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
옥성호 지음 / 부흥과개혁사 / 2008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1. 요약 。。。。。。。                    

 

     방언을 은혜와 능력을 받는 통로로,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갈 수 있는 비밀의 열쇠로 여기고, 그래서 하늘의 언어 운운하는 김우현 씨가 쓴 책 『하늘의 언어』를 겨냥하고 쓴 책이다. 시종일관 체험 중심의 논리를 세워갔던 앞서의 책과는 달리, 이 책의 저자는 ‘그러면 성경에서는 뭐라고 말하고 있는가’에 집중하며 글을 써내려간다.

 

     저자는 방언을 교회가 설립되는 특별한 시기에, 표적을 중요시했던 유대계 비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독특하고 유일한 은사였다고 본다. 그는 성경에 등장하는 방언이란 오직 외국어 방언뿐이었고, 오늘날 일각에서 말하는 ‘영적 방언’, 혹은 ‘하늘의 언어’ 따위는 애초부터 없었다고 생각한다. 방언과 관련해 가장 많은 직접적인 교훈/언급이 등장하는 고린도전서를 연구해 볼 때, 이미 교회 주변부에 다양한 종류의 세속적이고 우상을 섬기는 이들 사이에 그런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들이 존재했는데도 바울이 이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고 바로 방언에 관한 교훈을 전하는 것으로 보아, 고린도 교회 안의 방언은 그런 세속적인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말과는 뚜렷하게 구분되는 종류였다는 것이다.

 

     초대교회에 있었던 외국어 방언은 점차 그쳐가고 있었는데, 이는 고린도전서와 시기적으로 얼마 차이가 나지 않는 로마서에 은사의 종류로 방언이 소개되지 않는다는 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방언의 역할은 성경의 말씀이 완성될 때까지였다는 전통적인 해석에 힘을 싣는다.

 

     아울러 오늘날 방언이라고 행하여지는 것들은 사실상 일관되게 통역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언어학적으로 무의미한 음성들의 연속일 뿐이며, 나아가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성경 해석방법 상의 문제점들도 지적한다.

 

 

2. 감상평 。。。。。。。                  

 

     앞서 『하늘의 언어』라는 영지주의적 교훈을 담고 있는 책에 관한 서명을 쓰면서 내가 말했던 ‘재미도 없고, 공격적인 말투로 인해 욕먹기 딱 좋은’ 작업을 해 낸 책이다. 호불호가 명확히 갈리는 민감한 쟁점에 대해 많은 수의 목회자들이나 신학자들이 분명한 입장을 취하지 않는 것을 일종의 미덕으로 여기고 있는 마당에 용기 있는 결단이다. 책의 내용은 너무나 분명하고 명확해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꽤나 불편하게 느껴질 것이다.

 

     비판을 할 때는 정확한 이유와 분명한 논리가 필수적이다. 비록 저자가 아직 정규 신학과정을 수료하지는 않았다고 하지만(신대원에서 공부를 시작했다는 말도 들었는데 어떤지는 모르겠다), 저명한 신학자들의 해석과 성경문맥에 따른 이해를 시도함으로써 어느 정도 타당한 이유와 논리를 확보하고 있다. 내가 경험해 보니 아니더라, 누구에게 들은 얘긴데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 따위의 한심한 비난은 적어도 이 책에 대해서는 온당하지 못한 평가다.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 “성경을 멋대로 해석하여 자기 논리에 끼워 맞춘 불쌍한 책” 운운하는 밑도 끝도 없는 100자평을 달아 놓은 사람도 있던데, 누가 더 불쌍한 건지.

 

 

     오늘날 교회를 위협하는 가장 심각한 요인 중 하나는 반(反)지성주의다. 지성의 사용이 줄어들면 자연히 경험에 의존하는 경향이 나타나게 되고, 경험이라는 건 태생적으로 개인차가 있을 수밖에 없고 주관성이 강조된다. 쉽게 말해,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믿고,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도 그것이 믿음의 길이라고 여기게 된다는 말이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았던 사사 시대의 사람들의 모습이 정확하게 그랬고, 신자들을 핍박하고 죽이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요 16:2-3)에 등장하는 어떤 사람들의 모습 또한 그러했다. 옳고 그름을 분별하려면 지성을 사용해야 하는데, 그냥 느끼는 대로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저자의 의견을 단순히 은사중지주의자의 생각으로 치부하고 나와는 다르다는 식으로 접근하지는 않기를 바란다. 특히 분명한 이유와 명확한 논리도 없이 따지는 식으로는 곤란하다. 그건 그냥 자신이 얼마나 성경과 예수님, 그리고 진리의 성령님으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를 증명해주는 증거일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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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줄거리 。。。。。。。        

 

     왕년의 잘나가던 국민요정 걸그룹 출신의 신진아. 그룹을 해체한 후 솔로 활동을 시작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남은 것은 시청률 2%도 되지 않는 라디오 프로그램 ‘원더풀 라디오’의 DJ 자리 하나 뿐. 죽어가는 프로그램을 살리기 위해 전격 투입된 이재혁 PD와 야심차게 시작한 새 코너가 히트하면서 희망이 보이는 것도 잠시, 이전 소속사 대표의 방해공작으로 인해 금새 위기에 처한다.

 

 

 

2. 감상평 。。。。。。。                    

 

     주연인 이민정의 미소가 영화 전체의 분위기를 밝게 만든다. 되는 일은 하나도 없고, 주변 사람들이나 일들은 꼬이기만 하고, 누군가 작심하고 일을 방해하는 상황에서도 그녀의 미소를 보고 있으면 일이 금방 해결될 것만 같다는 느낌이 드니까. 좋은 말이긴 한데, 좀 다르게 보면 그녀의 얼굴에서 딱히 위기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나름 연예인으로서 치명적인 위기 앞에 서 있는데도 그녀의 얼굴은 평온하기만 하니 좀 더 발전시켜야 할 점이 보인다. 상대역인 이정진의 가벼운 로맨스물 연기도 영 어색했고. 차라리 이광수의 코믹연기가 좀 더 봐줄만 했다.

 

     뭐 사실 이건 배우 한 사람의 탓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게, 영화 자체가 그렇게 좀 가벼운 느낌이다. 가볍게 볼 사람들을 위한 가벼운 로맨틱 드라마에 타겟을 맞추고 제작되었다면 굳이 시비를 가릴 것 까지는 없겠지만, 쏟아지는 카메오들의 등장과 너무나 싱겁게 풀려버리는 갈등구조 등도 영화의 진지함을 좀 떨어뜨리는 요소가 아니었나 싶다.

 

 

 

    그래도 영화 자체가 나쁜 건 아니다. 추운 겨울 적당한 웃음과 따뜻함을 아울러 경험하고 싶은 사람들은 충분히 있을 테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주연 배우가 좋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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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2-04-20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는 라디오스타가 오히려 나은 듯 합니다. 그러나 저러나 요즘은 라디오의 르네상스가 도래하나 봅니다.

노란가방 2012-04-20 12:32   좋아요 0 | URL
저도 요새는 텔레비전 보다는 라디오를 더 많이 듣게 되네요.. ^^
 

 

1. 줄거리 。。。。。。。        

 

     알래스카의 정유회사에 고용되어 야생동물들을 사냥하는 주인공 오트웨이. 하지만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후 깊은 우울감 속에서 지내고 있었다. 마침내 일이 끝나고 돌아가는 비행기 안, 하지만 얼마 후 비행기는 추락을 하고 설상가상으로 늑대들이 나타나 생존자들을 위협한다. 한 사람 한 사람 죽어가면서 오트웨이와 생존자 일행은 살아남기 위해 눈밭을 헤매기 시작한다.

 

 

 

 

2. 감상평 。。。。。。。                    

 

     날고기 같은 영화다. 그것도 얇게 저며서 각종 양념을 넣어 만든 육회가 아니라 갓 사냥한 짐승을 거칠게 도축해 뜯어낸 듯한 그런 영상이다. 생존이라는 절박한 과제 앞에서 인물들은 다른 것들을 생각할 여유가 없고, 보는 이들 또한 그러하다.

 

     결국 감독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살아야 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명제다. 자살을 시도했던 그 사람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 주인공 오트웨이는 살아남기 위해 갖은 고생을 감수하는 것을 마다치 않는다. 그는 자신이 아는 모든 지식과 기술을 동원해 생존자들을 이끌고 살 길을 찾아 나선다. 진짜 죽음의 위기 앞에서 어쭙잖은 감상은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단순한 메시지다.

 

     다만 그 가운데서 인간과 늑대의 차이가 무엇인지 점차 희미해져간다. 자신들을 공격하던 늑대 한 마리를 잡아 죽이고서 “We are animals” 라고 외치는 한 인물의 말은 이런 점을 잘 보여준다. 다 벗겨놓고 보면 인간이나 동물이나 별반 다를 바가 없다는 유물론적 환원주의의 그림자가 엿보인다. (사실 포스터도 인간과 야수의 모호한 경계를 암시하는 것 같다)

 

 

 

     에너지가 넘친다. 다만 에너지만 넘친다. 생존에의 투쟁 자체는 훌륭하게 묘사했지만, 그 투쟁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보도록까지는 하지 못했다. 의미보다는 느낌이 좀 더 강조되는 영화. 개인적으론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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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언어 - 하늘문을 여는 열쇠
김우현 지음 / 규장(규장문화사) / 2007년 7월
평점 :
일시품절


1. 요약 。。。。。。。                    

 

     방언을 하늘의 언어, 성령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통로로 여기는 저자가 자신의 삶을 간증으로 나눈다. 그에 따르면 방언을 하는 곳에서 놀라운 일들(능력?)이 나타나고 큰 부흥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 당연한 논리적 결론으로 저자는 모든 신자들이 방언을 할 수 있으며, 또 방언을 해야 한다는 방언 일반론을 주장하고, 나아가 방언을 하지 ‘못하는’ 신자들에게는 뭔가 문제가 있다는 식 - 지적인 교만 내지는 무지 - 으로 몰고 가는 듯한 인상을 보여준다.

 

 

2. 감상평 。。。。。。。                   

 

     이런 책에 대한 서평을 쓰는 건 쉽지 않다. 우선은 책의 내용이 기독교를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고, 나아가 거기 담겨 있는 저자의 관점이 거의 전체적으로 왜곡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전에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이나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신은 위대하지 않다』라는 책을 읽고 감상을 남길 때 느꼈던 것과 비슷하다. 이럴 경우 책의 내용을 조목조목 따져가며 평가를 하게 되는데, 일단 그런 글은 재미도 없고 필경 공격적인 문장들로 마쳐질 가능성이 높다. 그래도 어쩌겠나.. 

 

 

     책에 담긴 내용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19세기 이래로 부흥했던 기독교 영지주의의 재판(再版)이라고 하겠다. 초대교회를 지긋지긋하게 괴롭혔다가, 박해의 시기가 지나며 교회들이 한 자리에 모여 건강한 교리를 재확인하는 일이 시작되면서 잦아들기 시작했던 이 사조(思潮)는 19세기와 20세기를 거치면서 다시 크게 부흥했다. 능력과 성결, 더 높은 삶, 영적인 비밀과 같은 용어들은 그들의 전매특허였다. 물론 저자는 이걸 ‘사탄이 교회에 침투해 성령의 역사를 인간적인 의와 지식으로 대치해버’린 것(235)으로 생각하는 듯하지만.

 

     방언을 ‘인간의 이성적인 무엇보다 더 고차원의 영적 지식의 통로’(96)로 여기는 저자의 생각은 정확히 이런 영지주의적 경향과 맞닿아 있다. 아울러 기도를 하며 성령의 목소리를 직접 자신의 입으로 냈다는 (성경 어디에서도 유사한 예를 찾을 수 없는) 주장을 하는 그는(119), 방언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로 올라가’기를 구한다(120). 방언을 통해 ‘십자가의 비밀’, ‘보혈의 비밀’, ‘예수 이름의 비밀’, ‘교회의 비밀’, ‘깊도다 경건의 비밀이여’와 같은 비밀구절들의 의미들이 풀어질 것이라는 구절(210)은 영지주의적 공동체의 구원론을 정확하게 담아내는 부분이다.

 

 

     특정한 비전(秘傳)적 수단을 통해 더 높은 영적 경지에 오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을 핵심으로 하는 영지주의는, 불가해한 하나님에 대한 인간중심적 사고의 결정체다. 처음부터 기독교의 주변부에서 싹이 텄던 그들이 사용하는 용어들은 기독교의 그것과 매우 유사해 많은 사람들을 혼동에 빠뜨리게 해 왔다. 일상적인 것들보다 더 우월한 무엇에 대한 그들의 간절한 사모는 영적인 계층을 만들었고, 이 계층을 지켜내기 위한 비밀들을 강조하는 경향을 띤다. 그러나 성경은 비밀들과 영적인 계층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깊으신 비밀은 이미 다 풀렸는데, 그분의 영원하신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인간들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심으로써, 이 세상을 구원하신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비밀’의 내용의 전부이다. 여기에 또 어떤 비밀을 덧붙이려 하는 저자는 성경의 저자들도 감히 넘보지 않았던 하나님의 영광을 침범하는 위험한 행동을 하는 것이다.

 

     당연히 이 과정에서 성경에 등장하는 역사적이고 객관적인 사실들이 우리의 신앙의 기초가 되지 못하고, 대신 그 자리를 주관적인 느낌과 경험들이 차지하고 있다. 방언을 인정하지 않는 게 성령님을 무시하는 것(87)이라는 설명이나 모든 영적 은사는 방언을 기반으로 나타나기에 방언은 은사의 기본(108)이라는 주장, 초대교회 성도들은 대부분 방언을 했기 때문에 영적 충만함을 누리며 강한 능력을 경험했다(110)는 부분, 방언에 대한 ‘지식 없음’이 방언을 하지 못하도록 제어했다(175)는 구절 등은 저자의 주장이 철저하게 개인적인 사유와 경험에 기반해 있을 뿐임을 보여주는 증거다. 다니엘이 방언을 할 줄 몰라 그의 기도가 사탄의 세력에게까지 흘러들어가 하나님의 응답을 방해했다는 식의 지적을 담고 있는 부분(88-89)은 기가 차다.

 

 

     모든 것을 방언이라는 중심을 떠받드는 시종으로 만드는 시도는 방언에 대한 경계를 십자가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과 동일한 상상에 올려놓는 자의적 해석(216)을 낳기까지 하고 있다. 저자가 그토록 자주 참조하는 고린도전서 14장은 방언의 유익을 강조하고 권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정확히 그 반대를 위한 내용이지만, 방언에 대한 저자의 사랑은 성경구절을 정확히 반대로 해석하도록 만들었다.

 

     고린도 교회는 공동체라고 부르기가 민망할 정도로 깨어진 상태에 있었는데, 바울은 그런 교회를 향해 개인만을 위하고 자랑하려는 태도를 버리고 공동체성을 회복하라고 권면한다. 방언과 예언의 대조는 이런 문맥에서 등장한다. 그건 방언이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것이고, 개인의 덕을 세우는 것임을 말하려는 게 아니라, 그보다는 교회의 덕을 세울 수 있는 예언을 사모하라고 권하기 위한 것이다. 때문에 원문에는 끊임없이 ‘호 데’, 즉 ‘그러나(but)’이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바울은 자신이 방언을 잘 하는 것을 자랑하고 그들도 그렇게 하라고 권하는 게 아니라, 그보다는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더 낫다’(18-19절)는 점을 강조할 뿐이다. ‘A도 좋지만 B가 더 나아’라는 말을 듣고서 A도 좋다고 했다는 부분만 가져다 쓰는 꼴이다.

 

 

     물론 이 책 한 권으로 저자가 영지주의적 이단에 속했다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 다만 그가 사용하는 문법들이나 단어들, 사유의 논리는 영지주의의 그것과 너무나 닮아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기독교의 용어들을 담고 있긴 하지만, 기독교에 관한 책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어떻게 동일한 출판사에서 마이클 호튼의 『미국제 영성에 속지말라』라는 책을 펴낸지 2년 만에 이런 책을 출판할 생각을 했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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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생각한다.

사랑은 감정의 파도에만 휩쓸리고 지적으로는 잠에 빠진,

생각 없는 감정이 아니다.

사랑은 항상 생각하느라 분주하다.

먼저 사랑이 담긴 생각이 있어야

행위가 뒤따르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 알렉스 켄드릭, 스티븐 켄드릭, 『사랑의 도전』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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