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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스피에르의 죽음
서준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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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혹한 악마 로베스피에르가 고뇌한다. 그는 그저 미치광이였던 게 아니라 한때 그를 열렬히 지지해준 상퀼로트들과 각기 다른 입장을 가진 정치인들에 둘러싸인 한 인간이었다. 민심은 차갑게 식어간다. 식료품에 대한 최고 가격 고정제가 철폐됨에 이어 최고 임금 상한제가 도입된다. 납세액에 따른 선거권제한에 극렬히 반대했던 그의 과거 행적에 대한 진정성도 의심받기 시작한다. 혁명적 부르주아들이라고 해도 결국 부르주아 정치인일 뿐이다.

 

그가 그 즈음 공회에서 한 연설은 이러한 여론에 더욱 불을 붙었다. 국민공회 안에는 각기 다른 계층의 이익을 표방하는 각각의 정파가 있는 것이 아니라 공화정의 덕성과 이념 추구에서 하나로 움직일 수 있다. 하지만 다음날 머리기사는 이렇게 나온다. 로베스피에르 우파들과의 대연합 제안. 그는 공회에서 혁명재판에 대한 긴급법령과 방토즈 특별법을 가결시키려면 모든 정파를 초월한 덕성에 호소하는 수밖에 없었다고 토로한다.

 

어느 순간부터 모든 건 로베스피에르 때문이다. 그저 로베스피에르를 끌어내리기 위해 온건파와 급진파와 상퀼로트들이 모두 손을 잡는 모습은 이것이 이념간의 갈등이 아니라 복수극의 형태를 띠고 있음을 보여준다.

 

애초에 모든 이익들을 초월한 공공의 선을 추구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각기 다른 입장과 시각차를 가진 사람들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은 추상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인간이기에 구체적인 것에서 어떻게든 어떤 입장에 설 수밖에 없다.

 

어쨌거나 로베스피에르는 이상을 가지고 있었다. 마지막 전면전을 선언하는 연설에서 그는 가치 허무주의를 지적한다. 공화국의 덕성과 정의에 대한 열정은 권력욕으로 똘똘 뭉친 영악한 정치가가 빚어낸 오물덩어리로 유도된다. 저들의 궁극적 지향점은 가치허무주의이다. 그러면 이성에 따른 역사적 진보와 신념은 한낱 허무맹랑한 우스갯소리로 전락한다. 그 이후의 세계는 부르주아들에 의해 움직이는 권태와 방종의 역사가 될 것이다. 아, 너무 심각해질 필요는 없겠다. 이 모든 건 그저 소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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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을 체포하라 - 14인 사건을 통해 보는 18세기 파리의 의사소통망
로버트 단턴 지음, 김지혜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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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분노의 괴물’로 시작되는 시가 발견되었다. 괴물은 루이 15세이다. 이는 얼마 전 해임되어 유배 간 모르파 백작쪽 사람이 쓴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시민을 체포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이 시 필사본의 주인은 프랑수아 보니로 의학을 공부하는 학생이었다. 그로부터 역추적에 들어갔다. 다른 불온한 시들의 전달들도 드러났다. 신부 르 메르시에는 한 세미나에서 기숙학생 테레가 암송하는 시를 받아 적으며 끝에 논평을 붙였다. 그런데 정치적인 내용이 아니라 특정 행에서 각운이 맞아떨어지지 않음을 지적하는 것이었다. 이는 신무 기아르에게 전달되었고 기아르는 알레르에게 장갑과 자신이 지는 시를 보내면서 이 시도 같이 보낸다. 이런 식으로 14명을 찾아내 바스티류로 보냈다. 하지만 시인은 결국 찾지 못했다. 시의 흔적은 희미해지고 수사는 무한히 지속되는 일련의 체포들로 빨려 들어갈 듯했다. 시를 필사하면서도 사람들을 자신들의 기호에 따라 시를 수정하고 다를 시와 결합하기도 했다.

 

전혀 다른 맥락에서 비롯된 개념으로부터 이러한 현상을 이해하려 한다는 것이 억지겠지만 롤랑 바르트의 ‘저자의 죽음’이 연상된다. 바르트에게 텍스트는 직물이다. 여러 견해들이 얼기고 설켜 이루어진다. 텍스트의 생성은 독자들로부터 이루어지고 한 텍스트에서 다를 텍스트로 지속적인 변형이 이루어진다. 결코 완성이란 게 없다. 지금의 인터넷 게시물들이 생각난다.

 

또 낭송이나 노래로 장르나 변형되어 널리널리 퍼지기도 했다. 소문이나 농담, 재담, 경구들과도 엮여 더 이상 구별해낼 수 없었다. 수사를 지휘했던 다르장송 백작은 “최대한 높이 가라”고 경찰들을 채근하며 이 사건을 자신의 정적들을 제거하는 방편으로 삼으려 했는지 모르지만 수사는 아래로 아래로 흘렀다. 체포된 14인들은 모두 중간계층의 전문직들이었다. 이는 특히 공부와 수련에 찌든 젊은 지식인들이 흔히 하던 위험한 놀이 중 하나였다. 정치적 음모는 없었다. 이념적 성향도 흐릿했다. 문학적 허세에 빠진 이들은 여럿 있었다. 그들은 고전 수사학을 따르며 송시를 지었다. 낭독을 생각해 고상한 어조와 세련된 운율을 갖추었다. 궁정인 들에게 이는 저속한 시이다. 그럼에도 몇몇 시는 정말 궁정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그 자리에 있어야지만 알 수 있는 유명 인사들의 아주 사적인 이야기나 전쟁 상황, 정치사안 등 모든 것들이 대중의 재판정에 올려졌다.

 

대중들은 노래했다. 잘 알려진 멜로디에 새로운 시구를 붙여 부른다. 어디에 붙이냐 하는 것도 비틀기에 하나다. 거리의 노래꾼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든다. 이쪽에 재능을 보이는 사람들끼리 모여 돌아가며 잘 알려진 곡에 맞춰 시를 짓는다. 카페로 자리를 옮기면서 문필가들과 함께한다. 그들은 술병을 돌리고 서로 재치 있는 시를 지으려고 경쟁했다. 그들은 급기야 오페라 코미크를 장악했다. 그들이 지은 수백 곡의 노래들이 프랑스 곳곳에서 울렸다.

 

이런 게 들뢰즈가 말한 ‘리좀’이 아닐까 싶다. 경계도 없이 뿌리처럼 ‘그리고, 그리고’하며 뻗어가고 있다. 그러니 머리를 잡으려고 해도 잡을 수 없다. 배후를 쫓으려고 해도 쫓을 수 없다. 에두아르 왕자 지지자도 계몽주의자도 이단으로 규정된 얀센주의자도 다 같이 노래한다. 귀족은 궁정에서 궤변논자들은 살롱에서 노동자들은 선술집에서 노래한다.

 

당시에도 계몽 사상가들이 이를 규정해보고자 했지만 철학적 개념에 사회적 현상은 미끄러졌다. 거리의 여론과 철학적 이상은 결코 일치한 적이 없다. 대중은 철학자들이 담론으로 구축하기 훨씬 전부터 존재하였으며 이런 시도에 조금에 조금도 관심 없이 그 자체로 어떤 힘이었다. 이를 바스티유 습격과 인과관계에서 보는 것도 이 사건 자체로의 많은 이야기들을 놓치게 한다. 14인 가운데 그 누구도 혁명적 사고의 조짐이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파리는 이러한 의사소통 망을 가지고 있었고 이들의 떠들썩한 소리를 루이 15세는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중은 계몽 사상가들을 포함해 앞에 놓인 모든 것을 쓸어버리는 거리에서 끌어올린 어떤 힘이었으며 40년 후에는 멈출 수 없게 된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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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출판 24시
김화영 외 지음 / 새움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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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이 문고 매장을 쓱 둘러보던 영업부 윤식은 문학 코너 담당자인 정주임을 발견하고 밝게 인사한다. 이번에 나온 시간을 너무 안쪽에 진열해 두셨다며 약간 비굴한 표정을 보인다. 정주임은 자리를 바꿔주며 가판대 광고도 좀 넣어달라고 요즘 광고 매출이 저조하다고 위에서 난리라며 하소연한다. 윤식은 문득 자신들보다 자금력이 없는 출판사들은 어떻게 할까하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 한 온라인 서점 MD에게서 이제는 300만 원 이상 광고해주는 책만 오늘의 책으로 소개해주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마치 르포를 보는 것 같지만 이는 새움출판사팀이 공동집필한 소설이다. 기나긴 불황과 연이은 사재기 논란 속에서 ‘견뎌봐야지, 더 나빠질게 있겠어.’ 습관처럼 읊조리며 살아가는 우리와 같은 사람 사는 이야기이다.

우편으로 날아든 원고 하나가 기획실장 아라의 책장 한켠에 꽂혀 있다가 우연히 주목받게 된다. 사장 정서는 이런 좋은 작품에 대접을 해주고 싶다며 신인작가에게는 이례적으로 선인세 1,000만원을 제시한다. 계약 후 편집장 해윤과 저자 현기 간의 원고 수정 작업이 이루어진다. 현기의 메일함은 ‘발신인 김해윤’으로 도배가 되어있다. 출간일에 맞추려면 어제까지는 데이터를 보내줘야 하는 걸 오전까지 검토에 수정을 거듭해 인쇄소에 넘겼다. 그럼에도 오자는 발견되고 침울해하는 해윤을 동료들은 얼른 초판을 다 팔고 다음 쇄에 수정하면 된다고 위로한다. 그렇게 <트레이더> 5,000부가 세상에 나왔다.

영업부 윤식은 책을 가지고 국내 최고 온라인 서점인 비블리온을 찾아간다. 비블리온 미팅룸은 출판사 영업부 팀들로 언제나 붐볐다. 문학 분야 MD인 미옥은 특히나 냉랭해 출판사들 사이에서 ‘마녀’로 불리는 존재이다. 한번 눈 밖에 난 출판사에는 절대 호의를 베풀지 않는다. 오늘도 책과 보도 자료만 뒤적이는 미옥 앞에서 윤식은 웃으며 갖은 홍보를 한다. 그러다 갑자기 고개를 든 미옥이 한마디 내뱉는다. “내일 출고시죠? 일단 10부 보내주세요.” 과연 <트레이더>는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을까?

그 외에도 다양한 출판계의 사정들이 담겨있다. 작가 현기가 원고를 발송한 15개 출판사 중 하나였던 DS미디어에서는 원고를 일단 사두는 걸로 하자고 제안했었다. 일어서려는 현기를 두고 기획팀장은 신인작가에게 이런 조건을 제시하는 출판사는 없을 거라고 자극한다. 현기는 순간 무언가 치밀어 올라 원고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찢어버릴 각오가 있다고 창녀처럼 싼값에 원고를 팔아넘기지 않을 거라며 뒤돌아 나온다. 사람 사는 거 다 같아도 왠지 출판계에 있는 사람들은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에 더 화가 났던 거 같다. 세상이 삭막해도 책은 여전히 15,000원 즈음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깊은 위로이기 때문이다. 사재기니 광고니 해도 결국 목석은 독자들이 가려낸다고 믿는 수비니겨 출판사 사람들의 24시가 소설 속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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