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과의 수다 - 당신의 상식은 누군가의 비상식
사토 미쓰로 지음, 이윤경 옮김 / 인빅투스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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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를 바라보는 사람의 수만큼 다양한 장미가 있다. ‘사실’이란 장미가 없는 것처럼 유일하게 순수한 사실이란 건 없다. 실재하는 것은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른 저마다의 다양한 해석 뿐들이다. 거울을 바라본다. 저편에 거울에 비친 나의 해석이 있다. 나는 나를 바라본다. 현실로 존재하는 것은 모두 나이다. 현실은 내가 믿는 모든 것이다. 믿음이란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기대하는 것이다. 그럴 거라고 믿고 그렇게 규정하기 때문에 그렇게 보인다. 세상의 법칙이나 성공에 필요한 노력의 정도도 내가 그렇게 믿기 때문에 그렇게 다가오는 것이다.

 

눈앞에 성실한 사람이 비치는 것도 나의 믿음이다. 인생에 성실함도 필요하다고 나는 믿는다. 하지만 그 역할을 내가 담당하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직장동료라는 타인의 모습으로 나의 이 고정관념이 ‘현실’로 비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나는 ‘성실함’과 ‘무능함’이란 관념을 내 멋대로 이어 붙였다. 관념들 중에서 강하게 붙어버린 나머지 고정되어 버린 것을 고정관념이라고 한다. 내 맘대로 무능하다고 그래서 나쁘다고 믿는 내 고정관념으로 인해 분노가 솟아난다. 강하게 믿을수록 이상과 현실 사이에 커다란 간극이 생겨나고 그 차이를 메우려고 발생하는 에너지가 바로 ‘감정’이다. 하지만 현실은 모두 나 자신이라고 했다. 나는 분명 ‘성실함’은 ‘무능함’이라고 생각하지만 내 안의 깊은 곳에서는 ‘성실함’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놀랍게도 나의 관념들에 대해 관념들끼리 부딪히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은 내가 기대하는 그대로이다. 나는 내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는 것에 대해 분노를 느끼면서도 동료들이 성실하게 임할 때 나는 나 좋을 대로 행동했기 때문에 이런 대우를 받을 만 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어떤 식으로든 나도 성실함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현실은 내가 바라는 그대로이니 나는 지금 이 모양으로 살고 있는 것이고 앞으로 내 나름의 성실성을 발휘한다면 더 나은 모습이 될 것이다. 나는 부자가 되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월급쟁이는 큰돈을 벌 수 없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내가 바라는 대로 이렇게 살고 있다. 내가 정말 월급쟁이도 집을 살 수 있다고 믿는다면 매일 절약하며 무엇이든 할 것이다.

 

거울에 비친 내 머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거울 속에 손을 넣어 머리 모양을 바꾸려한다. 거울이라는 ‘현실’에 비친 일들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땐 그것을 보고 있는 내가 먼저 변해야 한다. 현실을 바꾸려면 내 해석이 먼저 바뀌어야 한다. 거울은 먼저 웃지 않는다. 내가 먼저 웃어야 거울에도 웃는 얼굴이 비친다. 세상은 내가 바라는 그대로이니 내가 납득할만한 노력을 기울인다면 신은 소원을 이루어줄 것이다. 그러니 안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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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만지지 마라 - 몸의 들림에 관한 에세이
장 뤽 낭시 지음, 이만형 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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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는 정원지기라고 생각한 그에게 주의 몸이 어디 있는지 아느냐고 묻는다. 예수가 그녀에게 대답하는 대신 “마리아야!”라고 말한다. 그녀는 정원지기의 모습과 어긋나는 목소리를 듣는다. 그녀는 그를 알아본다. 그녀는 듣기 때문에 믿는다. 그녀는 자기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를 듣는다. 마리아의 믿음은 그렇게 이름을 부르는 데 대한 한결같은 믿음에 뿌리를 두고 있다. 믿음은 알아보기 어려운 것, 불확실한 것, 의심스러운 것에 신뢰를 보내는 데 있다. 그녀가 보는 이는 바뀌지 않았다. 그녀는 정원지기의 모습을 하고 있는 사람의 목소리에 응답하고 있다. 마리아는 보통사람, 정원지기를 본 것이다. 그 보통사람이 또 다른 보통 사람, 죽은 보통 사람을 뒤 잇는다.

 

예수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자이다”라고 말했다면 그는 여기 지금 보이지 않지만 빛나는 이이다. 이 영광은 받아들여지고 전달되는 한에서만 빛난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어로 “라뿌니Rabbouni”라고 그를 부른다. 이 말은 존경심과 친근성을 동시에 표현한다. 예수가 마리아에게 말했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만지지 말라” 그는 아직 ‘아버지’를 만나지 않았다. 그리고 아버지를 향해 떠난다. 마리아는 본다. 그러나 이 ‘봄’은 ‘만짐’이 아니며 그럴 수 없다. 그녀는 현존하지 않는 것을 본다. 그녀 앞에서 보는 이는 이미 떠났기 때문에 손이 미칠 수 있는 거리 너머에 있어 만질 수 없다. 그러한 그를 만지려는 것, 그를 멈춰 붙들려는 것은 직접적 현존에 집착하는 것이다. 하지만 유일한 접촉과 현존은 그 떠남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다가온다.

 

문자의 의미는 조금 이동한다. “나를 만지지 마라. 왜냐하면 내가 만지기 때문이다” 이 만짐은 거리두기와 다정함의 아주 특별한 조합으로서 이해된다. 사랑과 진리는 만지면서 밀어낸다. 이 접근은 만짐 그 자체 안에서 그 것들이 우리 힘 바깥에 있다는 걸 깨닫게 해준다. 그것들이 우리를 만지는 것은 그것들이 접근불가능하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만짐의 감각이 만지지 말라고 명령한다. “나를 만지려고 원하지 마라”라고 말한다. 그것이 본 의미이다.

 

“나를 만지지마라”를 지나면 도마의 에피소드가 있다. 예수가 그에게 말한다. 네가 믿게 되었으니 너는 행복할 것이다. 믿음 속에 있다는 건 죽은 몸이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믿는 게 아니라 죽음 앞에서 꿋꿋한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다. 이 자세가 부활을 만든다. 그것은 죽음에서 어떤 삶의 사랑과 진리를 일으켜 세우는 것이다. 잃어버린 것의 부활과 함께 더 이상 레테강 근처에서 방황하는 고통 받는 영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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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 그리고 삶은 어떻게 소진되는가
류동민 지음 / 코난북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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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동 먹자골목 한 편의 선술집에 앉아 밖을 바라보고 있다. 마치 외출 나온 항공사 여승무원처럼 단정하게 벨트를 묶은 트렌치코트 차림으로 지나가는 취객들에게 다정히 말을 건다. 그렇게 서성이기를 한 시간 남짓, 그녀는 마침내 나이든 취객 하나를 데리고 옆 건물의 ‘BAR'라고 써진 간판 불빛 아래로 사라진다. 잠시 후 그녀는 다시 거리로 나와 미소를 지으며 취객에게 말을 건다. 그녀의 고용형태와 임금이 궁금해진다. 고용 형태는 비정규직. 불법과 합법의 경계선 위에 서있는 그녀는 종업원이되 종업원이 아닐 것이다. 임금은 성과급으로 받을 것이다. 얼핏 한 시간에 한명 정도의 영업 실적을 올리는 듯 한데 그녀는 매상에서 몇 퍼센트나 받을 까.

폴란드 출신 경제학자 미하우 칼레츠키가 말하는 마크업(mark-up) 가격 설정은 이렇게 설명한다. 바의 주인은 임대료와 술값 등의 평균 비용을 계산하고 거기에 몇 퍼센트의 마진을 얹어야 할 것인지 생각해 가격을 설정한다. 임대료는 모든 가격 설정에서 기본적으로 일정 수준은 보장되어야 하는 불변의 상수이다. 상품가격도 임금도 지대부터 깔고 설정되면서 서울의 공간 구조도 변화해왔다. 테헤란로의 수많은 오피스텔 속으로 성매매 업소들이 파고 든 데에도 이것에 원인이 있다. 좁디좁지만 한 달 임대료만 몇 십만 원이 넘는 방에서 그 정도 수익을 올리고도 남는 업종은 흔치 않다. 너무나 역설적인 것은 이러한 공간 구조 왜곡이 그나마 경제를 지탱해주는 보루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근래 가로수길이나 서래마을과 같은 곳들은 널리 알려지게 되면서 임대료가 빠른 속도로 치솟았고 그 결과 작지만 특색을 갖춘 카페나 상점들은 그 부담을 견디지 못해 사라졌다. 대신 고급 브랜드 매장이나 대기업계열 커피 점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단 하나의 매장에서 수익을 올려야하는 자영업과는 달리 전국에 걸친 매장들로부터 일정한 수익을 되는 구조이기 때문에 특정 지역의 높은 임대료를 버틸 수 있는 것이다.

지대는 주거 공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직장이 시내나 강남에 있는 노동자가 서울 외곽으로 다시 위성도시로 밀려나는 거대한 흐름이 있다. 광역버스에 매달려 파김치가 된 몸으로 몇 시간씩을 통근에 사용하거나 차라리 직장 앞 원룸에서 산다. 주거비용이 비싸지면서 주거공간과 작업공간이 합쳐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것을 상징하는 것이 고시원이다. 1970년대 구로공단 근처 등지에 있던 쪽방들의 21세기 버전이 바로 고시원이다. 박인규의 소설 <갑을고시원 체류기>는 집안이 갑작스럽게 몰락해 고시원에 살게 된 대학생 이야기다. 소설의 배경인 1991년은 고시 공부하는 사람들과 고시원을 숙소로 쓰기 시작한 일용직 노무자들과 유흥업소 종업원들이 공존하던 시기이다. 더 이상 주거 공간은 쾌적한 곳만은 아니다. 밭에서 일하던 농부가 근처 나무 그늘 밑에 누워 잠시 눈을 붙이듯 일터 가까운 곳에 자리 잡은 비좁은 공간은 넓은 의미에서 일터에 잠겨드는 공간이다.

날로 화려해지기를 그치지 않는 서울 안에서 시급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아르바이트생들과 식사할 공간도 마땅치 않은 용역 청소 노동자 아주머니들이 있다. 눈에 잘 보이지 않고 외면 받는 이의 세계는 따로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세계, 이 서울에 있다. 그들이 허물어 질 때 결국 허물어지는 건 우리 자신일 것이다. 기여와 권리가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그럴 듯하게 맞아 떨어지는 도시는 우리 모두의 안전한 삶을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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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으로 읽는 괴테 니체 바그너
승계호 지음, 석기용 옮김 / 반니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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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는 태양을 모범으로 삼았다. 그 자체로 흘러넘치는 풍요는 의도치않게 태양이 의식하지 않고도 주변에 풍요로움을 선물한다. 이것이 흔히 우리가 아는 차라투스트라의 기세이다. 그런데 2부에 이르자 차라투스트라는 절망에 빠져버렸다. 이런 독립적이고 자족적인 삶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인간은 모두 다른 인간에 의존하고 이에 대한 좌절이 고통과 복수의 감정으로 이어진다.

 

현재는 과거의 산물이고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현재와 과거이다. 과거는 이 강자와 약자의 관계를 만들어낸 궁극적인 원인이다. 그래서 과거가 궁극의 복수 대상이 된다. 예를 들어 징벌을 받을 것이다, 시간과 함께 소멸의 징벌을 받을 것이다, 정의에 따라 질서 잡힐 것이다 하는 신념을 증명하려 든다. 그러나 과거를 바꾸는 일은 불가능하다. 의지는 미래에서 과거로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나는 그 과거를 바랐다’, 내 의지대로 바람대로 된 것이다. 아, 한번 더 바꾼다. ‘그래서 나는 그 과거를 바랐다’, 또 다시 그것을 바란다.

 

미래를 내다보고 있는 의지는 지나간 원인들의 결과물이다. 이런 인과적 조건은 의지란게 사실 결정되어 있고 자율성을 가질 수 없다고 말한다. 과거에 매어있는 의지는 타율적이다. 그리고 이 타율의지는 스피노자적 의지다 스피노자는 신 즉 자연의 필연성이 우리의 의지를 결정한다고 가르친다. 자율의지를 발현해 날아오르려는 차라투스트라를 내려앉히려하고 좌절시키려는 추악한 난쟁이가 그의 타율의지였다. 저자는 난쟁이가 차라투스트라의 동물적 자아라고 신선한 해석을 내놓는다. 차라투스트라가 혐오했던 그저 그런대로 살아가는 인간들과 그를 덮치는 모든 우연적인 사건들도 모두 그의 의지였고 자아였다.

 

이 말은 세계에서 유일한 것은 스스로 굴러가는 이 세계뿐이고 영원한 것은 현재뿐이라는 것이다. 결국 세상은 하나다. 이런 우주적 결론과 함께 저자는 그럼에도 개인의 의지를 지우지 않는다. 내 의지가 이미 내 과거에 의해 결정되어 있다 해도 우리는 어쨌든 결정과 선택을 해야하고 우리의 자아라는 건 있다. 그럼 개인 자아와 자연적 자아는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까

 

우리는 자연적 필연적으로 결정된 이 난쟁이 자아에 경외심을 느끼고 사랑해야 한다. 이 사랑으로 추악한 난쟁이는 사자가 되었다. 다시 태양과 같은 기세로 사나운 야수처럼 행동한다. 독립적이고 자족적인 사자가 되어 자신의 자율의지를 떨칠 수 있는 모든 잠재력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이 자율 자아를 억제하거나 제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히드라의 머리다. 히드라의 머리는 자르자마다 새로 태어난다. 무언가 이 극의 시작과 똑같은 거 같지만 전혀 다르다. 시작에서 그는 혼자였지만 이제는 웃는 사자와 사랑스런 세계에 둘러싸여 있다. 아무것도 변한게 없지만 세상 모든 것이 변해버렸다.(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부분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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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언제부터 지루해했을까? -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
고쿠분 고이치로 지음, 최재혁 옮김 / 한권의책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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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참 불쌍하다. 그 타고난 적응력을 발휘해 낯선 상황을 익숙한 것으로 만들어 놓고는 또다시 탄식하는 것이다. 아, 지루해. 이 책을 마주하며 지루함에 대한 나름의 해결책을 제시해주시 않을까 기대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다. 우선 진정 즐길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파티에 가 잘 놓아놓고 집에 들어와 문득 오늘 파티 참 지루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하이데거가 말하는 지루함의 제2형식이다. 제1형식은 기차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아직 오지 않았고 그 시간에 붙잡혀 공허 속에 놓여있다. 파티에선 무언가 기다리지도 않았고 시간에 매여 있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느끼는 지루함은 우리 존재 자체가 갖는 지루함이다. 지루함을 없애려 시간을 멈추고 기분전환을 하는데도 이것이 오히려 지루함을 가져온다. 저자는 우리가 그 타피의 식사나 음악, 시가 향들을 즐길 훈련이 되지 않아서라고 말한다. 지루함을 모두 떨칠 수는 없겠지만 지루함과 기분전환이 뒤얽힌 삶 속에서 기분전환의 순간을 더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이보다 더 결정적인 해결책도 제시하는 데 바로 ‘동물 되기’ 이다. 꿀벌은 꽃 위에 앉아 꿀을 빨아 마신 후 날아간다. 왜 날아가 버릴까? 꿀이 더 이상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날아가는 것일까? 이런 의문으로 하이데거는 벌의 꽁무니에 조심스레 칼자국을 냈다. 벌의 꽁무니에서 꿀이 흘러나온다. 꿀벌은 아무렇지 않게 계속 꿀을 빨아들인다. 포만감이란 신호가 날아가 버린다는 다음 동작을 유도하는데 신호가 오지 않으니 계속해서 빨아들이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를 꿀벌이 먹이에 의해 “압도 되어 있다”고 말한다. 이런 동물과 달리 인간은 대상을 그 자체로 인식한다고 주장한다. 꿀을 꿀로서 확인하고 먹는다. 그런데 ‘꿀 그 자체’란 것은 무엇일까.

 

우리도 인간의 환경세계에 압도되어 있고 그 만큼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꿀벌이 꿀벌의 환경세계를 살고 도마뱀이 도마뱀의 환경세계를 살아가듯, 우주물리학자와 일광욕하는 사람은 각자 다른 세계에서 전혀 다른 방식의 태양을 경험한다. 생각한다는 것은 강제되는 것이다. 세계에 침입한 새로운 요소에 대해 생각함으로써 대응한다. 습관을 다시 창조하고 환경세계를 획득한다. 생각하지 않고도 자연스레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한다.

 

이렇게 특정한 대상들에 압도되어 있을 때 즉 동물과 같은 상태에 있을 때 인간은 지루해하지 않는다. 그런데 곧 이를 익숙한 대상으로 만들어 놓고는 지루해한다. 여기까지 읽고 난 후 든 내 생각은 그렇게 들어오는 환경세계 모두가 익숙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 와중에도 불편한 것들이 있고 무의미해 보이는 것도 많다. 동물이 된다는 것은 이런 것들에 대해 끝까지 생각하고 새 학기 첫날처럼 촉각을 다 곤두세우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스벤젠은 낭만주의가 도래하면서부터 인간이 지루해했다고 말한다. 전 근대사회에서는 집단 안에서 그리고 종교적으로 삶의 의미를 부여받았지만 이제는 각자 알아서 각자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인생의 충실함을 추구해나가야 한다. 그런데 이게 간단한 일이 아닌지라 기차를 기다리는 것처럼 지루하다. 스벤젠은 낭만주의와 결별하고 존재의 의미를 단념하는 것이 지루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제시한다. 저자는 이것이 가능한지에 대해서 회의적이고 가능하다해도 단순히 포기한다는 것의 다른 말이 아닌지 비판한다. 하지만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고민에 몰두하는 것은 그 행위 자체로 의미 있지 않을까 싶다. 환경세계를 획득하고 나란 존재를 펼쳐나갈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적어도 지루함으로부터 기분전환이 될 수 있다. 곧 다시 지루함이 찾아오고 세계에 대한 고민은 끝이 없겠지만 완전함에 대한 낭만주의를 버려야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 본래 인간은 지루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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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희 2014-11-29 0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