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 같은 반 친구 중에 수업시간에 꼭 손을 들고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하는 놈이 있었다. 그 녀석은 수업시간에 화장실에 가서 변기에 앉아서 볼일을 보면서 생라면을 부셔 먹었다. 그래서 그 녀석 별명이 멀티였다. 야이 새끼야 왜 똥 싸면서 생라면을 먹고 그래 더럽게.


그 녀석은 모두가 수업을 들을 때 혼자서 자유를 느끼는 순간이 바로 변기에 앉아서 생라면을 먹는 순간이라고 했다. 더럽다고 하지만 그저 따로 할 뿐이지 누구나 다 똥 싸고 밥 먹잖아. 나는 그걸 동시에 하는 것뿐이야. 동시에 먹으면 시간도 절약되고 말이지. 게다가 묘한 쾌감 같은 게 느껴진다고 했다.


이런 변태 새끼. 그 녀석은 변태 새끼라는 말을 들어도 낄낄거리며 너도 한 번 그런 쾌감을 느껴봐라 중독되면 계속하게 돼.


그 녀석은 합기도 3단으로 운동을 아주 좋아하는 녀석이었다. 몸도 좋고 운동이라면 다 잘하는 그런 부류의 녀석이었다. 그런데 그 녀석은 겁이 참 많았다. 사람은 겁내지 않았는데 귀신같은 초자연, 초현실 같은 것에 겁을 먹었다.


자율학습시간에 녀석이 내 자리 앞에 앉았다. 어쩌다 보니 그 녀석에게 호러 이야기를 하나 해주었다. 가출해서 바닷가의 한 여인숙에서 한 방에 지내게 된 여자의 이야기. 물론 막 지어내서 했다. 폭우가 내려 숙박시설이 만실이어서 비가 그칠 때까지 한 여자와 작은 여인숙의 한 방에 잠시 같이 있게 되었다.


그 여자는 큰 가방을 가지고 다녔는데 여자가 음료를 사러 밖으로 나간 사이에 같이 가출을 한 친구 중에 한 명이 가방을 열었는데 큰 비닐봉지가 튀어나왔다. 봉지를 푸니 이상한 썩은 피 냄새가 방안에 확 퍼졌다. 비닐 속에는 아기의 시신이 토막이 나 있었다.


그때 그 녀석이 너무 놀란 나머지 자율학습 시간이었는데 으악 하며 소리를 지르더니 의자에서 바닥으로 넘어진 것이다. 물론 그때 내가 웍 하며 점프 스퀘어를 하기도 했는데 그렇게 놀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덕분에 당직인 물리에게 들켜 복도에서 벌을 섰다. 그리고 그 녀석이 놀라면서 내 팔을 얼마나 세게 꽉 잡았던지 멍이 들었다.


벌을 서면서도 바지 주머니가 약간 볼록 한 것이 비닐봉지 소리가 났다. 똥 싸면서 먹다 남은 생라면이었다. 씩 웃으며 주머니에서 생라면을 꺼내서 물리에게 들키기 잔에 재빠르게 입에 넣고 녹여 먹었다. 극한의 긴장으로 먹는 생라면은 꽤나 스릴 있는 맛이었다.


생라면 참 좋아했던 그 녀석은 잘 지내고 있겠지. 며칠 전에 오랜만에 생라면을 뿌셔 먹었다. 그 녀석 생각이 확 났다. 생라면은 우걱우걱 씹어먹는 맛도 있지만 입에서 살살 녹여 먹는 맛 또한 좋다. 녹여 먹으려면 일단 환경에 영향을 받아야 한다. 그저 무방비 상태인 곳 - 집이나, 길거리, 사무실 같은 방해가 없는 곳에서 먹는 생라면은 그저 씹어 먹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학교 수업시간이나, 자율학습을 할 때는 소리를 내며 씹어 먹을 수 없다. 살살 녹여 먹어야 한다. 스프가 침에 의해 녹으면서 입 안에 있는 생라면 사이사이에 스며들어 꽤나 맛도 좋다. 생라면을 입 안에서 녹여 먹는 건 극장이 최고였다. 특히 예전에 극장 안에서 파는 팝콘이나 음료만 반입되는 시기에 생라면은 극장 안에 가지고 갈 수 없다.


그래서 팝콘 통에 생라면을 뿌셔 넣고 음료 대신 거기에 맥주를 부어서 맨 뒷자리 맨 구석 자리에서 생라면을 살살 녹여 먹으며 맥주를 홀짝거리고 영화를 보면 아주 재미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재미있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런 스킬이 쌓이면 일반 라면에서 짜파게티로 넘어가게 된다. 짜파게티로 생라면으로 먹는 맛이 참 좋다.


생라면으로 라면을 먹으면 스프가 남는다. 스프는 마요네즈처럼 모든 음식에 다 잘 어울린다. 그냥 밥 위에 뿌려 먹어도 되고, 빵에 뿌려 먹어도 맛있다. 대학 때 빙 둘러앉아 술을 마실 때 안주가 떨어지면 과자 대신 어김없이 생라면이었다. 처음에는 에이 안주가 이게 뭐야 하지만 금방 동이 난다.


생라면을 오물오물 먹고 있으면 예전으로 잠시 돌아간 기분이 든다. 생라면은 어른이 되면 잘 먹지 않는다. 맥주 안주에 생라면이 좋은데 안주 머 먹을래?라고 묻기에 생라면이라고 말하면 대체로 에이, 라는 반응이다. 고요한 밤에 싸구려 와인을 홀짝이며 생라면을 우두둑 씹어 먹는 소리가 있는데 그 소리가 적막 사이의 틈을 파고들어 리듬을 탄다.


생각해보면 주위가 온통 적막 속에 있었던 적이 언제였던가 싶다. 하지만 오늘 아침에는 바닷가에서 책을 좀 읽었다. 8월이 되고 모처럼 해가 쨍쨍하게 떴다. 8월 내내 흐리거나 비가 오락가락하거나 날씨가 애꿎었다. 습도가 없어서 해가 떠 있으면 쨍하다.


맑고 뜨거운 태양빛을 받을 수 있다. 바닷가에는 다른 소음을 들리지 않고 잔잔한 파도 소리와 갈매기가 우는 소리만 들린다. 이런 날 책을 좀 읽으면 집중이 잘 된다. 소설 속에 퐁당 빠져버린 것 같다. 옆에 생라면이 있었다면 참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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