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여행을 권함
김한민 지음 / 민음사 / 201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대학에 입학 한 후 처음으로 외지에 나와 살게 되었다. 이른 바 서울 유학.

부모님의 우려와는 다르게 서울도 크게 다를 건 없었다. 심지어 눈을 감고 있어도 코를 베어가는 사람도 없었다. 하긴 다 사람사는 곳이니 뭐가 크게 다를게 있겠나. 내겐 제법 친해진 동기들도 있었고, 매일 밤 시간가는 지 모를 정도로 마셔댔으니 정신도 없었고, 해가 뜨는지 지는지 구분이 잘 가지 않는 반지층 방에서 함께 치킨을 뜯으며 비디오게임을 즐길 친구도 있었다. 스무살, 서울의 밤은 매일 그렇게 지나갔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지친다라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지, 이걸 왜 하고 있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작은 것 하나부터 시작된 작은 권태로움은, 순식간에 내 삶 전체를 무료하게 만들었다. 당시 연애했었던 친구에게는 참 미안한 이야기지만,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은 연애조차 무료함과 권태로움을 막기에는 무리였다. 그 전의 통제된 삶과는 다른, 어디하나 묶인 데 없는 자유를 가장한 방종에 취해 지나치게 가벼운 시간을 보냈던 결과였다. 여름이되고 바람이 불었고, 가벼웠던 내 생활은 쉽게 날아가버렸다. 그 즈음의 서울 밤 하늘, 흐리던 달은 참 얄미웠던 것 같다.





그 때가 처음이었다, 자발적으로 떠난 것은.

그 전에도 사전적인 의미의 여행은 많이 다녀보았지만, 아니 따라다녔지만 내 인생의 진짜 여행은 그 때가 시작인 것 같다. 이유는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유를 몰랐다. 다만 멀리 떠났다가 돌아오면 다리의 피로감만큼이나 가슴 속에 뭔가 차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얻은 것도 깨달은 것도 사실 쥐뿔도 없었지만, 나는 그게 그냥 '연료' 같은거라고 생각했다. 삶의 의미는 평소에 찾으면 된다고 다짐했다. 내게 필요한 것은 일상에 충실하기 위한 에너지였고, 여행은 그것을 제공했으며, 난 그걸로도 충분했으니까.

  

그 이후로 여행은 내 생활에 있어 아주 중요한 하나의 요소가 되었다. 삶을 점으로 표시한다면, 두 번의 국토순례와 여러차례의 국내여행, 나들이를 비롯해서 캄보디아로 떠났던 첫 배낭여행, 공모전으로 떠났었던 일본 등의 여행 경험은 모두 당시의 내 삶을 표현하는 굵은 점들이 되었다. 매일 밥만 먹던 내게 여행은 라면이었다. 그리고 때론 그 라면이 참 맛있게도 느껴졌고, 때론 정말 맛대가리 없어서 '아, 정말 맛있는 건 밥이었구나' 하는 생각도 들게 했다. 어찌 되었건 내게 여행은 라면이었고, 그저 라면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었다.

  

 

자꾸 여행을 라면에 비유해서 미안한 일이지만 (글을 쓰는 지금 슬슬 점심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양해바란다), 사람 욕심이라는 게 하나를 하면 자꾸 더 좋은 걸 하고 싶어지더라. 라면도 슬슬 물리기 시작했는지 좀 더 특이한 라면을 먹고 싶어졌다. 여행을 뭔가 특별하게 만들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여행을 나만의 특별한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한 결과, 방법을 찾았다. 바로 '흔적을 남기는 것'이었다. (유치하게 어디서 낙서... 이런건 아니니까 걱정은 접어두시길)

   

쉬운 것부터 시작했다. 처음에는 여행 중 기념이 될만한 작은 것들을 보관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기차나 항공편의 티켓들, 영수증 같은 것. 그리고 좀 더 잘 기억하기 위해서 간단한 느낌을 담은 단어나 글도 함께 썼다. 나중에 보면 손발이 오그라드는 부작용은 많았지만 그래도 그게 추억이었고, 그게 내 여행이었다. 그런데 그것도 오래가지 않더라. 욕심쟁이심뽀 어디가겠나, 그렇게 나는 기왕이면 사진도 찍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보통은 사진을 여행의 부산물이라 생각한다. 나도 처음엔 그랬다. 사진도, 기록도 모두 추억하는 여행을 아름답게 해준다고 믿었다. 그런데 사진을 찍다보니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을 찍는다고 말하기도 부끄러운 실력이지만) 사진을 찍는 행위 자체가 순간순간에 집중하게 하는 매력이 있는 것 같더라. 사진도, 기록도 지나고 난 여행을 아름답게 추억하게 하는 재주가 있지만, 동시에 지금 즐기는 여행도 더 풍요롭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그 때 알게 되었다. 비로소 라면이 짜장라면이든, 짬뽕라면이든, 무튼 맛을 음미하는 수준으로 발전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찰나의 느낌을 담는 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장비도 무거웠고, 현장에서 사진을 잘 찍었다고 해서 나중에 본 사진이 무조건 만족스러울거라는 보장도 할 수 없었다. 기본기 없던 실력이 하루 아침에 늘진 않을테고, 조금씩 노력은 하겠지만 그래도 이걸 보완해줄 뭔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생각을 조금 달리했다. 현장감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쪽보다, 내 감정이 느끼는 바에 더 집중하자고. 그게 바로 '스케치' 였다그래서 시간적인 여유가 있는 여행이라면 스케치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처음 시도했던 건 뉴질랜드 여행. 처음은 역시나 초라하다. 몇몇 그림을 그려보긴 했지만, 생각보다 (시간적인) 여유도 없었고, 노트도 변변찮았고, 연필도 구할 수 없어서 펜으로만 그렸다. 실력이 없으니 역시 장비 탓을 하게 되지만... 무튼 그랬다. 그렇게 여행을 돌아와서 한동안은 스케치를 잊고 있다가 이 책을 접하게 되었다. [그림 여행을 권함]이라는 겸손한 제목이 참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내용은 크게 말할 것이 없을 것 같다. 저자의 여행이야기, 그리고 그림을 그렸던 것들, 몇몇 애피소드들을 담고 있다. 그래서 여행기를 기대하고 이 책을 구매한다면 어쩌면 실망하실 수도 있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이 책의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그림을 여행에 빗대어, 여행을 떠나기전 마음가짐이나 태도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림여행에 필요한 간단한 준비물과 방법들을 이야기 해주는 것도 좋았다. 예를 들면, '자기만의 캐릭터를 만들어라', '기분을 표현하는 것은 꼭 직접적일 필요가 없다', '묵었던 숙소의 평범함을 그리는 것도 좋다' 뭐 그런 것들. 이런 이야기들을 숙지한 후에 책을 보면 중간에 들어간 삽화가 더 재미있게 느껴질 수 있다. 처음 도입부의 저자의 어머니께서 그렸다는 여행기도 참 귀엽고?! 운치 있었다는 것도 말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다.





다음 달이면 몽골여행을 떠난다. 관련된 정보를 찾다가 우연히 이제는 이웃이 된 리모님의 블로그(http://rimo.me/)를 찾게 되었다. 여행했던 순간들을 드로잉으로 남기시는 여러 포스팅을 보면서 정말 감탄을 금치 못했었다. 물론 사진으로 봐도 멋진 곳들이겠지만, 직접 그린 스케치 자국과 파스텔 톤의 색체는 사진 이상의 감정과 느낌이 담겨있는 것 같았다. 멋진 그림들에 반해 조심스레 덧글을 남겼더니, "드로잉은 그 과정에서 자기만의 시선으로 세상을 기록할 수 있다는 것이 참 좋은 것 같다"라는 답글을 달아주신다. 이 책 [그림 여행을 권함]이 말하고 있는 내용과 완전히 맞아 떨어져서 적잖이 놀랐다. 저자와 리모님, 두 분 모두 여행과 그림이 가지는 공통점, 과정과 순간에 온전히 집중하고 받아들일 때 진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이번 여행 전 준비물 리스트에 급히 몇 가지를 추가해야겠다. 작은 스케치북과 연필. 오늘의 작은 시도가 이번 여행도,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여행까지도 그 순간을 더 온전히 즐길 수 있는 마법의 레시피가 되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림을 잘 그리는 방법에 관해서라면 난 별로 할 말이 없다. 그림은 누가 가르쳐준다기보다 스스로 즐기는 법을 터득하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마치 여행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림을 못 그리도록 막는 장애물에 관해서라면 할 말이 아주 많다. 손을 쓰는 인류에게 주어진 이 엄청난 특권을, 그 누구도 박탈당해선 안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마치 여행의 권리처럼 말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특권은 너무나 광범위하게 망각되었다. 가장 기본적인 물음에서 시작해보자. 그림이란 뭘까? 그림은 명사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 동사이기도 한 말이다. 나는 이런 구조의 말들이 좋다. 꿈을 꿈. 삶을 삶. 그림을 그림. 이런 말들에는 결과와 과정을 동등하게 중시하는 뜻이 읽힌다. 이런 의미에서, 그림이라고 하면 대개 종이에 남는 결과물을 먼저 떠올리겠지만 나에게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그림을 그리는 행동, 더 자세히 말해 그리는 사람 속에서 일어나는 시간의 변화이다. - 프롤로그 中







상단과 하단의 해당 책 사진을 클릭하시면 다른 리뷰와 함께 바로 구매하실 수 있습니다.








Copyright ⓒ 2014. by 비틀즈. All Right Reserved.

무언가에 집중해서 바라본다는 것은, 곧 자기자신을 응시하는 게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여러분의 덧글과 공감은 제게 큰 응원이 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