譯註 老子道德經注 - 노자도덕경주
왕필 지음, 김시천 옮김 / 전통문화연구회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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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자'라는 이름은 참으로 매력적이다. 서양에 '스피노자'가 있다면, 동양에는 '노자'가 있으며, 현대에는 '박노자'가 있다. 한결같이 시대의 반항아로 살아가며, 남들과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려한다. 이들 노자의 사상을 이해하는 것은 참으로 힘들다. 그중에서 동양의 '노자'는 가장 이해하기 힘들다. 그것은 노자를 만날 수 있는 '도덕경'이라는 책이 천의 얼굴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도덕경'해설서 중에서 김시천 교수의 '역주 노자도덕경주'를 골랐다. 팟캐스트 '학자들의 수다'에서 보여준 김시천 교수의 실력을 믿어 보기로 했다. 자, 노자를 통해서 또 다른 우리의 모습을 만나러 길을 떠나자.

 

1. 노자! 교육을 말하다.

  고전은 시대가 변해도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는 책이다. '도덕경'은 2천 여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견디며 오늘날에도 많은 혜안을 주고 있다. 물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듯이, 도덕경이라는 거울은 우리의 교육에 어떤 통찰을 주고 있을까?

  많은 학생들이 선행학습을 한다. 예습과 선행학습은 엄연히 다르다. 예습은 다음날 배울 것을 간단히 살펴보는 공부라면, 선행학습은 1년전에 혹은 6개월전에 한과목을 미리 배우는 것이다. 선행학습에 대해서 노자는 어떻게 생각할까? 

 

"전식자 지화이우지시(前識者 道之華而愚之始 )"

미리 안다는 것은 도의 허황된 꽃이요 어리석음의 시작이다.

 

  미리안다는 것! 선행학습은 학생들에게 허황된 꽃이며, 어리석음을 불러 일으키는 시작이다. 이미 모든 것을 알기에 수업에 참여할 흥미를 떨어뜨린다. 수업시간에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 잠을 자는 경우가 있다. 이미 학원에서 선행학습을 했는데, 이미 다아는 것인데, 왜? 또 공부를해야하느냐며 잠을 청하기도 한다. 교과서 진도를 빨리 나가면 실력도 타인보다 앞서 간다는 착각 속에서 살고 있는 학부모와 학생들이 많다. 그러나 노자는 말한다. 선행학습은 겉모습만 화려한 꽃이며, 참다운 공부의 질을 떨어뜨리는 어리석음이라고....

  노자가 한국에 온다면 한국 어머니에게 해줄말은 무엇일까? 자녀를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우리이의 어머니에게 아마도 이러한 말을 했을 것이다.

 

 "생이불유 위이불시 장시부재 시이현덕 (生而不有, 爲而不恃, 長而不宰, 是謂玄德)"

   낳으면서 가지지 않고, 하되 의지하지 않으며, 자라게 하되 다스리지 않으니 이것을 일컬어 '신묘한 덕'이라 한다.

 

  과거 우리 부모들은 자녀를 노후연금으로 생각했다. 자녀를 자신과 동일시하고 자녀를 위해서 희생을 하면 노후에 자녀가 자신에게 효도하리라 생각한다. 이러한 아집은 집착과 소유욕으로 이어진다. 자녀를 자신의 '아바타'로 생각하고 자녀가 자신의 꿈을 대신 이뤄주길 바란다. 자녀의 꿈보다는, 자녀의 행복보다는 타인에게 자랑할 수 있는 직업과 학력을 가진 자신의 아바타가 되어주길 바란다. 내가 낳았으니, 자녀는 나의 소유라는 이기적인 생각은 자녀에게는 그 무엇보다 강력한 폭력이다. 노자는 말한다. 한국의 학부모여! 자식을 낳았으되, 소유하려하지말라! 자녀를 길렀으되 자녀에게 의지하려하지 말라, 자녀의 올바른 성장을 바란다면 자녀가 하고 싶은 일을 부모가정하지 말고 자녀가 결정하게하라! 이러한 양육방법을 오묘한 덕이라한다. 진로문제로 자신의 집에 불을 질러 아버지를 죽였다는 기사가 우리를 놀라게했던 적이 있다. 자녀를 소유하고 의지하고 다스리려한다면, 자녀가 부모의 노예가 되던지, 부모가 자녀의 희생물이 될 수도있다.

  노자가 우리 학교를 방문해서, 보통의 교장들의 모습을 본다면 어떠한 말을 해줄까? 초빙교장, 응모교장들이 자신의 치적을 쌓기 위해서 각종 사업을 벌이는 모습을 보면서 노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민지난치 이기상지유위 시이난치(民之難治, 以其上之有爲, 是以難治)"

  백성을 다스리기 어려운 것은 윗사람들이 무언가 하는 게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스리기 어려운 것이다.

 

  대전의 어느 학교에서 교육청에 민원이 들어왔다. 교장이 자신의 치적을 쌓기 위해서 연구학교를 신청했다. 그런데, 교사의 찬성율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재투표를 했고, 그래도 찬성율이 저조하자, 교무부장이 이를 조작했단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그 학교만의 일이 아니다. 내가 보아왔던 많은 학교에서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찬성율이 나오면 재투표를 했고, 투표를 하기 전에는 "선생님들은 아무일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승진을 하셔야하는 주변의 선생님을 위해서 부디 찬성표를 던져주세요"라는 멘트를 넣는다. 정에 약한 한국사회에서 승진에 목을 메며 일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서 찬성표를 던진다. 그리고 그결과는 비참하다. 보여주기 위한 행정이 시작된다. 학생과 상담하며 알찬 수업준비를 하기 위해서 쏟아야할 시간을 보여주기 위한 행정에 소비해야한다. 가득이나 바쁜 학교생활이 더욱 바빠지고, 그 스트래스는 자연스럽게 학교 구성원들 모두에게 퍼지게된다. 서로 이해하고 넘어갈 일도, 신경질적으로 대하며 분쟁을 일으키기도 한다. 서로 이해하며 몸이 아파서 병가를 쓴 선생님의 교실에 누가 들어갈 것인지를 두고 신경질을 부린다. 나도 힘들고 시간이 부족하기에 남을 돌볼 여유가 없다. 이러한 우리의 학교 현장을 보며 노자는 말한다. "교사와 학생이 힘들어하고 그들을 조화롭게 만들지 못하는 것은 교장과 교감이라는 관리자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일을 만들기 때문이다. 교육의 핵심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일들을 만들기 때문에 다스리기 어려운 것이다."

  "그렇다면, 노담 선생님(노자) 힘든 학교생활은 어떻게 해나가야하나요"라고 내가 묻는다면, 노자는 어찌 답할까?

 

 " 이성인상민, 필이언지하, 선민, 필이신후지(是以聖人欲上民, 必以言下之, 欲先民, 必以身後之)"

  이 때문에 성인은 백성 위에 있고자 할 때에는 반드시 그 말을 낮추고, 백성 앞에 서고자 할 때는 반드시 그 몸을 뒤로 물린다.

 "자현자불명 자시자불창(自見者不明 自是者不彰) 자벌자무공 자긍자 불장(自伐者無功 自矜者 不長)"

  스스로 드러내는 자는 밝지 않고, 스스로 옳다고 하는 자는 드러나지 않고, 스스로 뽐내는 자는 공이 없고, 스스로 자랑하는 자는 오래가지 못한다.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하며 큰소리를 치는 사람은 별로 무섭지 않다. 가장 무서운 사람은 녹음기를 들고와서 자신이 필요한 질문을 차근차근하면서 논리적으로 사건을 따져들어가는 사람이다. 그는 당장의 화풀이 보다는 법적으로 상대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자신의 화를 감추고 얼굴에는 미소를 띈다. 가장 무서운 관리자는 폭력적, 강압적으로 교사와 학생을 짓누르는자가 아니다. 자신을 낮추며 그들을 앞세우고 자신을 뒤로 물리는 자이다. 폭력적 관리자는 민원을 제기하고 법적으로 그를 상대하면 된다. 그러나 자신을 낮추는 관리자는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기에 함부로 대할 수 없다. 내가 경험했던 000 교감이 있다. 겉보기에도 유약해보이고 겸손했다. 선생님이 타주는 커피를 받아들고도 다른 선생님들은 커피를 마셨냐며 자신의 커피를 주려하였다. 큰일을 결정할 때는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듣지만, 일단 결정이 되면 그 어떤 반발에도 굴하지 않는다. 자기 것을 취하지 않고 주변의 사람들에게 먼저 베풀었기에 주변의 사람들이 자신을 먼저 챙겨주었고, 결과적으로 자신이 가장 많은 것을 얻었다고 그는 자주 말한다. 노자는 말한다. 사회생활을 현명하게 하고자한다면, 아랫사람들 대할 때 자신의 말과 행동을 낮추라, 그들을 이끌고 가고 싶다면 그들 뒤에서라! 가기 싫어하는 소를 억지로 앞에서 끌고 가기 보다는 그 소와 친구가 되어 뒤에서 소를 몰고가라! 자신의 공을 자랑하지 말고, 스스로 뽐내지 말고, 스스로 자랑하지 말자! 그러면 남이 먼저 나를 알아줄 것이다.

  노자가 우리의 교실에 들어와서 변화하고자하는 교사에게 어떠한 조언을 해줄까? 4차 산업혁명을 준비해야하는 학생들을 어떻게 기를 것인가? 그들에게 어떠한 수업을 해야할까?

 

  "대백약욕 광덕부족 건덕투 질진약투(大白若辱 廣德若不足 建德若偸 質眞若渝)"

   매우 흰 것은 마치 욕된 듯하고, 넓은 덕은 마치 부족한 듯하고, 확고 부동한 덕은 야박한 것 같고, 질박한 참됨은 마치 더러운 듯하다.

 

  1타 강사들이 학원가를 휩쓸고 있다. 최태성, 설민석을 비롯한 많은 스타강사를 보면서, 나도 저들처럼 수업을 하려했다. 나름 강의식 수업에는 일가를 이루었다. 그런데, 나의 확고 부동한 강의식 수업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대결에서 이세돌이 승리했다. 더 이상 암기를 많이 시키는 수업은 새로운 인재를 키워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깨달았다. 변화해야한다. 변화해야한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사회, 우리 교육이 변화해야한다고 외치고 있다. 그러나 막상 변화하고 있지 못하다. 새로운 시대를 대비할 수 있는 교육을 하기 위해서 우리 교사에게 노자는 무어라 말해줄까? 매우 흰 것은 마치 욕된 듯하다. 넓은 덕은 마치 부족한 듯하다. 확고 부동한 덕은 야박한 것 같다. 질박한 참됨은 마치 더러운 듯하다. 좋은 수업은 서툰듯하다. 교사가 모든 것을 학생에게 알려주는 수업은 완벽한 수업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헛된 수업일 뿐이다. 참된 앎을 전해주고 싶다면, 마치 서툰듯, 비어 있는듯 수업을 해야한다. 교사는 가만이 있지만, 학생들은 바삐 움직이며 배움을 터득해간다. 학생이 스스로 친구들을 가르치고 배워간다. 교실에서 교사는 마치 한가히 노는 백조인 듯 하다. 요즘, 강조하는 학생 중심 수업을 실행하라.

  학생들에게 성적문제, 이성문제 등등 수많은 고민거리가 있지만,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가장 큰 고민거리는 자신의 진로문제이다. 자신의 꿈을 찾지 못해서 고민하는 학생, 자신의 성적으로는 자신이 가고 싶은 학과에 진학할 수 없기에 꿈을 바꾸어야할지 고민학는 학생들이 많다. 노자가 진로를 고민하는 우리 학생들에게 다가가 무엇이라 말할까?

 

  "천하난사, 필작어이 천하대사 필작어세 이성인, 불위대, 고능성기대 (天下難事, 必作於易, 天下大事, 必作於細,  是以聖人 終不爲大 故能成其大)"

 천하의 어려운 일은 반드시 쉬운 일에서 시작되고 천하의 큰일은 반드시 작은 일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성인은 끝내 큰일을 행하지 않으니 그 때문에 그 위대함을 이룰 수 있다.

 

  거대한 자신의 꿈을 이루고 싶지만, 현실은 너무도 초라하다. 태산앞에 자신의 위치는 너무도 낮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 무모한 도전을 할 것인가? 큰꿈을 가지라 했기에 무조건 큰 꿈을 갖고 있을 것인가를 고민한다. 이들 학생들에게 노자는 조언한다. 천하의 어려운 일은 반드시 쉬운 일에서 시작된다. 천하의 큰일은 반드시 작은 일에서 시작된다. 태산을 오르기 위해서는 자신의 작은 발걸음을 내딛는 것에서 부터 시작한다. 함부로 태산을 한걸음에 오르려하지 않는다. 그래서 성인은 끝내 큰일을 행하지 않으니 그 때문에 태산을 오르는 위대함을 이룰 수 있다.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신이 지금 내딛어야하는 작은 걸음을 시작하자. 자신의 꿈을 아직 찾지 못했다면, 자신의 꿈을 찾기 위해서 서점을 찾아가는 작은 일부터 시작하자. 천하의 어려운 일도, 천하의 큰일도 작고 세세한 것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2. 노자! 한국사회를 말하다.

  노자선생이 대한민국에 온다면 우리에게 어떠한 말들을 해줄까? 노자를 초대해서 그의 말을 들어보자. 뒤엉킨 실타래처럼 풀리지 않는 우리 현실을 노자의 눈을 통해서 바라보자.

  노회찬이 갔다. 대한민국 사람들이 가고 싶어하지만, 너무도 두려운 존재 삼성을 상대로 굴하지 않았으며, 503호 공주님과 맞짱을 뜨며 약자의 편에서서, 노동자의 편에서서 일생을 살아온 사람이다. 그렇게 강한 사람이 드루킹 사건에서 불거진 선거자금 문제에 너무도 힘없이 자신의 목숨을 끊었다. 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强行者有志(강행자유지) 不失其所者久(불실기소자구) 死而不亡者壽(사이불망자수)"

  힘써 행하는 사람은 뜻이 있으며, 제자리를 잃지 않는 사람은 오래가고, 죽어서도 잊히지 않는 사람은 오래 산다.

 

  노회찬은 명문 고등학교를 다니면서도 유신에 반대하고 민주주의를 외쳤다. 여러 책들을 읽으며 진리를 얻고자했다. 한국의 명문대학을 나오고서도 노동자로 살아가기 위해서 용접을 배웠다. 자신의 삶을 힘써행하는 그의 모습에는 뜻이 있었으며, 노동자를 위한 삶을 버리지 않은 그는 서민을 위한 정치인으로 오래 우리 곁에 있었다. 그러나, 그리도 강해보이는 그가, 자신의 티끌 같은 오점을 용서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허공속에 내던졌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정치적으로 반대편에 서있었던 사람도 그를 위해서 눈물을 흘렸다. 그의 삶은 노무현의 삶과 오버랩된다. 약자를 위해서, 약자를 위한 정의를 만들기 위해서 시대와 정면대결했던 그들의 삶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다. 그들은 죽었지만, 그들은 우리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있다. 그래서 노자는 말한다. '죽어서도 잊히지 않는 사람은 오래 산다.' 노회찬은 우리 가슴속의 밀알이 되어 영원히 우리곁에 살아갈 것이다.

 

  "부유병, 시이불(聖人不病, 以其病病, 是以不病) 성인, 이기병, 시이불병(聖人不病, 以其病病, 是以不病)"

  대저 오로지 병을 병으로 여기는 까닭에 병이 되지 않는 것이다. 성인이 병폐가 없는 것은 그 병을 병으로 여기는 까닭에 병이 되지 않는 것이다.

 

  이땅의 진보세력은 자신의 허물을 용납하지 않는다. 아니, 그를 지켜보는 우리들이 그것을 강요한 측면도 강하다. 몇백억을 집어삼키고서도 뻔뻔하게 잘도살아가는 사람이, 노무현이 자살했을 때 '사람이 마음이 약해서..'라고 말하며 혀를 찼단다. 그들에게는 돈 얼마 받아먹은 것이 전혀 허물이 되지 않는가 보다. 결국 그들의 허물이 쌓여서 적폐가 되었다. 이 땅의 진보세력들은 자신의 병폐를 병으로 여긴다. 병폐를 병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는 더 이상 진보세력이 아니다. 여기에서 진보세력의 딜레마가 시작된다. 진보세력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병폐를 병폐로 여기고 이를 용납하지 않아야한다. 그러기에 진보세력에게는 가장 강력한 도덕적 완결성을 요구한다. 이로인해서 진보세력의 거두들이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끊는다. 병폐가 적폐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도덕적 완결성을 요구할 것인가? 아니면, 어느 정도의 도덕적 흠을 용납해야할까? 이 풀기 어려운 딜레마 속에서도 나는 믿는다. 이 땅의 진보세력이 언제까지나 약자의 편에서서 모두를 위한 사회를 만들려 노력하리라는 사실을.... 도덕경 20장은 고 노회찬의 마음을 노래하는 것 같다.

 

"荒兮 其未央哉. 衆人熙熙 如享太牢 如春登臺 황혜 기미앙재. 중인희희 여향태뢰 여춘등대 

我獨泊兮 其未兆 如嬰兒之未孩 儽儽兮 若無所歸 衆人皆有餘 而我獨若遺 아독박혜 기미조 여영아지미해 래래혜 약무소귀 중인개유여 이아독약유 

我愚人之心也哉 沌沌兮 俗人昭昭 我獨昏昏 俗人察察 我獨悶悶 아우인지심야재 돈돈혜 속인소소 아독혼혼 속인찰찰 아독민민 

澹兮 其若海 飂兮 若無止 衆人皆有以 而我獨頑似鄙 담혜 기약해 요혜 약무지 중인개유이 이아독완사비 

我獨異於人 而貴食母 아독이어인 이귀식모"

 

황량한 모습이 텅 빈 곳에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는 듯하다.

뭇사람들이 희희낙락하며 큰 소를 잡아 잔치를 벌이는 것 같고, 봄날 누각에 오르는 것 같다.

나 홀로 담박하여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은 모습이 아직 웃을 줄 모르는 갓난아기 같으며,

몹시 지친 모습이 돌아갈 곳이 없는 것 같네

뭇사람은 모두 남음이 있는데 나홀로 잃어벌니 듯하니

나는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이로구나.

혼돈스럽다.

세간의 사람들은 똑똑한데 나홀로 흐리멍덩하고

세상 사람들은 자롣 살피는데, 나홀로 어리석도다.

담담하여 바다 같고, 고고하여 그칠 줄을 모르는 듯하네,

뭇사람들은 모두 쓸모가 있는데, 나홀로 완고하고 비루하다.

나홀로 다른 사람과 다르고자 하여 만물을 먹이는 어미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지난 이명박근혜 정권을 살면서 가장 두려웠던 것이 우리 사회가 전체주의로 회귀하는 일이었다. 이명박근혜 정권에 대해서 비판하려하면 좌빨로 바라보는 노년세대들의 모습을 보면서, 정치 이야기를 싫어하는 주변인들을 바라보며, 우리사회에 우경화를 걱정했다. 노자는 이명박근혜 정권을 보면서 이러한 말을 했을 것이다.

 

  "天下  皆知美之爲美  斯惡已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천하  개지미지위미  사오이  개지선지위선  사불선이)

   故  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形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고  유무상생  난이상성  장단상형  고하상경  음성상화  전후상수)"

  천하가 모두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여길 줄 아는데 이것은 추한 것이다. 천하가 모두 선한 것을 선하다고 여길 줄 아는데 이것은 선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있음과 없음은 서로 낳고 쉬움과 어려움은 서로 이루어주고, 긺과 짧음은 서로 비교되고, 높음과 낮음은 서로 기울며, 음악소리와 노랫소리는 서로 어울리고, 앞과 뒤는 서로 따른다.

 

  모두가 좋아하고 절대다수가 사랑하는 사회에서는 히틀러가 총통이 될 수 있는 사회이다. 나와 다름을 인정하기 않기에, 아름다움만이 존재해야한다는 믿음이 지배하기에, 나와 다른 유대인과 아름답지 않은 장애자들을 죽였다. 노자는 모두가 Yes할때 No를 외칠 수 있는 용기를 우리에게 주문하고 있다. 그러나 모두가 Yes할때, No를 외치기는 너무도 힘들다. 폭력으로 No를 외치지 못하게 만들기도하고, 사회 분위기가 No를 금기시하기도한다. 획일적인 아름다움이 지배하는 사회는 더 이상 아름답지 않다. 세상을 아름답게하기 위해서라도 추함과 아름다움은 조화를 이뤄야한다. 2000년전 노자는 서양보다 먼저 똘래랑스를 알고 있었다.

  취직이 잘되지 않고, 그래서 연애와 결혼을 포기하는 젊은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들중에는 비트코인에 빠져서 대학 등록금을 날린 대학생들도 있다. 이들에게 노자는 어떠한 말을 할까?

 

  " 不貴難得之貨  使民不爲盜  不見可欲  使民心不亂(부귀난득지화  사민불위도  불견가욕  사민심불란)"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하게 여기지 말아 백성들이 도둑이 되지 않게 하라. 욕심낼 만한 것을 보이지 말아 백성들의 마음이 어지러워지지 않게 하라.

 

  일확천금을 얻으려 대학등록금을 날린 젊은이들은 정부를 탓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기 보다는 이를 정권탓으로 돌린다. 그렇게하면 일시적 위안은 느낄 수 있다. 마치 자신의 누명을 인정하고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아Q'처럼....위정자라면,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하게 여기지 않도록 하여, 땀흘려 일하기 보다는 한탕으로 부자가 되려하지 않게 해야한다. 투기성 비트코인을 보다 일찍 규제하여, 투명하고 안전하게 만들고, 비트코인의 위험성을 젊은이들에게 알려야했다. 그리고 젊은이들이 새로운 창조적인 도전을 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야한다.

  요즘 플라스틱 빨대를 사용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코에 플라스틱 빨대가 박힌 바닷거북을 보면서 인간의 편리함이 자연을 얼마나 고통스럽게 만드는지를 알았다. 그래서 노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天下萬物生於有 有生於無'(천하만물어유 유생어무 )"

  천하의 만물은 유에서 생겨나고 유는 무에서 생겨난다.

 

  천하의 모든 것들은 있음에서 생겨나는데 있음이 시작되는 곳에서는 없음을 근본으로 삼는다. 석유라는 유에서 플라스틱이라는 있음이 생겨났다. 그렇다면 마땅히 플라스틱은 없음으로 돌아가야한다. 그래야만 천하만물이 순환하며 자연이 조화를 이룰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만든 플라스틱은 없음으로 돌아가지 않거나, 돌아가는 시간이 너무도 길다. 있음을 위해서 없음으로 돌아가야한다는 자연의 이치를 인간이 만든 플라스특은 거스르고 있다. 반면 질그릇은 진흙이라는 있음에서 탄생했으나, 다시 없음으로 돌아간다. 있음을 위해서라도 없으로 돌려보내야한다. 없음으로 돌아가지 않는 있음은 만들어서는 안된다. 비단 플라스틱만이 아니다. 핵발전소를 비롯한 수많은 있음들은 없음으로 돌아가지 않아 자연을 위협시키고 있다. 있음은 없음을 근본으로 삼아야한다는 노자의 말에 인간이여 귀를 기울여 조시오....

 

3. 노자! 정치를 말하다.

  노자라는 책이 제왕학의 교재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노자와 법가가 결합하여 '황로학'이 성립한다. '황로학'은 중국 한나라 시기에 경제때에 중국 황제들에 의해서 번성했다. 어떤이는 도덕경을 병법서라고 말한다. 도덕경에는 병법에서나 볼법한 글귀들이 많이 있다. 노자가 말하는 정치학을 만나보자.

 

 

  "重爲輕根 靜爲躁君(중위경근 정위조군)"

 

  "奈何萬乘之主 而以身輕天下(내하만승지주 이이신경천하)

   輕則失本 躁則失君(경즉실본 조즉실군)"

  무거움은 가벼움의 근본이 되고, 고요함은 조급함의 군주가 된다.

  전차 만대를 부리는 주인이면서 어찌 그 몸을 천하에 가볍게 처신하겠는가. 가볍게 처신하면 근본을 잃게 되고 조급히 굴면 군주의 지위를 잃게 된다.

 

  진정 정치를 하는자는 신중하고 냉철해야한다 한비자 '망정'편을 보는 듯하다. 군주가 신중하지 않고 가볍게 처신을 한다면, 근본을 잃게 되고 심지어는 군주의 지위를 잃게 될 수도 있다. 항상 신중하게 자신의 권위를 사용해야한다. 그 권위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군주를 4등급으로 분류할 수 있다. 도덕경 17장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太上 下知有之 其次 親而譽之 其次 畏之 其次 侮之(태상 부지유지 기차 친이예지 기차 외지 기차 모지)"

  대인이 윗자리에 앉아 다스릴 때에는 아래 백성들이 그가 있다는 것만 알 뿐이며, 그 다음 사람은 그를 친하게 여기고 기리게 하며, 그 다음 사람은 그를 두려워하게 하며, 그 다음 사람은 그를 모멸한다.

 

  이를 역사와 관련지어 설명해보자. 군주가 윗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만을 알 정도 정치를 잘하는 단계(下知有之)에는 중국 전설상의 임금인 요임금과 순임금을 들 수 있다. 그다음 그를 친하게 여기고 예찬하는 단계(親而譽之)는 우리나라 세종과 정조 대왕을 예로 들수 있다. 임금을 두려워하 단계(畏之)는 연산군을 들 수 있다. 인조반정 전의 신하들은 연산군이 두려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불만이 가득찼고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왕의 주변을 떠나거나 반정군의 편에 들어섰다. 마지막으로 임금을 모멸하는 단계(侮之)는 인조를 들 수 있다. 두번씩이나 수도를 버리고 도망간 무능한 왕이다. 자신의 못남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아들을 독살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군주는 칭찬을 받기 보다는 두려운 존재가 되어야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노자는 두렵고 멸시받는 군주를 최하등급으로 두고, 무위의 통치자와 유능함으로 다스림으로써 사랑받는 통치자를 가장 윗자리에 두었다. 503호의 국정농단을 겪으면서 한국의 대통령들은 두렵우면서도 경멸을 받는 존재인지, 사랑받는 존재인지를 생각해본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이란 "전쟁은 나의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 적에게 굴복을 강요하는 폭력 행위다."라고 말했다. 전쟁은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기 위한 정치의 연장선이다. 그렇다면, 노자가 말하는 전쟁론을 살펴보자.

 

  "不以兵强天下 其事好還 師之所處 荊棘生焉(불이병강천하  기사호환 사지소처 형극생언)"

  군사로 천하에 강자 노릇하지 않으니, 그런일을 되돌리기를 좋아한다. 군대가 머물던 자리에는 가시덤불만 돋아닌다.

 

  전쟁을 모르는 자들이 전쟁을 쉽게 생각한다는 말이 있다. 과거 이명박 정권에서 NSC가 열렸는데, 군필자가 국방부장관 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유명하다. 전쟁을 모를 수록, 군을 모를 수록 전쟁을 쉽게 말한다. 손자병법에도 가장 좋은 방법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방법이라했으며, 전쟁은 신중해야한다고 말했다. 그런점에서 노자는 정쟁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전쟁이 임할때는 당연히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善爲士者不武 善戰者不怒 善勝敵者不與 善用人者爲之下(선위사자불무 선전자불노 선승적자불여 선용인자위지하)"

  장수 노릇을 잘하는 자는 무용을 뽐내지 않고 싸움을 잘하는 자는 분노하지 않고 적을 잘 이기는 자는 함께 다투지 않고, 남을 잘 부리는 자는 자신을 낮춘다.

 

  싸움에서 진정 중요한 것은 평정심을 잃지 않는 것이다. 전쟁은 국가의 존망이 걸린 중요한일이다. 평정심을 잃지 않고 신중을 기해야만이 패하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가장 잘 싸우는자는 분노하지 않고 적과 함께 다투지 않는다. 외교로, 경제를 무기로 적을 제압하며, 최후의 수단으로 전쟁을 사용한다. 트럼프가 오바마처럼 싸드를 비롯한 무기로 중국을 압박하기 보다는 경제로서 압박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노자가 생각하는 국제질서는 무엇일까? 그가 생각하는 대국은 어떠한 면모를 가지고 있어야할까? 도덕경 61장에는 노자가 생각하는 국제질서의 단초가 있다.

 

  "大國者下流 天下之交 天下之牝 牝常以靜勝牡 以靜爲下(대국자하류 천하지교 천하지빈 빈상이정승모 이정위하)

  故大國以下小國 則取小國 小國以下大國 則取大國(고대국이하소국 즉취소국 소국이하대국 즉취대국)

  故或下以取 或下而取 大國不過欲兼畜人(고혹하이취 혹하이취 대국불과욕겸축인)

  小國不過欲入事人 夫兩者各得所欲 大者宜爲下(소국불과욕입사인  부양자각득소욕 대자의위하)"

  큰 나라는 강과 바다처럼 아래쪽에 처하니 천하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요. 천하 사람들이 돌아오는 암컷이다. 암컷은 늘 고요함으로 수컷을 이기고 고요함으로 아래가 된다. 그러므로 큰 나라로서 작은 나라 아래에 처하면 작은 나라를 취하고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 아래에 처하면 큰 나라에게 취해지니 그러므로 어던 경우는 아래에 처하여 취하고 어떤 경우는 아래에 처하여 취해지는데 큰 나라는 다른 사람들을 다 거느리기를 바랄 뿐이고, 작은 나라는 다른 사람밑에 들어가 섬기기를 바랄 뿐이다. 큰 나라와 작은 나라 둘이 각자 바라는 것을 얻을 수 있다면 큰 나라는 마땅히 아래에 처해야한다.

 

  도덕경 61장은 '조공 책봉'이라는 동아시아 외교 질서를 상정해 놓은 듯하다. 주나라의 봉건제도가 무너져 내려가던 시기에 살았던 노자의 머릿속에는 큰나라가 작은 나라를 불러 회맹을 맺고 작은 나라들이 이에 순종하는 속에서 이루어지는 평화를 현실적인 대안으로 생각한듯하다. '조공 책봉'이라는 동아시아 외교 질서가 무너진 지금, 중국이 걸어야할 바람직한 외교질서는 무엇일까? 바로 도덕경 61장에 있다. 큰 나라는 강과 바다처럼 낮은 곳에 임하여 천하의 모든 것들이 모여들 수 있도록 아량을 베풀어야한다. 대국굴기를 하려는 중국은 야심차게 일대일로를 추진하고 있다. 차이나머니를 앞세워 주변국들에게 각종 투자를 하는듯하지만, 그 과실은 중국이 가져가고 주변국들은 중국의 경제치투에 신음하고 있다. '도광양회'하면서 미국의 발톱을 피해가던 중국이 이제는 대국굴기를 외치며 세계로 폭주하고 있다. 중국은 노자의 말에 귀기울여야한다. 대국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낮추고 천하 사람들이 모여들 수 있도록 그들을 품어야한다. 지금의 폭주하는 중국의 모습은 약소국에게는 모멸의 시선을 받고,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이라는 경제적, 군사적 견제를 불러 일어킨다.

 

4. 역주 노자도덕경주를 말하다.

  김시천은 노자를 전공한 학자이다. 그의 '도덕경'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가 번역한 '역주 노자도덕경주'에 대해서 몇마디 할말이 있다.

  첫째, 김시천은 지나치게 바그너의 학설을 따른다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외국 학자들의 '도덕경' 관련 서적을 많이 본 김시천은 외국 학자들의 학설을 많이 받아들였다. 외국학자들의 주장이 나름의 타당성이 있어 받아들인 것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외국학자들 중에서 특히 바그너의 주장을 많이 따르고 있는 점은 약간 불편한 느낌을 준다. 도덕경 23장 " 德者 同於德(덕자 동어덕)"이라는 문장은 하상공본과 왕필본 도덕경에 모두 실려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바그너가 왕필 주문에 있는 내용을 근거로 '덕'을 '득'으로 고쳐서 '者 同於得(득자 동어득)"으로 수정하였다. 왕필본과 하상공본에 똑같은 내용이 전해지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수정한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 행동이다.

   둘째, 주문을 근거로 본문을 고친 것도 이해할 수 없다. 도덕경 34장 "萬物歸焉而不爲主(만물귀언이불위주) 可名爲大 (가명위대)"를  "萬物歸之而不於主(만물귀지이불어주) 可名爲大 (가명위대)"로 수정한 것이 대표적이 예이다. 저본의 '언'을 주문의 '귀지'에 근거하여 '지'로 수정했다. 이번에도 바그너의 주장을 따른예이다. '위'를 '어'로 수정하 것은 앞의 문장과 짝을 이루기 위해서 수정했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없다.

  김시천의 해석에 대한 불만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왕필의 해석에도 이해가지 않는 부분이 있다. 도덕경 57장에 "民多利器 國家滋昏(민다리기 국가자혼, 백성에게 이로운 기물이 많으면 국가는 더욱 혼란해진다.)"를 왕필주에는 "백성이 강하면 국가는 약해진다."라고 적어 놓았다. 백성이 강해지면 국가가 약해진다는 말은 현대사회에는 어울리지 않는 설명이며, 노자를 바르게 해설한 것도 아니라고 판단된다. 백성이 이로운 것만 추구하면 국가가 혼란해진다.라는 뜻으로 해설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일 것이다. 백성이 자신의 이로운 것만을 추구하다가 국가에 해를 끼친사례는 비트코인 사태를 들 수 있다. 단기적 이익을 쫓다가 개인은 물론, 국가와 사회에도 해독을 끼쳤으니 말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서 내 나름의 해석도 해보았다. 도덕경 27장에 "常善救物 故無棄物

(상선구물 고무기물, 늘 만물을 잘 구하는 가닭에 버려지는 물건이 없으니)"라는 문장을, 항상 물건을 잘 구하기에 그래서 버려지는 물건이 없다. 즉, 한번 물건을 살 때, 제대로 된 물건을 장만했기에 벌빌 물것이 없다. 로 해석했다. 어떤가? 괜찬은가??

 

 

  노자를 읽으면서 20여년전 도올 김용옥 선생이 TV에 나와 했던 강의가 새록새록 기억난다. 그의 강의를 들으며 도덕경이 이렇게 재미있고 쉬울 수 있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만약, 그때 '도덕경'을 사서 원문을 공부하며 강의를 들었다면 얼마나 많은 깨달음을 얻었을까? 아쉬움이 밀려온다. 그러나, 그때는 너무도 고민이 많았다. 대학을 다니며, 앞으로 먹고살 걱정을 해야했다. 사랑을 생각하며 가슴아파하기도 했다. 이제 다시한번 만나게된 '도덕경'은 그 시간 동안 성숙한 나에게 깊은 감동과 깨달음을 주고 있다. 먼 훗날, 도덕경을 다시 만난다면 그때는 무르익은 내가 도덕경의 감동을 더욱 진하게 느낄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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