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영화포스터 커버 특별판)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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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 줄리언 반스 저 / 다산책방

시간과 기억, 그리고 책임의 관계










솔직히 고백하건데, 나는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문제도 괜히 어렵게 생각하는 약간 피곤한 유형의 사람이다. 그건 아마도 대부분의 어떤 상황과 결과물은 독립된 상황이 아닌 여러 작은 이유들의 누적된 결과라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다. 일에서도 현재의 순간이나 결과치보다도 진척되어 온 경과나 진행 방향을 중요시하는 편인 것 같고.

 

천성이 이렇게 생겨먹어서일까? 지금 당장의 일이나 결과에 대해 이야기 할 때면, 유독 과거에 있었던 여러 상황들에 대해서 많이 언급하게 된다. 아마 주변 사람들 입장에서는 하도 옛 이야기들을 많이 하니까 작은 것 하나하나에 집착하는 쫌생이 쯤으로 느낄 수도 있겠다 싶다. 뭐, 정말로 그런 속마음에서 하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주변 사람들로부터 기억이 좋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그렇다고 해서 기억력이 특별히 좋은 편도 사실 아니다. 칠칠 맞게도 문을 잠궜는지 기억을 못해서 외출하다가 도로 집으로 올라가서 확인하는 경우도 종종 있을 정도니까. 다만 특이하게 남는 대사나, 이미지, 순간의 느낌 같은 것은 약간의 사진이나 짧은 동영상의 느낌으로 인식하는 것 같다. 그렇게 각인된 장면은 그나마 오랜 시간 기억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가족 모임에서 서너살 때 기억의 에피소드나 유년 시절의 이야기들을 하면 가족들도 깜짝깜짝 놀라곤 하니까. 문제라면, 그런 오랜 기억들이 대부분 별로 쓸모 없는 것들이 많다는 것 정도?



그런데 과연 그렇게 기억된 장면들은 과연 정확한가? 만약 누군가 이런 질문을 내게 건낸다면... 잘 모르겠다. 아마도 정확하다는 확언은 쉽사리 건내지 못할 듯 하다. 우선은 1) 우리 삶은 지나치게 규모가 크고 복잡해서, 사건 하나가 일어나는데 있어서 너무나도 많은 크고 작은 사건들이 연관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가 모든 일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있지 않는 이상 발생하는 일의 이면은 볼 수가 없을 것이므로, 기억하는 일이나 장면 역시 그러한 본질을 반영하지 못할 수밖에 없게 된다. 두번 째는 2) [EBS 다큐프라임 : 기억력의 비밀] 등의 여러 과학적 연구로도 밝혀졌듯, 기억은 하나의 사진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새롭게 추가되는 정보로 인해 끊임없이 재구성되고 때로는 왜곡되는 존재이기 때문에, 시간에 따른 기억의 변형을 무시할 수 없다. 


이쯤에서 중요한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기억'으로 대변되는 과거의 일들은 현재의 나의 의식을 구성하며 자연스럽게 현재의 판단과 삶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리고 그 것은 또 다시 미래에 발생할 어떤 불확실한 사건의 새로운 원인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처럼 의도와 관계없이 왜곡된 기억들로 인해 발생하는 사건들에 대해서 과연 우리는 얼마만큼의 책임을 가져야할까?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바로 이러한 시간과 기억, 그리고 책임의 관계를 다루고 있는 책이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와 저자인 줄리언 반스를 처음 접한 것은, 작년 이동진씨의 빨간책방이라는 도서리뷰 팟캐스트를 통해서 였다길지 않은 분량임에도 무거운 주제를 담고 있다는 첫 소개를 시작으로 약 두 시간의 시간, 그것도 2회 분량으로 길게 다루어지는 것에 흥미를 가졌다특히, 작가인 줄리언 반스가 항상 책을 쓰기 전 넘쳐나는 정보와 상상력들 중에서 과연 인간은 어디에 있는가를 찾기 위해 고심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더욱 흥미가 생겼었다. 빅데이터 시대, 파편화되는 인간 등 조금만 둘러보면 쉽게 보이는 현실의 문제들에 대한 철학적인 논의라니. 그것도 소설이라는 하나의 이야기로 말한다니. 참 매력적으로 보였다. 게다가 개인적으로 김연수 작가를 좋아하는데, 줄리언 반스가 가장 비슷한 국내작가로 김경욱씨와 김연수씨가 꼽힌다는 말에 반드시 이 책은 읽어야겠구나 결심했었더랬다. 

 

그렇게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라는 책을 읽었다. 외국소설의 번역본은 조금 읽기가 어색한 감이 있어서 그닥 좋아하지않다보니 스토리를 놓치지 않는 것에 집중해서 글을 읽었던 것 같다. 느낌이라면, 평범하고 찌질한 토니 웹스터의 모습들을 보면서 왜 이렇게 인생을 피곤하게 살까를 생각했던 것 정도? 그러다가 뒷부분의 충격적 반전을 본 뒤 다시 내용들을 곱씹어 보게 되었고이 제목이 가진 위력을 비로소 실감했다. 작가가 인터뷰에서 짧은 책이지만 두 권이 쓰여진 것과 같은 느낌을 받을 것이라 왜 자부했는지 알 수 있겠더라.

 

사실 팟캐스트에서는 이 책 제목이 상업적 의도에서 만들어진 그닥 적절하지 않은 제목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내용 상의 반전과 더불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책임'의 영역에 대한 물음까지 포함하는 아주 훌륭한 제목이라 생각한다그래서 이 책을 처음으로 접하는 이가 있다면 제목의 의미에 집중해서 찬찬히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사실 줄거리 내용만으로 보면 답답할 정도로 항상 토니의 예상이나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 토니 주변의 가장 중심인물이라 할 수 있는 베로니카나 다른 인물들에 의해서 가장 많이 반복되고 있는 대사가 ‘아직도 감을 못 잡고 있구나’ 라는 것부터, 주인공인 토니 웹스터의 예상이 얼마나 틀려왔었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렇게 예상들이 항상 틀려왔음에도 불구하고, 왜 소설의 제목에서는 마치 결과를 당연히 예상했다는 듯이 이야기하고 있을까?

 

소설 속에서 토니는 마치 나처럼 상황 자체를 무척이나 복잡하게 보는 스타일의 찌질이다. 현실과 기억에 대한 수많은 왜곡 가능성과 불확실성에 대한 힌트들을 스스로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상황은 계속해서 토니의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며, 마침내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의 발생에 대해서도 결국은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체념하고 합리화 해버리는 단계에 이른다. 제목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바로 여기에 있다. 체념, 합리화는 '내면적 수용'의 다른 말이니까.

 

작가는 아마도 우리의 인생은 불확실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사실 시간과 기억의 불확실성에 대해서는 독자에게도 주어지는 힌트들도 수없이 많다이를테면 처음 1부에서 보여지는 토니와 에이드리언의 고교시절 모습, 그리고 그 속에서의 역사에 대한 담론을 들 수 있겠다. 역사의 의미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각 증거물은 사건의 모든 부분을 보여주기에는 불충분하며해석자에 의해 의미가 달라질 수 있고남아있는 자의 자의적 합리화도 가능하며심지어 역사를 겪은 당사자의 이야기라 하더라도 본인 조차 그것의 의도를 제외한 파급되는 영향까지는 고려하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 말은 글 전체를 관통하는 기억에 대한 불확실성에 대한 분명한 복선이다.

 

글이 후반부에 접어들고 충격적 결말에 가까워 질수록, 회고 형식의 이 소설은 보다 직접적으로 작가의 생각들을 말하기 시작한다. 심지어 앞 부분에서 분명하다고 말했었던 것들을 이제와서 사실은 불확실하다며 번복하는 경우도 있다. 이 쯤되다 보니 독자의 입장에서는 마치 소설 속 화자가 노망이라도 걸렸나 한번 쯤 의심해볼만도 하다. 어쨌든 그런 흐름을 통해 작가는 자연스럽게 사건의 발생과 해석의 불확실성, 기억의 불확실성을 확실히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 사소한 언급들이 누적되어 뇌리에 남아있다가 후반부의 충격적 결말을 접하게 되면, 독자들의 머릿 속은 혼란으로 폭발할 것이다. 화자가 겪었던 그 혼란, 그러니까 전반부에 언급되었던 그 많은 이야기들이 실은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혼란에 독자들은 허우적 된다어디까지가 정확한 상황이고 왜곡된 상황인지 곱씹을 수밖에 없다결국 기억은 정확하지 않으며 단지 우리가 기억하고 싶은 대로 기억하는하나의 믿음일 뿐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런데 만약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여기에서 머문다면이 책의 제목은 지금의 제목이 아닌 예감은 결코 맞지 않는다가 더 적합했을 것이다하지만 나는 작가가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그러한 불확실성에서 파생되는 결과의 책임범위에 대한 문제까지 독자에게 묻고 있다고 생각한다인생은 축적의 문제고책임이 있다그리고 이 모든 것 너머에 혼란이 있다거대한 혼란이”. ‘요컨대 b, a1, a2, s, v라는 정수가 포함된 축적은 어떻게 나타낼 수 있을까?’ 의 문장들을 통해 우리는 과연 불확실한 상황들로 인해 인지하지 못한하지만 우리의 영향력이 얽혀있는 문제와 결과에 대해서 얼마만큼 책임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지 고민할 것을 요구 받는다.



개인적으로 아직까지도 이 책임의 영역에 대한 결론은 명쾌한 답을 내리지 못했다하지만 책의 제목이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라는 것을 감안했을 때, 처음에는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라고 하더라도 발생하는 사건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음을 뒤늦게 나마 인지하게 된다면, 궁극적으로는 그 인과관계에 대해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결국 불확실한 인생이라 하더라도 결국 우리는 살아가야만 하고그러므로 그 삶이 나의 것임을 포기하지 않는 한 발생하는 결과에 대해서도 할 수 있는 책임을 다해야만 할테니까. 

 

소설 속에서 토니는 기억조차 불확실한 자신의 행동에서 시작된 결과인 상징물 b에 대해서, 아무런 위로가 되지 못한 채 당혹감과 미안함 속에서 단지 두 배의 팁을 내는 행동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그것이 나름의 책임을 덜어내는 행동이 될까라는 스스로의 물음과 함께물론 그 행동은 선택이 아닌할 수 있는 것이 그것 밖에 없었다고 보여지지만.

 

어떻게 보면 이 책은 수수께끼 투성이다불확실함에 대해 해석을 이끌어내는 수수께끼기억과 시간에 대한 수수께끼.그것에서 파생된 결과의 책임범위에 대한 도덕적 수수께끼그리고 개인적으로 여성특유의 아리송한 대화체까지도 수수께끼로 다가올 수 있다인간은 보이지 않는 것에서 공포를 느낀다고 하는데, 어쩌면 그러한 불확실성 가득한 삶은 하나의 공포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우리가 나이를 먹으면서, 그리고 삶을 살아가면 갈수록 사는 것이 녹녹치않고 웬지 무섭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 점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래도 어쩔 수 없다삶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두렵더라도, 알지 못하더라도 살아갈 수밖에 없으니까오히려 어떤 일이 일어날 지 모르기 때문에 흥미롭다고 생각하며 살 수밖에 없을 듯하다그리고 그렇기에 지금 순간순간에 더 진심을 다해 살아야하지 않을까.

 

아, 그리고 영어 책도 괜찮으신 분들은 원본 그대로를 읽어보시길 권한다. 분량도 그리 많지 않아 읽기 편하고, 단어 선택도 운율을 고려한 경우가 많아서 한국판보다 더 빠르게 읽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세상에 초침만큼 이치를 벗어나지 않는 게 또 있을까하지만 굳이 시간의 유연성을 깨닫고 싶다면약간의 여흥이나 고통만으로 충분하다시간에 박차를 가하는 감정이 있고한편으로 그것을 더디게 하는 감정이 있다그리고 가끔,시간은 사라져버린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는 행위를 근거로 정신 상태를 판단할 수 있다고 했다반면에 개인의 삶에서는 그 반대가 진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현재의 정신 상태를 근거로 과거의 행위를 판단할 수 있다. (중략그렇다면 문제는 수많은 것들이 걸린 그런 문제로 인한 손실에 어떻게 대처할까이다상처를 인정할 것인가아니면 억누를 것인가. (중략그리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더 이상 상처받지 않는 것을 주된 목표로 삼는 사람도 있다이들이야말로 피도 눈물도 없는 부류이자가장 조심해야 할 부류다. 

 

 젊었을 때는 노년에 겪을지 모를 고통과 황폐를 미리 예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중략그러나 이는 결국 앞을 내다보는 행위일 뿐이다앞을 내다보고그러고 나서 그 미래로부터 과거를 돌아보는 자신을 상상한다는 건 불가능하다.시간이 가져다주는 새로운 감정을 익히는 것예를 들면우리의 삶을 지켜봐 온 사람이 줄어들면서 우리의 인간됨과 우리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는가를 증명해줄 것도 줄어들고결국 확신할 수 있는 것도 줄어듦을 꺠닫게 되는 것. (중략)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다. 

 

 바로 우리 코 앞에서 벌어지는 역사가 가장 분명해야 함에도 그와 동시에 가장 가변적이라는 것우리는 시간 속에 살고그것은 우리를 제한하고 규정하며그것을 통해 우리는 역사를 측량하게 돼 있다그러나 시간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속도와 진정에 깃든 수수께끼를 파악하지 못한다면우리가 역사를 어찌 파악한단 말인가심지어 우리 자신의 소소하고 사적이고 기록되지 않은 것이 태반인 그 단편들을. 

 

 누구나 그렇게 간단히 짐작하면서 살아가지 않는가예를 들면 기억이란 사건과 시간을 합친 것과 동등하다고그러나 그것은 그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기이하다또한 시간이 정착제 역할을 하는 게 아니라 용해제에 가깝다는 사살을 우리는 명백히 알아야만 한다. 

 

 사람들이 그 여자는 예쁘게 생겼다고 할 땐 보통 그 여자는 소싯적에 예뻤다는 뜻일 경우가 많다그러나 내가 마거릿에 대해 말할 땐 정말 그렇기 때문이다마거릿은 자신이 변했다고 생각한다그렇다는 걸 안다실제로도 그녀는 변했다그러나 나는 그 변화의 폭을 다른 사람만큼 느끼지 못한다마거릿은 사라져버린 것만 보고나는 변함없이 그대로인 것만 본다고. (중략) 우리가 지금도 가장 중점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눈이다안 그런가우리가 처음 만나사랑을 나누고결혼을 하고신혼여행을 가고공동담보를 잡히고쇼핑을 하고요리를 하고휴일을 함께 보내고서로를 사랑하며 함께 아이를 낳았을 때의 그 사람이 여전히 지니고 있는 그 눈 말이다. 

 

 어쩌면 이것이 젊은 사람과 나이 든 사람의 차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젊은 시절에는 자신의 미래를 꾸며내고나이가 들면 다른 사람들의 과거를 꾸며내는 것. 

 

 배우면 배울수록 두려움은 줄어든다학문의 의미가 아닌 인생을 실질적으로 이해한다는 맥락에서 배우는’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우리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얼마나 자주 할까그러면서 얼마나 가감하고윤색하고교묘히 가지를 쳐내는 걸까그러나 살아온 날이 길어질수록우리의 이야기에 제동을 걸고우리의 삶이 실제 우리가 산 삶과는 다르며,다만 이제까지 우리 스스로에게 들려준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우리에게 반기를 드는 사람도 적어진다타인에게 얘기했다 해도결국은 주로 우리 자신에게 얘기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어쩌면 인성이란 다소 시간이 지나서즉 이십대에서 삼십대 사이에 정점에 이른다는 점만 빼면지성과 비슷할지도 모른다그 시기가 지나면 우리는 그때까지 쌓은 소양에 여지 없이 고착되고 만다우리에겐 우리 자신뿐이다그렇다면 그걸 통해 여러 인생을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그리고 – 폼 잡고 말하려는 건 아니지만 – 우리의 비극까지도. 

 

 노화로 인해 하나둘씩 기억을 잃기 시작할 때반응하는 방식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중략그러나 그것 말고도 배우는 게 한 가지 더 있다바로 뇌는 고정 배역을 맡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만사는 감소의 문제요뺄셈과 나눗셈의 문제라고 생각하기 무섭게 뇌가기억이 우리의 뒤통수를 칠지도 모른다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속 편하게 점진적인 쇠락에 기댈 수 있다고 믿는다면 꿈 깨시지인생은 그보다 훨씬 복잡하니까그래서 뇌는 이따금씩 파편적인 기억을 던질테고심지어는 기억의 묵은 폐쇄회로를 터주기까지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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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하지 않았던 과거의 행동이 감당할 수 없는 결과로 다가왔을 때,

그것에 무기력 할 수밖에 없다는 건 어쩌면 공포가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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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테 미안해서 비행기를 탔다 - 오기사가 다녀온 나르시시즘의 도시들
오영욱 글.그림 / 달 / 2011년 11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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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휴가를 가장한 노동을 하러 고향 집에 방문했었다. 여행준비를 마치신 부모님께서 해외로 떠나시고 홀로 집을 지키는 신세가 되었을 무렵. 할 일마저 어느정도 마무리가 되어버리자 마침내 외로움과 심심함이 3 대 7의 비율로 밀려오기 시작했다. 무료함을 달래려 서재에 들어가서 책 구경을 했다. 아주아주 예전에 읽어서 내용도 잘 기억나지 않는 책들과 사 놓고는 읽지 않았던 책들이 서재 벽면 한쪽을 채우고 있었다. 왠지 방치된 책들에 애잔한 마음이 들어 그 중에서 가벼워 보이는 책 한 권을 꺼내들었다. 오기사, 오영욱씨의 [나한테 미안해서 비행기를 탔다] 였다. 

 

 

나르시시즘은 그리스 신화에서 호수에 비친 자기 모습을 사랑하며 그리워하다가 물에 빠져 죽어 수선화가 된 나르키소스(Narcissos)라는 미소년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프로이트(Freud)가 이 말을 정신분석학에서 자아의 중요성이 너무 과장되어 자기 자신을 너무 사랑하는 것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하였다. 프로이트는 나르시시즘에 대해 자기 자신을 리비도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라고 하였으며, 인격적 장애의 일종으로 보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나르시시즘 [Narcissism] 

오영욱씨의 책 들이 대부분 비슷한 느낌이긴 하지만 그 중에서도 이 책은 비교적 컨셉이 분명한 편이다. 그 컨셉은 [오기사가 다녀온 나르시시즘의 도시들]이라는 책의 부제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오영욱씨가 다녀온 곳은 모두 미국의 '라스베가스', 인도의 '찬디가르', 그리고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책에서 오영욱씨는 이 도시들과 그것에 투영된 인간의 모습/생각들을 본인의 전문분야인 건축을 매개로 해서 바라보고 있다. 

 

그럼 왜 하필 이 도시들이었을까? 이 세 도시는 공통점이 있으니, 모두 비교적 가까운 시간 내에 계획에 의해 새롭게 건설된 신도시들(라스베가스는 자본에 의해, 찬디가르는 르 꼬르뷔지에의 설계,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이름처럼 표트르 대제에 의해)이라는 점이다. 그렇기에 마치 자기애의 과잉을 보여주는 듯한 분위기를 공통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어색하면서도 인위적인, 억지스럽기도 한 면도 가지고 있다부제에 적혀있는 '나르시시즘의 도시'라는 의미는, 세 도시의 건축에 담긴 인간의 의도를 일종의 '과시'로 보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이유 없이 만들어지는 것은 없는 것 같다. 특히나 그것들이 인위적인 것이라면 더더욱. 그런 의미에서 도시 속 창작물인 건축물 하나하나마다 (현재와 비교적 가까운) 현대인들의 욕망이 담겨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이쯤되면 이 이야기는 여행지의 건축물을 탐구하는 척하지만 결국은 인간을 바라보고 있는 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르긴 몰라도 건축물을 잘 아는 사람의 시선에는, 과거 건설자들의 모습이나 의도도 더 잘 보였던 것이 아니었을런지. 

 

하지만 더 섬세하게 파악할 수 있다고 해서 반드시 긍정적인 이미지로만 남는 것은 아니다. 각각의 도시들 앞에 따라붙는 '욕망의 도시', '일탈의 도시', '위안의 도시'라는 수식어처럼 각각의 도시들은 어딘가 부족한 면이 있는, 단점이 분명한 도시라는 것을 저자는 계속해서 언급한다. 어쩌면 인간의 욕심/바람에 의해서 만들어졌지만, 그럼에도 계획과는 다른 여전히 채워지지 않은 부족함이 존재하는 도시들을 바라보면서, 결국 인간의 바람과 욕망은 완전히 채워지기 힘들다는 것을 작가는 인정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도시들에 보내는 작가의 연민과 애정은 확고하다. 나는 이 역시 한편으로는 허허벌판 위에 터전을 일구어 낸 인간의 열망을 나름대로 존중하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찬디가르 편에서 르 꼬르뷔지에의 글을 인용한 것과 마지막 에필로그 부분이다. 전자의 경우에는 사실 상 이 책 전반을 관통하고 있는  내용으로 마치 저자가 도시로 떠났던 이유를 말해주는 것으로 느껴질 정도다.  

 

위대한 시대가 막을 열었다새로운 정신이 존재한다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밀려가는 홍수처럼 우리를 압도하고 있는 산업은 새로운 정신에 의한 이 새로운 시대에 우리가 적응하기 위한 도구들을 제공한다불가피하게 경제적 법칙은 우리의 행동과 생각들을 지배한다주택의 문제는 그 시대상황과 관련이 있다오늘 날 사회의 균형은 바로 주택에 달려있다지금과 같은 변혁의 시대에 있어서 건축은 가치관을 수정하고 주택의 구성요소들을 변경해야 하는 그 첫 번째 책임을 진다대량생산은 분석과 실험에 기반을 둔다산업의 시각으로 대량생산에 입각하여 주택의 부재들에 대한 체계를 수립해야 한다그리고 우리는 대량생산에 대해 정신적 개념을 정립해야 한다가령대량생산형 주택을 짓는 정신대량생산형 주택 속에서 생활하는 정신대량생산형 주택을 인식하는 정신만약 우리가 주택에 관계된 모든 낡은 개념들을 버리고비판적이고 객관적인 관점으로 다시 바라본다면우리는 대량생산주택인 사는 기계에 도달할 것이다이 사는 기계는 생활 속의 연장도구들이 아름다운 것과 마찬가지로 건강하고 아름다운 것이다예술가의 감성이 준엄하고 순수한 기능적 요소들에게 생명력을 불어넣었을 때 또한 아름답다. - 르 꼬르뷔지에 

나는 이 글을 보고 저자는 분명 위의 세 도시를 [기계적 합리성에 충실한, 그래서 모든 것들을 산업과 연관된 미래지향성을 기준으로 평가하도록 만들어진 도시들]로 바라보았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사실 르 꼬르뷔지에는 대량생산이 하나의 시대의 흐름이고 시대의 정신이라고 외쳤지만, 시대정신에 무작정 편입된다는 것은 때론 자신의 특색과 존재성을 포기하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찬디가르에 붙은 부제처럼 일탈을 위해 떠났다는 그는, 오히려 이 시대의 시대정신을 만든 그 당시의 일탈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현재의 주류를 만들어버린, 그러나 결코 성공적으로 평가되지는 않는 과거의 일탈들을 보면서 그는 분명 묘한 자극을 받았을 것이다. 짐작컨데 아마도 이 시대의 새로운 일탈을 꿈꾸지는 않았을런지. 

 

내게 모든 도시는 마치 여자 같았다귀여운 여자얼굴만 예쁜 여자왠지 마음에 들지 않는 여자존경스러운 여자세심한 여자섹시한 여자터프한 여자여자를 좋아할 것 같은 여자남자 하나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여자 등등그렇기 때문에 도시로의 여행은 짝사랑이 되기 일쑤였다머리가 큰 이방인 남자를 단번에 좋아할 수 있는 여자는 세상에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녀들의 마음을 빼앗기 위해서 난 보다 오랫동안 그녀 주위에 머물러야 했다이십 대의 나였다면 분명 그녀들을 소유하고 싶어 어쩔 줄 몰라 했을 것이다하지만 삼십 대 중반의 나이가 되자 세상과 공존하는 법을 보다 잘 알게 되었다나는 음흉한 눈길의 아저씨처럼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 것 바라만 보고 있어도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중략) 세상의 모든 도시들 역시 수많은 시행착오의 결과물이었다지나간 시간의 흔적과 상처들이 도시의 구석구석에 새겨져 있었다그리고 나는 어느덧 사랑하게 된 사람의 오랜 습관을 바라보는 것처럼 그 나름대로의 모습들이 좋았다. - 에필로그 中

나는 에세이는 과장이 없어야(적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생각을 솔직히 적어가는 것이 에세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과장하는 것은 읽는 이에게 생각과 감정을 강요하는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이 글은 참 매력적인 에필로그다. 도시를 대하는 태도, 도시에 대한 애정, 도시 속에서 사는 방법, 자신의 삶의 방식까지 하고 싶은 말은 죄다 말하고 있으면서도 글 자체는 무척이나 무덤덤하다. 작가는 이정도의 뻔뻔함?! 같은 것도 있어야 할 것 같다. 결국 그 뻔뻔함이라는 것도 건축가의 시선이라는 자부심에서 나오는 것이라 생각되지만.





내용 외적인 이야기가 될 수도 있지만, 오기사의 책들을 보면 항상 부러운 것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바가지를 쓴 캐릭터'. 또 하나는 자기만의 관점이라 내세울 수 있는 '건축가의 눈'.

 

캐릭터의 가장 큰 장점이라면, 글을 쓰는 사람도 읽는 사람도 이야기에 더 몰입하게 한다는 것. 감정이입 할 대상을 만들어 둔 다는 것만으로도 의외로 사람들은 쉽게 빠져들기 마련이다. 그림을 잘 그리지는 못하기에 감히 캐릭터를 만들어내지는 못할 것 같지만, 상징물을 넣어 사진을 찍거나 하는 방식으로 나 또한 여행기나 글을 쓰는데 도입을 해볼만한 방식인 것 같다. 건축가의 시각은... 뭐 어쩔 수 없다. 나만의 전문성을 가져서 보이는대로 판단하는 수밖에.

 

가볍게 꺼낸 책이 마음을 가볍게 만들었다. 가벼워져서 그런지 다가 올 여행을 더 기대하게 되는 것 같다. 반쯤은 떠있는 듯한 마음으로 여행을 떠나야겠다.





 외로움은 기대의 불균형에서 오는 것이다.

 

 환상은 대게 진부하지만 세상은 보다 진부하다그러니까 쿨하지 않게 보일까봐 걱정하면서 살 필요는 없다.

 

 노골적인 상징은 목적에 집착한다. (중략상징은 인간을 위한다는 근대 건축이 정작 잃고 있었던 인간성의 영역에 관한 이야기였다그것은 고귀함과는 거리가 먼 즉흥적이고 직설적인 감성들이다.

 

 상징이 공간을 지배한다건축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공간 간의 관계라는 것은 형태보다는 상징에 의하여 맺어지기 때문에풍경 속에서의 건축은 형태보다는 상징으로 장소를 규정한다. – 로버트 벤추리, [라스베이거스의 교훈]

 

 욕망의 크기는 문제가 아니다그냥 각자의 욕망이 다르기에 종종 서로 충돌하게 되는 것이 문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이 사라진 시대에 누군가가 의지할 것은 결국 자신의 욕망밖에 없다.

 

 일탈은 자기애에서 비롯된다일상이 온전히 자신의 것이라고 느껴지지 않거나 혹은 목표를 향해가는 길을 읽고 잠시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다면 일탈의 감행을 고려해볼 만하다자기애가 결핍된 돌출행동은 단지 현재의 부정일 뿐이다.일탈은 나름대로 미래지향적 자의식 발현이다.

 

 궁극적인 새로움이란 다시 말하자면 일상을 바꾸는 문제다수없이 많은 건축적 시도와 실험들은 결과적으로는 일탈에 가까웠다일상에 큰 영향을 끼치지는 못한 채 잠시 기존의 질서에 변주를 준 것이다물론 부정적인 일은 아니다.많은 시도들은 사유의 깊이를 더하고발전을 위한 기반을 다진다.

 

 삼십 대 중반은 그냥 정신이 없는 시기인 것 같다문득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덧 지나간 그런 속성의 시간이었다.

 

 세상은 먼저 걱정해주는 사람들에 의해 나름대로 편하게 돌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누가 더 느긋할 수 있는지가 인생의 피곤함을 결정한다.

 

 일탈은 복제되지 않아야 한다복제되고 재생산되는 순간 일탈만이 줄 수 있는 그 미묘한 긴장감은 사라져버린다. (중략)개발이 시작된 지 50년이 넘은 찬디가르에는 여전히 다른 인도의 도시들에서는 느낄 수 없을 미묘한 기운이 흐르고 있다나는 그것이 일탈이 줄 수 있는 건강한 에너지라고 생각한다.

 

 찬디가르와 브라질리아두 도시는 모두 이성과 합리성이 인간의 삶을 고스란히 규정할 수 있다는 믿음 아래 건설되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그리고 대체로 썰렁하다는 유사점도 있다설계자들은 이상적인 도시를 도면 위의 선들로 구현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고 치열하게 실현해냈다이것이 바로 두 도시가 세계에서 가장 황량한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다소 비관적인감동을 줄 수 있는 이유가 아닐까 한다.

 

 생각은 스스로에 대한 애정에 의해 능동적으로 진화한다그건 변절과는 다른 것이다.

 

 체념의 고통을 겪어본 사람만이 동정을 받을 권리가 있다.

 

 크기는 문제가 아니라고 수많은 조언자들이 위로를 하더라도 결국 그 크기가 사람들을 자신만만하게 하거나 위축되게 만들고는 한다마음이란 그리 쉽게 설득되지 않는 존재인 것이다.

 

 세상에 완벽한 위로는 존재하지 않는다위로란 정열적 사랑고백처럼 잠시 자신을 속이는 일이다하지만 속는 줄 알면서도 가끔은 모른 척 넘어가야할 때도 있는 법이기에 사람들은 지치지 않고 새로운 사연들을 만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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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여행을 권함
김한민 지음 / 민음사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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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입학 한 후 처음으로 외지에 나와 살게 되었다. 이른 바 서울 유학.

부모님의 우려와는 다르게 서울도 크게 다를 건 없었다. 심지어 눈을 감고 있어도 코를 베어가는 사람도 없었다. 하긴 다 사람사는 곳이니 뭐가 크게 다를게 있겠나. 내겐 제법 친해진 동기들도 있었고, 매일 밤 시간가는 지 모를 정도로 마셔댔으니 정신도 없었고, 해가 뜨는지 지는지 구분이 잘 가지 않는 반지층 방에서 함께 치킨을 뜯으며 비디오게임을 즐길 친구도 있었다. 스무살, 서울의 밤은 매일 그렇게 지나갔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지친다라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지, 이걸 왜 하고 있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작은 것 하나부터 시작된 작은 권태로움은, 순식간에 내 삶 전체를 무료하게 만들었다. 당시 연애했었던 친구에게는 참 미안한 이야기지만,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은 연애조차 무료함과 권태로움을 막기에는 무리였다. 그 전의 통제된 삶과는 다른, 어디하나 묶인 데 없는 자유를 가장한 방종에 취해 지나치게 가벼운 시간을 보냈던 결과였다. 여름이되고 바람이 불었고, 가벼웠던 내 생활은 쉽게 날아가버렸다. 그 즈음의 서울 밤 하늘, 흐리던 달은 참 얄미웠던 것 같다.





그 때가 처음이었다, 자발적으로 떠난 것은.

그 전에도 사전적인 의미의 여행은 많이 다녀보았지만, 아니 따라다녔지만 내 인생의 진짜 여행은 그 때가 시작인 것 같다. 이유는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유를 몰랐다. 다만 멀리 떠났다가 돌아오면 다리의 피로감만큼이나 가슴 속에 뭔가 차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얻은 것도 깨달은 것도 사실 쥐뿔도 없었지만, 나는 그게 그냥 '연료' 같은거라고 생각했다. 삶의 의미는 평소에 찾으면 된다고 다짐했다. 내게 필요한 것은 일상에 충실하기 위한 에너지였고, 여행은 그것을 제공했으며, 난 그걸로도 충분했으니까.

  

그 이후로 여행은 내 생활에 있어 아주 중요한 하나의 요소가 되었다. 삶을 점으로 표시한다면, 두 번의 국토순례와 여러차례의 국내여행, 나들이를 비롯해서 캄보디아로 떠났던 첫 배낭여행, 공모전으로 떠났었던 일본 등의 여행 경험은 모두 당시의 내 삶을 표현하는 굵은 점들이 되었다. 매일 밥만 먹던 내게 여행은 라면이었다. 그리고 때론 그 라면이 참 맛있게도 느껴졌고, 때론 정말 맛대가리 없어서 '아, 정말 맛있는 건 밥이었구나' 하는 생각도 들게 했다. 어찌 되었건 내게 여행은 라면이었고, 그저 라면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었다.

  

 

자꾸 여행을 라면에 비유해서 미안한 일이지만 (글을 쓰는 지금 슬슬 점심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양해바란다), 사람 욕심이라는 게 하나를 하면 자꾸 더 좋은 걸 하고 싶어지더라. 라면도 슬슬 물리기 시작했는지 좀 더 특이한 라면을 먹고 싶어졌다. 여행을 뭔가 특별하게 만들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여행을 나만의 특별한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한 결과, 방법을 찾았다. 바로 '흔적을 남기는 것'이었다. (유치하게 어디서 낙서... 이런건 아니니까 걱정은 접어두시길)

   

쉬운 것부터 시작했다. 처음에는 여행 중 기념이 될만한 작은 것들을 보관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기차나 항공편의 티켓들, 영수증 같은 것. 그리고 좀 더 잘 기억하기 위해서 간단한 느낌을 담은 단어나 글도 함께 썼다. 나중에 보면 손발이 오그라드는 부작용은 많았지만 그래도 그게 추억이었고, 그게 내 여행이었다. 그런데 그것도 오래가지 않더라. 욕심쟁이심뽀 어디가겠나, 그렇게 나는 기왕이면 사진도 찍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보통은 사진을 여행의 부산물이라 생각한다. 나도 처음엔 그랬다. 사진도, 기록도 모두 추억하는 여행을 아름답게 해준다고 믿었다. 그런데 사진을 찍다보니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을 찍는다고 말하기도 부끄러운 실력이지만) 사진을 찍는 행위 자체가 순간순간에 집중하게 하는 매력이 있는 것 같더라. 사진도, 기록도 지나고 난 여행을 아름답게 추억하게 하는 재주가 있지만, 동시에 지금 즐기는 여행도 더 풍요롭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그 때 알게 되었다. 비로소 라면이 짜장라면이든, 짬뽕라면이든, 무튼 맛을 음미하는 수준으로 발전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찰나의 느낌을 담는 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장비도 무거웠고, 현장에서 사진을 잘 찍었다고 해서 나중에 본 사진이 무조건 만족스러울거라는 보장도 할 수 없었다. 기본기 없던 실력이 하루 아침에 늘진 않을테고, 조금씩 노력은 하겠지만 그래도 이걸 보완해줄 뭔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생각을 조금 달리했다. 현장감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쪽보다, 내 감정이 느끼는 바에 더 집중하자고. 그게 바로 '스케치' 였다그래서 시간적인 여유가 있는 여행이라면 스케치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처음 시도했던 건 뉴질랜드 여행. 처음은 역시나 초라하다. 몇몇 그림을 그려보긴 했지만, 생각보다 (시간적인) 여유도 없었고, 노트도 변변찮았고, 연필도 구할 수 없어서 펜으로만 그렸다. 실력이 없으니 역시 장비 탓을 하게 되지만... 무튼 그랬다. 그렇게 여행을 돌아와서 한동안은 스케치를 잊고 있다가 이 책을 접하게 되었다. [그림 여행을 권함]이라는 겸손한 제목이 참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내용은 크게 말할 것이 없을 것 같다. 저자의 여행이야기, 그리고 그림을 그렸던 것들, 몇몇 애피소드들을 담고 있다. 그래서 여행기를 기대하고 이 책을 구매한다면 어쩌면 실망하실 수도 있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이 책의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그림을 여행에 빗대어, 여행을 떠나기전 마음가짐이나 태도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림여행에 필요한 간단한 준비물과 방법들을 이야기 해주는 것도 좋았다. 예를 들면, '자기만의 캐릭터를 만들어라', '기분을 표현하는 것은 꼭 직접적일 필요가 없다', '묵었던 숙소의 평범함을 그리는 것도 좋다' 뭐 그런 것들. 이런 이야기들을 숙지한 후에 책을 보면 중간에 들어간 삽화가 더 재미있게 느껴질 수 있다. 처음 도입부의 저자의 어머니께서 그렸다는 여행기도 참 귀엽고?! 운치 있었다는 것도 말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다.





다음 달이면 몽골여행을 떠난다. 관련된 정보를 찾다가 우연히 이제는 이웃이 된 리모님의 블로그(http://rimo.me/)를 찾게 되었다. 여행했던 순간들을 드로잉으로 남기시는 여러 포스팅을 보면서 정말 감탄을 금치 못했었다. 물론 사진으로 봐도 멋진 곳들이겠지만, 직접 그린 스케치 자국과 파스텔 톤의 색체는 사진 이상의 감정과 느낌이 담겨있는 것 같았다. 멋진 그림들에 반해 조심스레 덧글을 남겼더니, "드로잉은 그 과정에서 자기만의 시선으로 세상을 기록할 수 있다는 것이 참 좋은 것 같다"라는 답글을 달아주신다. 이 책 [그림 여행을 권함]이 말하고 있는 내용과 완전히 맞아 떨어져서 적잖이 놀랐다. 저자와 리모님, 두 분 모두 여행과 그림이 가지는 공통점, 과정과 순간에 온전히 집중하고 받아들일 때 진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이번 여행 전 준비물 리스트에 급히 몇 가지를 추가해야겠다. 작은 스케치북과 연필. 오늘의 작은 시도가 이번 여행도,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여행까지도 그 순간을 더 온전히 즐길 수 있는 마법의 레시피가 되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림을 잘 그리는 방법에 관해서라면 난 별로 할 말이 없다. 그림은 누가 가르쳐준다기보다 스스로 즐기는 법을 터득하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마치 여행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림을 못 그리도록 막는 장애물에 관해서라면 할 말이 아주 많다. 손을 쓰는 인류에게 주어진 이 엄청난 특권을, 그 누구도 박탈당해선 안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마치 여행의 권리처럼 말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특권은 너무나 광범위하게 망각되었다. 가장 기본적인 물음에서 시작해보자. 그림이란 뭘까? 그림은 명사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 동사이기도 한 말이다. 나는 이런 구조의 말들이 좋다. 꿈을 꿈. 삶을 삶. 그림을 그림. 이런 말들에는 결과와 과정을 동등하게 중시하는 뜻이 읽힌다. 이런 의미에서, 그림이라고 하면 대개 종이에 남는 결과물을 먼저 떠올리겠지만 나에게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그림을 그리는 행동, 더 자세히 말해 그리는 사람 속에서 일어나는 시간의 변화이다. - 프롤로그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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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를 사랑하는 일, 당신이 당신을 사랑하는 일 - 개정증보판
최갑수 지음 / 예담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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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더워지니 슬슬 땀이 나기 시작한다. 왜 이렇게 덥게 느껴지나 싶었더니 머리가 제법 길었더라. 몸도 마음도 시원해지자 싶어 한산한 오후 시간 잠깐 미용실에 들렀다. 도착했을 때 한 명 있던 손님이 막 나가던 참이었고, 커트해주시는 형님이 잠시 담배 한 대 피는 것 외에는 별다른 기다림 없이 바로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음, 약간의 기다리는 시간과 커트 하는 시간 내내 자리에 앉아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덥수룩한 머리 때문일까, 내 얼굴이 왠지 어색하다. 하긴 최근에 이렇게 긴 시간 동안 내 모습을 마주한 적이 있었던가. 그러고 보니 그 동안 주변의 사람과 일들, 상황들, 물건들에만 집중하느라 정작 나를 바라보지는 못했던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누군가가 그랬듯, 사람은 누군가와 함께 있음으로 스스로의 존재를 느끼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긴 자신이 살고 있는 순간과 상황에 온전히 몰입되지 않으면, 한시라도 주변의 작은 변화에 집중하지 않으며 생존자체가 불가능 한 요즘이니, 스스로 최면상태를 걸며 살지 않으며 삶을 버티기 힘들다는 말도 괜히 나온 건 아닐 게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황과 집단 속에서의 큰 의미로서의 자신의 모습에 너무 몰입하며 살고 있고,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것 같다. 그게 나쁘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오직 확장된 의미로서의 자신의 모습만을 인식하며 살다가는, 어느 순간 밀려오는 공허함에 대처하기가 상당히 난처해질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가끔은 철저한 고독 속으로 스스로를 몰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전혀 다른, 기존의 나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순간에 이르러 오히려 내 심장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내게 있어서 그런 순간들을 경험하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여행이다. 물론 단순한 휴양으로, 때론 다른 현실적인 여러 이유로 여행을 떠날 때도 있지만, 자발적으로 떠나는 여행의 대부분에서 이질감 속에서 진정한 나를 보는 경험을 하곤 한다.





최갑수 씨의 여행에세이 [내가 나를 사랑하는 일, 당신이 당신을 사랑하는 일]을 읽었다. 굳이 이 책을 집게 된 이유는 잘 모르겠다. 다만 초반부에 나오는 하조대의 사진과 글이, 나홀로 동해안을 걸었던 예전의 일을 떠올리게 한 뒤부터는 계속 이끌려서 읽었던 것 같다. 마치 여행이 여러 요소들을 포괄하고 있는 것처럼, 책의 구성 역시 감성이 느껴지는 선명한 사진들과 글들이 함께 실려있다 보니 여행에세이 치고는 조금 두께가 있는 편이다. 그럼에도 두께와 양과는 관계없이 책 자체는 금방 읽힌다. 글이 딱딱하거나 길지 않고 직관적으로 읽기 좋게 되어있는 것도 한 몫 했지만, 최갑수 씨의 솔직한 경험과 감정선이 잘 묻어나 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고 보니 책 목차가 봄/여름/가을/겨울의 모습을 담은 네 개의 챕터로 이루어져 있는 걸 보면, 아마도 저자인 최갑수씨가 아마도 35살의 봄부터 그 해 겨울까지의 여행지에서 본 풍경과 느낌을 담은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이 여행에세이는 여행을 직접적으로, 또 무작정 예찬하지는 않는다. 다만 스스로가 생각하는 여행과, 반대로 여행이 스스로에게 주는 생각들을 약간은 유치하게 느껴지는, 오글거리기도 한 언어들로 전달하고 있다. 내게 그 글과 사진들이 조금은 부끄러움 느낌으로 다가왔던 것은, 마치 치부를 들킨 듯한 것 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만큼 감정을 여과 없이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 것도 그가 여행가이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본다.





다시 한 번 책을 보면, 에세이의 부제인 Sentimental Travel 이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아, 그랬구나. 그제서야 조금 더 이해가 되는 것 같다. 여행을 떠나면 조금은 개방적이고 대담하게 된다는 것. 모든 것들을 새롭게 볼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 그리고 그 속에 일어나는 불확실한 일들을 모두 나의 책임으로 돌릴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 저자가 말하던 상황을 온전히 받아들일 자세라는 것을 이 ‘센티멘탈’이라는 단어 하나에 집약해놓은 것 같다. 하지만 저자가 말하고 있는 것은 그 여행의 태도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부제라는 것이 제목을 설명하는 역할을 하는 것처럼, 저자는 결국은 여행을 통해 스스로를 사랑하는 방법까지 이야기하려고 한다. 여행을 통해서 스스로를 온전히 바라보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그런 여행으로 느끼게 하는 기본적인 태도도 함께 이야기하는 것이다.

 

삶을 여행자로 살아가는 저자만큼의 내공은 없지만, 진심으로 여행을 좋아하는 그래서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으로 짐작하건데 그가 말하고자 하는 ‘스스로를 사랑하는 법’ 역시도 결국은 앞서 말했던 ‘나 자신을 고독으로 몰고 가는 것’에 있다고 본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데, 항상 진지하게 힘을 바짝주고 전쟁터에 임하는 것 같은 삶을 고수하다가는 나를 지키기가 어려워진다. 한 발, 조금은 떨어져서 상황을 이색적인 것으로 몰고 가서, 스스로 이방인이 되어서 나를 희극으로 바라보는 것. 그게 누군가에게는 휴식으로, 누군가에게는 경험으로, 누군가에게는 고생으로, 각자의 구체적 느낌은 모두 다르겠지만 결국은 더 진실된 내 삶을 지키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책 커버 뒷 편에 쓰여진 소설가 김중혁씨의 추천 글은 최갑수 씨의 등을 ‘단단하고 야무지다’ 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 짧은 표현이 담고 있는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다. 여행자는 모든 것을 자신이 감내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그 경험과 무게와 고독감과 넓어진 감정의 폭들은, 삶을 보다 크게 넓게 또 이왕이면 아름답게 바라보게 하는 시각을 선물할 것이다.

 

휴, 책을 덮었다.

어느 새 궁둥이가 또 들썩들썩 거리기 시작했다. 덕분에 또 여행을 가고 싶어지게 된 것 같다. 참 큰일이다.











 그의 몸은 길 위에서 단단해졌고 정신은 투명해졌다카메라를 들고 배낭을 멘 순간에야 그는 비로소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길에서 만나는 꽃과 구름과 바람과 사람들은 구체적이었다그것들은 살아 있었고 움직이고 있었다.

 

 이곳에만 오면 인생이 간결해지는 것 같아.” 하조대 해변을 거닐다 친구가 던진 말. “일하는 데 여덞 시간사랑하는 데 여덞 시간자신을 위하는 데 여덞 시간하루를 이렇게 삼등분해서 살 수 있다면 충분히 행복할 텐데… 해변과 바다 그리고 하늘이 정확히 3분의 1씩 차지하고 있는 곳 하조대.

 

 순간, 새들이 휘익- 하며 화살처럼 날아올랐다. 나는 셔터를 눌렀다. 타타타탁. 셔터 소리가 기관총처럼 울렸다. 문득 그녀가 떠올랐다. 하숙집 창틀에 기대 바라본 그녀. 골목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던 그녀. 내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사랑했던 그녀. 내 기억의 깊은 우물 속에 숨어 있다 홀연히 나에게로 다가온 그녀. 새들이 찍혀 있었다. 시간의 저쪽에 매복하고 있다가 갑자기 엄습하는 그리움처럼, 날카로운 휘파람처럼 구름의 한 귀퉁이를 찢으며 날아온 새들.

 

 하긴 마음먹고 떠나온 여행에서 사람들은 평소보다 두 배정도는 대담해지는 법이다.

 

 우리 모두는 시궁창에 있지. 그러나 우리 중 몇 사람은 별을 바라보고 있지 – 오스카 와일드

 

 삶은 우리에게 몰입을 요구한다. 우리는 최면 상태가 아니고서는 제대로 살아갈 수 없다.

 

 서른다섯. 이젠 슬픔도 아주 구체적으로 다가온다. 가령 밤 열 시의 슈퍼마켓에서 라면 한 봉지와 소주 한 병을 살 때, 오백 원짜리 동전 두 개와 백원짜리 동전 다섯 개, 오십 원짜리 동전 두 개를 내고 사십 원을 거슬러 받을 때,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주머니에 거스름돈을 찔러 넣을 때, 마흔을 바라보는 여자 선배가 올해는 꼭 시집 갈 거야, 하며 말할 때, 그 선배가 탱고를 배우러 다니는데 함께 레슨을 받는 젊은 애들의 동작은 따라할 수 있어도 예쁜 표정은 절대로 따라할 수 없다며 푸념할 때, 슬픔은 너무나도 구체적이다. 서른다섯. 슬픔의 무게도 잴 수 있을 것 같은 나이.

 

 많이 아플 때마다, 나는 내가 몸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니, 몸이 나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마음이고 정신이고, 사랑이고 다 필요 없다. 몸이 먼저다.

 

 우리는 혼자 있는 시간을 견디는 데 익숙하지 않아. 불안해지지. 끊임없이 전화를 하고 메신저를 하고 문자 메시지를 날리지.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사실에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비로소 안심하곤 하지. 하지만 여행을 떠나봐. 기꺼이 혼자가 되어봐. (중략) 그렇게 해봐. 생각보다 평화로워질 거야. 네가 비로소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게 될 테니.

 

 사람들은 대개 마흔 정도가 되면 젊은 시절 자신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했던 것들과 안녕을 고하고 속수무책으로 진부해지고 따분해지기 마련이다.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 있을 것인데 – 가령 멋진 차를 산다든가, 새로운 취미나 공부거리를 가진다든가, 새로운 여자를 만난다든가 하는 방법들 – 가장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가 여행이 아닐까.

 

 해안도로와 중간산도로를 번갈아 갈아타며 겨우 모슬포항에 도착했지만 배는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코앞에서 꽁무니를 빼고 있었다. 다음 배까지는 두 시간이나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어쩌겠어, 다 내 잘못인걸. 여행에서는 이렇게 마음을 먹어야 편하다. 놓친 배, 떠나버린 버스, 이륙한 비행기는 절대로 돌아오지 않는다. 여행자가 가져야 할 첫 번째 덕목. 미리 도착하거나 아쉬워하지 않을 것.

 

 오늘은 세상에 대해 그리고 우리 생에 대해 약간은 심미적이며 관조적인 자세를 가져볼 것. 우리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바로 그 정신적 습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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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경제.인생 강좌 45편 - 윤석철 교수의 경영학 특강
윤석철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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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흘러가는지 너무 복잡하다 싶다. 결국은 보고 싶은 것만, 알기 쉬운 것만 골라보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더라 만은, 그래도 조금이나마 세상 속도에 발걸음 속도를 맞춰보고자 매일 아침 신문은 꾸준히 읽는 편이다. 그러다가 얼마 전 5월 29일자 한국경제에 실린 윤석철 서울대 명예교수의 인터뷰 기사를 읽게 되었다. 그 기사를 읽으면서 최근 읽었던 <경영 경제 인생 강좌 45편>이라는 윤석철 교수님의 저서가 생각났다. 우연히 위즈덤하우스 리퍼도서 판매 행사에서 저렴하게 구매했던 책이었는데, 책의 주요 내용들이 신문기사에 조목조목 요약되어있어서 인상 깊었기에 아마 책 내용이 떠오른 게 아닌가 싶다.

 

 

 

 

사실 윤 교수님의 <경영 경제 인생 강좌 45편>은 초판이 2005년 발간 된, 그러니까 이미 10년 가까이 지난 책이다. 매일매일 최첨단 기술의 발달로 인해 경영 환경이 변화하는 현대시대에는 사실 그러한 환경 변화에 맞추어 경영의 방법이나 이론들도 함께 진화하고 변화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산이 변할 시간 동안 이 책이 가치를 가지고 계속해서 읽혀진다는 것은 경영을 함께 발맞춰 변화하는 기술적 측면이 아닌, 쉽게 변하지 않는 인간의 사고와 태도적 측면에서 바라보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다른 포스팅에서도 몇 번 언급했지만 나는 경영학을 전공했다. 많은 이유들 중에서 내가 경영학을 선택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고등학교 시절 윤리 선생님과의 대화 때문이었다. 당시 어떤 이야기를 하면서 선생님께서 뭔가 예시를 들었는데 그 때 이런 말씀을 하셨다.

 

예를 들어 왜 경영학을 배우고 싶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당사자가 좁은 시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취업과 같은 현실적인 이유를 가져올 것이다. 하지만 인생을 크게 바라보는 사람은 다르다. 경영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경영의 근본적인 속성은 세상이 굴러가는 이치를 파악하는 것에 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이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인간들의 상호작용이다. 따라서 인간을 잘 이해하고 그것을 통해 살아가는 지혜를 터득하는 가장 현대적인 학문이 경영학이 될 수 있다.

 

지금도 사실 나는 대학에서 배웠던 경영학은 단순한 기술적 방법론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기술과 방법이 현실에 반영되어 연구한 만큼의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그만큼 인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적용’이라는 별도의 문제가 필요하다고 느낀다. 다시 말해서, 결국 이 책이 10년의 시간 동안 꾸준히 읽힐 수 있었던 것은 경영, 경제의 기본적 원리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인생의 문제로 확대하여 바라보는 통찰을 제공해주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책의 내용은 그리 어렵지 않다. 분량도 두꺼운 책이 아니므로 직접 읽어보시는 것을 권하고 싶다. 짧게나마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인간의 생존양식이란 늘 무언가를 주고 받으면서 가치를 창출하기도 하고 그 속에서 노동의 원동력을 얻어왔다. 즉, 기브 앤 테이크가 가장 기본적인 삶의 원리인 것이다. 이러한 원리가 현대적으로 조직화 된 것이 기업이다. 이러한 기업들이 소비자가 무엇을 원하고, 자사가 무엇을 줄 수 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감수성’, 그리고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상상력’, 그것을 현실화 할 ‘과학기술’이 필요하다고 윤석철 교수는 말하고 있다. 이 때 감수성, 상상력 그리고 기술발달의 방향을 선택함에 있어서는 ‘창조성’과 ‘생산성’을 고려해야 한다. 얼마나 창조적인지, 혹은 생산성이 좋은지, 그게 아니라면 두 가치 간의 적절한 타협점을 찾는 것이 결국 만들어내는 가치와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책의 전반부가 인간의 속성을 통해 본 기업의 지향점과 기본원리 등을 이야기하고 있다면, 책의 후반부는 그러한 기업이 좋은 기업으로서 존속하기 위한 구성원들의 태도와 사고적 측면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이를테면 속도와 목적적합 추구의 요소는 모두 기업에게 필요하지만, 그것이 서로 상충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반드시 경영자의 관점에서 두 요소 간의 최적해를 찾아야 한다는 부분이 있다. 이것은 조직이 효율성을 중시해야 하는지 효과성을 중시해야 하는지와 같은 경영학의 풀리지 않은 고민에 해답이 될 수도 있다.

 

 

 

이 외에도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부분으로는 직선 코스가 아닌 제곱식 유형의 우회축적의 경로가 오히려 시간적 측면으로는 ‘최소시간’이라는 부분이다. 이것을 쉽게 풀이하면 오히려 성공으로 가는 지름길은 바로 앞의 이익을 보고 판단할 때 가능한 것이 아니라, 다소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기본에 충실하고 다양한 경험을 할 때 더욱 따르게 원하는 결과에 다가갈 수 있다는 점이다. 일상에서 많은 멘토가 될만한 분들은 이렇게 말한다. 결과는 노력에 비례하지만 항상 일정하게 정비례하는 것은 아니라고. 노력으로 인한 결과는 즉각적으로 그것이 반영되는 것이 아니라, 마치 계단식처럼 어느 정도 누적되었을 때 비로소, 비약적으로 결과가 좋아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고. 우회축적의 경로의 개념은 그러한 노력과 결과의 관계를 측정하는 좋은 기준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또 기억에 남는 부분으로는 기업의 생존부등식이란 [제품가치(V) > 제품가격(P) > 제품코스트(C)] 이라는 것을 전제로, 정말로 기업이 사회에 기여해야 것은 눈에 보이는 투명경영이나 광고성 사회환원(물론 이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이 아니라, V-P의 가치가 극대화 되어 소비자들에게 더 많은 효용과 가치를 전해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게다가 이러한 기업 생존부등식을 인간 개인의 삶으로 확장하여, 내가 투입하는 노력 대비 더 많은 임금을 받는 것에만 몰두하지 말고(물론 이러한 행위도 합리적인 행위로써 추구해야 할 태도이다) 상대방이 원하는 가치 대비 줄 수 있는 역량 자체를 끌어올리기 위한 자기계발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에도 설득력이 있다.

 

 

 

복잡하면 복잡할수록 그것을 단순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복잡한 것을 단순화하는 과정에는 핵심을 찾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 신문을 읽는 것도, 10년이 지난 이 책을 밑줄 그어가며 읽는 것도 그러한 기본과 핵심에 집중하려는 작은 노력이라 하고 싶다. 복잡할수록 그것을 완전히 이해하기 보다는 기본에 충실한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어 갈 것이 요구되는 건 어쩔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 경영자는 한정된 자기 분야를 초월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지적 시야를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21세기 경영은 그만큼 자유도가 높고, 그것은 곧 생존경쟁이 선택이 아니라 숙명임을 뜻하기 때문이다.
 
◆◆ 실존주의 문학가 카뮈는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일이 철학의 기본적 과제가 되어야 한다”고 <시지프의 신화>에서 말한다. “부조리란 인생에서 의미를 찾으며 성실하게 살아가려는 인간의 의지를 좌절시키는 비합리성의 세계”라 한다. (중략) 또 다른 실존주의 철학자 야스퍼스는 “삶의 세계를 논리적 통일성을 가지고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외쳤고, 하이데거는 “세계는 고뇌하는 인간에게 아무것도 줄 것이 없다”고 말했다. 이토록 부조리로 가득 찬 삶의 세계에서 인간이 택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 결국 삶의 기반은 ‘주고받음’에 있다.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는 결국 살기 위해 어떤 시스템을 구축하느냐의 문제로 귀결되는데, 사회와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구성원/구성체의 생존기반은 결국 ‘주고받음’으로 이루어지고 유지된다. (중략) 국가-국민, 기업-고객, 가정 모두 각자의 생존기반에 대한 고마움을 인식하고 그에 대한 봉사(보답을 위한 노력)를 실천하는 수준여하가 인간적 성숙을 재는 척도일 수 있다.
 
◆◆ 지나간 명화 <쉐난도>에서는 ‘사랑한다’는 말과 ‘좋아한다’는 말을 엄격히 구별한다. 제니와 결혼하기 위해 허락을 구하러 온 샘에게, 그녀의 아버지 앤더슨은 묻는다. “왜 제니와 결혼하려고 하는가?” 청년은 “제니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라 답한다. 그러자 앤더슨은 “그것은 충분한 이유가 못 돼”라고 말한다. 당황한 샘에게 앤더슨은 “사랑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은 다르지. 어떤 여자를 좋아하지 않으면서 사랑하게 되면 그와 하룻밤을 지내는 일조차 지겹고 싸늘하게 느껴지는 거야! 그런 밤을 지내고 나면 이튿날 아침엔 경멸만 남지!” 하면서 사랑함보다 좋아함이 더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 상상력에도 목표의식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비로소 가치창조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목표의식이란 고객의 필요와 아픔을 해소하고 기호와 정서를 만족시키기 위한 의지다. (중략) 이러한 목표의식은 문제정의로 발전해야 한다. 목표의식을 문제정의로 전환하는 데는 상상력이 필요하고, 문제정의가 제대로 되면 문제가 반은 풀린 셈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문제정의는 중요하다. 세련된 문제정의가 필요하다.
 
◆◆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계속 무엇인가를 배워야 살 수 있고, 그 배움의 결과는 인간사회와 자연의 존재양식, 이들 두 영역에 관하여 ‘될 수 있음’과 ‘될 수 없음’을 구분하는 지혜가 된다. (중략) 정리해서 우리는 생존하기 위해 인간사회와 자연법칙에 관하여 계속 탐구해야 하고, 자연에서 얻은 지식을 과학, 과학을 삶에 적용하는 지혜를 기술이라 한다.
 
◆◆ 사실 기업의 도덕성은 그러한 생존부등식의 만족여부에 달려있다. 오늘날 기업을 부도덕적 집단으로 매도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것은 인식오류다. 생존부등식을 만족시키는 기업은 제품 한 단위를 팔 때마다 V-P 만큼의 순가치를 소비자에게 기여하는 존재이며, 따라서 그것으로 축적하는 기업의 부는 도덕적으로 정당한 반대급부다.
 
◆◆ 가치는 어떻게 측정될까? 결국 가치는 구매하는 사람, 받아들이는 사람이 알아주는 만큼이 가치다. 사회생활에서는 누구나 자기 자신의 세일즈맨이 되어야 한다는 의견도 같은 의미다. (중략) 그렇다면 제품 혹은 서비스에 대해서 소비자가 느끼는 ‘가치’의 구성요소는 무엇일까?
 
◆◆ <논어>의 [안연]편에는 자공이 공자에게 정치에 관해 묻는 질문이 나온다. 이 질문에 공자는 경제, 국방, 그리고 국민 신뢰가 정치의 기본이라고 답한다. “그 세 가지 중 부득이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무엇을 버려야 합니까?” 하고 자공이 묻자, 공자는 국방을 버려야 한다고 답한다. “나머지 두 가지 중 다시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무엇을 버려야 합니까” 하고 묻자 공자는 경제를 포기하라고 답한다. 결국 공자는 ‘식량’이나 ‘국방’보다 ‘신회’를 더 중요한 기본으로 본 것이다.
 
◆◆ 인간이 느끼는 행복은 그가 도달한 철학적 성숙의 함수다.
 
◆◆ 정신심리학자 쿤켈은 자아의 파멸에 이를 만큼 심각한 사태에 직면한 인간은 자신을 지탱해주고 있는 것이 진실로 무엇인가를 묻게 되고, 이런 진실의 순간에 인간은 오만하거나 이기적이었던 자기중심적 생각에서 벗어나 공동체를 위한 창조적 삶을 선택하는 계기를 맞는다고 한다.
 
◆◆ 짧은 사랑과 긴 사랑을 구별할 줄 아는 지적성숙이 필요하다. 생텍쥐베리는 “사랑은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는 데 있지 않고 둘이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데 있다”고 표현했다. 또한 앙드레 지드는 “사랑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좋아함을 받는 것”이라고 했다. 좋아서 끌리는 힘, 즉 인간적 매력은 우리 삶에서 가장 강력한 힘일 것이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도 상대방이 계속 자기를 좋아하도록 외모뿐만 아니라 교양, 지성, 가치관, 도덕성 같은 인간적 매력을 가꾸는 일은 긴 사랑을 위한 필요조건이다.
 
◆◆ 오늘 날을 정보화 사회로 규정하면서 정보의 창출, 공유, 활용이 경쟁력의 원천이라 외친다. 정보에는 기계적 장치에서 얻는 시그널정보(SI)와 인간을 통해 얻는 휴먼정보(HI)가 존재한다. 미국이 9.11테러를 막지 못한 것은 SI를 믿고 HI를 소홀히 한 데 원인이 있다고 한다. 기업이 인력을 감축하고 자동화, 기계화를 하면 HI의 창조적 아이디어 창출은 줄어든다.
 
◆◆ 아우렐리우스의 지도자론에 따르면,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은 1)지혜 2)정의감 3)강인성 4)절제력이다. 지혜란 조직의 안정과 발전을 위해 미래를 기획하고 실천에 옮기는데 필요한 지적 능력을 말한다. 정의감은 옳고 그름을 가리는 능력을 뜻하며, 특히 내부로부터의 붕괴를 막는 중요한 덕목이 된다. 강인성은 위험과 어려움을 극복하는 정서적 힘을 뜻하고, 절제력은 자기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여 균형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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