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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인간
성석제 지음 / 창비 / 2014년 6월
평점 :
(타 블로그에 쓴 글을 가져왔습니다 http://blog.naver.com/yadohy6407/220086859328)
최근 본 책들의 표지에서 유독 한 작가의 그림을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김연수 소설가의 <밤은 노래한다>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비트겐슈타인의 조카>
- 피라미드
윌리엄 골딩 | 안지현 옮김
민음사 2013.10.04
윌리엄 골딩의 <피라미드>
- 의식
세스 노터봄 | 김영중 옮김
민음사 2014.05.09
세스 노터봄의 <의식>
- 인간 실격
다자이 오사무 | 김춘미 옮김
민음사 2004.05.15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
왜 에곤 쉴레일까? 쉴레의 그림이 책 판매에 도움이 줄 거란 생각은 별로 들지 않는다. 해골바가지에 피부를 덧씌운 것 같은... 그림의 첫 느낌은 <불쾌>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우리가 미술책이나 평소에 접했던 그림과 많이 다른데 그 차이의 본질은 무엇인가.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그림들이, 또 '명화'라고 불리는 과거에 그려졌던 그림들이 대상을 '아름답게' - 그래서 있는 그대로의 대상 이상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힘썼다면(앵그르의 <오달리스크>의 여인의 허리가 길게 그려진 것처럼) 쉴레의 그림은 이런 표현이 적절할 지 모르겠지만 '위추'(일부러 추하게)적으로 보일 만큼 대상을 적나라하게 표현한다. 하지만 사물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리얼리즘과는 다른 지향성이 쉴레의 그림에서 풍겨지는 독보적인 아우라를 형성한다. <밤은 노래한다>, <비트겐슈타인의 조카>, <피라미드>의 책 표지를 처음 봤을 때 '이거...'하고 쉴레의 그림이 아닐까 의심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독보적 아우라 때문이었다. 치명적 불온함, 포르노그래피의 적나라함과는 다른, 그렇다고 에로티즘의 언어로 해석하기도 애매한... 뼈와 살거죽!
그의 그림을 보면 <소외>와 <고독>이란 키워드가 떠오른다. 우리는 종종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는 상황에서 어떤 사건에 의해 '벌거벗겨진'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고 쓰곤 한다. 벌거벗겨짐. 상대방의 시선에서 느껴지는 맹목적 공격성과 이에 대응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방비 상태의 자신, 숨막힐 정도의 부끄러움/수치심 앞에서 우리는 쥐구멍을 찾는다. 그리고 문득 생각할 지도 모른다. '나는 나로부터 절대 도망갈 수 없구나' 아무리 자유로운 정신이라도 육체를 벗어날 수 없다. 글이나 음악, 미술 등에 정신을 옮겨놓거나 이식할 순 있지만 살아 있고 운동하는 정신은 인공지능을 제외하곤 육체를 토대로, 전제로 존재한다. 니체는 심신이원론, 정신과 육체를 분리해 사유하게 만든 소크라테스와 기독교를 거침 없이 비판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그 유명한 '신은 죽었다' 선언(서양정신사와 대결하고자 한 니체의 출사표라 볼 수 있다) 이후 유물론의 물결을 거쳐 다시 '신성의 회복'을 주장하고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 지구 반대편으로 하루나 이틀이면 갈 수 있고 이메일과 SNS 등을 통해 전 세계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게 된 오늘날 역설적으로 현대인이 호소하고 있는 감정은 '외로움'이다(SNS에 전시된 외로움을 보라!) 세계적인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자신의 '유동하는 근대'라는 사유 아래 현대사회는 '과잉'연결되어 있다고 분석, 지적하면서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 고독을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버지니아 울프가 여성인권을 말하면서 <자기만의 방>의 필요성을 역설했듯 현대인들은 자기 자신으로 생각하고 살기 위해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 스마트폰의 카카오톡도 경박한 토크쇼의 웃음소리BGM도 침략할 수 없는 자기만의 영토를 확보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불교가 현대인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고 생각한다. 선 수행, 명상 + 자연 ... (+차담) 청년출가학교에서 가장 좋았던 시간 중 하나가 '명상' 시간이었다. 기회가 된다면 미황사의 <참사랑의 향기> 프로그램도 참여해보고 싶다 ^^
민음사의 밀란 쿤데라 전집과 열린책들의 도스토예프스키 작품들을 보면 '커플'을 확인할 수 있다. 밀란 쿤데라 - 르네 마그리트, 도스토예프스키, 에드바르트 뭉크. 장르는 다르지만 영혼으로 통하고 공명하는 영혼의 단짝(들). 에곤 쉴레의 영혼의 단짝이 있다면 누가 있을까? 나는 프란츠 카프카에 한 표를 주고 싶다. 카프카와 쉴레. 살과 살이 아닌 뼈와 뼈를 맞대고 사랑할 것 같은 커플. 고독의 실존의 발명자들. 카프카의 대표작 <변신>과 <소송>을 읽어보지 않으신 분이라면 일독을 강력하게 권한다. 그리고 한 번 쉴레의 자화상을 멍하니 쳐다보길... 뭔가가 벗겨지고 처음엔 불편함과 불쾌함에 시달릴 지도 모르지만 이내 자유로움을 느낄 지도 모른다. 나같지 않은 나와의 어색한 조우. 잘 지냈지? 어색한 관계 사이에 인사법이다.
...
한 권이 추가됐다. 성석제의 투명인간. 고등학교 다닐 때 문제 푸는 걸 싫어해서 교과서에 나오는 작가/작품들을 포함한 한국문학을 알게 모르게 멀리 했다. 작가 성석제를 처음 알게 된 건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였던 것 같다. '신은 죽었다'는 문장을 직접 읽어보기 위해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보고(읽었다기보다) 있었기 때문에 성석제 작가가 니체를 패러디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기회에 고등학생들에게 두 가지만 말해주고 싶다. 1 고등학교에서 추천하는 추천책/필독서를 필히 읽지 말 것. 단테의 신곡부터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실천이성비판,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칼 마르크스 자본론 1,2... 나는 내 지적능력이 또래에 비해 떨어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권장'/'필독'도서를 꾸역꾸역 읽어야 했다. 그 결과 그 시간 동안 읽을 수 있었을 수많은 책들을 읽지 못하고 내 머릿 속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의미'에 대해 집착하는 경향이 그때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평균 500페이지가 넘는 무의미와 씨름해야 했던 불임의 독서의 후유증... 자기 수준에 맞는 책을 읽고, 좀 더 어려운 책을 읽고 싶으면 선생님을 찾아가라고 추천하고 싶다. 요즘엔 아트엔스터디, 다중지성의 정원, 수유너머, 시민행성 등 이용할 수 있는 질 좋은 인문학 콘텐츠가 많기 때문에 배우고자 하는 의지와 일정 수준의 경제력만 뒷받침된다면 혼자 헤매는 시간을 줄이면서 공부할 수 있을 것이다. 안광복 선생님 같은 분을 보니까 좋은 고등학교엔 '철학'교사가 있는 것 같던데 뭐, 대한민국도 언젠가 프랑스처럼 되는 날이 오겠지... 그때 가면 프랑스도 지금과 많이 달라지겠지만.
언제나 그렇듯 서론이 길었다. 에곤 쉴레에 대한 다른 글까지 끌어오면서 서론을 길게 '끈' 이유에 대해 고백하고자 한다. 그 동안 독후감은 대부분 책을 읽자마자 썼다. 세세한 줄거리까지 모두 기억나는 것은 책에서 마음으로 스며든 감정이 생생히 살아 있기 때문에 머리와 손이 달아올랐다. 한 번 쓰기 시작하면 A4 두 장 정도 분량은 거뜬히 채울 수 있었다. 그 자연스러운 배출에 제동을 걸고, 양보다 질을 추구해보잔 생각에 공백을 만들었다. 망각에 휩쓸리지 않고 남아 있는 것들을 선명하고 세세하게 복원해보자는 마음으로 알라딘 리뷰들을 써보았다. 결과는 생각보다 신통치 않았다. 공백기간을 말 그대로 비워두었다면 또 달라겠지만 그 시간 동안 다른 책을 읽고, 배우고 하는 '채움'의 시간을 거치면서 침전된 마음에서 순수한 결정을 보기가 쉽지 않았다. 사실 이렇게 '뜸'을 들이게 된 데에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이 컸다. 아마 이동진의 빨간책방에서 이동진 평론가가 인용한 말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하루키는 여행기를 여행지에서 쓰지 않는다고 한다. 여행지에서는 쓰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기 때문에, 돌아온 다음에 쓴다고 한다. 시간성을 획득한 기억, 마음의 결에 따른 자연스럽게 걸러지고 남은 것들에 대해 말하기. 접근방향은 좋았으나 구체적인 방법에 있어서 활용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 같다. 결정적으로 잠에서 깬 직후 '따끈따끈'한 상태로 글쓰기를 즐겼다는 마르케스의 말을 듣고, 독후감 쓰기를 즐기기 위해 차분함보다 따근함/뜨듯함을 즐기기로 마음을 고쳐 먹었다. ... 쉬운 사람
에곤 쉴레의 그림이 있는 표지와 제목을 보았을 때 예상한 내용은 카프카적 소외였다. 이를 테면 후기 자본주의 시대에 자본의 질서에 편입되지 못한 인간이 사회의 코드에 읽히지 않아 투명인간처럼 취급당한다는... 뻔한 생각. 투명인간을 읽고 든 생각은 이것이었다. 이 소설은 성석제만이 쓸 수 있다. 성석제 작가의 다른 작품을 읽어보지 못했지만 그의 스타일이나 장점에 대해 '곰곰생각하는발'님을 통해 들을 수 있었다. 키워드는 이랬다. 시골, 입말, 이야기꾼. 가독성이 뛰어났고, 묘사하는 대상의 이미지가 선명하게 그려졌다. 시냇물처럼 졸졸 흐르는 문장들의 달리기에서 가끔 냇물 바닥의 조약돌의 매끈매끈한 질감이나 반짝이는 윤슬(오호 내가 좋아하는 단어 ><) 같은 것이 느껴져서 지루하지 않았다.
만수. 만수를 한 마디로 정의내리자면 이랬다. 착한 사람. 혹은 바보. 내 아버지 세대 정도가 쓴 글에서 '착한 바보'에 대한 그리움을 토로하는 걸 종종 볼 수 있었다. 응답하라. 그 많던 착한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어디 가지 않았다. 시대가 변했다. 착한 사람들은 투명인간이 되었다. 조금 손해보더라도 착하게 사는 것을 선택한 바보들은 만수처럼 파산당했다. 생존경쟁이 흔해진 말이 보여주듯 약간의 손해가 아닌 생존 그 자체를 놓고 경쟁하는 사회 속에서 만수들은 온정주의에 빠져 과거를 그리워하고 현재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퇴행적 존재로 자연도태되었다. 투명인간, 그것은 조르조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homo sacer의 다른 이름이었다. 죽여도 처벌당하지 않고 희생물로 바칠 수 없는 벌거벗은 생명. 투명인간은 자본주의의 만신전에 희생물로 바칠 수 없는 잉여적 존재이며, 죽여도 처벌당하지 않는다. 우리는 2009년 투명인간들을 보았다. 자본주의의 수도가 되려는 꿈의 이미지로 가득 찬 서울의 한 복판에서 다섯 명이 경찰 공권력의 투입에 의해 죽었고, 그들의 장례식은 치뤄지지 않은 채 300일 넘게 순천의 냉동고에 보관되었다. 여기 사람이 있습니다, 인간 정체성의 승인을 요구해야 했던 절규의 건너편에는 인간과 인간 아닌 것을 나누는 정치/법 권력의 서슬 퍼런 기준이 존재하고 있었다. 사실 인간보다 '시민'이란 개념에 좀 더 가깝지만 무자비한 폭력 앞에 스스로 '인간'임을 말하고, 누군가에게 확인받아야 하는 상황은 '뼈와 살'이 인간의 충분조건이 더 이사 아님을 말해주고 있다. 뼈와 살 위에 어떤 사회적, 문화적 코드를 덧입어야 인간으로 해독되는 상황은 현대사회를 수용소라 설명한 아감벤의 규정이 대한민국의 입시체제를 설명하는 은유로서가 아니라 삶 전반에 '문자 그대로' 적용되는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네이버가 민음사가 후원하는 <열린연단> 첫 번째 강좌에서 인문학자 김우창은 이런 말을 남겼다. 착한 사람이 잘 사는 사회가 돼야 한다. 착하게 살기 위해 예수나 부처, 루터 급의 결단이 필요한 사회는 지속되기 힘들다.
조금 모자라도 이 사회에 온기를 불어넣어주고 웃음을 주고 빛이 되는 만수 같은 사람들이 더 많아지는 세상. 그런 마음을 가장 정확하게 보여준 시란 생각에 김종삼의 시 한 편을 남긴다.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시가 뭐냐고
나는 시인이 못 됨으로 잘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무교동과 종로와 명동과 남산과
서울역 앞을 걸었다.
저녁녘 남대문 시장 안에서
빈대떡을 먹을 때 생각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엄청난 고생 되어도
순하고 명랑하고맘 좋고 인정이
있으므로 슬기롭게 사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알파이고
고귀한 인류이고
영원한 광명이고
다름 아닌 시인이라고
김종삼,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