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러니까 기다리는 걸 잘 못한다.

어려서 할머니, 할아버지 밑에서 컸었다고는 얘기했었고,

그러니 무엇 하나 아쉬워서 기다릴 일이 없었다.

할머니, 할아버지, 다섯 명의 고모들 중 결혼 안하고 남아있던 고모들은 내가 분부만을 내려주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인줄 알았다.

이러고 성장한 나는,

커서 단체 생활, 집단 생활을 하면서 그 차이에서 버거워했었지만,

그래도 직업 자체가 보수적이고 고리타분하다보니 그럭저럭 잘 견뎌내고 있다.

모르는 사람들은 내가 시간 약속을 철저히 잘 지키는 줄 알지,

그게 안달이 나고, 불안과 초조의 소산이라는 걸 모른다.

 

지난 주에 남동생이 상의할 일이 있다고 만나자고 하였다.

남동생은 만나기로 한 주점에 잠깐 얼굴을 들이밀었다가는,

무슨 전화를 받고 급히 나갔다가 한참만에 들어왔다.

남동생은 딸 둘을 둔 이른바 '딸딸이'아빠다.

첫째와 둘째의 나이 차이가 무려 열 살이나 난다.

 

나와 같은 방식으로 키워져 오던 큰조카는 갑자기 생긴 동생으로 인하여,

관심이 분산되었고...

올해 중1인 사춘기 소녀답게 나름의 방식으로 온갖 일탈을 감행하여 남동생의 속을 있는대로 썪이는 중이었다.

 

동생을 향하여 별로 해줄 얘기가 없었던 난, 위로주나 살 요량이었는데...

그때 동생에게 걸려 온 전화 한통이 나까지 광분케 하였고,

그리하여 술독에 같이 빠져 버렸다.

얘기인즉,

학원에 가기 싫다고 친구와 패스트푸드점에 앉아있는 조카를 발견하여,

집으로 들여보내는 과정에서,

조카 친구의 부모에게도 연락을 하겠다고 하여 부녀 간에 말다툼이 있었나 보다.

그걸 순찰을 돌던 순찰차가 보고 조카가 탄 마을 버스에 같이 타서는,

누구냐

아빠다.

가정폭력이냐?

아니다.

꼬치꼬치 캐묻더라는 것이다.

 

아무리 실적 위주의 업무 행태가 판을 치는 세상이라고 하지만,

어떻게 그 부녀를 가정폭력으로 엮을 생각을 했을까 싶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이번엔 더 기가 막히는 얘기를 들었다.

부녀는 화해를 했고...

어찌 어찌하여 기분이 좋아진 조카는 마을 버스 안에서,

마을 버스 밖의 남동생을 향하여 손바닥을 자기 입술에 쪼옥~ 댔다가 날리는 손바닥키스를 날렸고,

남동생도 마을버스 밖에서 조카를 향하여 똑같이 화답하였다고 한다.

마을버스가 떠난 뒤, 남동생은 뒤에 서있던 순찰에게 아동 성폭력 전과가 있는지 조사를 받았는데...

불쾌하였지만, 자기도 딸 둘을 키우는 입장이다 보니 어쩌지 못하고 응할 수밖에없었다고 했다.

 

어제, '노자 할아버지 같이 놀아요!'란 그림책의 발상에서 참 좋았던게,

헝겁을 이렇게 저렇게 짜집기 한것도 물론이거니와,

거기다가 노자 '도덕경'의 몇 글자를 발췌하여 수실로 한땀 한땀 수놓은 정성이었다.

요즘은 어디서고 바빠 바빠를 외치는 속전속결의 세상에,

자기밖에 모르는고로,

남을 기다리거나, 남에게 정성을 들일 줄 몰라서 참신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수실'하면 떠오르는 책이 바로, '나는 기다립니다'이다.

 

 

그림책의 '끝'을 '끈'으로 바꾸어 표현해 놓았지만, 사실은 수놓을 때 쓰는 수실이다.

 

 

 

  나는 기다립니다...
  다비드 칼리 지음, 세르즈 블로크 그림, 안수연 옮김 /

  문학동네어린이 / 2007년 7월

 

책의 표지로 미루어 내용을 짐작할 수 있듯,

사람 사이의 관계, 삶을 '빨간 수실'로 표현해 놓았다.

이쯤에서 난 딴지를 걸고 싶어지는데,

이미지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라도,

더 복실거리고 탐스러운 털실뭉치도 놔두고,

하필 탄력 제로, 툭툭 잡아당기는 대로 끊어지는 수실을 사용했을까 하는것이다.

 

난 원색의 옷을 좋아하는데,

그런 옷의 단추가 떨어지면 단추를 달 실이 없어 난감할 때,

알록달록한 수실을 이용하여 단추를 달때가 있다.

작은 단추는 그럭저럭 견뎌내는데,

겨울 외투의 큰 단추는 반나절도 못 버티고 떨어져 단추마저 잃어버리는 낭패를 본 경험이 있다.

단추 마저 버텨내지 못하는 수실을,

기다림의 용도로 표현하다니,

사실을 알고보면 아이러니컬 하다.

 

기다림의 용도로는 짱짱한 고탄력 스타킹을 만드는 함섬섬유실이나,

필라테스할때 쓰는 고무로 된 밴드,

또는 자전거포에 가면 자전거 바퀴 속에 들어 있는 짱짱한 고무를 갈라만든게 짱이다.

폼은 안나더라도 무릇 인연이라면 그래야 하지 않을까?

수실처럼 어디에선가 조금만 힘을 주어 잡아당기면 툭툭 끊어져 버려선,

어디 성질 나빠져서 도 닦듯 인내하며 놓아야 하는 수인들 제대로 놓겠는가 말이다.

 

찰떡이나 점성 좋은 치즈도 좋겠다.

쭈욱 잡아 당기면 늘었다 줄었다 자유자재여서,

연결은 되어 있으면서 자신의 본성은 유지하는 그런 인연이어야 하겠다.

왜냐하면 '세살 버릇 여든까지'라는 속담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이 나이에 자기 자신이 나아지는 쪽으로의 변화라고 하여도 쉽지가 않은데,

누굴 내 입맛에 맞게 변화시키고 바꿀려고 하느냐 말이다.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관계는 발전할 수 있고, 인연은 유지될 수 있다.

수실처럼 '톡톡~' 끊어져 버리면 아무 짝에도 쓸모없어진다.

 

그렇다면 기다리는걸 잘 못하는 나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나?

석봉이 시험에 합격하기를...?

아니, 석봉이 건강하게 시험을 치르기를...

셤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하느라 몸 상하거나 하지 말고,

셤 마치고 무탈하게만 일상으로 돌아와 주기를 기다린다.

모든 석봉 모친의 마음이 그렇듯~!

 

'다비드 칼리''세르주 블로크' 커플의 책이 한권 더 있다, '너에게 뽀뽀하고 싶어'

 

 

 

 

 

 

 

 

 

 

 

 

 

 너에게 뽀뽀하고 싶어
 다비드 칼리 지음, 길미향 옮김, 세르주 블로크 그림 /

 아트버스(Artbus) / 2012년 8월

 

이 책도 '나는 기다립니다'처럼 참신하고 이쁘다.

 

다비드 칼리 홈페이지 링크 클릭~!

세르주 블로크 블로그 링크 클릭~!

 

웹서핑을 하다가 든 생각인데,

불어판의 경우,

저자가 '다비드 칼리'라고 되어 있고,

그 밑에 저자의 다른 작품들로 링크되는 란에 가서,

'다비드 칼리'와 '세르주 블로크' 두명이 나란히 놓여있다.

두 명은 공저자일수도 있는데,

번역하는 과정에서 그동안 우리의 관행상 '한명은 글, 한명은 그림' 이렇게 적어준 게 아닐까 싶었다.

 

둘 다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는 사람들인데,

한명은 글만 쓰고, 한명은 그림만 그렸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정작 본인들이 아니면 알 수가 없는 것이 아닐까?

 

'뽀뽀'니 '키스'를 '성인'의 전유물로 생각하는 것 자체가 편협하고 낡은 가치관 속에 빠져버리는 게 아닐까 싶다.

'너에게 뽀뽀하고 싶어'는 참으로 예쁜, 시간과 공간을 아우르는 책이다.

누군가는 결혼한 사람들의 '프렌치 키스'에 방점을 찍어 한정시켜 생각 했었는데,

그런 키스도 있는가 하면,

굿모닝 키스,

갈구하거나 허기질때 하는 키스,

가슴 설레이는 첫키스의 추억,

그 장소여서 아름다운 키스,

그 사람이어서 의미가 있는 키스,

화해의 몸짓으로서의 키스,

프로포즈로서의 키스,

영화를 보다가 필이 동하는 키스,

장엄한 광경에 동화되어 하는 키스,

등 갖가지 키스가 예쁘게 그려져 있는게,

프로포즈할때 한권쯤 준비해도 좋을 것 같다.

난 낭만적인 비오는 날 우산 속의 뽀뽀도 좋을 것 같고,

언덕 위에, 까만 하늘 아래에서,

쏟아지는 별들을 바라보노라면,

뽀뽀를 하지않고서라도 두고 두고 황홀할 것 같다.

 

 

 

 

그림은 파스텔톤의 손톱달이 뜬 이런 분위기가 맘에 든다.

 

 

 

당근,

아이디어는 돌맹이를 하트로 표현한 게 가장 맘에 들고...ㅋ~.

그리고 잠든 여자의 사랑스런 눈썹 그늘과,

그 눈썹 그늘을 바라보는 남자의 그윽한 눈빛이,

뽀뽀가 없어도 가장 맘에 들었다.

(남자가 들고 있는 책이 분홍분홍*^^*하다.)

 

 

 

책은 '나는 기다립니다'와 '너에게 뽀뽀하고 싶어', 두권 다 참 예쁘고 좋았다.

하지만, 남동생네와 관련된...'폭력과의 전쟁'관련 에피소드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실적이나 성과 위주의 보여주기 식으로 끝나 버리지나 않을까 하고 우려하는 건 나혼자만 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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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2-09-28 11:09   좋아요 0 | URL
동생네 부녀의 일은 정말 웃지못할 에피소드네요.ㅠ
늘 풍성한 책 이야기, 독자로서의 찐한 사랑이 느껴지는 리뷰~ 언제나 좋아요!
명절 잘 지내시고 올해가 저물기 전에 한번 봐야지요.^^

2012-10-05 20:0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