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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사냥꾼을 위한 안내서 - 제2회 중앙 장편문학상 수상작
오수완 지음 / 뿔(웅진) / 2010년 11월
평점 :
품절
우리가 인지할 리 없는 어느 시공의 여러 갈래 평행 우주 가운데 이런 시대 하나쯤 존재하지 않는다고 누가 단언할까? 책의 시대가 종언을 맞은 책의 죽음과 책을 둘러싼 암투가 음지와 양지에서 횡행하는 시절. 책을 금서하고, 분서하고, 암거래를 위한 루트만이 활기를 띠고 있는 출판 시장이 붕괴한 후의 책 사냥꾼, 책 탐정, 책 강도 등이 등장해 한정된 수요를 위한 욕구를 위한 맞춤 매매가 공공연히 행해지고 있는 그 시공에, 당신의 또 다른 자아는 과연 어떤 역할로 등장하게 될 지, 책을 탐하고 있는 작금의 당신이라면 순식간에 적응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장서가, 애서가, 탐서가, 고서수집가, 출판관계자, 작가, 그리고 일반적인 독자의 또 다른 모습을 이 책에서 본다. 『책 사냥꾼을 위한 안내서』가 구축하고 있는 책의 시대는, 책을 꿈꾸고 탐하는 이들이 그리는 책으로 이루어진 우주의 음울한 자화상이다. 출판 시장이 붕괴하고 전국적인 규모의 분서시위가 개최될 예정인 책의 종말이 예견된 시대를 근근이 지탱하는 책 사냥꾼은 책을 구하고자 하는 이들이 동원할 수 있는 수단을 모두 초월해 존재하는 자들이다. 이들이 구하고자 하는 책은 존재한 적이 없을 수도 있는데, 그것은 책 속의 책으로 인용되는 활자와 기억 속에서 재생 가능하기에 추적하지 못할 것도 없는 미묘하긴 하지만 극한의 목적의식을 부여하기도 한다.
출판계가 몰락하고 나서 고서를 매매하는 가장 독보적인 단체인 미도당의 의뢰로 일선에서 물러나 헌책방에 은거해있던 반디가 책 사냥꾼으로 다시 나설 수밖에 없던 이유는 몇 안 되는 지인과 가족에게 가해질 보복 때문인지, 아무도 발굴해내지 못하는 존재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전설의 책을 찾아내고자 하는 본연의 소명 때문이진 굳이 구별할 필요가 없다. 책 사냥꾼들은 존재하지 않는 책을 추적함으로써 책에 생명력을 부여하고, 그들의 뒤를 좇을 후계자들을 위해 회고록을 쓰는 소명을 부여받은 자들로, 책의 무덤가를 배회하는 하이에나의 이미지가 절로 그려지기도 한다.
책을 위한 책들의 방대한 계보 사이에서 뭔가 걸출한 족적을 남길 것 같은 기대감으로 출발한 탓인지, 책 사냥꾼 반디의 회한의 일대기는 한 없이 늘어지고 긴장감이 결여된 독서경험을 유발한다고 서글프지만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일일이 언급하지 않아도 '젠틀 매드니스'의 정점에 선 거장들의 그림자를 취합해 독자적인 책 모험담을 만나리라 예상했다면, 배신과 반전이 난무하는 가운데서도 일관되게 변죽만 울려대는 정교하고 영민해 보이지만, 위트와 해학이 결여된 독백을 견뎌내야 하는 고역과 마주하게 된 것이 아쉽기 그지없다.
미도당이 의뢰한 책이 단 한 권이 아니라 일련의 단서를 담고 있는 복수의 책이라는 것이 밝혀지는 와중에 반디가 보호하고자 했던 지인들이 모두 연관인물로 밝혀지고, 배신과 음모가 얽혀 아무도 신뢰하지 않아야하는 책 사냥꾼의 수칙을 지키지 못했을 시의 폐해를 사무치게 겪어내는 과정은 하드보일드 추리물의 긴장감을 표출해야할 것만 같은데, 이 책이 걷는 노선은 절망과 회환으로 버무린 공허한 독백이 되어버린 것은, 결국은 책과의 소통에 매진하다가 발견하는 책에 갇혀버린 이들이 한 번쯤 겪게 되는 소름끼치는 자기발견일 수도 있다. 책에 미쳐있는 이들이 꿈꾸는 이상의 도서관이 책의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담아내는 최종적인 시공이라는 것에 동의한다면 책을 탐하는 것은 특권이자 천형의 또 다른 이름인 것을 깨닫게 되곤 함으로.
에코의 미로 속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양피지에 독을 칠하고 희생자를 기다리던 호르헤 수사가 있었고, 하루키의 도서관 괴담에는 지식을 축적시키고 그 뇌수를 빨아먹는 괴이쩍은 노인이 있었다. 꿈꾸는 책들의 도시이기도 하고, 저주받은 책들의 무덤이자 이상의 도서관이라 명명되기도 하는 그 시공에 대한 또 하나의 계보도인『책 사냥꾼을 위한 안내서』. 무는 추적과 배신의 소용돌이의 끝자락에서 마주한 거대한 비밀의 실체는 도서관 괴담류의 그리 신선하지 못한 재생이기는 하지만, 책의 미로 안에 들어설 수 있는 모험에 초대받고 싶지 아니한 의사 책 사냥꾼들이 어디 있을쏘냐. 책의 가장 충실한 추종자이자 적인 인간의 탐욕 앞에서 소실되어가는 미로 서가의 모습을 뒤로 하고, 또 다시 자신만의 서가를 채우려는 반디의 소소한 결심은 책의 죽음으로도 끊을 수 없는 또 다른 책의 시대를 예고한다. 그것이 꼭 충만한 생명력으로 가득한 활극으로 펼쳐지지 않는다 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