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대 위의 까치 - 진중권의 독창적인 그림읽기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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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미술관련 책들을 읽는다.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두 오빠들이 모두 미대를 나온 덕분에 어려서부터 미술 원서들을 보며 자랐지만 작품과 화가들을 연결시켜 기억하거나 전문적인 지식을 얻어 듣거나 어떤 그림 하나에 푹 빠져본 기억은 없다.  그런데 이제와서 어릴 적 스쳐갔던 그림들이 문득문득 궁금하고 그리워져서, 미술관을 기웃거리거나 미술관련 책들을 뒤적이게 된다.  그것도 감히 전문 서적들을 뒤적일 용기는 없어서 비교적 유순하고 친절해 보이는 책들을 골라 읽곤 하는 것이다.

비교적 최근에 세 권의 미술서적을 읽었다.  하나는 서경식 씨가 쓴 <나의 서양 미술 순례>이고, 또 하나는 손철주 씨가 쓴 <인생이 그림 같다>, 그리고 가장 나중에 읽은 책이 이 <교수대 위의 까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세 사람의 글은 저마다 풍기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서경식 씨의 <나의 서양미술순례>는 저자 자신의 불행한 가족사와 어우러져 세 권의 책 중에서 가장 개인적이고 감성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제목에 들어있는 '순례'라는 말에 걸맞게 유럽의 미술관들을 여행하며 만난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지만  작품 속에서 아버지의 죽음을 떠올리거나 옥중에 갇혀있는 형들을 걱정하는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그의 '순례'는 단순히 타국의 미술관을 여행하며 감상한 미술작품에 그치지 않고 그 길의 여정에서 느끼는 '삶의 고단함'이라든가 '부조리한 인생'을 탐색하는 '과정'의 시간들이 진지하게 흐른다.  지금도 그 책을 떠올리면 축축하게 비가 내리는 어둡고 추운 거리를 홀로 걷는 듯한 기분에 젖는다.
손철주씨가 쓴 <인생이 그림 같다>는 세 권의 책 중에서 가장 부담없이 경쾌한 마음으로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강희맹의 '고사관수도'로 시작하는 이 책은 동서고금의 작품을 총망라하고 있는데다가 걸걸하고 화통하다가도 낭만적인 감상이 슬그머니 끼어드는 글이어서 시원시원하면서도 애틋한 맛이 나기도 한다.  

그에 비해서 진중권 씨의 글은 명쾌하고 단호하며 빈틈이 없어 보인다.  미술에 대해 식견이 어두운 내가 느끼기에 그렇다는 말이다.  얼마나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는지 그의 글을 읽다보면 일요일 늦은 아침처럼, 부스스한 머리에 눈꼽도 떼지 않은 눈으로  멍하니 세상을 바라보는 일 같은 건 거의 죄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처음에 말했듯이 난 '비교적 유순하고 친절해 보이는 책'들을 골라 읽는 편인데 솔직히 진중권 씨의 글은 유순하기 보다는 까칠하고 친절하기 보다는 사람을 긴장하게 만드는 뭔가가 있다.   낭만적 감성이 슬쩍 새어나오는 건 기대도 하면 안되고, 내 기억으로 사적인 여담을 슬그머니 내비친 건 알브레히트  뒤러의 <책을 삼키는 요한>이라는 목판화를 다루는 장에서 유학 시절 뒤러의 목판화 전집을 싸게 구입하게 된 이야기와 피터르 브뤼헐의 <교수대 위의 까치>를 이야기하는 장에서 어릴 적 '배꼽이 배보다 크다'는 속담을 듣고는 그 모습을 상상하며 방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웃었다는 이야기가 전부였던 것 같다.   그래서 머리말에 진중권 씨가 "이 책이 강단에서 미처 하지 못한 수업의 강의록이 되었다."라고 밝히지 않았더라도 나는 명강을 하는 엄한 선생님 앞에 앉은 얌전한 학생의 마음으로 이 책을 읽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작가, 작가의 삶, 연대, 당시의 사회,정치적 상황, 예술사조 등을 모두 무시하고도 작품과 나, 단 둘만의 내밀한 관계 맺기를 통해서 감상이 가능하다는, 그래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는데도 손철주 씨와 진중권 씨의 말투는 참 다르다.
손철주 씨는 머리말에서 선배에게 쓰는 편지글 형식을 빌어 이렇게 쓰고 있다.
'.... 저는 떠들 게 있으면 더 떠들어라 하는 주의입니다.  창피당하면 어떻습니까.  연습이 천재를 만드는 거나 무쇠가 두들겨 맞고 단련되는 거나 같은 발버둥 아닙니까.  수업료 안 내고 익히려 드는 게 도둑놈 심보지.  클 놈치고 좌충우돌 안 하는 거 봤습니까.  그림도 마찬가집니다.  보이는 대로 한 마디씩 지껄이고 쥐꼬리만한 지식이라도 갖다 붙여 그럴싸하게 포장하고, 그러면서 눈이 트이는 겁니다.
맞습니다, 김선배.  전문가들 말 어렵게 하는 건 큰 병폡니다.  그거 다 믿지 마세요.  누가 뭐라 하든 제 눈에 꽂히면 다죠, 뭐. ' 
읽으면서 큭큭 웃음이 날 만큼 마음이 느슨하고 가벼워진다.   

진중권 씨는?  자신이 선호하는 미술작품의 취향을 설명하는 데도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수준을 네 가지로 분류한다.  정서적 감동, 지각적 쾌감, 지성적 자극, 영성의 울림. 그렇게 분류하고 나서야 자신이 작품의 지적 측면에 끌리는 편이라고 설명한다.  그런 다음 자신이 예술작품과 관계를 맺는 방식을 제시한다.  애니그마, 창조적 독해, 회화의 푼크툼. 이 세 가지를 통해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결국 수많은 암호를 생성해내는 애니그마 머신에 가까운 예술작품을 제대로 수용하기 위해서는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 문제를 제기하고 의제를 설정하는 능력이 있어야 하며 수용자의 개별적이고 사밀한 체험을 통해 작품의 해석을 다양화할 수 있는 문학으로서의 해석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이것을 롤랑 바르트는 푼크툼이라고 했다) 
진중권 씨의 글이 훨씬 더 분석적이고 집요하며 지적 분위기를 풍긴다.  진중권 씨가 들으면 질색하실 테지만, 그가 이 책에 부려놓은 그만의 푼크툼이 나에겐 또 하나의 스투디움이 되어버린 것 같다.   

당연히, '소장하고 싶은 작품들의 가상 컬렉션'이라는 12점의 그림 속을 그는 파,고,든,다.  마치 "대충 넘어가는 일 따위 내 사전엔 없어!"하는 것처럼 단호하고 철저하다.  한  점의 그림을 설명하기 위해 딸려 나오는 작품들의 수는 어떤가.  예를 들면 '사라진 주체'라는 제목이 붙은 7장에서 요하네스 굼프의 1646년작 <자화상>이 등장한다.  자화상을 설명하기 위해 끌어들인 작품이 무려 20여 점에 이른다.   각 장마다 작품을 설명하는 데 인용한 회화이론과 기존의 해석들은 말할 것도 없고 철학을 비롯해 신경생리학까지 망라하는 배경 지식들을 가지고  자신만의 푼크툼을 직조(織造)해가는 솜씨 또한 일품이다.  "이 책은 독자들을 향한 적극적 독해의 요청, 다시 말해 '그림을 이처럼 읽어보라.'거나 '이와는 다른 식으로 읽어보라.'는 채근에 가깝다"(p.18) 라고 했지만 미안하게도 지금 나는 그가 쓴 이 책 한 권을 곱씹고 있는 것만으로도 뿌듯하고 행복하다.    

책을 읽으면서 그가 참 철저하고 유능하며 성실한 지식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과 사회에 대한 그런 성실성 때문에 이 수상쩍은 세상을 살아가며 나처럼 어수룩하고 더덜뭇한 사람에 비해 더 큰 상처를 입지 않았을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 
'작은 몸통에 커다란 머리를 가진 역사의 천사는 아마도 지식인을 가리킬 것이다.  천사의 작은 몸통은 현실의 무능함을, 커다란 머리는 과도하게 발달한 그의 관념성을 상징한다.  정의는 관념이고, 폭력은 물질이다.  그리고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어디까지나 원시적인 물질의 힘이다.  그 때문에 천사는 날개를 편 채로 거센 바람에 밀려 끝없이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다.  부조리야말로 삶의 예외적 현상이 아니라 정상적 상태라는 것, 그것이 교수대 위의 까치가 연출하는 풍경만큼이나 을씨년스러운 세상의 진리, 누구나 알고 있으면서 말하지 않는 비밀인 모양이다.'라는 그의 글이 성실한 지식인으로서의 자조적인 한탄처럼 들려서 마음에 턱하니 걸린 채로 안쓰럽게 펄럭인다.   그가 <교수대 위의 까치>를 보며 '세상에 태어나면서 둘로 쪼개져야 했던 자신의 반쪽'같은 느낌을 받는 건, 그가 브뤼헐이 보았던 세상의 부조리를 지금 이 자리에서 똑같이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그는 '섣불리 세상을 바꿔놓으려는 노력은 외려 세상을 재앙으로 몰아넣을 뿐이다.  그는 이 뒤집힌 세계를, 그것의 부조리함, 그것의 불합리함을 있는 그대로, 주어진 사실로 받아들이려 한다.  그런 부조리 속에 살아야 하는 것이 사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조건이 아닌가?'하는 말로 공감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의 상처가 문득 걱정스러워진다.  그는 아끼고 싶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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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09-11-13 0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섬사이님, 이렇게 세권의 책을 비교, 분석해주신 님의 꼼꼼함도 대단하십니다.
이 책, 안 읽고 못 지나가겠는걸요? ^^

섬사이 2009-11-13 11:40   좋아요 0 | URL
분석까지는 아니구요...^^;;
읽어보실만 할 거예요.

순오기 2009-11-17 0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에 댓글 달았는데 교수대 위의 까치가 여기 있군요.^^
우리도 지난 금욜 이 책 토론했는데,
회원들께 좋은 책 추천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많이 들었어요.^^

섬사이 2009-11-18 02:57   좋아요 0 | URL
예, 진중권 씨의 글은 '딱' 떨어져서 좋아요. ^^

프레이야 2009-11-26 1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섬사이님 추천이야요^^
저도 지금 이 책 읽고 있어요.
그는 매력적인 사람, 분명 맞아요.


섬사이 2009-11-27 00:34   좋아요 0 | URL
이번에 진중권 씨가 경비행기 타러 필리핀으로 떠나 몇 년 머물 거라는 소식을 들었어요.
정말 참 멋진 분이에요.