딴지일보에서 내 책을 팔아주기로 했다. 내가 책에다 싸인을 해서 팔면 좀 인기를 끌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딴지 측의 생각이었다. 가격은 택배까지 해서 9천원, 알라딘에서는 10%가 할인되어 8,100원이지만, 내 싸인의 값어치가 900원은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터였다. 그 숫자가 딴지에서 목표로 삼는 50명이 될지는 의문스럽지만, 어찌되었건 내겐 고마운 일이다.

그래서 어제 저녁, 난 배달된 책에다 싸인을 하러 딴지일보에 갔다. 가면서 내내 고민한 것은, 내 싸인이라고 할 게 없다는 거였다. 내 싸인은 '서'자를 조금 빠르게 쓴, 누구나 위조할 수 있는 특징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다른 이들에게 책을 줄 때는 싸인 대신 내 이름과 그에게 해줄 덕담 몇마디를 첨부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물론 제대로 된 싸인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안한 것은 아니지만, 내가 싸인할 기회라봤자 신용카드 전표에다 하는 것 말고 뭐가 있담? (그나마 신용카드를 잃어버렸으니...) 그런데, 50권이나 되는 책에다 싸인을 할 기회가 덜컥 생겨버린 거다.

내 싸인을 본 딴지측 관계자는 역시나 실망했다. '조금 약한데요' 그래서 난 '기생충은 영원하다! 서민 드림'이라는 문구를 제시했지만, 그것도 좀 이상했다. 순간, 8년 전의 일이 떠올랐다. 그때 난 가수 김현철이 진행하는 케이블방송에 출연하던 중이었는데, 시간이 남아 소파에 앉아있는 내게 묘령의 여자가 다가오더니 싸인을 요구한다. "전 싸인이 없는데요?"라고 했더니 지금 하나 만들란다. 잠시 생각을 하던 끝에 난 말 그림을 그렸다. '마태우스'는 한자로 쓰면 '馬太優秀'니 말 그림이 그런대로 어울렸다. 말의 몸에다 '마태우스 서민'이라고 쓰고, 말의 몸체 밑에다 날짜를 썼다. 말의 입 근처에 말풍선을 그린 후 '누구누구님, 행복하세요'라고 썼더니 그럴 듯 했다. 그 여자도 꽤 만족했는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이거, 저랑 같이 개발한 거라는 거, 꼭 기억하세요"

물론 난 그녀의 이름이 뭐였는지 까먹었다. 그녀 역시 나의 존재를 잊었을 것이다.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난 그로부터 얼마 못가서 몇 개 안되는 방송에서 모두 잘렸고, 그 후부터는 알아보는 사람도 없어졌으니까 말이다. 내가 그 싸인을 사용해 본 것은 그때를 포함해 세 번밖에 안된다.

어제, 싸인을 해야 할 50권의 책 앞에서 그 생각이 불현 듯 떠올랐고, 딴지 관계자도 좋다는 반응을 보였다. 50권을 다하는 데는 한시간이 조금 더 결렸다. 원래 그림에는 일가견이 있었는데, 말 그림은 생각만큼 잘 되지 않았다. 그리다 보니 '개' 같고, 말 다리는 앞뒤 길이가 달랐다. 그렇긴 해도, 그냥 이름만 써넣는 것보다는 그게 훨씬 더 멋져 보인다. 그래, 앞으로 내 싸인은 무조건 말 컨셉이다! 물론 신용카드에도!


* 수니나라님까지는 제가 그냥 이름만 썼지만요, 실론티님에게는 말 싸인을 그려넣었습니다. 앞으로 주문하시는 분께는 계속 말 싸인을 해드리겠습니다.


댓글(9)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쎈연필 2004-02-28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 알라딘에서 주문하면 마태우스님 싸인은 받을 수 없는 건가요? 마태우스님 주소 가르쳐주시면 책사서 보내드릴게요(그냥 받을 순 없고요). 말 싸인 보내주세요-^^

mannerist 2004-02-28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미 제 서재에서 보셨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이제껏 제가 본 사인 중 최고는 이겁니다.


 

 

 

 

 

 

 

 

Sviatoslav Richter라는 피아노 연주자의 사인입니다. 사인 이상으로 연주도 최고구요. 음악하는 예술가 기질이 대번에 드러나지 않나요? ㅋㅋㅋ...


마태우스 2004-02-28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너리스트님/우와, 정말 대단하군요...
자두상자님/으음... 그냥 주소 가르쳐 주시면 안될까요?

chaire 2004-02-28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리을)태우스님, 저도 자두상자 님처럼 주소로 책 보낼게요. 말그림 넣어주세요.

마태우스 2004-02-28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이레님/님도 빨랑 주소 대세요!!! 말그림 큼지막하게 그려드립니다.

책읽는나무 2004-02-28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요??.......어젯밤에 구슬프고도 긴사연을 적어서 멜로 보내드렸는데.........못보셨나요??.....답이 없으시네요...흑흑

비로그인 2004-02-28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호...말그려진 싸인이라...참신한데요?? 어느분이 스캔해서 보여주시면 재밌을꺼 같은데...^^

sooninara 2004-02-28 1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사인이 눈앞에 아른거립니다..시간나면 고속철타고 천안으로 가볼까요? 책들고서...
사인 A/S는 해주실거죠

비로그인 2004-03-01 0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마을 분들을 위한 싸인회를 개최하는게 좋을지도 모르겠는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