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를 사랑하는 일, 당신이 당신을 사랑하는 일 - 개정증보판
최갑수 지음 / 예담 / 2013년 6월
평점 :
품절











날씨가 더워지니 슬슬 땀이 나기 시작한다. 왜 이렇게 덥게 느껴지나 싶었더니 머리가 제법 길었더라. 몸도 마음도 시원해지자 싶어 한산한 오후 시간 잠깐 미용실에 들렀다. 도착했을 때 한 명 있던 손님이 막 나가던 참이었고, 커트해주시는 형님이 잠시 담배 한 대 피는 것 외에는 별다른 기다림 없이 바로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음, 약간의 기다리는 시간과 커트 하는 시간 내내 자리에 앉아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덥수룩한 머리 때문일까, 내 얼굴이 왠지 어색하다. 하긴 최근에 이렇게 긴 시간 동안 내 모습을 마주한 적이 있었던가. 그러고 보니 그 동안 주변의 사람과 일들, 상황들, 물건들에만 집중하느라 정작 나를 바라보지는 못했던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누군가가 그랬듯, 사람은 누군가와 함께 있음으로 스스로의 존재를 느끼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긴 자신이 살고 있는 순간과 상황에 온전히 몰입되지 않으면, 한시라도 주변의 작은 변화에 집중하지 않으며 생존자체가 불가능 한 요즘이니, 스스로 최면상태를 걸며 살지 않으며 삶을 버티기 힘들다는 말도 괜히 나온 건 아닐 게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황과 집단 속에서의 큰 의미로서의 자신의 모습에 너무 몰입하며 살고 있고,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것 같다. 그게 나쁘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오직 확장된 의미로서의 자신의 모습만을 인식하며 살다가는, 어느 순간 밀려오는 공허함에 대처하기가 상당히 난처해질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가끔은 철저한 고독 속으로 스스로를 몰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전혀 다른, 기존의 나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순간에 이르러 오히려 내 심장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내게 있어서 그런 순간들을 경험하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여행이다. 물론 단순한 휴양으로, 때론 다른 현실적인 여러 이유로 여행을 떠날 때도 있지만, 자발적으로 떠나는 여행의 대부분에서 이질감 속에서 진정한 나를 보는 경험을 하곤 한다.





최갑수 씨의 여행에세이 [내가 나를 사랑하는 일, 당신이 당신을 사랑하는 일]을 읽었다. 굳이 이 책을 집게 된 이유는 잘 모르겠다. 다만 초반부에 나오는 하조대의 사진과 글이, 나홀로 동해안을 걸었던 예전의 일을 떠올리게 한 뒤부터는 계속 이끌려서 읽었던 것 같다. 마치 여행이 여러 요소들을 포괄하고 있는 것처럼, 책의 구성 역시 감성이 느껴지는 선명한 사진들과 글들이 함께 실려있다 보니 여행에세이 치고는 조금 두께가 있는 편이다. 그럼에도 두께와 양과는 관계없이 책 자체는 금방 읽힌다. 글이 딱딱하거나 길지 않고 직관적으로 읽기 좋게 되어있는 것도 한 몫 했지만, 최갑수 씨의 솔직한 경험과 감정선이 잘 묻어나 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고 보니 책 목차가 봄/여름/가을/겨울의 모습을 담은 네 개의 챕터로 이루어져 있는 걸 보면, 아마도 저자인 최갑수씨가 아마도 35살의 봄부터 그 해 겨울까지의 여행지에서 본 풍경과 느낌을 담은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이 여행에세이는 여행을 직접적으로, 또 무작정 예찬하지는 않는다. 다만 스스로가 생각하는 여행과, 반대로 여행이 스스로에게 주는 생각들을 약간은 유치하게 느껴지는, 오글거리기도 한 언어들로 전달하고 있다. 내게 그 글과 사진들이 조금은 부끄러움 느낌으로 다가왔던 것은, 마치 치부를 들킨 듯한 것 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만큼 감정을 여과 없이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 것도 그가 여행가이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본다.





다시 한 번 책을 보면, 에세이의 부제인 Sentimental Travel 이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아, 그랬구나. 그제서야 조금 더 이해가 되는 것 같다. 여행을 떠나면 조금은 개방적이고 대담하게 된다는 것. 모든 것들을 새롭게 볼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 그리고 그 속에 일어나는 불확실한 일들을 모두 나의 책임으로 돌릴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 저자가 말하던 상황을 온전히 받아들일 자세라는 것을 이 ‘센티멘탈’이라는 단어 하나에 집약해놓은 것 같다. 하지만 저자가 말하고 있는 것은 그 여행의 태도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부제라는 것이 제목을 설명하는 역할을 하는 것처럼, 저자는 결국은 여행을 통해 스스로를 사랑하는 방법까지 이야기하려고 한다. 여행을 통해서 스스로를 온전히 바라보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그런 여행으로 느끼게 하는 기본적인 태도도 함께 이야기하는 것이다.

 

삶을 여행자로 살아가는 저자만큼의 내공은 없지만, 진심으로 여행을 좋아하는 그래서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으로 짐작하건데 그가 말하고자 하는 ‘스스로를 사랑하는 법’ 역시도 결국은 앞서 말했던 ‘나 자신을 고독으로 몰고 가는 것’에 있다고 본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데, 항상 진지하게 힘을 바짝주고 전쟁터에 임하는 것 같은 삶을 고수하다가는 나를 지키기가 어려워진다. 한 발, 조금은 떨어져서 상황을 이색적인 것으로 몰고 가서, 스스로 이방인이 되어서 나를 희극으로 바라보는 것. 그게 누군가에게는 휴식으로, 누군가에게는 경험으로, 누군가에게는 고생으로, 각자의 구체적 느낌은 모두 다르겠지만 결국은 더 진실된 내 삶을 지키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책 커버 뒷 편에 쓰여진 소설가 김중혁씨의 추천 글은 최갑수 씨의 등을 ‘단단하고 야무지다’ 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 짧은 표현이 담고 있는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다. 여행자는 모든 것을 자신이 감내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그 경험과 무게와 고독감과 넓어진 감정의 폭들은, 삶을 보다 크게 넓게 또 이왕이면 아름답게 바라보게 하는 시각을 선물할 것이다.

 

휴, 책을 덮었다.

어느 새 궁둥이가 또 들썩들썩 거리기 시작했다. 덕분에 또 여행을 가고 싶어지게 된 것 같다. 참 큰일이다.











 그의 몸은 길 위에서 단단해졌고 정신은 투명해졌다카메라를 들고 배낭을 멘 순간에야 그는 비로소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길에서 만나는 꽃과 구름과 바람과 사람들은 구체적이었다그것들은 살아 있었고 움직이고 있었다.

 

 이곳에만 오면 인생이 간결해지는 것 같아.” 하조대 해변을 거닐다 친구가 던진 말. “일하는 데 여덞 시간사랑하는 데 여덞 시간자신을 위하는 데 여덞 시간하루를 이렇게 삼등분해서 살 수 있다면 충분히 행복할 텐데… 해변과 바다 그리고 하늘이 정확히 3분의 1씩 차지하고 있는 곳 하조대.

 

 순간, 새들이 휘익- 하며 화살처럼 날아올랐다. 나는 셔터를 눌렀다. 타타타탁. 셔터 소리가 기관총처럼 울렸다. 문득 그녀가 떠올랐다. 하숙집 창틀에 기대 바라본 그녀. 골목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던 그녀. 내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사랑했던 그녀. 내 기억의 깊은 우물 속에 숨어 있다 홀연히 나에게로 다가온 그녀. 새들이 찍혀 있었다. 시간의 저쪽에 매복하고 있다가 갑자기 엄습하는 그리움처럼, 날카로운 휘파람처럼 구름의 한 귀퉁이를 찢으며 날아온 새들.

 

 하긴 마음먹고 떠나온 여행에서 사람들은 평소보다 두 배정도는 대담해지는 법이다.

 

 우리 모두는 시궁창에 있지. 그러나 우리 중 몇 사람은 별을 바라보고 있지 – 오스카 와일드

 

 삶은 우리에게 몰입을 요구한다. 우리는 최면 상태가 아니고서는 제대로 살아갈 수 없다.

 

 서른다섯. 이젠 슬픔도 아주 구체적으로 다가온다. 가령 밤 열 시의 슈퍼마켓에서 라면 한 봉지와 소주 한 병을 살 때, 오백 원짜리 동전 두 개와 백원짜리 동전 다섯 개, 오십 원짜리 동전 두 개를 내고 사십 원을 거슬러 받을 때,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주머니에 거스름돈을 찔러 넣을 때, 마흔을 바라보는 여자 선배가 올해는 꼭 시집 갈 거야, 하며 말할 때, 그 선배가 탱고를 배우러 다니는데 함께 레슨을 받는 젊은 애들의 동작은 따라할 수 있어도 예쁜 표정은 절대로 따라할 수 없다며 푸념할 때, 슬픔은 너무나도 구체적이다. 서른다섯. 슬픔의 무게도 잴 수 있을 것 같은 나이.

 

 많이 아플 때마다, 나는 내가 몸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니, 몸이 나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마음이고 정신이고, 사랑이고 다 필요 없다. 몸이 먼저다.

 

 우리는 혼자 있는 시간을 견디는 데 익숙하지 않아. 불안해지지. 끊임없이 전화를 하고 메신저를 하고 문자 메시지를 날리지.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사실에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비로소 안심하곤 하지. 하지만 여행을 떠나봐. 기꺼이 혼자가 되어봐. (중략) 그렇게 해봐. 생각보다 평화로워질 거야. 네가 비로소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게 될 테니.

 

 사람들은 대개 마흔 정도가 되면 젊은 시절 자신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했던 것들과 안녕을 고하고 속수무책으로 진부해지고 따분해지기 마련이다.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 있을 것인데 – 가령 멋진 차를 산다든가, 새로운 취미나 공부거리를 가진다든가, 새로운 여자를 만난다든가 하는 방법들 – 가장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가 여행이 아닐까.

 

 해안도로와 중간산도로를 번갈아 갈아타며 겨우 모슬포항에 도착했지만 배는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코앞에서 꽁무니를 빼고 있었다. 다음 배까지는 두 시간이나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어쩌겠어, 다 내 잘못인걸. 여행에서는 이렇게 마음을 먹어야 편하다. 놓친 배, 떠나버린 버스, 이륙한 비행기는 절대로 돌아오지 않는다. 여행자가 가져야 할 첫 번째 덕목. 미리 도착하거나 아쉬워하지 않을 것.

 

 오늘은 세상에 대해 그리고 우리 생에 대해 약간은 심미적이며 관조적인 자세를 가져볼 것. 우리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바로 그 정신적 습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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