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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를 바꿔라 - 하워드 진의 마지막 인터뷰
하워드 진.레이 수아레스 지음, 김민웅 옮김 / 산처럼 / 2023년 12월
평점 :
진정한 역사가의 마지막 육성
1.
두껍지 않은 분량의 책 속에 엄청난 양의 정보가 가득한데, 이전 그의 <미국민중사>, <달리는 기차위에 중립은 없다>, <오만한 제국> 등 적지 않은 책을 읽었음에도 아~~~ 이런 일도 있었군, 하는 탄식이 절로 나오는 사건들이 즐비하다.
2.
벌써 우리 곁을 떠난 지 10여 년이 지난 하워드 진의 책을 다시 만나게 되어 너무 반가웠다.
하워드 진의 글은 간결하고 힘이 있으며 진실하다.
겸손하고 평이한 문체 속에 깊이와 폭이 대단한 정보가 상당하다.
3.
단지 지식의 기계적 나열이 아니라 번득이는 혜안과 통찰력이 담긴 문장이 곳곳에 있다.
그중 한두 가지를 보자.
그동안 제2차 세계대전은 ‘선한 전쟁(Good War)’이라고 불렸고 다들 그렇게 인식하고 있으나 저자는 그런 주장에 반론을 제기한다.
미국에 살고 있던 10만 명이 넘는 일본계 미국인들과 일본인들을 수용소에 가둔 인종차별 사건, 히로시마 원폭투하, 유럽의 도시들(프랑크푸르트, 드레스덴 등)을 폭격하여 보통의 평범한 독일인과 일본인 각 수십만 명의 사람들을 죽이는 등의 사실을 알게 된 후 저자는 제2차 세계대전을 결코 ‘선한 전쟁’이라고 불러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정말 그런 전쟁의 가장 끔찍한 유산은 ‘선한 전쟁’이라는 기억으로 어떤 전쟁이든 정당화해왔다는 사실입니다. 그게 제2차 세계대전의 가장 위험한 면모입니다. 세계대전은 이미 지난 일이지만 그 전쟁을 선한 전쟁이라고 규정하면서 오늘날에도 계속 비유를 들어 써먹고 있는 것입니다. ..... 이렇게 선한 전쟁이라고 주장하는 제2차 세계대전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상황에서 전쟁을 정당화시키는 논거처럼 활용되어 사람들에게 전쟁을 지지하도록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210 ~ 212쪽)
“전쟁은 정부에서 평소 하고 싶었던 걸 할 수 있도록 하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건 자신들에게 반대하는 세력, 운동, 이견을 표명하는 상황을 통제하는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역시도 그랬습니다.” (212쪽)
전쟁의 본질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는 문장이라 생각된다.
4.
평생을 역사학자로 살아온 저자가 생각하는 역사학자는 누구이며 역사를 쓴다는 것은 무엇인지 말하는 부분은 그의 한평생을 요약하는 것처럼 보인다.
“역사학자라면 현실 세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들여다보고 이 세상에 뭔가 유익한 영향을 줄 수 있도록 역사를 연구하고 가르치고 책을 써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 사람이 역사학자입니다. 역사를 쓰면서 중립적인 것은 없다, 이른바 객관적인 것은 없다, 라고 말해온 바 있습니다. 현실 세계에서 겪고 있는 갈등과 멀리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란 어디에도 없습니다.”(239 ~ 240쪽)
5.
저자는 이런 세상이 낙관적이냐는 질문에 대해 답한다.
우리가 통상 생각하는 <권력>이란 돈, 무기를 많이 가지고 언론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을 말하지만 역사에서 보면 이와는 다른 권력이 현실에 존재한다고 말하며,
돈도 없고 군사력을 가진 것도 아니며 언론을 쥐락펴락할 힘도 없는 무력한 사람들이 역사의 어느 지점에서는 자신들의 삶을 변화시킬 힘을 보이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조직된 민중의 힘”이라고 말한다.
“조직화, 끈질긴 투쟁, 도덕적 열정, 헌신 이런 것들이 세상의 강자들과는 다른 힘을 만들어내는 요소입니다.” (245쪽)
6.
저자는 인류애적 공감의 힘을 강조하며 마지막까지 희망을 놓지 않는다.
“다른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인간이라는 것을 존중하며 ..... 저는 바로 이 인류애적 공감의 힘이 인간의 본성에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힘이 우리를 난관을 뚫고 희망의 미래로 이끌어주리라 확신합니다.” (247쪽)
우크라이나 – 러시아 전쟁, 이스라엘 – 하마스 전쟁 등으로 지금 이 순간도 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 그의 마지막 희망이 성취되는 평화로운, 정의로운 세상이 오기를 기대하며 글을 마친다.
▣ 사족
이 책의 아쉬움이라면 번역자의 과욕(?) 혹은 지나친 친절이 독서의 흐름을 종종 방해한다는 점이다. 번역자의 주를 문장 가운데 병기하고 있는데, 이를 각주나 미주로 처리하였다면 독서에 훨씬 도움이 되었을 듯싶다.
물론 번역자의 주는 책을 이해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