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언제부터 지루해했을까? -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
고쿠분 고이치로 지음, 최재혁 옮김 / 한권의책 / 2014년 10월
평점 :
절판


인간이란 참 불쌍하다. 그 타고난 적응력을 발휘해 낯선 상황을 익숙한 것으로 만들어 놓고는 또다시 탄식하는 것이다. 아, 지루해. 이 책을 마주하며 지루함에 대한 나름의 해결책을 제시해주시 않을까 기대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다. 우선 진정 즐길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파티에 가 잘 놓아놓고 집에 들어와 문득 오늘 파티 참 지루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하이데거가 말하는 지루함의 제2형식이다. 제1형식은 기차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아직 오지 않았고 그 시간에 붙잡혀 공허 속에 놓여있다. 파티에선 무언가 기다리지도 않았고 시간에 매여 있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느끼는 지루함은 우리 존재 자체가 갖는 지루함이다. 지루함을 없애려 시간을 멈추고 기분전환을 하는데도 이것이 오히려 지루함을 가져온다. 저자는 우리가 그 타피의 식사나 음악, 시가 향들을 즐길 훈련이 되지 않아서라고 말한다. 지루함을 모두 떨칠 수는 없겠지만 지루함과 기분전환이 뒤얽힌 삶 속에서 기분전환의 순간을 더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이보다 더 결정적인 해결책도 제시하는 데 바로 ‘동물 되기’ 이다. 꿀벌은 꽃 위에 앉아 꿀을 빨아 마신 후 날아간다. 왜 날아가 버릴까? 꿀이 더 이상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날아가는 것일까? 이런 의문으로 하이데거는 벌의 꽁무니에 조심스레 칼자국을 냈다. 벌의 꽁무니에서 꿀이 흘러나온다. 꿀벌은 아무렇지 않게 계속 꿀을 빨아들인다. 포만감이란 신호가 날아가 버린다는 다음 동작을 유도하는데 신호가 오지 않으니 계속해서 빨아들이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를 꿀벌이 먹이에 의해 “압도 되어 있다”고 말한다. 이런 동물과 달리 인간은 대상을 그 자체로 인식한다고 주장한다. 꿀을 꿀로서 확인하고 먹는다. 그런데 ‘꿀 그 자체’란 것은 무엇일까.

 

우리도 인간의 환경세계에 압도되어 있고 그 만큼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꿀벌이 꿀벌의 환경세계를 살고 도마뱀이 도마뱀의 환경세계를 살아가듯, 우주물리학자와 일광욕하는 사람은 각자 다른 세계에서 전혀 다른 방식의 태양을 경험한다. 생각한다는 것은 강제되는 것이다. 세계에 침입한 새로운 요소에 대해 생각함으로써 대응한다. 습관을 다시 창조하고 환경세계를 획득한다. 생각하지 않고도 자연스레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한다.

 

이렇게 특정한 대상들에 압도되어 있을 때 즉 동물과 같은 상태에 있을 때 인간은 지루해하지 않는다. 그런데 곧 이를 익숙한 대상으로 만들어 놓고는 지루해한다. 여기까지 읽고 난 후 든 내 생각은 그렇게 들어오는 환경세계 모두가 익숙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 와중에도 불편한 것들이 있고 무의미해 보이는 것도 많다. 동물이 된다는 것은 이런 것들에 대해 끝까지 생각하고 새 학기 첫날처럼 촉각을 다 곤두세우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스벤젠은 낭만주의가 도래하면서부터 인간이 지루해했다고 말한다. 전 근대사회에서는 집단 안에서 그리고 종교적으로 삶의 의미를 부여받았지만 이제는 각자 알아서 각자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인생의 충실함을 추구해나가야 한다. 그런데 이게 간단한 일이 아닌지라 기차를 기다리는 것처럼 지루하다. 스벤젠은 낭만주의와 결별하고 존재의 의미를 단념하는 것이 지루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제시한다. 저자는 이것이 가능한지에 대해서 회의적이고 가능하다해도 단순히 포기한다는 것의 다른 말이 아닌지 비판한다. 하지만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고민에 몰두하는 것은 그 행위 자체로 의미 있지 않을까 싶다. 환경세계를 획득하고 나란 존재를 펼쳐나갈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적어도 지루함으로부터 기분전환이 될 수 있다. 곧 다시 지루함이 찾아오고 세계에 대한 고민은 끝이 없겠지만 완전함에 대한 낭만주의를 버려야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 본래 인간은 지루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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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희 2014-11-29 0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