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한테 미안해서 비행기를 탔다 - 오기사가 다녀온 나르시시즘의 도시들
오영욱 글.그림 / 달 / 2011년 11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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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휴가를 가장한 노동을 하러 고향 집에 방문했었다. 여행준비를 마치신 부모님께서 해외로 떠나시고 홀로 집을 지키는 신세가 되었을 무렵. 할 일마저 어느정도 마무리가 되어버리자 마침내 외로움과 심심함이 3 대 7의 비율로 밀려오기 시작했다. 무료함을 달래려 서재에 들어가서 책 구경을 했다. 아주아주 예전에 읽어서 내용도 잘 기억나지 않는 책들과 사 놓고는 읽지 않았던 책들이 서재 벽면 한쪽을 채우고 있었다. 왠지 방치된 책들에 애잔한 마음이 들어 그 중에서 가벼워 보이는 책 한 권을 꺼내들었다. 오기사, 오영욱씨의 [나한테 미안해서 비행기를 탔다] 였다. 

 

 

나르시시즘은 그리스 신화에서 호수에 비친 자기 모습을 사랑하며 그리워하다가 물에 빠져 죽어 수선화가 된 나르키소스(Narcissos)라는 미소년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프로이트(Freud)가 이 말을 정신분석학에서 자아의 중요성이 너무 과장되어 자기 자신을 너무 사랑하는 것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하였다. 프로이트는 나르시시즘에 대해 자기 자신을 리비도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라고 하였으며, 인격적 장애의 일종으로 보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나르시시즘 [Narcissism] 

오영욱씨의 책 들이 대부분 비슷한 느낌이긴 하지만 그 중에서도 이 책은 비교적 컨셉이 분명한 편이다. 그 컨셉은 [오기사가 다녀온 나르시시즘의 도시들]이라는 책의 부제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오영욱씨가 다녀온 곳은 모두 미국의 '라스베가스', 인도의 '찬디가르', 그리고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책에서 오영욱씨는 이 도시들과 그것에 투영된 인간의 모습/생각들을 본인의 전문분야인 건축을 매개로 해서 바라보고 있다. 

 

그럼 왜 하필 이 도시들이었을까? 이 세 도시는 공통점이 있으니, 모두 비교적 가까운 시간 내에 계획에 의해 새롭게 건설된 신도시들(라스베가스는 자본에 의해, 찬디가르는 르 꼬르뷔지에의 설계,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이름처럼 표트르 대제에 의해)이라는 점이다. 그렇기에 마치 자기애의 과잉을 보여주는 듯한 분위기를 공통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어색하면서도 인위적인, 억지스럽기도 한 면도 가지고 있다부제에 적혀있는 '나르시시즘의 도시'라는 의미는, 세 도시의 건축에 담긴 인간의 의도를 일종의 '과시'로 보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이유 없이 만들어지는 것은 없는 것 같다. 특히나 그것들이 인위적인 것이라면 더더욱. 그런 의미에서 도시 속 창작물인 건축물 하나하나마다 (현재와 비교적 가까운) 현대인들의 욕망이 담겨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이쯤되면 이 이야기는 여행지의 건축물을 탐구하는 척하지만 결국은 인간을 바라보고 있는 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르긴 몰라도 건축물을 잘 아는 사람의 시선에는, 과거 건설자들의 모습이나 의도도 더 잘 보였던 것이 아니었을런지. 

 

하지만 더 섬세하게 파악할 수 있다고 해서 반드시 긍정적인 이미지로만 남는 것은 아니다. 각각의 도시들 앞에 따라붙는 '욕망의 도시', '일탈의 도시', '위안의 도시'라는 수식어처럼 각각의 도시들은 어딘가 부족한 면이 있는, 단점이 분명한 도시라는 것을 저자는 계속해서 언급한다. 어쩌면 인간의 욕심/바람에 의해서 만들어졌지만, 그럼에도 계획과는 다른 여전히 채워지지 않은 부족함이 존재하는 도시들을 바라보면서, 결국 인간의 바람과 욕망은 완전히 채워지기 힘들다는 것을 작가는 인정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도시들에 보내는 작가의 연민과 애정은 확고하다. 나는 이 역시 한편으로는 허허벌판 위에 터전을 일구어 낸 인간의 열망을 나름대로 존중하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찬디가르 편에서 르 꼬르뷔지에의 글을 인용한 것과 마지막 에필로그 부분이다. 전자의 경우에는 사실 상 이 책 전반을 관통하고 있는  내용으로 마치 저자가 도시로 떠났던 이유를 말해주는 것으로 느껴질 정도다.  

 

위대한 시대가 막을 열었다새로운 정신이 존재한다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밀려가는 홍수처럼 우리를 압도하고 있는 산업은 새로운 정신에 의한 이 새로운 시대에 우리가 적응하기 위한 도구들을 제공한다불가피하게 경제적 법칙은 우리의 행동과 생각들을 지배한다주택의 문제는 그 시대상황과 관련이 있다오늘 날 사회의 균형은 바로 주택에 달려있다지금과 같은 변혁의 시대에 있어서 건축은 가치관을 수정하고 주택의 구성요소들을 변경해야 하는 그 첫 번째 책임을 진다대량생산은 분석과 실험에 기반을 둔다산업의 시각으로 대량생산에 입각하여 주택의 부재들에 대한 체계를 수립해야 한다그리고 우리는 대량생산에 대해 정신적 개념을 정립해야 한다가령대량생산형 주택을 짓는 정신대량생산형 주택 속에서 생활하는 정신대량생산형 주택을 인식하는 정신만약 우리가 주택에 관계된 모든 낡은 개념들을 버리고비판적이고 객관적인 관점으로 다시 바라본다면우리는 대량생산주택인 사는 기계에 도달할 것이다이 사는 기계는 생활 속의 연장도구들이 아름다운 것과 마찬가지로 건강하고 아름다운 것이다예술가의 감성이 준엄하고 순수한 기능적 요소들에게 생명력을 불어넣었을 때 또한 아름답다. - 르 꼬르뷔지에 

나는 이 글을 보고 저자는 분명 위의 세 도시를 [기계적 합리성에 충실한, 그래서 모든 것들을 산업과 연관된 미래지향성을 기준으로 평가하도록 만들어진 도시들]로 바라보았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사실 르 꼬르뷔지에는 대량생산이 하나의 시대의 흐름이고 시대의 정신이라고 외쳤지만, 시대정신에 무작정 편입된다는 것은 때론 자신의 특색과 존재성을 포기하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찬디가르에 붙은 부제처럼 일탈을 위해 떠났다는 그는, 오히려 이 시대의 시대정신을 만든 그 당시의 일탈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현재의 주류를 만들어버린, 그러나 결코 성공적으로 평가되지는 않는 과거의 일탈들을 보면서 그는 분명 묘한 자극을 받았을 것이다. 짐작컨데 아마도 이 시대의 새로운 일탈을 꿈꾸지는 않았을런지. 

 

내게 모든 도시는 마치 여자 같았다귀여운 여자얼굴만 예쁜 여자왠지 마음에 들지 않는 여자존경스러운 여자세심한 여자섹시한 여자터프한 여자여자를 좋아할 것 같은 여자남자 하나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여자 등등그렇기 때문에 도시로의 여행은 짝사랑이 되기 일쑤였다머리가 큰 이방인 남자를 단번에 좋아할 수 있는 여자는 세상에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녀들의 마음을 빼앗기 위해서 난 보다 오랫동안 그녀 주위에 머물러야 했다이십 대의 나였다면 분명 그녀들을 소유하고 싶어 어쩔 줄 몰라 했을 것이다하지만 삼십 대 중반의 나이가 되자 세상과 공존하는 법을 보다 잘 알게 되었다나는 음흉한 눈길의 아저씨처럼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 것 바라만 보고 있어도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중략) 세상의 모든 도시들 역시 수많은 시행착오의 결과물이었다지나간 시간의 흔적과 상처들이 도시의 구석구석에 새겨져 있었다그리고 나는 어느덧 사랑하게 된 사람의 오랜 습관을 바라보는 것처럼 그 나름대로의 모습들이 좋았다. - 에필로그 中

나는 에세이는 과장이 없어야(적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생각을 솔직히 적어가는 것이 에세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과장하는 것은 읽는 이에게 생각과 감정을 강요하는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이 글은 참 매력적인 에필로그다. 도시를 대하는 태도, 도시에 대한 애정, 도시 속에서 사는 방법, 자신의 삶의 방식까지 하고 싶은 말은 죄다 말하고 있으면서도 글 자체는 무척이나 무덤덤하다. 작가는 이정도의 뻔뻔함?! 같은 것도 있어야 할 것 같다. 결국 그 뻔뻔함이라는 것도 건축가의 시선이라는 자부심에서 나오는 것이라 생각되지만.





내용 외적인 이야기가 될 수도 있지만, 오기사의 책들을 보면 항상 부러운 것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바가지를 쓴 캐릭터'. 또 하나는 자기만의 관점이라 내세울 수 있는 '건축가의 눈'.

 

캐릭터의 가장 큰 장점이라면, 글을 쓰는 사람도 읽는 사람도 이야기에 더 몰입하게 한다는 것. 감정이입 할 대상을 만들어 둔 다는 것만으로도 의외로 사람들은 쉽게 빠져들기 마련이다. 그림을 잘 그리지는 못하기에 감히 캐릭터를 만들어내지는 못할 것 같지만, 상징물을 넣어 사진을 찍거나 하는 방식으로 나 또한 여행기나 글을 쓰는데 도입을 해볼만한 방식인 것 같다. 건축가의 시각은... 뭐 어쩔 수 없다. 나만의 전문성을 가져서 보이는대로 판단하는 수밖에.

 

가볍게 꺼낸 책이 마음을 가볍게 만들었다. 가벼워져서 그런지 다가 올 여행을 더 기대하게 되는 것 같다. 반쯤은 떠있는 듯한 마음으로 여행을 떠나야겠다.





 외로움은 기대의 불균형에서 오는 것이다.

 

 환상은 대게 진부하지만 세상은 보다 진부하다그러니까 쿨하지 않게 보일까봐 걱정하면서 살 필요는 없다.

 

 노골적인 상징은 목적에 집착한다. (중략상징은 인간을 위한다는 근대 건축이 정작 잃고 있었던 인간성의 영역에 관한 이야기였다그것은 고귀함과는 거리가 먼 즉흥적이고 직설적인 감성들이다.

 

 상징이 공간을 지배한다건축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공간 간의 관계라는 것은 형태보다는 상징에 의하여 맺어지기 때문에풍경 속에서의 건축은 형태보다는 상징으로 장소를 규정한다. – 로버트 벤추리, [라스베이거스의 교훈]

 

 욕망의 크기는 문제가 아니다그냥 각자의 욕망이 다르기에 종종 서로 충돌하게 되는 것이 문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이 사라진 시대에 누군가가 의지할 것은 결국 자신의 욕망밖에 없다.

 

 일탈은 자기애에서 비롯된다일상이 온전히 자신의 것이라고 느껴지지 않거나 혹은 목표를 향해가는 길을 읽고 잠시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다면 일탈의 감행을 고려해볼 만하다자기애가 결핍된 돌출행동은 단지 현재의 부정일 뿐이다.일탈은 나름대로 미래지향적 자의식 발현이다.

 

 궁극적인 새로움이란 다시 말하자면 일상을 바꾸는 문제다수없이 많은 건축적 시도와 실험들은 결과적으로는 일탈에 가까웠다일상에 큰 영향을 끼치지는 못한 채 잠시 기존의 질서에 변주를 준 것이다물론 부정적인 일은 아니다.많은 시도들은 사유의 깊이를 더하고발전을 위한 기반을 다진다.

 

 삼십 대 중반은 그냥 정신이 없는 시기인 것 같다문득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덧 지나간 그런 속성의 시간이었다.

 

 세상은 먼저 걱정해주는 사람들에 의해 나름대로 편하게 돌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누가 더 느긋할 수 있는지가 인생의 피곤함을 결정한다.

 

 일탈은 복제되지 않아야 한다복제되고 재생산되는 순간 일탈만이 줄 수 있는 그 미묘한 긴장감은 사라져버린다. (중략)개발이 시작된 지 50년이 넘은 찬디가르에는 여전히 다른 인도의 도시들에서는 느낄 수 없을 미묘한 기운이 흐르고 있다나는 그것이 일탈이 줄 수 있는 건강한 에너지라고 생각한다.

 

 찬디가르와 브라질리아두 도시는 모두 이성과 합리성이 인간의 삶을 고스란히 규정할 수 있다는 믿음 아래 건설되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그리고 대체로 썰렁하다는 유사점도 있다설계자들은 이상적인 도시를 도면 위의 선들로 구현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고 치열하게 실현해냈다이것이 바로 두 도시가 세계에서 가장 황량한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다소 비관적인감동을 줄 수 있는 이유가 아닐까 한다.

 

 생각은 스스로에 대한 애정에 의해 능동적으로 진화한다그건 변절과는 다른 것이다.

 

 체념의 고통을 겪어본 사람만이 동정을 받을 권리가 있다.

 

 크기는 문제가 아니라고 수많은 조언자들이 위로를 하더라도 결국 그 크기가 사람들을 자신만만하게 하거나 위축되게 만들고는 한다마음이란 그리 쉽게 설득되지 않는 존재인 것이다.

 

 세상에 완벽한 위로는 존재하지 않는다위로란 정열적 사랑고백처럼 잠시 자신을 속이는 일이다하지만 속는 줄 알면서도 가끔은 모른 척 넘어가야할 때도 있는 법이기에 사람들은 지치지 않고 새로운 사연들을 만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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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겁지 않은 내용도 진지하게 생각하며 글을 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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