 그리스도는 권력과 무력 대신에 인간 양심의 자발성을 추동시켜 그분의 통치를 관철시킨다.
*Protestantism / 改新敎: 16세기 무렵, 종교 개혁의 영향으로 가톨릭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온 복음주의 성향의 기독교 교파들을 두루 일컫는 말이다. 복음주의 교회라고도 부른다. 종교개혁 시기 개신교의 원어 표기는 ‘Protestant‘에서 유래했기에 일반적으로 프로테스탄트로 한다. 기독교에서 어디까지가 개신교의 범주인지에 대한 정의는 분명하지 않지만, 대개 종교 개혁 1세대 종파들로부터 거듭 파생된 종파들도 일반적으로 포함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가톨릭의 그리스도 이해에 따르면, 이미 예수의 부활과 함께 우리는 예수의 권력 통치 시대에 있다는 것이다. 반면 프로테스탄트의 그리스도 이해에 따르면, 세계정세의 긴장 해소는 세상의 종말 때에야 이뤄진다. ‘개신교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 승천해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앉아 세상을 통치하지만 재림할 때까지는 십자가에 달린 주의 자격으로 세상을 통치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양심 영역에서부터 통치권을 행사하신다. 그는 행동주의 심리학적 행동교정을 강제하지 않으며, 사람들을 설복시키고 사람들의 신뢰와 사랑과 믿음을 통해 그들의 마음속에 들어가 감화감동시키는 방식으로 통치하신다. 개신교적 신념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세상 지배가 실현되는 시점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예수께서 세상 권력의 대리자인 빌라도와 마주 서서 그에게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라고 말했던 그 상황의 연장선상에 있다.
루터는 저급한 정신의 도취 상태를 통해서가 아니라 명료한 정신활동, 곧 완고한 고독 속에서 100% 정직하고 벌거벗은 양심의 자아성찰과 사고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갈 수 있음을 깨달았다. 이 자아성찰과 사유는 말씀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말씀과 낯선 영원 무한한 것에 대한 신비주의적 체험이나 도취 상태를 통해서가 아니라, 말씀과 그 말씀에 대한 지각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발견한다.
개신교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지금 배울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아마도 이 세상을 그리스도 통치 아래 수렴시키고 복속시키려는 스콜라 신학*적 전체성일 것이다. 온 세상 모두를 다 통치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답게 개신교는 개교회주의**, 타계주의적 개인구원론, 예정설*** 등에만 집착하지 말고 온 세상 만유를 다 품고 통치하고 구원하시려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마음에 공감하는 복음의 교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스콜라 신학은 보통 서구 역사에서 중세라고 명명한 시대의 특징적 신학 사조 또는 신학 방법론을 지칭하는 말로써, 주로 ‘이성과 신앙의 조화‘를 주제로 다루었다. ‘스콜라‘는 중세에 신학과 철학을 가르치던 장소가 수도원의 학교(스콜라)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개교회주의란 교회의 인적 물적 사용을 개교회 유지와 확장에 최우선권을 부여하는 태도와 의식을 말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신자 위에 신자 없고 신자 밑에 신자 없듯이 교회 위에 교회 없고 교회 밑에 교회 없다. 이것이 개교회주의의 원리이며 동시에 성경 속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는 단순한 진리이다.
***예정설은 기독교의 구원론에 관한 신학적 이론 중 하나이다. 인간의 구원은 인간의 노력이나 행위와 상관없이 전적으로 신으로부터 선택에 의해 이루어지며, 이에 따라 선택받은 영혼들이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이론이다. 5세기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 이론에서 출발하였다. 종교개혁 이후 대다수의 개신교 교파들이 보편적으로 이 입장을 택하고 있는데, 특히 개혁교회에서 예정설을 매우 강조한다.

1/ 가톨릭교회의 매력
사람들은 자연종교의 원시적인 마술에서부터 엄격한 유대교적 율법 종교 및 신비감의 섬세한 영혼 서약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총체적인 종교적 추구를 가톨릭교회가 포용하고 있다는 바로 그 점에서 가톨릭교회의 위대함을 발견한다. 프로테스탄트가 인간 속에 있는 많은 것을 부정하는 반면, 가톨릭교회는 인간 속에 있는 모든 것을 긍정한다. 즉 가톨릭은 인간 전체를 긍정한다는 것이다.
가톨릭의 위대한 현대주의자 조지 티렐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타 종교들과 유대교와 그리스-로마와 이집트의 이교적 세계 및 그것과 관련된 문화들과의 여러 형태의 접촉, 그것을 우리는 가톨릭교회의 가장 큰 공로와 장점 중 하나로 여긴다. 궁극적 의미에서 세계의 모든 종교와 하나임을 아는 것…., 이것이 가톨릭적인 것이다”
모든 시대의 정신적 자산을 경외심에 가득 차 향신하며 모든 꽃으로부터 꿀을 흡입하려는 현세대의 보편주의 열망과도 일치한다.

2/ 교회 분열의 원인
루터는 선택할 수 있었던 가장 온건한 방식을 택했다. 우선 면죄부 악용 상황을 교회 지도층이 인지하고 있는지 서면으로 문의하고 나서, 면죄의 효력에 대한 학술적 토론을 요청했던 것이다. 학술토론 제의를 추동했던 것은, 교회 제도나 교리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면죄부를 악용함으로써 큰 내적 위험 속으로 끌려들어 가는 인간 영혼에 대한 한 사제의 불안이었다. 루터는 교황과 교회의 의지와는 별개로, 양심 없는 면죄부 설교자들의 죄 때문에 면죄의 의미에 대해 위험한 오해가 발생했다고 확신하여 그에 대항했던 것이다.
교회가 그에게 가한 충격을 루터는 결코 잊지 못했다. 이것이 이후 루터의 모든 행동의 발단이 되었다. 이로써 그는 가톨릭교회가 세워져 있는 전체 근거에 대해 숙고하기 시작했다. ‘교황은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자’라는 주장도 거짓을 수 있지 않을까‘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때야 비로소 그는 교회의 교리적 기초들을 의문시했으며, 적그리스도인 교황과 엄숙하게 절교하고 파문장을 불태워 버리는 일을 감행하는 이단자가 되었다.
왜 독일 국민의 마음은 로마 교회로부터 돌아섰는가?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루터의 책만을 읽을 필요는 없다. 우리는 한스 작스, 알브레히트 뒤러, 울리히 폰 후덴과 당시 수많은 영혼들 속에 일어났던 일을 큰 소리로 분명하게 진술했던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독일 국민이 로마 교회로부터 돌아서게 된 이유들을 들을 수 있다. 첫 번째 감정은 기만당해 왔다는 것이다. “우리는 속았다. 하나님과 영혼 사이의 깊은 고독 속에서만 결정될 수 있는 성스러운 양심의 일이, 외국의 세계 권력에 의해 자본주의적 착취 대상이 되었다. 사람들은 경제적 이득을 얻기 위해, 외국으로 넘어갈 돈을 마련하기 위해 우리 양심의 불안을 이용했다.”두 번째 감정은 종교적 질곡을 벗어나고자 하는 해방의 욕구였다. “우리는 양심상의 일들이 패권정치나 금권정치 문제들과 불운하게 얽혀 있는 상황으로부터 벗어나야만 한다. 우리는 이러한 세속 교회 뒤편의 근원인 그리스도 그분에게로, 즉 인간들의 쓰레기에 의해 파묻혀 버린 원천으로 돌아가야 한다”
16세기 르네상스 시대 교황 제도에 대한 사람들의 이러한 비판은 오늘날에는 과거에 속한다. 그 이후 로마 가톨릭교회도 많은 것이 개선되었기 때문이다. 가장 큰 폐해들은 시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로마 가톨릭과의 분리를 야기했던 상황들은 독일인들의 영혼에 지울 수 없이 깊이 각인되었다.

3/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교회가 교회력을 따른다고 해서 과연 가톨릭교회가 주님의 의도한 교회일까 하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 최종 확정된 것은 아니다. 석가모니는 자신이 신적 존대로 숭배될 것을 결코 알지 못했다. 그는 한 사람의 철학자로서, 무거운 인생의 고난 속에서 모든 세속적인 향락의 무상함을 깨달았으며, 그로써 동포 인간들에게 모든 고통으로부터 구원에 이르는 단순한 길을 권했다. 그것은 집착적으로 살려는 의지의 포기다. 부처가 죽은 후 그의 가르침이 사도적 고승들에 의해 북방 국가들에 전했을 때, 그를 기리고자 그의 이름에 따라 불리는 하나의 종교가 생겨났다. 사람들은 모든 기도와 경건에서 끊임없이 그를 불렀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화된 불교는 부처가 원하던 것을 거의 그 반대의 것으로 변질시켰다.
불교 역사의 예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바는, 인류의 스승을 찬미하려는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그의 추종자들이 그를 오해하고, 그의 이름을 계속 부르면서도 그가 원했던 것과 반대되는 일을 하는 것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가톨릭교회의 풍부한 그리스도 경배에 대해서도 무의식적으로 그런 의문이 일어난다. ‘만일 예수가 이러한 방식의 숭배와 찬미를 원하지 않을뿐더러 그의 이름으로 행동하는 이런 주교 계급을 전혀 원치 않고 완전히 다른 것을 원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두 종파는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그리스도 안에 모든 지혜의 보물이 숨겨져 있고 세계의 수수께끼의 해답이 있으며,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 봉인된 생명책을 펼친다는 것은 두 종파 모두 확신하는 신조다.
베드로에게 했던 예수의 말씀,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라는 말씀*의 진의가 무엇인가. 바티칸 종교회의는, 복음서 증언에 따라 하나님의 교회 전체에 대한 최고 관할권이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거룩한 사도 베드로에게 직접 약속되었고 위임되었다는 것을 교리로 받아들이고 장엄하게 선포했다.
만일 예수께서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셨다면, 그럼으로써 그가 신앙과 삶의 문제들에서 무오한 권위를 지닌 하나의 직분을 세우려고 하셨다면, 프로테스탄트는 처음부터 예수의 저주 아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루터는 이러한 직분에 더 이상 순종하지 않았고 그렇다면 그리스도에 대한 그가 죄를 범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사실상 교황권으로부터 독립적인 교회의 설립 권리에 대한 원칙적인 질문 앞에 서게 된다.
프로테스탄트 진영에서는 그 전체 단락을 삽입 구절로 설명하거나 처음부터 반대되는 의미로 해석함으로써 예수의 말씀을 완화시키려고 했다. 하르낙은 반석 관련 구절에서도 유사하게 그 말씀을 더 이상 베드로가 아니라 교회에 적용하는 삽입이 다음과 같이 일어났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반석 위에 나의 교회를 세울 것이며, 그리고 음부의 문들이 그것을, 즉 교회를 정복하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삽입은 그 교회의 창설자를 찬미하려고 했던 로마 교회에 의해 일어났을 것이다. 나는 감히 하르낙의 가설에 근거하여 본래 복음서들에 쓰여 있는 말씀을 밀어낼 수는 없다.
우리는 그 말씀을 신양 사상 전체 문맥에 집어넣어 보아야만 한다. 하나님의 설계도는 에베소서 2:20 이하에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0~22)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 시몬 바요나야, 너는 복이 있다. 너에게 이것을 알려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시다. 나도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다. 나는 이 반석 위에다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 죽음의 문들이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복음서‬ ‭16:15-19‬ ‭RNKSV‬‬)
에베소서 말씀에서 우리는 건축기사 하나님의 최초의 석층 계획도를 갖는다. 전체를 떠받치고 있는, 하나님에 의해 토대로 놓인 맨 아래층이 보인다. 모퉁잇돌은 예수 그리스도이며, 기초 벽의 마름돌들은 선지자와 사도들이다.
영적인 공동체 안에는 그리스도 외에도, 전체 교회를 위해 독특한 중요성을 지니며 그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전권, 즉 미래의 세계까지 미치는 전권을 위임받은 인물들이 존재한다. 떠받치는 역할을 하는 기초석들에 비견되는 인물들이 있는 것이다. 바울은 베드로에게 하신 예수의 말씀을 다시금 밝게 조명해 주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는 ‘기둥’들로서 간주되었던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에 대하여 언급한다(갈 2:9). 그러므로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건축물을 떠받치는 기둥들이었다.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즉 “나는 너를 반석으로, 기초석으로, 기둥으로 만들어, 그 위에 살아 있는 돌들로 전체 집이 세워지도록 하겠다. 나는 너에게 아주 특별한 전권을 준다. 나는 너에게 천국의 열쇠를 준다. 네가 내릴 결정들은 초세속적인 효력을 가질 것이다. 네가 땅 위에서 매는 것을 또한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다”라는 말씀이다.
그 말씀이 분명하게 의미하고 있는 것은, 베드로가 사도로서 하나의 사명, 즉 전체 교회 공동체에 대해 상속될 수도 없고 바로 다음 세대에게도 양도될 수 없는 존엄한 직분을 얻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위는 절대적으로 유일회적이다. 이것이 기초석과 그것이 떠받치고 있는 건축물에 대한 비유의 의미다. 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본래의 의미대로 이해하자면, 사도 베드로에게 하나님의 영적인 건축물 속에서 절대로 반복될 수 없는 유일한 지위를 부여해 주었기 때문에 모든 형태의 교황권은 배제되며 금지된다. 사도직 계승이라는 전체 이념은 그 자체가 모순인 것이다.

4/ 가톨릭 교회의 그리스도 이해와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그리스도 이해
예수는 누구였는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다소 영향력 있는 사람이라면 부지중에라도 어떻게든지 그에 대한 태도를 결정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가 어느 누구도, 석가도 모하멧도 공자도 주장하지 않았던 권리, 즉 사람들에게 ‘너의 죄가 용서받았다’라고 말할 사죄대권을 가졌다고 스스로 주장했다는 점이다. 마가복음에 따르면, 그는 스스로 “인자*는 ……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라고 말했다. 그는 불가능한 일을 하려 했으며 어떠한 인간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한 신성모독자인가, 아니면 실제로 하나님께 위임받은 사죄대권을 가지고 말하고 행동하며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자인가?
예수의 사죄대권은 오로지 유일하게 인간 속의 이러한 보이지 않는 내적인 사건과 관계되기 때문에, 이러한 사죄대권 요구의 권리를 옹호하거나 반대하기 위해 과학적 논증들을 시도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
*“내가 밤에 이러한 환상을 보고 있을 때에 인자 같은 이가 오는데,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계신 분에게로 나아가, 그 앞에 섰다. 옛부터 계신 분이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셔서, 민족과 언어가 다른 뭇 백성이 그를 경배하게 하셨다.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여서, 옮겨 가지 않을 것이며, 그 나라가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다니엘서‬ ‭7:13-14‬ ‭RNKSV‬‬)
예수는 한 세계의 종말을 임박한 것으로 기대했다. 예수께는 어쨌든 종말이 온다는 사실, 세계 사건은 종결점을 향해 달려간다는 사실이 시기 규정보다 더 중요하다.
실제적인 삶의 관점에서 고찰할 때, 예수의 종말 기대, 소위 종말론적 세계관은 무엇을 의미할까? 하나님과 영혼의 화해에 대한 문제와 행복과 권력에 대한 문제 중에서 전자의 것, 화해에 대한 문제만이 해결되었다는 것이다. 그와 반대로 두 번째 문제, 권력과 행복에 대한 문제는 아직 미해결되었다. 하나님은 그것의 해답을 종말까지 유보하셨다.

5/ 하나님을 향한 두 개의 대립된 길
마태복음 25장 31절 이하에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했다”라는 주님의 칭찬에 “우리가 어느 때에 그리하였나이까?”라고 응답하는 일단의 사람들에게 그는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라고 대답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당신이다. 비록 그들이 그것을 전혀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모든 인간은 항상 그와 관계가 있다. 그러므로 신앙 공동체만이 그가 영으로 있는 그리스도의 육체가 아니다. 전 인류가 넓은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인 것이다. 그리스도는 비밀스러운 방법으로 인류 전체의 역사에 관여하고 있다. 인류사 전체는 눈에 보이지 않는 중심점인 듯 그리스도 주위를 움직인다. 그러므로 두 종파에게는 그리스도의 신적 대권에 대한 믿음만이 아니라, 세계 역사를 통과해 걸어가는 살아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도 공통적이다.
하나님의 사자인 그가, 멸시받는 자로서, 조롱당한 자로서 세상을 통과해 갔다. 언제 이 무시무시한 긴장이 해소되며 언제 반전이 나타날 것인가? 가톨릭의 그리스도 이해에 따르면, 반전은 이미 예수의 부활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 이래로 우리는 예수의 권력 통치 시대에 있는 것이다. 그와 반대로 프로테스탄트의 그리스도 이해에 따르면, 세계정세의 긴장 해소는 현재 세상의 종말과 더불어 비로소 오게 된다.
가톨릭의 그리스도는 지금은 지상에 대한 전제왕권을 획득했다. 가톨릭교회는 하나님의 지상 국가이며,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시작된 그리스도의 왕권 통치라는 것이다. 대관식에서 교황에게, “그대는 지도자들과 왕들의 아버지이며 전 세계의 지배자이며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자임을 알라”라고 선포한다.
중세 가톨릭교회의 그리스도 이해에 따르면, 이러한 섬김을 통한 내적 통치는 과거, 즉 예수의 생애에서 가난하고 비천했던 처음 짧은 시기에 속하는 것으로 여긴다. 그리스도의 부활 이래로 우리는 두 번째 단계인 권력의 시기로 들어섰다는 것이다.
원칙적으로 예수회*는 이단자 모두가 사형을 받을 만하다는 교리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이러한 교리는 오늘날 더 이상 사용되지 않지만, 원칙적으로 폐기된 것은 아니다.
*예수회(라틴어: Societas Iesu)는 로마 가톨릭교회 소속 수도회이다. 1534년 8월 15일에 군인 출신 수사였던 이냐시오 데 로욜라에 의하여 설립되었다.
프로테스탄트적인 그리스도 이해에 따르면, 이 세상에서의 권력 문제가 아버지 하나님에 의해 해결될 그 시간, 그 위대한 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세상 지배가 실현되는 시점은 개신교적 신념에 따르면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첫 번째 문제인 죄의 문제는 십자가에서 해결되었다. 그러나 해결되어야만 하는 두 번째 문제인 권력의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세계사의 드라마는 아직도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라고 말했던 그 당시 그 지점에 서 있다.
그리스도는 세계 상황의 긴장 해소와 현 존재의 무시무시한 대립 상황의 해결은 종말에 가서야 있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회심의 기회를 줄 것이기 때문이다. 신랑의 도착이 지체되는 것, 그것이 기다리는 열 처녀에게 여러운 시험이다. 그리고 그들 중 절반만이 그 시험을 통과한다.
신구교 두 종파를 갈라놓는 그리스도 이해에 대한 이러한 근본적인 차이를 일단 인식했다면, 우리는 대립의 핵심을 이해한 것이다. 이외의 모든 것은 단지 그로부터 나온 결과일 뿐이다.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계 11:15)라고 말할 그 순간이 이미 온 것이라면 그것은 장엄할 것이다. 이러한 순간이 도래했다는 환상만이라도 생겨난다면, 우리 속에 있는 모든 것은 해방감을 느끼며 동경에 가득 차서 환성을 울리게 된다. 교황 제도의 매혹적인 매력은 여기서 발산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해결의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도 믿음 안에 살고 있는 것이지, 보는 것 속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의 지상 통치가 완전히 실현되는 저 순간을 끌어오는 것은 우리의 능력 밖의 일이다.
권력 인상들과 신비적 도취 상태들은 집단적 암시하에 공유될 수 있지만, 진리의 인식과 양심의 경험들은 단독자적인 개인의 체험들이다. 루터는 우리가 참다운 의미로 하나님 앞에 서는 그때, 즉 죽을 때에는 어떠한 높은 권위도 소용없게 되며 그리하여 우리는 완전히 혼자가 된다고 되풀이하여 역설한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신앙고백을 두 개의 명제와 반명제로 요약할 수 있다.
1. 우리는 저급한 정신의 도취 상태를 통해서가 아니라 명료한 정신활동, 곧 우리가 완전한 고독 속에서 우리 자신으로 돌아오게 되는 정신활동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갈 수 있다. 신비주의적 체험, 혹은 저급한 것이든 좀 더 고상한 것이든 마취상태를 통해서가 아니라 말씀과 그 말씀의 정신적인 지각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발견한다.
2. 하나님은 단지 소스라쳐 놀라 일깨워진 양심에 의해서만 발견될 수 있으며, 도덕적으로 무관심한 권력 체험이나 권위에 대한 복종을 통해서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프로테스탄트적 입장은 루터가 보름스 의회*에서 자신의 주장들을 철회하라는 요구에 대해 제기한 답변에 ”정신의 명료함, 말씀 그리고 양심”이라는 프로테스탄티즘의 모든 기본 요소가 표명되어 있다.
*보름스 의회(Diet of Worms, Reichstag zu Worms) 또는 보름스 제국의회는 1521년 3월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가 보름스에서 제국의회를 소집하고 종교 개혁가 마르틴 루터를 소환해 루터의 견해를 심의한 사건을 말한다.

6/ 신령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
말씀은 하나님을 발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말씀이 정신의 창조자이기 때문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모든 영적인 활동은 말씀들로 표현될 수 있어야 하며 말씀으로부터 태어난다.
가톨릭교회는 모든 평신도가 교리를 이해해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는다. 가톨릭 신자들은 교회가 믿고 있는 것을 믿고 있다고 말하기만 하면 된다. 이해하는 것은 신학자들의 문제다.
그리스도의 진짜 신부이며 우리의 성스러운 어머니인 가톨릭교회에게 복종할 준비가 항상 되어 있어야 한다. … 우리는 가톨릭교회와 완전히 같은 모양이 되며 완전히 일치하기 위해서, 만일 교회가 검다고 규정했으면 우리 눈에 희게 나타난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것을 검다고 선포해야만 한다. 이 점은 예수회 교육에서 항상 반복된다. 우리는 오성*을 우리의 수도원장과 일치시켜 그가 명령하는 모든 것을 합리적이라고 간주하며 우리의 판단을 완전히 그의 판단에 복종시키는 것이다. 상급자가 너 자신의 판단이나 견해 혹은 능력과 모순돼 보이는 어떤 것을 너에게 명령한다면, 모든 인간적 이유와 생각들을 지양한 채 꿇어앉아, 네가 홀로 있을 때 복종의 맹세를 되풀이하라. 예수회의 견해에 따르자면 그것은 우리에게 하나님께 가는 길을 열어 주는 매우 특별한 공로다.
*오성: 기쁨, 노여움, 욕심, 두려움, 근심
이에 대해 프로테스탄트들은 ‘아니요’라고 대답해야 한다. 우리가 스스로 눈멀게 하여 우리 자신의 고유한 판단을 포기한다면, 우리는 바로 그 속에서 우리가 유일하게 하나님을 볼 수 있고 파악할 수 있는 그 빛, 즉 우리의 영적인 생명을 꺼버리는 것이다. 의심에 대한 모든 강제적 억압은 양심을 거스르는 긴장이다. 프로테스탄트적 입장에서 고찰한다면, 우리가 알게 된 가톨릭교회의 영적 생활의 억압 양식은 모두 하나님과 우리의 교제에서 위험한 걸림돌이다. 첫째, 정신적으로 저급한 의식몽롱 상태에 빠짐으로써 억압될 수 있다. 두 번째, 이해하지 못한 것을 참되다고 생각하는 데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세 번째, 예수회의 교사들에 의한 복종훈련이라고 추천되는 이른바 자기 맹목화, 즉 우리에게 오는 항변들과 떠오르는 의심을 의지 행위를 통해서 강제로 억제하려는 시도다. 우리는 하나님의 신령과 진리 속에서만 예배할 수 있다.

7/ 양심의 종교
수도사 루터가 양심가책자였으며, 옛날부터 수도원에서 가장 진지한 수도사들에게 빈번했던 현상, 즉 중세 후기 도덕신학이 쇄심증이라고 칭했던 정신병을 앓고 있었다는 가톨릭 역사가들의 말이 전혀 부당하지만은 않다. 이것은 어떤 종류의 진기한 병인가? 둔감한 보통 인간은 그 병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몇 달 만이라도 하나님의 한 가지 계명, 가령 ‘순결하라’는 계명이나 ‘하나님을 모든 것보다 사랑하라’는 계명을 충실히 지키려고 시도해 본 섬세한 영혼을 가진 인간이라면, 이러한 병이 우리에게 모두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누구나 즉시 깨닫게 될 것이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이 ‘전부 아니면 전무’만이 존재한다는 것이 루터의 수도원 투쟁들의 근원이다. 기도를 할 때면 그 문제가 그를 괴롭혔다. ‘너는 기도할 때 참으로 온전한 하나님 사랑에 의해 하였느냐? 그것이 없다면 기도란 단지 죄에 불과하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교회의 성사도, 고해성사나 고해석도 그에게 아무런 평안을 마련해 줄 수 없었다. “그는 날마다 고해하며 가장 작은 일도 참회하며 과거의 일도 되풀이하여 참회한다.” 그러나 그는 “실제로는 이전과 동일한 인간이었음을” 깨닫는다.
선교사들의 집은 양심의 짐을 벗기를 원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른 아침부터 포위되었다. 감히 참회를 할 수 없었던 많은 사람들은 원시림으로 가서 목매어 자살했다.
하나님은 어떤 강요된 헌신도 원하시지 않는다. 이것은 온전한 마음과 온전한 영혼으로서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의무와 당위적 강제와 강압의 모든 불순물이 사라진 마음의 가장 깊숙한 열망으로부터 탄생한 의지, 완전히 자유롭고 온전한 의지만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한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지옥으로 보낸다 할지라도 기쁘게 가야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늘에 들어가기 위해 수도 생활이나 세속 생활을 영위할 수도 있는데, 거기에는 항상 또 다른 동기인 자기애가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 반쪽의 마음만을 드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참으로 알게 되자마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절망할 수 있을 뿐이다. 어떠한 인간도 우리를 이러한 절망으로부터 구원할 수 없다. 만일 이러한 상태에서 도움, 즉 멸망으로부터의 구원이 있을 수 있다면, 이것은 완전히 무조건적인 용서 가운데서만 가능하다.
우리 편에서 하나님을 움직여 우리를 용서하도록 하게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일조차 불가능하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로는 단지 하나님에 대한 반항 속으로 한층 깊이 들어갈 뿐이며, 하나님으로부터 한층 멀어지게 된다. 만일 우리가 기적적인 방법으로 도움을 받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에 대해 절망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한 절망 속에 있다면, 우리는 곧 깨닫는다. 이 세상에서 아직 도움이 가능한 것이라면, 그 도움은 하나님으로부터만이 올 수 있다. 하나님이 그 일을 시작하셔야만 하며, 그가 그것을 완성하셔야만 한다. 하나님은 그에 대한 우리의 관계를 우리의 아무런 협력 없이 완전히 새로운 토대 위에 세우셔야만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돕고자 하신다 하더라도, 그가 우리를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우리 편에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은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어떠한 인간적인 생각도 미칠 수 없는 한 방법을 택하셨다. 하나님은 여러 백성 중에서 한 백성을 제사장 백성으로 선택하여 이 백성으로부터 나온 한 사람에게 전권을 영원히 부여하며, 그의 이름으로 구원과‘화해의 말’을 하며, 이 구원의 메시지를 그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서 확증하는 방식으로 구원의 방법을 정하셨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계셨으며, 세상을 그 자신과 화해시키셨다.” 예수가 최초 등장 시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을 때, 유대인들도 알았다. 그가 하나님을 모독한 자이거나, 그때에 오기로 되어 있던 그분이라는 것을.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도 죄를 용서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우리 현존의 저 최저점에 도달하지 못한 한, 우리는 여전히 우리가 최소한 하나님을 신뢰할 수는 있을 것이며, 이것이 하나님께 우리를 용서할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우리 자신에 대해서 절망하자마자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순수한 의미의 손을 내뻗어 받는 그 동작마저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때문에 종교개혁자들은 ‘믿음’을, 정신적 공로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배제되도록 항상 묘사했던 것이다. 루터는 갈라디아서 2장 주석에서 ‘믿음’이란 하나의 대상, 즉 그리스도를 지향한 활동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 믿음 자체 안에 그리스도가 존재하고 있다.
만일 믿음의 기적이, 즉 절망한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현존이 나타난다면, 그때 영혼은 그리스도와 완전히 홀로 있게 된다. 죄인의 영혼은 그리스도 앞에 철저히 홀로 남아 죄 사함을 경험한다. 그 점에 가톨릭 신앙과 개신교 신앙의 최종적인 대립이 놓여 있다. 그와 더불어 모든 인간 제사장 직분은 영 단번에 폐지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에 의한 인간 제사장 직분의 전적 폐지가 히브리서의 중심사상이다. 히브리서에 따르면,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제물을 드렸던 제사장들과 제사장 가문의 모든 제사 제도는 그리스도 십자가의 예표적 그림자였다. 그리스도는 ‘멜기세덱의 반차에 따라 영원히 제사장’으로 임명되셨다. 모든 인간은 인간의 중재 없이 영원하신 한 분 대제사장 앞에 직접 서 있다.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와 홀로 있다. 그리스도가 오신 이래로 더 이상 어떠한 제사장도 없으며, 단지 그리스도의 용서의 말씀을 세상에 전하는 전달자들만이 있을 뿐이다.
만일 우리가 자기 자신의 수고와 고통을 통해 양심의 평안으로 들어가고자 한다면, 그는 무엇 때문에 죽으셨을까? 단지 그의 의 속에서만 다시 말해 그대와 그대의 행위들에 대한 어찌할 수 없는 절망을 통해서만 그대는 평화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8/ 제사장직의 종말
‘오직 믿음으로만’이 의미하는 것은 인간의 행위, 즉 제사장의 중재 및 성사 중심 교회의 신비적인 매개물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믿음을 통해서’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인간 제사장은 그의 면죄권, 양심에 대한 그의 지배력, 그의 성례전적 구원 방편들과 함께 배제된다. 우리는 오로지 눈에 보이지 않는 대제사장 그리스도와만 관계가 있다. 이 점에서 두 종파의 대립은 모든 상호 이해와 상호 존중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해소될 수 없다.
제사장 계급이 양심을 지배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첫 번째 방법은, 모든 형식을 갖춘 종교재판이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동료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을 지켜 준다는 명분을 내세워 애매한 그리스도인들을 고문하고 화형으로 위협했었다. 이방인들에 의한 기독교인 박해 때보다도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종교재판의 희생양으로 학살된 것은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오점으로 영원히 남아 있다.
종교재판의 제도 전체는 분명히 단지 이단자를 제거하여 교회를 이단의 해독으로부터 정화하는 것만을 겨냥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가톨릭 국가, 특히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에 있는 사람들을 이단적인 발언 때문에 종교재판에서 희생당할 수도 있다는 지속적인 불안과 끊임없는 두려움에 있도록 하기 위해 정교하게 고안된 수단이었다. 그 제도 전체는 사람들을 위협하여 그러한 공포적인 정신병 아래 있게 함으로써 교회가 그들의 양심을 지배하는 것을 노렸던 것이다.
종교재판은 단지 기독교 역사에서만 영원히 가장 어두운 페이지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다. 인류 역사 전체에 그렇게 남아있다. 이러한 무시무시한 권력은 400년에 걸쳐서 민중을 지배했다. 계몽주의 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천천히 완전하게 그 마지막 찌꺼기가 제거되었다. 오늘날 중세의 화형 장작더미는 과거에 속하지만, 사실 어떤 특정한 형태의 종교재판만이 지나가 버렸을 뿐 인간 양심을 지배하려는 제사장 계급이 존재하는 한 종교재판 자체는 그 어떤 형태로든 존속한다. 단지 변화된 시대 상황에 맞게 조정될 뿐이다.
종교재판은 양심을 지배하기 위해 제사장 계급이 사용했던 한 가지 수단이었을 뿐이다. 한층 더 위험스러운 두 번째 수단은 면죄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한 인간이 감히 하나님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의 양심의 짐을 면해 준다는 주장이다. 루터는 “그 불행한 사람들이 속아서 면죄부를 사면 그들은 확실하고 안전하게 축복받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라는 사실을 알게 됨으로써 교황 제도를 반대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죄를 용서하는 전권을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만 남겨 놓으셨다. 그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며, 자신의 명예를 다른 어떤 사람에게 주시지 않는다.
많은 프로테스탄트 종파의 성직자들 역시 여전히 로마 교회보다 더 위험스러운 권력을 갖고 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너희들은 비싼 값을 지불하고 구속되었다. 그러므로 인간들의 종이 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한다. 그리스도는 제자 공동체에서 어떠한 새로운 제사장 계급도, 어떠한 새로운 희생제의도 지정하지 않았다. 그리스도는 제사장직의 종말이기 때문이다.
제사 제도는 그 역사적 사명을 다 했다. “그리스도는 죄인들을 위해서 영원히 효력 있는 한 제물로 바쳐졌으며, 이제 하나님 우편에 앉아 있다.” “그는 멜기세덱의 반열을 따르는 영원한 제사장이다. 그리스도만이 ‘내가 너를 용서하노라’라고 선포할 수 있다.” 프로테스탄티즘은 더 이상 제사장을 필요로 하지 않는 세계사 속의 유일한 종교 형태다. 그 점이 바로 프로테스탄티즘의 어려움이고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약점이나, 그 점이 바로 그것의 신적인 진리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신의 은총을 증명하는 일뿐만 아니라 자신의 현존을 증명하는 일까지도 오로지 자신의 권능 안에 남겨 두셨다. 하나님은 현존하신다. 다만 하나님이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때에 스스로를 계시하신다. 하나님께서 알리시기를 원하지 않는 곳에서는 경계를 날아 넘으려는 모든 철학적인 요구도 헛된 시도이며, 곧 추락하게 될 인간 정신의 비행인 것이다.

9/ 개신교 윤리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제3부 “감사에 대하여˝라는 기독교 윤리 전체를 단 하나의 함축성 있는 표제로 요약한다. “우리가 아무런 공로도 없이 기독교 신앙을 통한 은총으로 우리의 불행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는데, 왜 우리는 선한 일을 해야만 하는가? 우리가 온 생명을 다하여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를 표하기 위해서이며, 그는 우리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절망 한가운데서 용서받은 자가 그토록 많은 호의를 베풀어 주신 분의 발아래에 자신의 인생 전체를 두기 원하는 것과 결코 다르지 않다. 그리하여 어떠한 율법도 어떠한 고행도 도달할 수 없었던 그것, 즉 하나님에 대한 헌신의 열정이 아주 진기한 자기이해와 더불어 아무런 애씀 없이 인간으로부터 터져 나온다.
“신자는 선행 행위를 행해야 하는지 아닌지를 전혀 묻지 않고 그 일을 이미 해버린다.”
중세 체제 전체가 의존하고 있는 가설은, 세상에는 하나님의 중심 지점이 있다는 것이다. 인류를 정신생활 전체가 그곳으로부터 관리될 수 있으며, 그것은 세계 문제와 씨름하는 인간들에 대한 중재재판소이자 진리의 문제에서 최고 행정재판소이다. 중세 시대처럼 영원한 진리를 소유한 중심 지점이 있다고 믿는 일반적 믿음이 있었던 한에서는 모든 것이 좋았다. 모든 진리 문제에서 이러한 권위 있는 중심 지침이 초월적 전권에 의하여 어떤 인간을 성사로부터 제외할 수 있다는 것도 극히 정당한 일로 여겨졌다. 중세의 시민사회에서는 교회에서 파문당한 자는 시민적 생활도 불가능했다. 그는 사회적으로도 추방당했다. 사람들은 더 이상 그와 친교 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것을 통해서 시민사회는 사도직의 전권을 인정했던 것이다. 근대의 시작, 르네상스와 함께 나타난 새로운 세계 문화의 시작과 더불어 그것은 서서히 변화되었다. 이 해체는 종교개혁과는 완전히 무관하게 이루어졌다. 인류를 관통하는 거대한 정신의 흐름들을 하나의 중심 지점에서 조정하며 감독하는 것은, 자연과학의 새로운 시작과 더불어, 데카르트* 이래 철학적 사고의 새로운 각성과 경험과학**들의 개선 행렬과 더불어 확실히 불가능하게 되었다.
*르네 데카르트(프랑스어: René Descartes [ʁəne dekaʁt], 라틴어: Renatus Cartesius 레나투스 카르테시우스, 1596년 3월 31일 - 1650년 2월 11일)는 프랑스의 물리학자, 근대 철학의 아버지, 해석기하학의 창시자로 불린다. 그는 합리론의 대표주자이며 본인의 대표 저서 《방법서설》에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계몽사상의 ‘자율적이고 합리적인 주체‘의 근본 원리를 처음으로 확립한 것으로 유명하다.
**경험적 사실을 연구 대상으로 하는 실증적 학문. 자연 과학이나 사회 과학 따위의 논리나 수학의 모형만을 통하여 접근할 수 없는 모든 과학을 이른다. [비슷한 말] 실증 과학ㆍ실질 과학.
일단 제사장 계급의 전권이 추락했을 때, 사람들은 인류의 가장 중요한 전환점들 중 하나에 서게 되었다. 중세의 문화생활을 총괄했던 상부 구조 전체가 허물어졌다. 단지 하부 구조만이, 삶을 창조하고 규정하는 세속적 질서들을 지닌 불경건한 인류만이 살아남았다. 그 결과는 끝없는 영락*인 것처럼 보였다.
*영락: 세력이나 살림이 보잘것 없이 찌부러지는 것
이러한 영락은 예수의 복음 속에 포함되어 있는 가장 값비싼 보배, 즉 세속적 직업 속에서의 노동이 참다운 예배라는 진리를 발견하기 위한 길이었을 뿐이다.
성전이 붕괴되자 세상 전체가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다. 작업장이 교회가 되었으며 조국이 성지가 되었다. 인간의 삶을 건축하는 데 공헌하는 모든 사람은 이러한 위대한 하나님의 성전에서 거룩한 제사장으로서 봉사하는 것이다.
세상과 구분되던 성전 구역, 거룩하신 하나님이 그 외의 장소에서와 다른 방식으로 현존하시는 좀 더 거룩한 장소라는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성전 벽들은 허물어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바로 그것을 통해서 세상 전체가 성전으로 확장된다. 사람과 세상에 대한 의무와 대립되는 하나님에 대한 특별 의무란 더 이상 없다. 자신의 동료 인간들에게 돕는 힘이 됨으로써만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 세상의 모든 장소는 부정하다. 하지만 모든 곳에 은혜의 보좌가 있다. 이 은혜의 보좌는 눈에 보이지 않게 현존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공간적인 장소로서, 이 세상의 모든 곳으로부터 다가갈 수 있으며 어디에서든 완전히 동일한 거리에 있다.
제사장 문화의 종말과 더불어, 하나님의 세계와 우리가 살고 있는 권력투쟁적 세계 간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시작되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두 세계 사이에서 방랑하고 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는 보이지 않는 사랑의 나라, 모든 실존적 투쟁의 바깥에 서 있지만, 다른 한편 세속적인 직업인으로서 투쟁의 한 가운데에 있으면서 세속적 수단들을 사용하여 그 투쟁을 끝내야만 하는 것이다.
세속 직업의 위대함을 표현한 루터의 말로 이 장을 끝맺고자 한다. “제화공, 농부, 그리고 수공업자는 저마다 자신의 세속적 생업을 갖고 있는 동시에 성별된 사제이며 제사장들이다.” 한 가난한 하녀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나는 지금 요리를 하며, 잠자리를 펴며, 집을 청소한다. 누가 나에게 그것을 하라고 명령하였나? 나의 주인님과 주인마님이 명령했다. 누가 그들에게 나에게 명령할 권리를 주었는가?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 아아, 내가 그들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면 좋겠는데, 그렇다면 나는 얼마나 더 행복할까! 마치 내가 하늘에서 하나님께 직접 요리해 드리는 것처럼.”

10/ 개신교 교회
콘스탄티누스의 칙령*으로 소급되는 중세 국가는 진리 문제에 대한 특정한 해결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 국가는 어떤 특정한 종교가 진리이며 그 종교가 국가종교로 인정되어야 한다는 전제 위에 세워져 있었다. 380년에 그라티아누스, 발레티니아누스, 테오도시우스의 황제 칙령 “삼위일체 강요와 가톨릭 신앙”에 의해서 삼위일체의 기독교 신앙이 세계적인 로마제국의 국법으로 채택되었다. 이 법을 위반하면 국가로부터 처벌받을 수 있었다. 이것은 종교개혁 시대 후기까지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에도 여전히 영향을 미쳤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313년, 라틴어: Edictum Mediolanense, 영어: Edict of Milan)은 종교적인 예배나 제의에 대해 로마 제국이 중립적 입장을 취한다는 내용의 포고문이다. 이로써 로마 제국에서 신앙을 가지는 것, 특히 기독교 신앙을 가지는 것에 대한 방해물이 제거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는 311년 갈레리우스가 내린 칙령에 의해 이미 합법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밀라노 칙령은 311년의 칙령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소극적 의미의 기독교 보호에서 적극적 의미의 기독교 보호 내지는 ‘장려‘를 의미하게 되었다. 밀라노 칙령으로 인해 기독교는 탄압받는 입장에서 로마 황제의 비호를 받는 입장으로 크게 격상되었으며, 콘스탄티누스 1세는 기독교를 장려한 최초의 로마 황제가 되었다. 현재 칙령 문서 자체는 내려오지 않으며, 금석문 형태로도 남아있지 않다. 1차 사료로는 유일하게 락탄티우스의 ‘박해자들의 죽음에 대하여‘에 동방 황제 리키니우스가 휘하의 총독들에게 보내는 공식 서한의 형태로 실려 있다.
그러나 진리에 대한 신앙을 이러한 방식으로 헌법에 수용하려는 시도가 포기되자마자, 새로운 국가이념, 프리드리히 대제의 눈앞에 떠올랐던 현대의 프로테스탄트 국가이념이 탄생했다. 이러한 국가는 사상의 자유와 신앙의 자유라는 원칙에 근거한다.
교회와 분리된 이러한 국가에 상응하는 것은, 르네상스 이래로 서서히 모든 분야에서 발전되어 교회로부터 분리되어 나온 새로운 문화다. 이 문화는 교회와 세속 궁전들을 짓는 데 사용된 르네상스 건축이라는 새로운 예술 양식에 나타난다. 영국에서는 셰익스피어 무대가 생겨났다. 그림의 경우 네덜란드와 이탈리아에서 맨 먼저 종교적 소재에서 벗어났다. 그 후 18세기에는 독일 음악의 위대한 전성기인 고전주의자와 낭만주의자의 시대가 온다. 베토벤에 와서 인간의 영혼은 교회의 위안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하나의 독자적인 언어를 발견한다. 이러한 문화발전을 르네상스로부터 독일 관념주의에 이르는 가장 일반적인 관련성들에서도 조망해 보더라도, 인간 정신이 교회의 단일 문화로부터 벗어나서 모든 영역에서 그 독자적인 길을 추구했던 이 거대한 흐름은 더 이상 후퇴할 수 없음을 우리는 알게 된다. 오늘날에는 더 이상 가톨릭교회가 다른 정신운동들보다 우위에 놓일 수 없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가톨릭교회는, 모든 세례 받은 비가톨릭교도들도 실제로는 가톨릭교회에 속해 있으므로 그에 맞게 대우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단지 시간의 바퀴를 되돌리려는 인위적인 시도일 뿐이다. 교회의 지배로부터 벗어난 국가 생활과 세계 문화가 이러한 식으로 각성했다면, 이 새로운 상황에서 교회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중세의 종말과 함께 나타난 새로운 상황은, 그때까지 교회의 본질을 구성했으며 교회의 전체 매력과 대중성의 근거였던 두 가지 것이 붕괴한 것이 그 특징이다. 첫째는 성별된 제사장직의 붕괴이며, 두 번째는 거룩한 공간, 거룩한 행위, 거룩한 대상의 붕괴다.
개신교적 토대 위에서 적어도 독일 국내의 개신교 교회들에 아직 목사가 존재한다면, 이것은 제사장 중심 교회에서와는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목사는 종교적 전권을 갖지 않으며, 어떤 다른 구성원도 이것을 가질 수 없다. 루터는 “목사직은 모든 제사장, 즉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공통된 공적인 직분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그가 교구 일을 관리하고 설교하고 영혼을 보살피는 것은 한 기관의 모든 조직화된 공동 작업에 필요한 일의 분담 차원에서 그 의미가 있다. 후세대에 대한 신앙교육 책임이 목사직에 첨가된다. 목사직이 중세의 성직자가 가졌던 초월적인 광채를 포기하자마자, 목사직은 오늘날 삶에서 가장 희생적인 소명, 특히 현대 대도시에서는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가장 힘든 직분, 동료 시민들에게 감사를 가장 적게 받는 직분이 되었다.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에 더 이상 거룩한 공간, 어떤 다른 장소보다 하나님이 더욱 충만히 현존하실지도 모르는 어떠한 장소도 없게 된다. 또한 은혜의 능력들이 흘러들어 갈 것이라고 여겨지던 대상물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데려가 줄 것이라고 생각되던 거룩한 물건들도 더 이상 없다. 루터는 아주 순수하게 세례에 대해서 이러한 독특한 프로테스탄트적인 성례전 이해를 펼쳐 보인다. 우리는 세례 시의 물도 본질에서는 소가 마시는 물보다 나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 물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과 분리된 그 물은 특별히 다른 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루터에 따르면, 이러한 물에 신적인 중요성을 부여해 주는 것은 오로지 말씀뿐인데, “그 물이 어떤 다른 물보다 그 자체로서 좀 더 고귀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 물에 덧붙여진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그 물을 특별하게 한다. 물에서 핵심적인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과 하나님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루터는 세례에서 이미 옛 성사* 이해를 단숨에 극복하고 프로테스탄티즘의 새롭고 순수한 성사 이해에 도달했다.
*성사(고대 그리스어: μυστριον 뮈스트리온, 라틴어: Sacramentum 사크라멘툼, 영어: Sacrament 새크러먼트) 또는 성례전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혜가 눈에 보이는 방법으로 전달되는, 쉽게 말해서 하느님의 은혜를 받는 기독교의 예식이다. 형태적으로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기독교의 종교적 예식이다. 대한민국에서는 교파별로 개신교는 성례, 성례전으로 부르며 로마 가톨릭교회와 동방 정교회, 성공회는 성사라고 한다.
성찬식 투쟁에서 루터는 강한 상대를 만나 레슬링에서 엄수해야만 하는 선 밖으로 몇 걸음 밀려가는 선수와 같다. 탈선은 다음의 위험스러운 주장을 통해서 발생했다. “비록 심판에 이르는 불신자들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성례전적 물질들 속에서 실제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받는다.” 인간이 말씀에 대한 믿음 없이도 하늘의 식사를 받는다는 생각이 가능하게 되자마자, 우리는 다시금 거룩한 것, 초월적인 힘으로 충전된 거룩한 성체를 갖게 된다. 그렇게 된다면 오직 믿음을 통해서, 말씀의 감명을 받아, 오직 양심 속에서와는 다른 어떤 방법, 즉 성체를 먹음으로써 천상의 힘들과 가까워질 수 있게 되는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프로테스탄트적 입장을 견지하기를 원한다면 루터의 성찬 교리를 그의 세례 교리에 맞추어 수정해야만 한다. 물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물이 궁극적으로 가리키는 하나님의 말씀이 더 중요하다고 말해야 한다. 교회가 성별된 인간과 성별된 대상물, 성별된 성직자와 성별된 성체를 의식적으로 완전히 포기함으로써 교회는 강력한 기득권을 포기한 것이었다. 때문에 사람들에게 그 어떤 압박을 가하여 그들을 자기에게 종속시킬 어떠한 수단도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교회가 눈에 보이는 모든 권력 수단을 의식적으로 포기하게 되면, 바로 그리스도 교회의 참다운 본질이 나타난다. 서로 무관하게 완전히 상이한 삶의 상황에서 살던 두 사람이 예수의 제자 집단으로 인도되어 들어와 서로 알게 될 때 즉시 드러난다. 그들은 놀랍게도 자신들이 어릴 때부터 서로 알았던 것처럼 그토록 친밀한 형제들임을 발견한다. “여기에는 유대인도 헬라인도 없다.” 그들은 아마도 계급 증오를 통해 분리되어 있는 서로 다른 사회 계층에 속할지도 모르며, 완전히 상이한 교양을 지녔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형제 관계의 힘은, 인간 사회의 계급 간에 세워져 있는 담들을 허물어뜨린다. “여기에는 종도 없고 자유자도 없다. 너희들은 함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국가와 민족들처럼 분명히 실제 하지만, 모든 세속적인 조직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가족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세속적인 가족 속에 태어나듯 하나님의 가족 속에 자연적으로 태어날 수는 없다. 하나의 협회, 가령 사격 동호회나 보트 클럽에 들어가듯이 자기 자신의 결정에 의해 들어갈 수도 없다. 하나님 자신만이, 오로지 하나님 자신의 권능에 속한 방식으로 사람들을 이러한 가족 속에 받아들일 수 있다. 하나님의 교회 안에는 강한 신분 구별이 있다. 형제들과 자매들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버지들’, ‘어머니들’, 그리고 단지 우유만을 소화할 뿐 단단한 음식을 먹지 못하는 ‘미성년의 아이들’도 있다.
인간의 제도들을 통해서는 교회를 만들 수도 유지할 수도 없다. 교회는 단지 사람들이 말씀을 듣는 중에 “말씀에 의해 태어나든지” 혹은 “위로부터 태어남”으로써 세워지며 존속될 수 있다. 실로 이것은 하나님의 일이다.
교회는 교회 공동체의 영원한 목적과는 반대로 모든 수단을 다해서 권력을 획득하며 소득을 증대시키려는 세속적인 목적을 추구하려는 세속적인 세상 권력들에 둘러싸여 있다. 독립적이고 생명력 있는 그리스도 공동체는 세상에 하나의 방해물이며, 세상 사람들의 양심을 일깨우는 교회는 세상 자체에 불안의 근원이다.
교회가 교회의 외적인 조직, 국가와 국가의 통치기관들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일 때만 교회는 국가와 민족의 양심이 될 수 있다. 모든 세속적인 단체들은 지도권을 위임받은 지배 권력이 권위적인 방식으로 부하들에게 법률을 부과하며, 이러한 법률에 따라 살게끔 형벌의 위협으로 강요함으로써 질서가 유지될 수 있다. 그리스도의 교회 공동체에도 상위와 하위, 지도자와 추종자들이 존대해야 한다. 그러나 교회 지도자들은 외적인 권력 수단들로 무장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의지에 반하는 무엇인가를 강요하기 위한 형벌 권력을 갖지 않는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권력 수단은 말씀이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말씀은 가장 연약한 무기다. 그럼에도 말씀은 세상의 모든 힘보다 강력하다. 사람들을 내적으로 승복시켜 예수의 통치 아래로 데려올 수 있기 때문이다.
전체 세상과 그것의 생활양식으로부터 독립적인 교회는 오로지 살아 계신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 그리스도는 성령을 통해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그의 교회 공동체를 최후의 승리 때까지 끝까지 인도하신다. 아브라함 카이퍼가 말하듯이, 교회는 “하늘로부터 이 지상에 이식된 식민지이다. 그것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고유의 기반 위에 세워져 있으며, 고유의 양식으로 건설되며, 이 세상의 채석장에서 공급해 주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돌들로 건축된다. 그 운영면에서는 자연의 법칙들과 세속 입법자들의 법칙들에 구속되지 않으며, 오로지 그의 창립자이신 하나님의 생명의 법칙에만 종속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세상의 모든 기관에 대하여 독자적이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교회는 국가와 민족의 양심이 되어, 모든 새로운 상황에서 하나님의 요구들을 혁명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도록 혁신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
국가권력으로부터 독립적인 교회는 단지 민족의 양심일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생존경쟁에서 생겨나는 상처들을 치유하는 선한 사마리아인이며 도와주는 힘이다. 모든 자선봉사는 어떠한 대가도 바라지 않는 노동이다. 현재의 공공생활에서 복지를 위한 거의 모든 노력은 원래 교회로부터 나온 것이다. 교회는 사회봉사활동의 개척자들인 비헤른, 뷔르템베르크의 국내 선교의 아버지 구스타프 베르너, ‘누구의 아이도 아닌 아이들의 아버지’인 영국의 바나도와 같은 인물들을 배출한다. 이들은 영락한 자들을 돕는 사회복지사업의 선구자들이었다.
교회 기관들의 이러한 모든 ‘업적’은 그것들이 아무리 가치 있다 할지라도 교회의 본질은 아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는 몸이며, 놀랍도록 많은 지체를 가진 유기체다. 살아 계신 주님이 외부족인 형태들에 이르기까지 그의 독특한 특질을 교회에 부여해 주신다. 교회는 죄를 용서하고 사람들을 그의 왕국으로 초청하는 그리스도의 전권에 의해서만 산다. 이러한 의미에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도신경의 신앙고백은 가치가 있다. “나는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를 믿습니다.”

역자 후기
그(칼 하임)는 20세기 초, 특히 1920년대 독일 개신교 신자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던 가톨릭교회로의 역개종과 가톨릭교회의 풍부한 예전, 영성 등에 막연한 향수를 느낀 나머지 종교개혁의 근본 정신을 망각해 가는 현실을 염두에 두고 이 책을 저술했다. 따라서 가톨릭교회의 신앙의 현대적인 변모와 개선에 대한 민감한 이해가 이 책에는 결여되어 있는 듯 보일 수도 있다. 특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에 저술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한계를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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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의 본질 - 루터의 영혼에서 시작된 종교개혁의 핵심
칼 하임 지음, 정선희 외 옮김 / 복있는사람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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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과 개신교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지만, 그 갈라진 노선에는 큰 차이가 있다. 가톨릭은 교황이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자로서 하나님의 지상국가가 가톨릭 교회를 통해 임했다고 보는 반면, 개신교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임명되신 그리스도의 나라는 아직 임하지 않았다고 본다. 교황직의 탄생 배경과 중세 교회의 역사, 현재 개신교회의 본질을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성경을 바로 알고 믿음을 공고히 하는데 도움을 주는 책이다.
별점: ★★★★★



해설의 글
신학은 하나님을 가르치고, 하나님께 가르침을 받고,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학문이다. 자연과학은 그것이 진정 학문이라면 하나님과 관련되는 학문이며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요청하는 학문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칼 하임의 신학은 선교적이고 봉사적인 신학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와 그 절정인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은 단지 도덕과 정신의 영역에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활동과 모든 학문 영역과 관련된다는 점을 일관되게 주장했다.
칼 하임 신학의 현대적 의미는 그가 주창한 두 가지 중심 테제로 요약된다. 첫째, 무의미와 절망의 현대 상황에서 인간에게 남겨진 유일한 삶은 하나님을 믿는 길이다. 둘째, 신학은 하나님을 배제하려고 하고 이데올로기화하려는 자연과학*과 부단히 대화해야 하며, 자연과학은 그 큰 맥락 가운데서 성찰되고 기독교적 신앙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연과학(自然科學, 영어: natural science)은 자연현상에 대한 이해를 조직화한 지식의 체계이며, 과학의 한 분야이다.
베드로에게 주어진 사도적 특권과 사명이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황권을 보증한다고 여기는 마태복음 16장 18절에 대한 해석 차이에서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라는 말씀의 진의가 무엇인가? 1870년에 열린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 말씀과 누가복음 22장 31~32절에 근거해 하나님의 교회 전체에 대한 최고 관할권이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베드로에게 직접 위임되었다는 것을 교리로 선포했다.
하임은 마태복음 16장 18절의 “반석”을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 그리고 2차적으로는 사도들과 선지자 집합체라고 본다. 그러면서 마태복음 16장 18절의 반석 말씀의 효력은 어디까지나 베드로에게 국한된다고 본다. 그렇기에 칼 하임은 마태복음 16장 18~21절을 근거로 베드로의 교황권 상속 교리를 도출하는 가톨릭 교리는 성서적으로 지지될 수 없다고 확언한다.
가톨릭교회는 예수님의 신적 사죄대권이 교황과 사제들에게 전유되었다고 믿는 반면, 모든 프로테스탄트* 예배는 그리스도의 배타적 사죄대권만을 고백한다.
루터가 와서 복원시킨 십자가에 달린 가난한 그리스도는 권력 장치를 통해 인간의 외적 행동만 지배하는 세속적 군주가 아니라 인간의 양심과 내면을 설득시키고 감화감동시켜 마침내 정치 및 사회 체제 전체를 바꾸도록 격동하시는 영적 통치자다. 영적 통치자인 그리스도는 권력과 무력 대신에 인간 양심의 자발성을 추동시켜 그분의 통치를 관철시킨다.
*Protestantism / 改新敎: 16세기 무렵, 종교 개혁의 영향으로 가톨릭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온 복음주의 성향의 기독교 교파들을 두루 일컫는 말이다. 복음주의 교회라고도 부른다. 종교개혁 시기 개신교의 원어 표기는 ‘Protestant‘에서 유래했기에 일반적으로 프로테스탄트로 한다. 기독교에서 어디까지가 개신교의 범주인지에 대한 정의는 분명하지 않지만, 대개 종교 개혁 1세대 종파들로부터 거듭 파생된 종파들도 일반적으로 포함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가톨릭의 그리스도 이해에 따르면, 이미 예수의 부활과 함께 우리는 예수의 권력 통치 시대에 있다는 것이다. 반면 프로테스탄트의 그리스도 이해에 따르면, 세계정세의 긴장 해소는 세상의 종말 때에야 이뤄진다. ‘개신교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 승천해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앉아 세상을 통치하지만 재림할 때까지는 십자가에 달린 주의 자격으로 세상을 통치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양심 영역에서부터 통치권을 행사하신다. 그는 행동주의 심리학적 행동교정을 강제하지 않으며, 사람들을 설복시키고 사람들의 신뢰와 사랑과 믿음을 통해 그들의 마음속에 들어가 감화감동시키는 방식으로 통치하신다. 개신교적 신념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세상 지배가 실현되는 시점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예수께서 세상 권력의 대리자인 빌라도와 마주 서서 그에게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라고 말했던 그 상황의 연장선상에 있다.
루터는 저급한 정신의 도취 상태를 통해서가 아니라 명료한 정신활동, 곧 완고한 고독 속에서 100% 정직하고 벌거벗은 양심의 자아성찰과 사고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갈 수 있음을 깨달았다. 이 자아성찰과 사유는 말씀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말씀과 낯선 영원 무한한 것에 대한 신비주의적 체험이나 도취 상태를 통해서가 아니라, 말씀과 그 말씀에 대한 지각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발견한다.
개신교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지금 배울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아마도 이 세상을 그리스도 통치 아래 수렴시키고 복속시키려는 스콜라 신학*적 전체성일 것이다. 온 세상 모두를 다 통치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답게 개신교는 개교회주의**, 타계주의적 개인구원론, 예정설*** 등에만 집착하지 말고 온 세상 만유를 다 품고 통치하고 구원하시려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마음에 공감하는 복음의 교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스콜라 신학은 보통 서구 역사에서 중세라고 명명한 시대의 특징적 신학 사조 또는 신학 방법론을 지칭하는 말로써, 주로 ‘이성과 신앙의 조화‘를 주제로 다루었다. ‘스콜라‘는 중세에 신학과 철학을 가르치던 장소가 수도원의 학교(스콜라)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개교회주의란 교회의 인적 물적 사용을 개교회 유지와 확장에 최우선권을 부여하는 태도와 의식을 말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신자 위에 신자 없고 신자 밑에 신자 없듯이 교회 위에 교회 없고 교회 밑에 교회 없다. 이것이 개교회주의의 원리이며 동시에 성경 속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는 단순한 진리이다.
***예정설은 기독교의 구원론에 관한 신학적 이론 중 하나이다. 인간의 구원은 인간의 노력이나 행위와 상관없이 전적으로 신으로부터 선택에 의해 이루어지며, 이에 따라 선택받은 영혼들이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이론이다. 5세기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 이론에서 출발하였다. 종교개혁 이후 대다수의 개신교 교파들이 보편적으로 이 입장을 택하고 있는데, 특히 개혁교회에서 예정설을 매우 강조한다.

1/ 가톨릭교회의 매력
사람들은 자연종교의 원시적인 마술에서부터 엄격한 유대교적 율법 종교 및 신비감의 섬세한 영혼 서약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총체적인 종교적 추구를 가톨릭교회가 포용하고 있다는 바로 그 점에서 가톨릭교회의 위대함을 발견한다. 프로테스탄트가 인간 속에 있는 많은 것을 부정하는 반면, 가톨릭교회는 인간 속에 있는 모든 것을 긍정한다. 즉 가톨릭은 인간 전체를 긍정한다는 것이다.
가톨릭의 위대한 현대주의자 조지 티렐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타 종교들과 유대교와 그리스-로마와 이집트의 이교적 세계 및 그것과 관련된 문화들과의 여러 형태의 접촉, 그것을 우리는 가톨릭교회의 가장 큰 공로와 장점 중 하나로 여긴다. 궁극적 의미에서 세계의 모든 종교와 하나임을 아는 것…., 이것이 가톨릭적인 것이다”
모든 시대의 정신적 자산을 경외심에 가득 차 향신하며 모든 꽃으로부터 꿀을 흡입하려는 현세대의 보편주의 열망과도 일치한다.

2/ 교회 분열의 원인
루터는 선택할 수 있었던 가장 온건한 방식을 택했다. 우선 면죄부 악용 상황을 교회 지도층이 인지하고 있는지 서면으로 문의하고 나서, 면죄의 효력에 대한 학술적 토론을 요청했던 것이다. 학술토론 제의를 추동했던 것은, 교회 제도나 교리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면죄부를 악용함으로써 큰 내적 위험 속으로 끌려들어 가는 인간 영혼에 대한 한 사제의 불안이었다. 루터는 교황과 교회의 의지와는 별개로, 양심 없는 면죄부 설교자들의 죄 때문에 면죄의 의미에 대해 위험한 오해가 발생했다고 확신하여 그에 대항했던 것이다.
교회가 그에게 가한 충격을 루터는 결코 잊지 못했다. 이것이 이후 루터의 모든 행동의 발단이 되었다. 이로써 그는 가톨릭교회가 세워져 있는 전체 근거에 대해 숙고하기 시작했다. ‘교황은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자’라는 주장도 거짓을 수 있지 않을까‘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때야 비로소 그는 교회의 교리적 기초들을 의문시했으며, 적그리스도인 교황과 엄숙하게 절교하고 파문장을 불태워 버리는 일을 감행하는 이단자가 되었다.
왜 독일 국민의 마음은 로마 교회로부터 돌아섰는가?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루터의 책만을 읽을 필요는 없다. 우리는 한스 작스, 알브레히트 뒤러, 울리히 폰 후덴과 당시 수많은 영혼들 속에 일어났던 일을 큰 소리로 분명하게 진술했던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독일 국민이 로마 교회로부터 돌아서게 된 이유들을 들을 수 있다. 첫 번째 감정은 기만당해 왔다는 것이다. “우리는 속았다. 하나님과 영혼 사이의 깊은 고독 속에서만 결정될 수 있는 성스러운 양심의 일이, 외국의 세계 권력에 의해 자본주의적 착취 대상이 되었다. 사람들은 경제적 이득을 얻기 위해, 외국으로 넘어갈 돈을 마련하기 위해 우리 양심의 불안을 이용했다.”두 번째 감정은 종교적 질곡을 벗어나고자 하는 해방의 욕구였다. “우리는 양심상의 일들이 패권정치나 금권정치 문제들과 불운하게 얽혀 있는 상황으로부터 벗어나야만 한다. 우리는 이러한 세속 교회 뒤편의 근원인 그리스도 그분에게로, 즉 인간들의 쓰레기에 의해 파묻혀 버린 원천으로 돌아가야 한다”
16세기 르네상스 시대 교황 제도에 대한 사람들의 이러한 비판은 오늘날에는 과거에 속한다. 그 이후 로마 가톨릭교회도 많은 것이 개선되었기 때문이다. 가장 큰 폐해들은 시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로마 가톨릭과의 분리를 야기했던 상황들은 독일인들의 영혼에 지울 수 없이 깊이 각인되었다.

3/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교회가 교회력을 따른다고 해서 과연 가톨릭교회가 주님의 의도한 교회일까 하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 최종 확정된 것은 아니다. 석가모니는 자신이 신적 존대로 숭배될 것을 결코 알지 못했다. 그는 한 사람의 철학자로서, 무거운 인생의 고난 속에서 모든 세속적인 향락의 무상함을 깨달았으며, 그로써 동포 인간들에게 모든 고통으로부터 구원에 이르는 단순한 길을 권했다. 그것은 집착적으로 살려는 의지의 포기다. 부처가 죽은 후 그의 가르침이 사도적 고승들에 의해 북방 국가들에 전했을 때, 그를 기리고자 그의 이름에 따라 불리는 하나의 종교가 생겨났다. 사람들은 모든 기도와 경건에서 끊임없이 그를 불렀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화된 불교는 부처가 원하던 것을 거의 그 반대의 것으로 변질시켰다.
불교 역사의 예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바는, 인류의 스승을 찬미하려는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그의 추종자들이 그를 오해하고, 그의 이름을 계속 부르면서도 그가 원했던 것과 반대되는 일을 하는 것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가톨릭교회의 풍부한 그리스도 경배에 대해서도 무의식적으로 그런 의문이 일어난다. ‘만일 예수가 이러한 방식의 숭배와 찬미를 원하지 않을뿐더러 그의 이름으로 행동하는 이런 주교 계급을 전혀 원치 않고 완전히 다른 것을 원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두 종파는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그리스도 안에 모든 지혜의 보물이 숨겨져 있고 세계의 수수께끼의 해답이 있으며,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 봉인된 생명책을 펼친다는 것은 두 종파 모두 확신하는 신조다.
베드로에게 했던 예수의 말씀,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라는 말씀*의 진의가 무엇인가. 바티칸 종교회의는, 복음서 증언에 따라 하나님의 교회 전체에 대한 최고 관할권이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거룩한 사도 베드로에게 직접 약속되었고 위임되었다는 것을 교리로 받아들이고 장엄하게 선포했다.
만일 예수께서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셨다면, 그럼으로써 그가 신앙과 삶의 문제들에서 무오한 권위를 지닌 하나의 직분을 세우려고 하셨다면, 프로테스탄트는 처음부터 예수의 저주 아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루터는 이러한 직분에 더 이상 순종하지 않았고 그렇다면 그리스도에 대한 그가 죄를 범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사실상 교황권으로부터 독립적인 교회의 설립 권리에 대한 원칙적인 질문 앞에 서게 된다.
프로테스탄트 진영에서는 그 전체 단락을 삽입 구절로 설명하거나 처음부터 반대되는 의미로 해석함으로써 예수의 말씀을 완화시키려고 했다. 하르낙은 반석 관련 구절에서도 유사하게 그 말씀을 더 이상 베드로가 아니라 교회에 적용하는 삽입이 다음과 같이 일어났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반석 위에 나의 교회를 세울 것이며, 그리고 음부의 문들이 그것을, 즉 교회를 정복하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삽입은 그 교회의 창설자를 찬미하려고 했던 로마 교회에 의해 일어났을 것이다. 나는 감히 하르낙의 가설에 근거하여 본래 복음서들에 쓰여 있는 말씀을 밀어낼 수는 없다.
우리는 그 말씀을 신양 사상 전체 문맥에 집어넣어 보아야만 한다. 하나님의 설계도는 에베소서 2:20 이하에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0~22)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 시몬 바요나야, 너는 복이 있다. 너에게 이것을 알려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시다. 나도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다. 나는 이 반석 위에다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 죽음의 문들이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복음서‬ ‭16:15-19‬ ‭RNKSV‬‬)
에베소서 말씀에서 우리는 건축기사 하나님의 최초의 석층 계획도를 갖는다. 전체를 떠받치고 있는, 하나님에 의해 토대로 놓인 맨 아래층이 보인다. 모퉁잇돌은 예수 그리스도이며, 기초 벽의 마름돌들은 선지자와 사도들이다.
영적인 공동체 안에는 그리스도 외에도, 전체 교회를 위해 독특한 중요성을 지니며 그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전권, 즉 미래의 세계까지 미치는 전권을 위임받은 인물들이 존재한다. 떠받치는 역할을 하는 기초석들에 비견되는 인물들이 있는 것이다. 바울은 베드로에게 하신 예수의 말씀을 다시금 밝게 조명해 주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는 ‘기둥’들로서 간주되었던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에 대하여 언급한다(갈 2:9). 그러므로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건축물을 떠받치는 기둥들이었다.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즉 “나는 너를 반석으로, 기초석으로, 기둥으로 만들어, 그 위에 살아 있는 돌들로 전체 집이 세워지도록 하겠다. 나는 너에게 아주 특별한 전권을 준다. 나는 너에게 천국의 열쇠를 준다. 네가 내릴 결정들은 초세속적인 효력을 가질 것이다. 네가 땅 위에서 매는 것을 또한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다”라는 말씀이다.
그 말씀이 분명하게 의미하고 있는 것은, 베드로가 사도로서 하나의 사명, 즉 전체 교회 공동체에 대해 상속될 수도 없고 바로 다음 세대에게도 양도될 수 없는 존엄한 직분을 얻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위는 절대적으로 유일회적이다. 이것이 기초석과 그것이 떠받치고 있는 건축물에 대한 비유의 의미다. 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본래의 의미대로 이해하자면, 사도 베드로에게 하나님의 영적인 건축물 속에서 절대로 반복될 수 없는 유일한 지위를 부여해 주었기 때문에 모든 형태의 교황권은 배제되며 금지된다. 사도직 계승이라는 전체 이념은 그 자체가 모순인 것이다.

4/ 가톨릭 교회의 그리스도 이해와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그리스도 이해
예수는 누구였는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다소 영향력 있는 사람이라면 부지중에라도 어떻게든지 그에 대한 태도를 결정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가 어느 누구도, 석가도 모하멧도 공자도 주장하지 않았던 권리, 즉 사람들에게 ‘너의 죄가 용서받았다’라고 말할 사죄대권을 가졌다고 스스로 주장했다는 점이다. 마가복음에 따르면, 그는 스스로 “인자*는 ……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라고 말했다. 그는 불가능한 일을 하려 했으며 어떠한 인간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한 신성모독자인가, 아니면 실제로 하나님께 위임받은 사죄대권을 가지고 말하고 행동하며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자인가?
예수의 사죄대권은 오로지 유일하게 인간 속의 이러한 보이지 않는 내적인 사건과 관계되기 때문에, 이러한 사죄대권 요구의 권리를 옹호하거나 반대하기 위해 과학적 논증들을 시도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
*“내가 밤에 이러한 환상을 보고 있을 때에 인자 같은 이가 오는데,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계신 분에게로 나아가, 그 앞에 섰다. 옛부터 계신 분이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셔서, 민족과 언어가 다른 뭇 백성이 그를 경배하게 하셨다.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여서, 옮겨 가지 않을 것이며, 그 나라가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다니엘서‬ ‭7:13-14‬ ‭RNKSV‬‬)
예수는 한 세계의 종말을 임박한 것으로 기대했다. 예수께는 어쨌든 종말이 온다는 사실, 세계 사건은 종결점을 향해 달려간다는 사실이 시기 규정보다 더 중요하다.
실제적인 삶의 관점에서 고찰할 때, 예수의 종말 기대, 소위 종말론적 세계관은 무엇을 의미할까? 하나님과 영혼의 화해에 대한 문제와 행복과 권력에 대한 문제 중에서 전자의 것, 화해에 대한 문제만이 해결되었다는 것이다. 그와 반대로 두 번째 문제, 권력과 행복에 대한 문제는 아직 미해결되었다. 하나님은 그것의 해답을 종말까지 유보하셨다.

5/ 하나님을 향한 두 개의 대립된 길
마태복음 25장 31절 이하에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했다”라는 주님의 칭찬에 “우리가 어느 때에 그리하였나이까?”라고 응답하는 일단의 사람들에게 그는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라고 대답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당신이다. 비록 그들이 그것을 전혀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모든 인간은 항상 그와 관계가 있다. 그러므로 신앙 공동체만이 그가 영으로 있는 그리스도의 육체가 아니다. 전 인류가 넓은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인 것이다. 그리스도는 비밀스러운 방법으로 인류 전체의 역사에 관여하고 있다. 인류사 전체는 눈에 보이지 않는 중심점인 듯 그리스도 주위를 움직인다. 그러므로 두 종파에게는 그리스도의 신적 대권에 대한 믿음만이 아니라, 세계 역사를 통과해 걸어가는 살아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도 공통적이다.
하나님의 사자인 그가, 멸시받는 자로서, 조롱당한 자로서 세상을 통과해 갔다. 언제 이 무시무시한 긴장이 해소되며 언제 반전이 나타날 것인가? 가톨릭의 그리스도 이해에 따르면, 반전은 이미 예수의 부활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 이래로 우리는 예수의 권력 통치 시대에 있는 것이다. 그와 반대로 프로테스탄트의 그리스도 이해에 따르면, 세계정세의 긴장 해소는 현재 세상의 종말과 더불어 비로소 오게 된다.
가톨릭의 그리스도는 지금은 지상에 대한 전제왕권을 획득했다. 가톨릭교회는 하나님의 지상 국가이며,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시작된 그리스도의 왕권 통치라는 것이다. 대관식에서 교황에게, “그대는 지도자들과 왕들의 아버지이며 전 세계의 지배자이며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자임을 알라”라고 선포한다.
중세 가톨릭교회의 그리스도 이해에 따르면, 이러한 섬김을 통한 내적 통치는 과거, 즉 예수의 생애에서 가난하고 비천했던 처음 짧은 시기에 속하는 것으로 여긴다. 그리스도의 부활 이래로 우리는 두 번째 단계인 권력의 시기로 들어섰다는 것이다.
원칙적으로 예수회*는 이단자 모두가 사형을 받을 만하다는 교리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이러한 교리는 오늘날 더 이상 사용되지 않지만, 원칙적으로 폐기된 것은 아니다.
*예수회(라틴어: Societas Iesu)는 로마 가톨릭교회 소속 수도회이다. 1534년 8월 15일에 군인 출신 수사였던 이냐시오 데 로욜라에 의하여 설립되었다.
프로테스탄트적인 그리스도 이해에 따르면, 이 세상에서의 권력 문제가 아버지 하나님에 의해 해결될 그 시간, 그 위대한 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세상 지배가 실현되는 시점은 개신교적 신념에 따르면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첫 번째 문제인 죄의 문제는 십자가에서 해결되었다. 그러나 해결되어야만 하는 두 번째 문제인 권력의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세계사의 드라마는 아직도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라고 말했던 그 당시 그 지점에 서 있다.
그리스도는 세계 상황의 긴장 해소와 현 존재의 무시무시한 대립 상황의 해결은 종말에 가서야 있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회심의 기회를 줄 것이기 때문이다. 신랑의 도착이 지체되는 것, 그것이 기다리는 열 처녀에게 여러운 시험이다. 그리고 그들 중 절반만이 그 시험을 통과한다.
신구교 두 종파를 갈라놓는 그리스도 이해에 대한 이러한 근본적인 차이를 일단 인식했다면, 우리는 대립의 핵심을 이해한 것이다. 이외의 모든 것은 단지 그로부터 나온 결과일 뿐이다.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계 11:15)라고 말할 그 순간이 이미 온 것이라면 그것은 장엄할 것이다. 이러한 순간이 도래했다는 환상만이라도 생겨난다면, 우리 속에 있는 모든 것은 해방감을 느끼며 동경에 가득 차서 환성을 울리게 된다. 교황 제도의 매혹적인 매력은 여기서 발산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해결의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도 믿음 안에 살고 있는 것이지, 보는 것 속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의 지상 통치가 완전히 실현되는 저 순간을 끌어오는 것은 우리의 능력 밖의 일이다.
권력 인상들과 신비적 도취 상태들은 집단적 암시하에 공유될 수 있지만, 진리의 인식과 양심의 경험들은 단독자적인 개인의 체험들이다. 루터는 우리가 참다운 의미로 하나님 앞에 서는 그때, 즉 죽을 때에는 어떠한 높은 권위도 소용없게 되며 그리하여 우리는 완전히 혼자가 된다고 되풀이하여 역설한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신앙고백을 두 개의 명제와 반명제로 요약할 수 있다.
1. 우리는 저급한 정신의 도취 상태를 통해서가 아니라 명료한 정신활동, 곧 우리가 완전한 고독 속에서 우리 자신으로 돌아오게 되는 정신활동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갈 수 있다. 신비주의적 체험, 혹은 저급한 것이든 좀 더 고상한 것이든 마취상태를 통해서가 아니라 말씀과 그 말씀의 정신적인 지각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발견한다.
2. 하나님은 단지 소스라쳐 놀라 일깨워진 양심에 의해서만 발견될 수 있으며, 도덕적으로 무관심한 권력 체험이나 권위에 대한 복종을 통해서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프로테스탄트적 입장은 루터가 보름스 의회*에서 자신의 주장들을 철회하라는 요구에 대해 제기한 답변에 ”정신의 명료함, 말씀 그리고 양심”이라는 프로테스탄티즘의 모든 기본 요소가 표명되어 있다.
*보름스 의회(Diet of Worms, Reichstag zu Worms) 또는 보름스 제국의회는 1521년 3월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가 보름스에서 제국의회를 소집하고 종교 개혁가 마르틴 루터를 소환해 루터의 견해를 심의한 사건을 말한다.

6/ 신령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
말씀은 하나님을 발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말씀이 정신의 창조자이기 때문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모든 영적인 활동은 말씀들로 표현될 수 있어야 하며 말씀으로부터 태어난다.
가톨릭교회는 모든 평신도가 교리를 이해해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는다. 가톨릭 신자들은 교회가 믿고 있는 것을 믿고 있다고 말하기만 하면 된다. 이해하는 것은 신학자들의 문제다.
그리스도의 진짜 신부이며 우리의 성스러운 어머니인 가톨릭교회에게 복종할 준비가 항상 되어 있어야 한다. … 우리는 가톨릭교회와 완전히 같은 모양이 되며 완전히 일치하기 위해서, 만일 교회가 검다고 규정했으면 우리 눈에 희게 나타난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것을 검다고 선포해야만 한다. 이 점은 예수회 교육에서 항상 반복된다. 우리는 오성*을 우리의 수도원장과 일치시켜 그가 명령하는 모든 것을 합리적이라고 간주하며 우리의 판단을 완전히 그의 판단에 복종시키는 것이다. 상급자가 너 자신의 판단이나 견해 혹은 능력과 모순돼 보이는 어떤 것을 너에게 명령한다면, 모든 인간적 이유와 생각들을 지양한 채 꿇어앉아, 네가 홀로 있을 때 복종의 맹세를 되풀이하라. 예수회의 견해에 따르자면 그것은 우리에게 하나님께 가는 길을 열어 주는 매우 특별한 공로다.
*오성: 기쁨, 노여움, 욕심, 두려움, 근심
이에 대해 프로테스탄트들은 ‘아니요’라고 대답해야 한다. 우리가 스스로 눈멀게 하여 우리 자신의 고유한 판단을 포기한다면, 우리는 바로 그 속에서 우리가 유일하게 하나님을 볼 수 있고 파악할 수 있는 그 빛, 즉 우리의 영적인 생명을 꺼버리는 것이다. 의심에 대한 모든 강제적 억압은 양심을 거스르는 긴장이다. 프로테스탄트적 입장에서 고찰한다면, 우리가 알게 된 가톨릭교회의 영적 생활의 억압 양식은 모두 하나님과 우리의 교제에서 위험한 걸림돌이다. 첫째, 정신적으로 저급한 의식몽롱 상태에 빠짐으로써 억압될 수 있다. 두 번째, 이해하지 못한 것을 참되다고 생각하는 데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세 번째, 예수회의 교사들에 의한 복종훈련이라고 추천되는 이른바 자기 맹목화, 즉 우리에게 오는 항변들과 떠오르는 의심을 의지 행위를 통해서 강제로 억제하려는 시도다. 우리는 하나님의 신령과 진리 속에서만 예배할 수 있다.

7/ 양심의 종교
수도사 루터가 양심가책자였으며, 옛날부터 수도원에서 가장 진지한 수도사들에게 빈번했던 현상, 즉 중세 후기 도덕신학이 쇄심증이라고 칭했던 정신병을 앓고 있었다는 가톨릭 역사가들의 말이 전혀 부당하지만은 않다. 이것은 어떤 종류의 진기한 병인가? 둔감한 보통 인간은 그 병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몇 달 만이라도 하나님의 한 가지 계명, 가령 ‘순결하라’는 계명이나 ‘하나님을 모든 것보다 사랑하라’는 계명을 충실히 지키려고 시도해 본 섬세한 영혼을 가진 인간이라면, 이러한 병이 우리에게 모두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누구나 즉시 깨닫게 될 것이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이 ‘전부 아니면 전무’만이 존재한다는 것이 루터의 수도원 투쟁들의 근원이다. 기도를 할 때면 그 문제가 그를 괴롭혔다. ‘너는 기도할 때 참으로 온전한 하나님 사랑에 의해 하였느냐? 그것이 없다면 기도란 단지 죄에 불과하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교회의 성사도, 고해성사나 고해석도 그에게 아무런 평안을 마련해 줄 수 없었다. “그는 날마다 고해하며 가장 작은 일도 참회하며 과거의 일도 되풀이하여 참회한다.” 그러나 그는 “실제로는 이전과 동일한 인간이었음을” 깨닫는다.
선교사들의 집은 양심의 짐을 벗기를 원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른 아침부터 포위되었다. 감히 참회를 할 수 없었던 많은 사람들은 원시림으로 가서 목매어 자살했다.
하나님은 어떤 강요된 헌신도 원하시지 않는다. 이것은 온전한 마음과 온전한 영혼으로서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의무와 당위적 강제와 강압의 모든 불순물이 사라진 마음의 가장 깊숙한 열망으로부터 탄생한 의지, 완전히 자유롭고 온전한 의지만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한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지옥으로 보낸다 할지라도 기쁘게 가야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늘에 들어가기 위해 수도 생활이나 세속 생활을 영위할 수도 있는데, 거기에는 항상 또 다른 동기인 자기애가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 반쪽의 마음만을 드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참으로 알게 되자마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절망할 수 있을 뿐이다. 어떠한 인간도 우리를 이러한 절망으로부터 구원할 수 없다. 만일 이러한 상태에서 도움, 즉 멸망으로부터의 구원이 있을 수 있다면, 이것은 완전히 무조건적인 용서 가운데서만 가능하다.
우리 편에서 하나님을 움직여 우리를 용서하도록 하게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일조차 불가능하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로는 단지 하나님에 대한 반항 속으로 한층 깊이 들어갈 뿐이며, 하나님으로부터 한층 멀어지게 된다. 만일 우리가 기적적인 방법으로 도움을 받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에 대해 절망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한 절망 속에 있다면, 우리는 곧 깨닫는다. 이 세상에서 아직 도움이 가능한 것이라면, 그 도움은 하나님으로부터만이 올 수 있다. 하나님이 그 일을 시작하셔야만 하며, 그가 그것을 완성하셔야만 한다. 하나님은 그에 대한 우리의 관계를 우리의 아무런 협력 없이 완전히 새로운 토대 위에 세우셔야만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돕고자 하신다 하더라도, 그가 우리를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우리 편에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은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어떠한 인간적인 생각도 미칠 수 없는 한 방법을 택하셨다. 하나님은 여러 백성 중에서 한 백성을 제사장 백성으로 선택하여 이 백성으로부터 나온 한 사람에게 전권을 영원히 부여하며, 그의 이름으로 구원과‘화해의 말’을 하며, 이 구원의 메시지를 그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서 확증하는 방식으로 구원의 방법을 정하셨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계셨으며, 세상을 그 자신과 화해시키셨다.” 예수가 최초 등장 시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을 때, 유대인들도 알았다. 그가 하나님을 모독한 자이거나, 그때에 오기로 되어 있던 그분이라는 것을.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도 죄를 용서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우리 현존의 저 최저점에 도달하지 못한 한, 우리는 여전히 우리가 최소한 하나님을 신뢰할 수는 있을 것이며, 이것이 하나님께 우리를 용서할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우리 자신에 대해서 절망하자마자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순수한 의미의 손을 내뻗어 받는 그 동작마저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때문에 종교개혁자들은 ‘믿음’을, 정신적 공로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배제되도록 항상 묘사했던 것이다. 루터는 갈라디아서 2장 주석에서 ‘믿음’이란 하나의 대상, 즉 그리스도를 지향한 활동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 믿음 자체 안에 그리스도가 존재하고 있다.
만일 믿음의 기적이, 즉 절망한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현존이 나타난다면, 그때 영혼은 그리스도와 완전히 홀로 있게 된다. 죄인의 영혼은 그리스도 앞에 철저히 홀로 남아 죄 사함을 경험한다. 그 점에 가톨릭 신앙과 개신교 신앙의 최종적인 대립이 놓여 있다. 그와 더불어 모든 인간 제사장 직분은 영 단번에 폐지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에 의한 인간 제사장 직분의 전적 폐지가 히브리서의 중심사상이다. 히브리서에 따르면,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제물을 드렸던 제사장들과 제사장 가문의 모든 제사 제도는 그리스도 십자가의 예표적 그림자였다. 그리스도는 ‘멜기세덱의 반차에 따라 영원히 제사장’으로 임명되셨다. 모든 인간은 인간의 중재 없이 영원하신 한 분 대제사장 앞에 직접 서 있다.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와 홀로 있다. 그리스도가 오신 이래로 더 이상 어떠한 제사장도 없으며, 단지 그리스도의 용서의 말씀을 세상에 전하는 전달자들만이 있을 뿐이다.
만일 우리가 자기 자신의 수고와 고통을 통해 양심의 평안으로 들어가고자 한다면, 그는 무엇 때문에 죽으셨을까? 단지 그의 의 속에서만 다시 말해 그대와 그대의 행위들에 대한 어찌할 수 없는 절망을 통해서만 그대는 평화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8/ 제사장직의 종말
‘오직 믿음으로만’이 의미하는 것은 인간의 행위, 즉 제사장의 중재 및 성사 중심 교회의 신비적인 매개물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믿음을 통해서’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인간 제사장은 그의 면죄권, 양심에 대한 그의 지배력, 그의 성례전적 구원 방편들과 함께 배제된다. 우리는 오로지 눈에 보이지 않는 대제사장 그리스도와만 관계가 있다. 이 점에서 두 종파의 대립은 모든 상호 이해와 상호 존중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해소될 수 없다.
제사장 계급이 양심을 지배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첫 번째 방법은, 모든 형식을 갖춘 종교재판이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동료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을 지켜 준다는 명분을 내세워 애매한 그리스도인들을 고문하고 화형으로 위협했었다. 이방인들에 의한 기독교인 박해 때보다도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종교재판의 희생양으로 학살된 것은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오점으로 영원히 남아 있다.
종교재판의 제도 전체는 분명히 단지 이단자를 제거하여 교회를 이단의 해독으로부터 정화하는 것만을 겨냥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가톨릭 국가, 특히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에 있는 사람들을 이단적인 발언 때문에 종교재판에서 희생당할 수도 있다는 지속적인 불안과 끊임없는 두려움에 있도록 하기 위해 정교하게 고안된 수단이었다. 그 제도 전체는 사람들을 위협하여 그러한 공포적인 정신병 아래 있게 함으로써 교회가 그들의 양심을 지배하는 것을 노렸던 것이다.
종교재판은 단지 기독교 역사에서만 영원히 가장 어두운 페이지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다. 인류 역사 전체에 그렇게 남아있다. 이러한 무시무시한 권력은 400년에 걸쳐서 민중을 지배했다. 계몽주의 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천천히 완전하게 그 마지막 찌꺼기가 제거되었다. 오늘날 중세의 화형 장작더미는 과거에 속하지만, 사실 어떤 특정한 형태의 종교재판만이 지나가 버렸을 뿐 인간 양심을 지배하려는 제사장 계급이 존재하는 한 종교재판 자체는 그 어떤 형태로든 존속한다. 단지 변화된 시대 상황에 맞게 조정될 뿐이다.
종교재판은 양심을 지배하기 위해 제사장 계급이 사용했던 한 가지 수단이었을 뿐이다. 한층 더 위험스러운 두 번째 수단은 면죄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한 인간이 감히 하나님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의 양심의 짐을 면해 준다는 주장이다. 루터는 “그 불행한 사람들이 속아서 면죄부를 사면 그들은 확실하고 안전하게 축복받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라는 사실을 알게 됨으로써 교황 제도를 반대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죄를 용서하는 전권을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만 남겨 놓으셨다. 그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며, 자신의 명예를 다른 어떤 사람에게 주시지 않는다.
많은 프로테스탄트 종파의 성직자들 역시 여전히 로마 교회보다 더 위험스러운 권력을 갖고 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너희들은 비싼 값을 지불하고 구속되었다. 그러므로 인간들의 종이 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한다. 그리스도는 제자 공동체에서 어떠한 새로운 제사장 계급도, 어떠한 새로운 희생제의도 지정하지 않았다. 그리스도는 제사장직의 종말이기 때문이다.
제사 제도는 그 역사적 사명을 다 했다. “그리스도는 죄인들을 위해서 영원히 효력 있는 한 제물로 바쳐졌으며, 이제 하나님 우편에 앉아 있다.” “그는 멜기세덱의 반열을 따르는 영원한 제사장이다. 그리스도만이 ‘내가 너를 용서하노라’라고 선포할 수 있다.” 프로테스탄티즘은 더 이상 제사장을 필요로 하지 않는 세계사 속의 유일한 종교 형태다. 그 점이 바로 프로테스탄티즘의 어려움이고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약점이나, 그 점이 바로 그것의 신적인 진리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신의 은총을 증명하는 일뿐만 아니라 자신의 현존을 증명하는 일까지도 오로지 자신의 권능 안에 남겨 두셨다. 하나님은 현존하신다. 다만 하나님이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때에 스스로를 계시하신다. 하나님께서 알리시기를 원하지 않는 곳에서는 경계를 날아 넘으려는 모든 철학적인 요구도 헛된 시도이며, 곧 추락하게 될 인간 정신의 비행인 것이다.

9/ 개신교 윤리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제3부 “감사에 대하여˝라는 기독교 윤리 전체를 단 하나의 함축성 있는 표제로 요약한다. “우리가 아무런 공로도 없이 기독교 신앙을 통한 은총으로 우리의 불행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는데, 왜 우리는 선한 일을 해야만 하는가? 우리가 온 생명을 다하여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를 표하기 위해서이며, 그는 우리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절망 한가운데서 용서받은 자가 그토록 많은 호의를 베풀어 주신 분의 발아래에 자신의 인생 전체를 두기 원하는 것과 결코 다르지 않다. 그리하여 어떠한 율법도 어떠한 고행도 도달할 수 없었던 그것, 즉 하나님에 대한 헌신의 열정이 아주 진기한 자기이해와 더불어 아무런 애씀 없이 인간으로부터 터져 나온다.
“신자는 선행 행위를 행해야 하는지 아닌지를 전혀 묻지 않고 그 일을 이미 해버린다.”
중세 체제 전체가 의존하고 있는 가설은, 세상에는 하나님의 중심 지점이 있다는 것이다. 인류를 정신생활 전체가 그곳으로부터 관리될 수 있으며, 그것은 세계 문제와 씨름하는 인간들에 대한 중재재판소이자 진리의 문제에서 최고 행정재판소이다. 중세 시대처럼 영원한 진리를 소유한 중심 지점이 있다고 믿는 일반적 믿음이 있었던 한에서는 모든 것이 좋았다. 모든 진리 문제에서 이러한 권위 있는 중심 지침이 초월적 전권에 의하여 어떤 인간을 성사로부터 제외할 수 있다는 것도 극히 정당한 일로 여겨졌다. 중세의 시민사회에서는 교회에서 파문당한 자는 시민적 생활도 불가능했다. 그는 사회적으로도 추방당했다. 사람들은 더 이상 그와 친교 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것을 통해서 시민사회는 사도직의 전권을 인정했던 것이다. 근대의 시작, 르네상스와 함께 나타난 새로운 세계 문화의 시작과 더불어 그것은 서서히 변화되었다. 이 해체는 종교개혁과는 완전히 무관하게 이루어졌다. 인류를 관통하는 거대한 정신의 흐름들을 하나의 중심 지점에서 조정하며 감독하는 것은, 자연과학의 새로운 시작과 더불어, 데카르트* 이래 철학적 사고의 새로운 각성과 경험과학**들의 개선 행렬과 더불어 확실히 불가능하게 되었다.
*르네 데카르트(프랑스어: René Descartes [ʁəne dekaʁt], 라틴어: Renatus Cartesius 레나투스 카르테시우스, 1596년 3월 31일 - 1650년 2월 11일)는 프랑스의 물리학자, 근대 철학의 아버지, 해석기하학의 창시자로 불린다. 그는 합리론의 대표주자이며 본인의 대표 저서 《방법서설》에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계몽사상의 ‘자율적이고 합리적인 주체‘의 근본 원리를 처음으로 확립한 것으로 유명하다.
**경험적 사실을 연구 대상으로 하는 실증적 학문. 자연 과학이나 사회 과학 따위의 논리나 수학의 모형만을 통하여 접근할 수 없는 모든 과학을 이른다. [비슷한 말] 실증 과학ㆍ실질 과학.
일단 제사장 계급의 전권이 추락했을 때, 사람들은 인류의 가장 중요한 전환점들 중 하나에 서게 되었다. 중세의 문화생활을 총괄했던 상부 구조 전체가 허물어졌다. 단지 하부 구조만이, 삶을 창조하고 규정하는 세속적 질서들을 지닌 불경건한 인류만이 살아남았다. 그 결과는 끝없는 영락*인 것처럼 보였다.
*영락: 세력이나 살림이 보잘것 없이 찌부러지는 것
이러한 영락은 예수의 복음 속에 포함되어 있는 가장 값비싼 보배, 즉 세속적 직업 속에서의 노동이 참다운 예배라는 진리를 발견하기 위한 길이었을 뿐이다.
성전이 붕괴되자 세상 전체가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다. 작업장이 교회가 되었으며 조국이 성지가 되었다. 인간의 삶을 건축하는 데 공헌하는 모든 사람은 이러한 위대한 하나님의 성전에서 거룩한 제사장으로서 봉사하는 것이다.
세상과 구분되던 성전 구역, 거룩하신 하나님이 그 외의 장소에서와 다른 방식으로 현존하시는 좀 더 거룩한 장소라는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성전 벽들은 허물어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바로 그것을 통해서 세상 전체가 성전으로 확장된다. 사람과 세상에 대한 의무와 대립되는 하나님에 대한 특별 의무란 더 이상 없다. 자신의 동료 인간들에게 돕는 힘이 됨으로써만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 세상의 모든 장소는 부정하다. 하지만 모든 곳에 은혜의 보좌가 있다. 이 은혜의 보좌는 눈에 보이지 않게 현존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공간적인 장소로서, 이 세상의 모든 곳으로부터 다가갈 수 있으며 어디에서든 완전히 동일한 거리에 있다.
제사장 문화의 종말과 더불어, 하나님의 세계와 우리가 살고 있는 권력투쟁적 세계 간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시작되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두 세계 사이에서 방랑하고 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는 보이지 않는 사랑의 나라, 모든 실존적 투쟁의 바깥에 서 있지만, 다른 한편 세속적인 직업인으로서 투쟁의 한 가운데에 있으면서 세속적 수단들을 사용하여 그 투쟁을 끝내야만 하는 것이다.
세속 직업의 위대함을 표현한 루터의 말로 이 장을 끝맺고자 한다. “제화공, 농부, 그리고 수공업자는 저마다 자신의 세속적 생업을 갖고 있는 동시에 성별된 사제이며 제사장들이다.” 한 가난한 하녀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나는 지금 요리를 하며, 잠자리를 펴며, 집을 청소한다. 누가 나에게 그것을 하라고 명령하였나? 나의 주인님과 주인마님이 명령했다. 누가 그들에게 나에게 명령할 권리를 주었는가?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 아아, 내가 그들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면 좋겠는데, 그렇다면 나는 얼마나 더 행복할까! 마치 내가 하늘에서 하나님께 직접 요리해 드리는 것처럼.”

10/ 개신교 교회
콘스탄티누스의 칙령*으로 소급되는 중세 국가는 진리 문제에 대한 특정한 해결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 국가는 어떤 특정한 종교가 진리이며 그 종교가 국가종교로 인정되어야 한다는 전제 위에 세워져 있었다. 380년에 그라티아누스, 발레티니아누스, 테오도시우스의 황제 칙령 “삼위일체 강요와 가톨릭 신앙”에 의해서 삼위일체의 기독교 신앙이 세계적인 로마제국의 국법으로 채택되었다. 이 법을 위반하면 국가로부터 처벌받을 수 있었다. 이것은 종교개혁 시대 후기까지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에도 여전히 영향을 미쳤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313년, 라틴어: Edictum Mediolanense, 영어: Edict of Milan)은 종교적인 예배나 제의에 대해 로마 제국이 중립적 입장을 취한다는 내용의 포고문이다. 이로써 로마 제국에서 신앙을 가지는 것, 특히 기독교 신앙을 가지는 것에 대한 방해물이 제거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는 311년 갈레리우스가 내린 칙령에 의해 이미 합법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밀라노 칙령은 311년의 칙령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소극적 의미의 기독교 보호에서 적극적 의미의 기독교 보호 내지는 ‘장려‘를 의미하게 되었다. 밀라노 칙령으로 인해 기독교는 탄압받는 입장에서 로마 황제의 비호를 받는 입장으로 크게 격상되었으며, 콘스탄티누스 1세는 기독교를 장려한 최초의 로마 황제가 되었다. 현재 칙령 문서 자체는 내려오지 않으며, 금석문 형태로도 남아있지 않다. 1차 사료로는 유일하게 락탄티우스의 ‘박해자들의 죽음에 대하여‘에 동방 황제 리키니우스가 휘하의 총독들에게 보내는 공식 서한의 형태로 실려 있다.
그러나 진리에 대한 신앙을 이러한 방식으로 헌법에 수용하려는 시도가 포기되자마자, 새로운 국가이념, 프리드리히 대제의 눈앞에 떠올랐던 현대의 프로테스탄트 국가이념이 탄생했다. 이러한 국가는 사상의 자유와 신앙의 자유라는 원칙에 근거한다.
교회와 분리된 이러한 국가에 상응하는 것은, 르네상스 이래로 서서히 모든 분야에서 발전되어 교회로부터 분리되어 나온 새로운 문화다. 이 문화는 교회와 세속 궁전들을 짓는 데 사용된 르네상스 건축이라는 새로운 예술 양식에 나타난다. 영국에서는 셰익스피어 무대가 생겨났다. 그림의 경우 네덜란드와 이탈리아에서 맨 먼저 종교적 소재에서 벗어났다. 그 후 18세기에는 독일 음악의 위대한 전성기인 고전주의자와 낭만주의자의 시대가 온다. 베토벤에 와서 인간의 영혼은 교회의 위안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하나의 독자적인 언어를 발견한다. 이러한 문화발전을 르네상스로부터 독일 관념주의에 이르는 가장 일반적인 관련성들에서도 조망해 보더라도, 인간 정신이 교회의 단일 문화로부터 벗어나서 모든 영역에서 그 독자적인 길을 추구했던 이 거대한 흐름은 더 이상 후퇴할 수 없음을 우리는 알게 된다. 오늘날에는 더 이상 가톨릭교회가 다른 정신운동들보다 우위에 놓일 수 없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가톨릭교회는, 모든 세례 받은 비가톨릭교도들도 실제로는 가톨릭교회에 속해 있으므로 그에 맞게 대우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단지 시간의 바퀴를 되돌리려는 인위적인 시도일 뿐이다. 교회의 지배로부터 벗어난 국가 생활과 세계 문화가 이러한 식으로 각성했다면, 이 새로운 상황에서 교회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중세의 종말과 함께 나타난 새로운 상황은, 그때까지 교회의 본질을 구성했으며 교회의 전체 매력과 대중성의 근거였던 두 가지 것이 붕괴한 것이 그 특징이다. 첫째는 성별된 제사장직의 붕괴이며, 두 번째는 거룩한 공간, 거룩한 행위, 거룩한 대상의 붕괴다.
개신교적 토대 위에서 적어도 독일 국내의 개신교 교회들에 아직 목사가 존재한다면, 이것은 제사장 중심 교회에서와는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목사는 종교적 전권을 갖지 않으며, 어떤 다른 구성원도 이것을 가질 수 없다. 루터는 “목사직은 모든 제사장, 즉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공통된 공적인 직분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그가 교구 일을 관리하고 설교하고 영혼을 보살피는 것은 한 기관의 모든 조직화된 공동 작업에 필요한 일의 분담 차원에서 그 의미가 있다. 후세대에 대한 신앙교육 책임이 목사직에 첨가된다. 목사직이 중세의 성직자가 가졌던 초월적인 광채를 포기하자마자, 목사직은 오늘날 삶에서 가장 희생적인 소명, 특히 현대 대도시에서는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가장 힘든 직분, 동료 시민들에게 감사를 가장 적게 받는 직분이 되었다.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에 더 이상 거룩한 공간, 어떤 다른 장소보다 하나님이 더욱 충만히 현존하실지도 모르는 어떠한 장소도 없게 된다. 또한 은혜의 능력들이 흘러들어 갈 것이라고 여겨지던 대상물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데려가 줄 것이라고 생각되던 거룩한 물건들도 더 이상 없다. 루터는 아주 순수하게 세례에 대해서 이러한 독특한 프로테스탄트적인 성례전 이해를 펼쳐 보인다. 우리는 세례 시의 물도 본질에서는 소가 마시는 물보다 나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 물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과 분리된 그 물은 특별히 다른 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루터에 따르면, 이러한 물에 신적인 중요성을 부여해 주는 것은 오로지 말씀뿐인데, “그 물이 어떤 다른 물보다 그 자체로서 좀 더 고귀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 물에 덧붙여진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그 물을 특별하게 한다. 물에서 핵심적인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과 하나님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루터는 세례에서 이미 옛 성사* 이해를 단숨에 극복하고 프로테스탄티즘의 새롭고 순수한 성사 이해에 도달했다.
*성사(고대 그리스어: μυστριον 뮈스트리온, 라틴어: Sacramentum 사크라멘툼, 영어: Sacrament 새크러먼트) 또는 성례전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혜가 눈에 보이는 방법으로 전달되는, 쉽게 말해서 하느님의 은혜를 받는 기독교의 예식이다. 형태적으로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기독교의 종교적 예식이다. 대한민국에서는 교파별로 개신교는 성례, 성례전으로 부르며 로마 가톨릭교회와 동방 정교회, 성공회는 성사라고 한다.
성찬식 투쟁에서 루터는 강한 상대를 만나 레슬링에서 엄수해야만 하는 선 밖으로 몇 걸음 밀려가는 선수와 같다. 탈선은 다음의 위험스러운 주장을 통해서 발생했다. “비록 심판에 이르는 불신자들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성례전적 물질들 속에서 실제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받는다.” 인간이 말씀에 대한 믿음 없이도 하늘의 식사를 받는다는 생각이 가능하게 되자마자, 우리는 다시금 거룩한 것, 초월적인 힘으로 충전된 거룩한 성체를 갖게 된다. 그렇게 된다면 오직 믿음을 통해서, 말씀의 감명을 받아, 오직 양심 속에서와는 다른 어떤 방법, 즉 성체를 먹음으로써 천상의 힘들과 가까워질 수 있게 되는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프로테스탄트적 입장을 견지하기를 원한다면 루터의 성찬 교리를 그의 세례 교리에 맞추어 수정해야만 한다. 물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물이 궁극적으로 가리키는 하나님의 말씀이 더 중요하다고 말해야 한다. 교회가 성별된 인간과 성별된 대상물, 성별된 성직자와 성별된 성체를 의식적으로 완전히 포기함으로써 교회는 강력한 기득권을 포기한 것이었다. 때문에 사람들에게 그 어떤 압박을 가하여 그들을 자기에게 종속시킬 어떠한 수단도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교회가 눈에 보이는 모든 권력 수단을 의식적으로 포기하게 되면, 바로 그리스도 교회의 참다운 본질이 나타난다. 서로 무관하게 완전히 상이한 삶의 상황에서 살던 두 사람이 예수의 제자 집단으로 인도되어 들어와 서로 알게 될 때 즉시 드러난다. 그들은 놀랍게도 자신들이 어릴 때부터 서로 알았던 것처럼 그토록 친밀한 형제들임을 발견한다. “여기에는 유대인도 헬라인도 없다.” 그들은 아마도 계급 증오를 통해 분리되어 있는 서로 다른 사회 계층에 속할지도 모르며, 완전히 상이한 교양을 지녔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형제 관계의 힘은, 인간 사회의 계급 간에 세워져 있는 담들을 허물어뜨린다. “여기에는 종도 없고 자유자도 없다. 너희들은 함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국가와 민족들처럼 분명히 실제 하지만, 모든 세속적인 조직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가족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세속적인 가족 속에 태어나듯 하나님의 가족 속에 자연적으로 태어날 수는 없다. 하나의 협회, 가령 사격 동호회나 보트 클럽에 들어가듯이 자기 자신의 결정에 의해 들어갈 수도 없다. 하나님 자신만이, 오로지 하나님 자신의 권능에 속한 방식으로 사람들을 이러한 가족 속에 받아들일 수 있다. 하나님의 교회 안에는 강한 신분 구별이 있다. 형제들과 자매들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버지들’, ‘어머니들’, 그리고 단지 우유만을 소화할 뿐 단단한 음식을 먹지 못하는 ‘미성년의 아이들’도 있다.
인간의 제도들을 통해서는 교회를 만들 수도 유지할 수도 없다. 교회는 단지 사람들이 말씀을 듣는 중에 “말씀에 의해 태어나든지” 혹은 “위로부터 태어남”으로써 세워지며 존속될 수 있다. 실로 이것은 하나님의 일이다.
교회는 교회 공동체의 영원한 목적과는 반대로 모든 수단을 다해서 권력을 획득하며 소득을 증대시키려는 세속적인 목적을 추구하려는 세속적인 세상 권력들에 둘러싸여 있다. 독립적이고 생명력 있는 그리스도 공동체는 세상에 하나의 방해물이며, 세상 사람들의 양심을 일깨우는 교회는 세상 자체에 불안의 근원이다.
교회가 교회의 외적인 조직, 국가와 국가의 통치기관들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일 때만 교회는 국가와 민족의 양심이 될 수 있다. 모든 세속적인 단체들은 지도권을 위임받은 지배 권력이 권위적인 방식으로 부하들에게 법률을 부과하며, 이러한 법률에 따라 살게끔 형벌의 위협으로 강요함으로써 질서가 유지될 수 있다. 그리스도의 교회 공동체에도 상위와 하위, 지도자와 추종자들이 존대해야 한다. 그러나 교회 지도자들은 외적인 권력 수단들로 무장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의지에 반하는 무엇인가를 강요하기 위한 형벌 권력을 갖지 않는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권력 수단은 말씀이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말씀은 가장 연약한 무기다. 그럼에도 말씀은 세상의 모든 힘보다 강력하다. 사람들을 내적으로 승복시켜 예수의 통치 아래로 데려올 수 있기 때문이다.
전체 세상과 그것의 생활양식으로부터 독립적인 교회는 오로지 살아 계신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 그리스도는 성령을 통해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그의 교회 공동체를 최후의 승리 때까지 끝까지 인도하신다. 아브라함 카이퍼가 말하듯이, 교회는 “하늘로부터 이 지상에 이식된 식민지이다. 그것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고유의 기반 위에 세워져 있으며, 고유의 양식으로 건설되며, 이 세상의 채석장에서 공급해 주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돌들로 건축된다. 그 운영면에서는 자연의 법칙들과 세속 입법자들의 법칙들에 구속되지 않으며, 오로지 그의 창립자이신 하나님의 생명의 법칙에만 종속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세상의 모든 기관에 대하여 독자적이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교회는 국가와 민족의 양심이 되어, 모든 새로운 상황에서 하나님의 요구들을 혁명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도록 혁신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
국가권력으로부터 독립적인 교회는 단지 민족의 양심일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생존경쟁에서 생겨나는 상처들을 치유하는 선한 사마리아인이며 도와주는 힘이다. 모든 자선봉사는 어떠한 대가도 바라지 않는 노동이다. 현재의 공공생활에서 복지를 위한 거의 모든 노력은 원래 교회로부터 나온 것이다. 교회는 사회봉사활동의 개척자들인 비헤른, 뷔르템베르크의 국내 선교의 아버지 구스타프 베르너, ‘누구의 아이도 아닌 아이들의 아버지’인 영국의 바나도와 같은 인물들을 배출한다. 이들은 영락한 자들을 돕는 사회복지사업의 선구자들이었다.
교회 기관들의 이러한 모든 ‘업적’은 그것들이 아무리 가치 있다 할지라도 교회의 본질은 아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는 몸이며, 놀랍도록 많은 지체를 가진 유기체다. 살아 계신 주님이 외부족인 형태들에 이르기까지 그의 독특한 특질을 교회에 부여해 주신다. 교회는 죄를 용서하고 사람들을 그의 왕국으로 초청하는 그리스도의 전권에 의해서만 산다. 이러한 의미에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도신경의 신앙고백은 가치가 있다. “나는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를 믿습니다.”

역자 후기
그(칼 하임)는 20세기 초, 특히 1920년대 독일 개신교 신자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던 가톨릭교회로의 역개종과 가톨릭교회의 풍부한 예전, 영성 등에 막연한 향수를 느낀 나머지 종교개혁의 근본 정신을 망각해 가는 현실을 염두에 두고 이 책을 저술했다. 따라서 가톨릭교회의 신앙의 현대적인 변모와 개선에 대한 민감한 이해가 이 책에는 결여되어 있는 듯 보일 수도 있다. 특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에 저술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한계를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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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고난이 선물이다 : 조정민 잠언록 - 조정민 잠언록
조정민 지음 / 두란노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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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은 참된 선물이다. 고난이 있어 내가 성장할 수 있고, 고난이 있어 내가 단단해진다. 하나하나 읽으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잠언인데, 실천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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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견딘 만큼 강해지고,
고난을 이긴 만큼 깊어집니다.

많은 일을 해서 대단한 것이 아니라
오래 견뎌서 대단한 것입니다.

씨앗이 죽지 않으면 나무가 살지 못하고,
알이 깨지지 않으면 새가 날지 못합니다.
무지개를 보고 싶다면
먼저 비바람을 견딜 준비를
해야만 합니다.

가까이 가서 보면 성한 나뭇잎이 없고,
샅샅이 파고 보면 옳은 사람이 없습니다.

골짜기와 정상은 이어져 있고,
고난과 영광도 이어져 있습니다.
둘은 결코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높은 곳에서 보면 높낮이가 없습니다.

계속 실패하는 것은 오르막길을 걷고 있는 까닭이고,
더 이상 실패하지 않는 것은
내리막길에 접어든 때문입니다.

문제를 아이가 혼자 고민하면 아이의 문제이고,
아버지와 의논하면 아버지의 문제입니다.

고난은 해답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뚫고 이겨낼 의지를 요구합니다.

고난을 치워 달라고 기도하기보다
고난을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저 사람 치워 달라고 기도하기보다
저 사람 품게 해 달라고 기도해 보세요.
그 기도는 반드시 응답됩니다.

가장 밝은 별은
가장 어두운 밤에 빛나는 별이고,
가장 감동적인 노래는
가장 슬픈 밤에 부르는 노래입니다.

사람들의 기대 위에 내 인생을 짓는 것은
모래성을 쌓는 일입니다.

그 기대는 반드시 변하고
언젠가 바뀌기 때문입니다.

고통은 생명의 일부이고,
고난은 형통의 일부이고,
실패는 성공의 일부입니다.

내가 옳고
당신이 틀렸다는 것을 입증하느라 보낸 시간이
가장 무의미한 시간입니다.

비난하는 것보다 아둔한 시간이 없고,
변명하는 것보다 아까운 시간이 없습니다.

교만이란 내 생각이 가득해서
남의 생각이 들어올 틈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교만은 영적인 치매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맞고 나서 돌아서고,
지혜로운 자는 맞기 전에 돌아섭니다.
탐욕스러운 자는 맞아도 돌이키지 않습니다.

용서의 밧줄에 매달려 사는 사람은
복수의 칼로 그 밧줄을 자르지 않습니다.

그 사람을 참고 견디는 것은 약해서가 아니라
강하기 때문입니다.
정말 강하면 끝까지 참고 견딥니다.

다른 사람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습니다.
먼저 나 자신에게
걸려 넘어지고 나서
다른 사람 핑계를 찾은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실수하는 사람이 아니라
실수에서 배우지 못하는 사람이고,
미련한 사람은 넘어지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넘어진 곳에서 또 넘어지는 사람입니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져주고
더 큰 사람이 참아주고
더 아는 사람이 속아줍니다.

지고도 이기는 인생이 있고,
이기고도 지는 인생이 있습니다.
인생이 끝나봐야 압니다.

이겨야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견디고 버티는 것이 이기는 것이고,
때로는 물러서고 져주는 것이 이기는 것입니다.
이긴 자들의 말로가 말합니다.

때로는 웃을 수밖에 없어도 웃음은 큰 능력이고,
때로는 기도밖에 할 수 없어도 기도는 가장 큰 힘입니다.

꿈이 있어 의미가 있고,
고통이 있어 가치가 있습니다.

간절히 원하는 사람은 결코 핑계를 찾지 않고
반드시 방도를 찾습니다.

좁은 마음에서 좁은 생각이 나고
넓은 마음에서 넓은 생각이 납니다.
좁은 생각에서 다툼이 나고
넓은 생각에서 화해가 납니다.
마음 넓히는 것보다 큰 일이 없습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는 가장 빠른 길은
내가 좋은 사람이 되는 길입니다.
좋은 사람이 되는 가장 빠른 길은
종일 내 안에 좋은 생각을 품는 것입니다.

불만을 나에게 말하면 낙심이 되고
남에게 말하면 비난이 되고
신에게 말하면 기도가 됩니다.

모든 것이 부족하면
한 가지만 채워져도 감사하고,
모든 것이 풍족하면
한 가지만 모자라도 불만입니다.

뚜렷한 이유 없이 그가 싫은 것은
나의 못난 성품 때문이고,
특별한 까닭 없이 그가 좋은 것은
그의 선한 성품 때문입니다.
그래서 못난 사람에게는 싫은 사람이 많습니다.

쓰레기를 혐오하고 비판하고 비난해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쓰레기는 누군가 말없이 치워야 사라집니다.

외모는 돈을 들여야 가꿀 수 있고,
인격은 돈을 버려야 가꿀 수 있습니다.
신기하게도 돈을 들인 외모가
돈을 버린 인격만큼 오래가지 않습니다.

자유의 본질은
욕망을 마음껏 채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욕망이 요구하는 것을
거부할 수 있는 데 있습니다.

빛은 어둠을 몰아내지만
어둠은 빛을 내쫓지 못합니다.
어둠은 빛을 더욱 드러낼 뿐입니다.

“오늘 하루가 생애 마지막 날이라면 뭘 하고 살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답합니다.
“더 사랑하고 다 용서하고 떠나겠습니다.”
그런데 왜 꼭 마지막 날에 그래야 합니까?

더 많이 가지려고 애쓰는 동안에는
가진 것조차 제대로 누리지 못합니다.

사랑하면
이해하지 못할 사람이 없고,
미워하면
이해되는 사람이 없습니다.

두려우면 밉지 않은 사람이 없고,
평안하면 미운 사람이 없습니다.
결국은 내가 만드는 세상입니다.

중독은
한 순간에 오지 않습니다.
내가 계속해서
선택한 것입니다.

마음에 들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마음을 바꾸는 것입니다.

사랑은 더 나은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한번 붙든 사람을 끝까지 놓치지 않는
아름다운 동행입니다.

가장 큰 실수는
나는 실수하지 않는다고 착각하는 것이고,
가장 큰 교만은 실수하는 사람을
무턱대고 비난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기도의 자리에 앉아 있지 않아도
기도하는 것이고,
사랑하지 않으면 기도의 자리에 앉아 있어도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랑 받고 사랑하는 만큼 건강하고,
사랑 받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한 만큼 병듭니다.

정말 사랑하면
그가 달라는 것과
그가 좋아하는 것을 주기보다
그에게 꼭 필요한 것을 줍니다.

꿈을 이루지 못한 것이 비극이 아니라
꿈을 갖지 않은 것이 비극입니다.
사랑을 잃은 것이 슬픔이 아니라
사랑하지 못한 것이 슬픔입니다.

탐욕은 결핍감 때문이고, 폭력은 불안감 때문이고,
음란은 사랑에 목마른 때문입니다.

십자가 사랑에 빚졌기에
오늘 하루 누군가의 허물을
가려 주는 삶이 되게 하소서.

싸워 이기는 것은 작은 능력입니다.
싸운 뒤에 화해하는 것은 큰 능력입니다.
그러나 안 싸우고 더불어 지낼 수 있는 것은
가장 큰 능력입니다.

친구를 가까이하는 사람은 다정한 사람이고,
원수를 가까이하는 사람은 고결한 사람입니다.

높은 산 정상에서
보물을 캔 사람은 없습니다.
보물은 언제나
낮은 곳 깊은 땅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용감한 사람이란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두렵지만 그 두려움보다 더 큰 이유 때문에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진실은 언제나 말이 적고,
거짓은 언제나 말이 많습니다.

귀가 문제를 일으키는 법은 없습니다.
늘 혀가 말썽입니다.

제대로 알면 아는 티를 내지 않고,
정말로 친하면 친한 티를 내지 않습니다.
어설픈 사람이 항상 티를 냅니다.

실제로 한 번이라도 자비를 베푸는 것이
도덕을 50년 동안 공부하고
100년 동안 가르치는 것보다 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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