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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심장부에서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평점 :
나는 늘 부재였다. 나는 이 집의 한복판에 있는 여성적인 온기가 아니라 제로이고 영이며, 그것을 향해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진공이고, 복도에서 소용돌이치는 싸늘한 바람처럼 숨을 죽인 희끄무레한 혼란이었다. 무시당해 복수심에 불타는.(p.8)
마그다의 죄라면 남아공의 네덜란드계 백인지주인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나지 못한 것일 테다. 끝내 아들을 낳아주지 못한 어머니의 죽음 이후 마그다는 하인들 틈바구니 속에서 '부재'이자 '제로'인 채로 자라나 일평생 결핍이었던 아버지에 대한 비대한 욕망에 시달리는 노처녀가 된다. 그래서 아버지가 풍만하고 교활한 새어머니를 데려왔을 때 음습한 어둠 속에서 도끼를 휘두르게 되는데-
그는 집에 새 부인을 데려오지 않았고, 나는 여전히 그의 딸이고, 만약 나쁜 말들을 거둬들인다면 착한 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실패에 대해, 평생 실직적인 어둠에 갇혀 있어 구애의 방식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그 실패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는 동안, 나는 그를 피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기회가 다시 주어진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뛴다. 하지만 나는 조용히 움직인다. 그리고 고개를 숙인다.(p.35)
새 부인을 데려온 적이 없는 아버지와 여전히 유명무실한 존재감의 마그다가 공존하는 시공을 마주하면서, 이 이야기가 온전히 마그다 혼자서 구축해나가는 고립의 역사라는 것이 밝혀진다. 새 부인 대신 아버지가 침대로 끌어들이는 것은 하인 헨드릭의 새 색시 안나이다. 애욕에 찬 날들을 위해 농장의 하인들을 모두 내보낸 아버지의 행동의 끝에는 아버지의 흑인 정부를 위해 수발을 드는 처지로 전락해버릴 마그다가 덩그러니 남는다. 도끼 대신 무거운 사냥총을 아버지의 침실 창문으로 쏘아버린 것은 과연 일어난 일인가, 다시 마그다가 창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광기의 역사인 것인가.
우리 중에 누가 짐승일까? 나의 이야기는 이야기다. 그것은 나를 놀라게 하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질문을 해야 하는 순간을 연기할 뿐이다. 덤불 속에서 들리는 소리는 내가 으르렁 거리는 소리일까? 공간이 나로부터 확장되어 지구의 네 구석 모두로 퍼져나가는 나라의 심장부에는 나를 막을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에, 미친 듯이 날뛰고 무절제한 내가 두려운 걸까?(p.97)
아버지를 부재 상태로 만들어버리고 나니, 농장에서의 권력구도는 순식간에 전복되어버린다. 체불한 임금대신 마그다의 몸을 강탈하는 헨드릭에게 오히려 친근한 유대감을 애걸하기 시작하는 양상에까지 이르면, 일평생 잊힌 존재였던 여자가 어떻게 또다시 잊히고 철저하게 고립되어 가는지를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다. 하인인 채로 마지못해 권력의 우위의 점하게 되다가 주인살해오명이 두려워 헨드릭과 안나가 도주하고나자 마그다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측정할 수 없을 만큼의 공허한 나날들뿐이다. 세상의 가장 외진 곳에서 스스로의 역사를 자아내는 일 말고는 남은 것이 없는 여자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온통 모순에 차고, 자학의 광기로 넘실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이다.
내게는 얘기할 수 있는 형제나 아버지, 어머니가 필요하다. 역사와 문화가 필요하다. 희망과 포부가 필요하다. 행복해지기 전에 도덕의식과 목적론이 필요하다. 먹을 것과 마실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제 나는 나 혼자다. 나는 어떻게 될까? 나는 다시 혼자다. 역사적 현재 속에서 혼자다.(p.229)
존 쿳시의 두 번째 소설인 『나라의 심장부에서』를 읽으려는 순간부터 심신을 옥죄는 강박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번엔 또 어떤 문장들로 광막함을 자아낼 것인지, 자진해서 개미지옥으로 몸을 던지는 것 마냥 철저하게 몰아붙이는 날 선 문맥은 신경증의 향연을 일으키지 않은 것이 의아할 지경이다. 남아공 식민지배의 역사 속에서 네덜란드계 백인인 '아프리카너'의 형상을 그네들이 정착해 만든 '아프리칸서스'로 전하는 데 인색했던 목가적 전통의 기존문단의 위선을 폭로하기 위해, '덜' 식민지적인 언어인 영어로 작품 활동을 해왔던 쿳시가 모국어인 아프리칸서스를 결합해서 탄생시킨 이 소설은 식민지의 온상인 시골농장의 야만적인 본모습을 극렬하게 표출시키고 있다. 결국은 철저하게 자신이 구축한 역사 '나라의 심장부'말고는 가질 수 없던 마그다의 참상을 독백으로 전하면서 세상 어느 곳보다 외지고 고독한 변방으로 우리를 안내하고 있다.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말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말이다.(p.2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